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 20세기와 한나 아렌트 한길신인문총서 9
김비환 지음 / 한길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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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써보자. '정치'는 '양복입고 싸움질하기, 네모 칸에 도장찍기'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같은 크기의 삼각형에 사각형을 밀어넣는 우를 범할 지라도 깍여나간 부분 말고 나름 작은 효용쯤은 있지 않을까.  

이 책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을 중심으로 '정치'와 '정치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그럼 먼저 한나 아렌트가 뭐하는 여자인가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길게 말할 자리도 아니니 쉽게 유태인이었으며-수용소 생활도 해봤다- 하이데거의 제자로 썸씽-자기들은 지적인 뭐라지만 성인남녀의 일은 모른다-하여간 그런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아렌트 약력 소개끝. 이제 본 판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저자인 김비환 교수는 아렌트를 둘러싼 비판들부터 소개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또 '자유'를 강조했으나 공동체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실존주의적 형이상학이라는 공격도 받았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독특하다'라는 말이다. 머리 막으면 아래치고 아래 막으면 머리치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 또는 그녀의 '정치철학'이란게 뭐냐?   이 책의 저자는 먼저 아렌트의 철학이 경험론적인 실천영역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말한다. 밑줄은 경험론적 실천영역에 쫘악...그러니까 아렌트가 콩 볶아 먹는 머리 속에서 정치철학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나치에 핍박받는 유태인으로서 유태인의 정체성을 자각한 '패리아' 정신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삶과 철학 전체를 관통한다고 말한다.('패리아'라는 것은 원래 인도의 천민을 말하는데,결국 주변인이나 버림받은 자,비인간과 같은 뉘앙스로 이해하면 된다.) 이게 대전제가 되는 셈이다.이 이야기를 저자가 꺼낸 이유는 아렌트 철학에서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둥, 연속성이 없다는 식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답변인셈이다. 실제로 비판론자들이 거론한 모순들은 아렌트 철학이 담고 있는 다원성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를 위해 서구의 전통적인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이른바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총체적 비판이다. 이를 통해 아렌트는 자신이 말하는 '정치'를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흔히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욕구이든,갈등이든-을 제도를 통해 해결하여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정도. 사회교과서에 나옴직한 보편적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아렌트에게 '비정치적'이거나 '정치 왜곡'이다. 여기서부터 독창적이지 않은가. 이건 그녀에게 사회적 영역에 종속된 정치적 영역인 셈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영역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영역이란 것도 포함시킨다. 흔히들 사회적 영역을 공적 영역과 같이 쓰는데 비해 아렌트는 이를 분리시킨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사적 영역의 공적화, 내지는 공적 영역의 사익화를 본의아니게 획책하는 공간이 된다. 아렌트에게 공적 영역은 '정치적 영역이다. 이 말은 아렌트가 '정치 자체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를 강조했다는 말이다. 즉 '정치'라는 녀석이 워낙 여기 저기 개입되어 있다보니 진짜 '정치'는 사라지고 이제 정치는 모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적 정치. 또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추동력으로서의 목적론적 정치-아렌트적 용어로는 만듦의 정치-가 주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가 그런 셈이다. 이건 중요하지만 정치에 부차적이란게 아렌트의 견해다. 쉽게 예를 들어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은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비정치적 행위이다. 무언가 만듦 자체를 위해 정치가 도구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의 하나로서 순수한(?)의미의 '정치' 복원을 시도한다. (이 말 뜻은 아렌트가 순수학문으로서의 정치이론을 강조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아렌트에게 정치는 경험적인 것이고 현상학적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한 것 같은 두 가지 세상. 이데아계와 현상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모든 것은 여기의 일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도구화되어 있는 정치 영역을 환원하려는 균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라고 저자가 말한다.(그게 가능한지는 이견이 있으나 하여간 아렌트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다.)

이런 아렌트에게 가장 적대적인 정치체는  전체주의였다. (나도 그렇다.다 그렇지 않나?) 그녀는 수용소 경험이 있고 아이힌만 재판 참석 경험도 있다. 그녀는 '정치'라는 공적 공간 자체를 말살 한 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다. 아렌트가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히틀러 체제와 스탈린 체제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렌트비판자 중에는 아렌트의 정치이론이 전체주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아렌트를 옹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해부족에서 오는 곡해라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비판 중 일부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넘어가자.) 이런 '전체주의시대의 도래'에 과거 전통적인 정치철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그에 아렌트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정치철학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물 한 잔 먹고 와서...꼴깍) 

어디까지 했더라...하여간 여차저차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깟다는 것. 특히 한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이힌만의 재판을 보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적 사고= 무사고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다. 그녀가 자각한 패리아의 정신을 강조한 것과 등치해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특히 최근 '언론의 자유 문제'를 이야기할 때 아렌트의 이름이 간혹 언급되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아렌트에게 '자유'는 모든 정치적 행위의 근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렌트에게 '정치'라는 공간은 순수하게 부각시켜야할 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자유'가 위협받거나 말살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뭐 어떻게 되긴? 자유가 없으니 정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럼 '정치'의 '정치다운 복원'을 외치는 아렌트는 공치는 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자유X = 정치X' 이 되기때문에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살리는 게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또 인간의 삶을 위해서(왜..인간이라고 하는지는 바로 뒤에서 설명한다.) 자유는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롤즈/맥킨타이어식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틀로다가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아렌트는 자유주의자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땡!!  대략 정치사상사를 보면 아렌트는 공동체주의자들 속에 이름이 끼여있다. 사실 자유,평등 이라는 개념자체를 이분법적이고 임의적으로 쓰는게 더 문제다. 언젠가 말했듯이 누가 '자유'를 말하면 '어떤 자유?'를 이야기하고, 누가 '평등'을 말하면 '어떤 평등?'을 이라고 되물어야한다. 그만큼 이런 개념들은 이미 자의적으로 활용되어도 누구하나 타바하지 않을만큼 혼합되고 훼손되어 있다.  

왜 아렌트에게 자유=인간=정치이고 또 그럼으로서 공동체주의로 기입되는지 지금부터 볼거다. (하여간 '자유=롤즈=자유주의' 내지는 '노동=마르크스=좌빨' ...이런거는 혼자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볼 때 했으면 좋겠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이제 중심이 된다. 

아렌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알수 없다라고 말한다. 오직 아는 것은'조건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여간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두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정관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인 삶'이다. 아렌트는 뒤에 것에 집중한다. (한가지 더 '역시 실천이야'라고...아렌트는 정관적 삶의 고유한 가치 역시 무시하지 않았다. 아도르노가 정관적 삶을 높이 평가하되 실천적 삶을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한 위치로 대칭된다.) 하여간 '활동적인 삶'의 정치의 존재론적 기본이 되는데 세가지 활동을 의미한다. 노동. 작업. 행위이다. 노동은 말그래도 먹고사는 노동이다. 작업은 '인공적 사물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사람은 인공물의 세계에 산다. 그리고 아렌트에게, 그녀의 정치이론에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여기는 그대로 인용하자 

"사물이나 물체의 매개없이 사람들간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다원성이라는 인간적 조건, 다시 말해 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이 땅에 살고 또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조응하는 활동" 이다.  

중요한 지점은 내가 색칠했다. 아렌트에게 정치철학은 -좀 재미없는 말로 -사이 간 자를 써서 '간주체적' 이며 '다원적' 이며 '현상학적'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행위'라는 개념은 동물과는 다른-동물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활동을 한다.군집활동을 하는 동물들.그런데 그것은 본능적인 행위이지 이성적 행위는 아니다- 인간의 특징이다. 아렌트는 딱잘라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적 영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즉 개인적 취미나 부의 추구, 미적 탐닉 등 사적 행복과 만족은 결국 온전한 삶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반쪽이 행복이란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세계 소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나 모르고, 또한 예술가도 못되고, 그저 예술작품이나 감상하면서 예술 속에 어쩌구 저쩌구 하며 야코 죽이는 이를 보거든 '어...세계소외 되어 있군?' 이라고 하면 대략 정답이다. 그럼 도대체 뭐가 더 있냐구?  

아렌트에게 인간은 공적 동물이다.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복의 영역이다. 그러니 사적 행복만 열나게 쫓아봐야 아렌트가 보기엔 그건 결국 100점 맞아도 수능 변환점수 50점인 셈이다.(아...뛰어나게 쉬운 설명이다.) 이러고 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의미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아렌트는 거기서 더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적 의미망 속에 갖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개의 체제를 주욱 나열하고 그 장단점을 선택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건 진짜 정치가 아니다. 내가 누차 누누히 강조했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거였다. 그렁저렁 하다 노란 깃발이 펄럭일 때 갑자기 과정치화되었다가 노란게 코 묻은 거라고 알고 또 정치에 등돌리다가...알고 봤더니 그 수건이 땀이 배였다는 걸 알고 석과대죄하는게 그게 정치가 아니다. 정치판은 더러운 놈들 쌈질하는 곳이니 관심없다가 거리의 확성기가 울려퍼지면 너나할 것 없이 정치평론가가 되는게 정치가 아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는 인간 삶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정치란 있엇고 내가 살면서도 정치가 있고 또 내가 죽어고 정치가 있다. 오로지 내가 정치적이 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뿐,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자각하여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 아니면 반푼의 행복에 그치느냐이다. 길어졌는데 하여간 내 말로 하면 '투표는 객관식이지만 정치는 주관식'이다. 아렌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행위라고 했다.

자..다시 아렌트의 '행위'로 돌아오자. 앞서 '자유' '전체주의 반대''공동체주의' 대충 뭐 이런말을 했었는데...아렌트의 정치적 인간에 대한 강조로 대충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한다.(아님..직접 책을 읽고 밑줄을 그어라.) 아렌트에게 '행위'란 발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왜 아렌트의 이론중 '발언과 정체성'을 독립시켜 인용하는지 알 수 있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이고 또한 이것이 현시적 특징을 갖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폭탄 테러범이 테러를 하고도 숨어서 가만히 있으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이유때문에 테러했소.부시 물러가라'라고 하는 순간 그건 '정치'가 된다.(음..간략하니 쉬운 설명이다.) 마르크스 부사령관이 '우리의 말이 무기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언로를 통한 이데올로기 정치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로서의 발언과 정체성의 문제였다.  전체주의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말을 못하게 한다. 또는 말을 못하게끔 기획한다. 또는 말을 하면 겁주려고 조사한다. 결국 '말을 못하게 행위를 못하게'한다. 그게 모든 전체주의는 아니지만 전체주의의 주요 속성 중에 하나이다. 이제 '행위'와 '전체주의' 간에 이야기는 대략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충일하게 살려면 '정치'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행위'는 여기에 필수적이다. 그 '행위'를 통해서 '정체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인간의 조건>을 전반부로 해서 <전체주의의 기원>,<혁명론>,<과거와 미래사이> 등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짚어나간다. 책 중반부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과 서구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아렌트에 쏟아진 비판들을 보여주고 아렌트의 의도를 읽게함으로써 반비판을 행한다. 서구 정치철학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에 대해서는 아렌트가 특정 요소만을 부각해서 의도적 칼질을 하고 있다는 균형도 보여준다. 물론 마르크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 역시 아렌트와 비슷한 지평위에서 말을 한다. 물론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결정론자들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순수'정치학의 의미에서 경제에 정치를 종속시킨 서구 철학의 마지막 대변자였다고 본다. 아렌트는 마르크스를 '노동하는 동물' 의 세계를 만든 철학자라고 비난한다. 마르크스 부분에 대해서는 읽다가 주섬주섬비판적 메모를 해둔 내용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이 생애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곳에서 행위의 근거가 어디서 출발할 수 있는지? 또는 아렌트의 발언행위가 주체의 측면에서  엘리트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은 아닌가? 이성의 언어로 발언할 수 없는 상황이나 그에 종속된 주체는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또한 노동자 여가가 소비로 귀결되는 체제에서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연구의 부분은 간과되어도 되는가. 아렌트의 목적초월적 정치함의가 갖는 문제점, 행위 담론의 수행성을 강조하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점. 정치 영역의 독자성의 강조가 학문적 범주의 외연에서 갖는 문제점 등등...  

 아렌트 철학의 독창성만큼 아렌트 비판자들의 주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들이 많다.마르크스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몇 몇 지점을 빼놓으면 허술하다. 이런 점들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성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을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까지 도달시켜놓은 점, 그리고 인간의 자발적 행위와 발언,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정치를 강조한 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대의제적 비관주의와 경제올인,정치 외면의 무관심 속에 분명히 새기고 넘어가야할 지점들이다. 

오랜만에 단 한퀴에 썻다. 헉헉...점심 시간 30분전에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끝났다. 회사 지하 식당 아직 밥주나. 아줌마... (생각나면 수정할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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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 대한민국 보고보고 시리즈 1
배연형.서희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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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다. 물에 가라 앉은 고향 마을의 돌담길을 따라가는 듯한 여행이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다. 그런데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는- 제법 거대한 제목의-시간의 역행이다. 몸집으로 뱉어낸 거미줄을 다시 삼키는 거미처럼. 되감기하는 릴테이프의 회전처럼. 소리길을 찾아 나선 여행에서는 공간의 수평선과 시간의 수직선이 교직된다.  

길을 나서자. 

<한국의 소리,세상을 깨우다>의 여정은 서울에서 시작된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서울 살면서 광화문 근처를 자주 다녔지만 비각에 눈길을 준 적 없었다. '교보 앞에 무슨 비각이 하나 있었다. 그 정도.' 도로원표...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광무대'....동대문 근처였다구?

여행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1900년대 초반 세워진 협률사,원각사,광무대 등 근대식 극장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길은 100년이 지난 현재의 서울에서 끝난다. 추측컨데 지금 우리 소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온고지신'의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새로운 각성을 갖자는 것이 여행의 목적인 듯 싶다. 

 소리길은 남쪽을 향한다. 한반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다. 여행 경로의 방향을 생각하며 잠시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위 전국 여행이라고 할 만한 기행을 살 면서 두 번 했는데 모두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육상 트랙을 돌아도 시계반대 방향으로 도는 데, 왜 나는 그 반대로 햇을까?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본 동해 바다의 수평선의 파란 강렬함이 끌어 들이는 힘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다음 번 여행은 꼭 시계 반대방향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 여행은 사당패의 본거지 안성부터 시작해서 충남 서천-논산-익산-전주- 고창 -담양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여행 길라잡이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번 여행에서 특히 살펴보고자 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 배연형 선생은 고음반연구회 활동이나 방송진행 경력 등으로 판소리계에서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분이다. 노재명,정창관, 최동현 선생들과 함께 판소리 대중들에게는 음반 해설이나 판소리 관련 글들을 통해 익숙한 이름이다. 이 분들과 함께 판소리의 대중화에 주력하고 계신 분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 소리기행을 전반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핵심은 조선 성악의 최고 예술이었다는 '판소리'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책의 분량으로 보더라도 4개의 챕터중 2개 부분이 '판소리기행'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행 가이드 배연형 선생을 따라 본격적으로 소리 기행 중 특히 판소리 여행을 떠나야 할 때다. 안성 청룡사를 떠나면 본격적인 판소리 이야기가 시작된다. 판소리 관련된 2-4장의 첫번째 소제목과 마지막 소제목을 보자. 여행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셈이다.  '중고제의 끝자락 ,거장 이동백'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현대 국악의 중심, 보성소리와 창극'으로 판소리 이야기가 끝난다. 공간적으로 보면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서 시작해서 전남 보성군과 고흥군 거금도에 해당한다.(거금도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나로호를 발사한 우주센터가 있는 외나로도이다.) 이렇게 여정을 잡은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여행의 출발이 서울에서 시작해서 남하하여 다시 서울로 끝나는 것도 사실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단지 저자가 서울에 살아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도록 하자.  

둘러볼 여행지는 모두 판소리 명창들의 고향이거나 활동 무대들이다. 그곳에 무슨 화려한 유적지 같은 것은 없다. 박물관이나 동상 정도 만나면 다행이다. 하지만 발걸음 마다 '오리정의 이별'을 앞두고 울부짖는 춘향이의 설움과 '상좌 다툼'을 하는 민화 속 동물들의 웃음이 묻어 있다. 여기 등장하는 명창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서천 장항의 이동백, 김창룡 명창, 판소리의 중시조 송흥록 명창, 30년 앞을 보고 판소리를 했다는 익산의 정정렬 명창, 최초의 판소리 이론가라 할만한 고창의 동리 신재효 선생, 순창의 김세종 명창, 장판개명창, 서편제의 시조 박유전 명창, 최초의 여성 판소리 스타 이화중선 명창, 쑥대머리의 임방울 명창, 구례의 유성준,박봉술 명창, 보성소리의 정응민 명창, 창극의 개척자 김연수 명창.....그 외에도 소리의 사숙 관계를 통해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덩쿨칡처럼 얽혀있다. 

저자는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도 않은 판소리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개략적으로 판소리의 역사와 명창들의 계보를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 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계보와 판소리 다섯바탕의 전승 계보를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딱딱하게 씌여질 수 있는 개론서들 대신 쉬엄 쉬엄 여행하는 기분으로 판소리 이야기와 명창들의 야화들을 섞어 들으며 판소리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에 나오는 주요 지역들 중 이미 가 본 곳들도 꽤 있다.그렇지만 나 역시 판소리에 관심을 갖기 전까진 하나 같이 그냥 스쳐 지나쳤다. 5-6년전에 보성 차밭에 갔더니 한복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인이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아..보성. 차말고도 판소리도 유명하지'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 그랬으니 정응민의 고택을 애써 찾을 일 만무하다. 낙안 읍성도 흥미롭게 돌아다녔지만 그곳이 송만갑,오태석 명창과 관련있는 전혀 알지 못했다.(아이가 크면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전라도 소리 여행'을 한 번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진도도 포함될 것이다.) 

판소리 명창들의 일화들과 야화들은 사실 이런 저런 판소리 책을 읽다보면 여러번 중복되는 내용들이다. 그들이 살았던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풀려나오니 현장감이 높다는 것이 장점이 될 터이다. 여기서는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다 언급하지는 않겠다. 과거 명창들의 소리는 대략 저작권도 만료되었을 테니 조금만 공을 들이면 음반을 통하지 않고도 온라인 상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껏 소리를 잡아 올렸다 '턱'하고 내려놓는 이동백 명창의 소리나 과거 명창들의 더늠을 잘 흉내내었다는 김창룡 명창의 소리, 장자백, 이선유,이화중선 등등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 여행의 발걸음을 따라 간다면 훨씬 좋을 듯 하다. 

자...앞에서 이야기한 배연형 선생이 '충남 서천부터 보성까지 판소리 여정'을 잡은 이유를 이야기할 때다. 그것은 '판소리 전파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판소리를 들으시는 분들은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판소리 발생 논쟁은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판소리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린 음악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무가기원설, 설화기원설,광대소학지희설,육자배기토리설, 창우기원설 등등... 그런데 이중 핵심은 '무가기원설'이다. 주장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판소리에 있어서 창자들이 전문적인 집단이나 사람이었다는 점과 판소리의 시작이 시나위권 중에서 주로 전라도 지역이라는데는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발생론의 기점에 대해 다른 이견이 '중고제 기원설' 또는 '경기충청 기원설'이다. 이 책의 저자 배연형이 바로 대표적인 주창자이다.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의 구성이 남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출발해서 땅끝인 보성과 거금도에서 끝나는 것, 즉 남하하는 여행을 채택한 것, 이것은 판소리의 남하를 주장을 해온 저자의 판소리 전파론을 여행 여정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행의 여정이 저자가 주장하는 판소리의 진화 방식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중반부에서 부터 주류의 '무가기원설'에 대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다가, 중반부와 결말부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한다. 

흔히 동편제와 서편제의 경계선을 섬진강으로 보지만 그보다는 전라북도와 남도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다. 요컨데 판소리는 경기와 충청에서 발생하여 점차 전라북도로,그리고 전라남도로 퍼져나갔다. p250 

그러니까 저자의 주장으로 보자면 판소리는 경기,충청의 중고제 소리(그 전에 고제 판소리가 있다) 가 전라북도 쪽으로 가서 동편제 소리가 되고, 이후 계면조와 기교를 더한 서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편제 중에서 박유전으로 부터 정씨가문으로 계승된 보성소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과정이 200년쯤 걸리게 되면서 맨 먼저 시작된 중고제는 전통이 끊기고, 송씨 가문의 동편제 소리도 송만갑을 경유하여 조금 변모하고, 주로 서편제와 보성소리가 현대 판소리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경기 충청에서 시작해서 보성에서 판소리 기행을 끝맺는다. 그리고 이런 도정을 통해 남하한 판소리가 보성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주류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난해 말<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이라는 책을 통해서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통해 이를 입증했다고 하여 학계에 관심을 끌기도 했고,또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소리>이 책은 <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책인 셈이다.

그럼 과연 무엇이 판소리 기원론 또는 전파론의 정답이냐? 누가 알겠는가? 여하튼 그의 각고의 노력으로 판소리에 대한 연구의 폭이 넓어질 것 만은 사실일 듯 하다. 그러나 배연형 선생의 '경기충정지역 기원설'은 판소리계에서는 비주류적인 견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설명만 믿고 어디 가서 '판소리는 경기충청에서 시작해서 내려간 거다.'라고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좀 갸우뚱 하거나 머뭇거릴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끄는 또 한가지 빠뜨리기 쉬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명창들의 전신 사진들이다.  여러 판소리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사진이다. 명창들은 모두 한결 같은 포즈다. 그들은 모두 한시 한폭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었다.그런데 이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을 사진사이다. 이 사진은 모두 벽소 이영민 선생이 찍은 것이다. 그는 전문사진사도 아니고-그 시대에 그런게 있었겠는가?- 판소리 명창도 아니다. 그는 일제시대 순천사람으로 우리 소리의 중요성을 알고 명창들의 사진뿐만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귀명창이다. 진정한 남도의 문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옥섭의 <노름마치>에도 보면 이영민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명창들 뒤에 있는 시는 바로 벽소 선생이 명창들의 소리를 평한 내용이다. 자존심 강한 당대의 명창들이  자신의 소리를 평가한 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벽소 선생의 문장이나 공력이 명창들의 소리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자를 다 모르고 한문시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해서 사진 속의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음이 무척 안타깝다. 이 책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벽소 선생의 이런 글이 쉽게 찾아진다.   

복사꽃 훈훈한 밤 봄성(春城)엔 달빛이 가득
버들 숲엔 안개끼고 누각엔 바람이 부네.
한 마디 맑은 노래 하늘은 강물결과 같은데
하늘음악(仙樂) 구름 중에서 울리는 듯 하여라  

                                         장흥 김녹주 명창에 대한 벽소 선생의 한시.

어차피 명창이 될 수는 없는 몸들이니 벽소 선생의 마음 자락 한 줌만 훔쳐도 즐거이 소리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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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 일 트로바토레
TDK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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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트로바토레>는 '음유시인'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싱어 송 라이터'쯤 될까?  극 중 주인공 만리코가 자신을 레오노라에게 그렇게 위장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복수의 대리인이며, 루나 백작의 정적이자 연적이다. 오페라<일 트로바토레>의 스토리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다. 각각의 기둥에는 '복수' 와 '사랑'이라고 씌여있다. 인류가 '겨울을 대비하여 햇빛을 모으고'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 <프레드릭>에 나오는 말이다. 프레드릭은 생쥐 작가다.) 가장 많이 곳간에서 꺼내 먹는 소재이다.  

<일 트로바토레>는 신화나 민담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유럽에 구전되던 신화나 민담 등이 베르디의 음악으로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에는 '유아살해' 라든가 '근친살해' 같은- 백작와 만리코의 관계는 카인과 아벨과도 같다.- 요소들과 '마녀설화' 같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일 트로바로레>의 도입부 성문 장면에서 백작의 근위수장인 페르란도가 화자가 되어 그 간의 상황을 요약한다.  

 현재 영주인 루나 백작의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변괴가 생긴다. 유령같은 집시 여인이 아이를 만져보고 나서 아이가 병이 생긴 것이다. 이에 분개한 백작의 아버지는 여자 집시를 화형에 쳐한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복수 해줄 것을 부탁하는데, 그 즈음 백작의 둘째 아기가 사라지고 만다.그리고 화형대에서는 집시의 유골과 함께 반쯤 타다 만 아기의 뼈가 발견된다. 

페르난도의 설명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 집시 딸인 아주체나가 등장하여 아들 만리코에게 복수를 외치며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줄 때까지는 말이다. 집시 딸인 아주체나는 화형식이 있던 그날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울며 어머니를 따라간다. 그리고 몰래 백작의 둘째 아들을 납치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고통을 보며 아기를 불길 속에 밀어넣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작의 아기가 옆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그렇다. 처절한 공포와 분노,슬픔 앞에서 그녀는 정신을 놓친 것이다. 그녀는 백작의 아들 대신 자기의 아기를  불에 밀어넣은 것이다. 

아주체나는 이제 어머니와 자기 아들의 비극적 죽음의 원인이 백작 가문에 있다고 생각하고, 장성한 첫째 아들, 루나백작의 복수를 도모하는 것이다. 불길에 던져지지 않고 살아남은 백작의 동생 만리코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만리코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 아주체나가 사악함의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데 이 오페라의 매력이 있다. 그녀는 실제로 복수를 꽤하지만 만리코를 정말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고 키운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형제 간의 살육을 유도하면서도 자기가 키운 아들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모순적인 어머니가 아주체나 인 것이다. 그녀의 이런 이중적인 딜레마는 그녀의 캐릭터를 살아있게 만든다. 아주체나는 결국 <일 트로바토레>에서 '복수 라인'의 중심 축이다. 

스토리의 또 다른 한 축은 '사랑 이야기'이다. 루나 백작이 만리코에게 적대감을 갖게 된 원인이다. 루나와 만리코는 한 여인을 두고 사랑의 경합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레오노라이다. 레오노라는 음유시인으로 위장한 만리코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럴 수 록 루나 백작의 분노와 질투는 커진다. 자기와 비할바 없는 음유시인 따위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비천한 자에게 여인을 빼앗긴다는 모욕감과 질투 앞에 칼을 들게 된다.   



 1978년 카랴얀이 빈 슈타츠오퍼와 함께 연주한 <일 트로바토레>는 이 오페라의 공연물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꼽히는 영상이다. 카라얀은 여기서 지휘는 물론이고 무대,조명,의상 등 무대 연출에도 직접 관여하여 '카라얀 프로덕션'으로 이 작품을 완성한다. 당시 잘츠부르크 무대에서 활약하던 카라얀은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 <일 트로바토레>에 특히 매력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영상물 내지의 해설을 보면 '일트로바토레에서 원형적 인물들을 보았기'때문이라고 한다. 이 공연물을 원래 TV로 유럽 전역에 방송될 예정이었으나 캐스팅과 관련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 공연물에서 30년전의 싱싱한 목소리의 플라시도 도밍고의 만리코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프랑코 보니솔리가 이 역을 맡기도 되어 있었으나 그의 공연 리허설에서 그의 상태가 거의 최악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대타로 급히 도밍고가 캐스팅되었다.  

<일 트로바토레>는 특히 4명의 남녀 성악가들의 고른 안배가 매력적인 오페라이다. 이 공연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기준 중에 하나는 4명의 각기 다른 성역의 가수들이 얼마나 재기량을 보여주었느냐, 그리고 그들의 조합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는가이다. 카라얀의 <일 트로바토레>공연물이 고전 반열에 오를 수 있다면 이 음반이 그런 4명의 카리스마 있는 가수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만리코의 도밍고는 -지속적으로 지적되는- 고음의 한방은 보져주지는 못하지만 젊고 윤기 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카라얀의 오페라 연출에서 지적된다는'배우들의 정적인 움직임'에 있다. 도밍고의 장점 중에 하나는 그가 이탈리아 테너들처럼 청량한 고음을 장착하고 있진 못하지만 극 중 배역에 대한 몰입과 연기력에서 동급 최강 대우를 받아왔다. 부드러운 면모와 분노의 화신이 되어야 하는 만리코는 그런 면에서 역동적인 모습이 필요한데 이 오페라에서 도밍고의 움직임은 정적이다.  

루나 백작의 피에로 카푸칠리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바리톤의 안정감을 보여준다. 특히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백작의 근엄함을 느끼게 해주는 목소리는 훌륭하다. 또한 연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질투의 감정 역시 그의 선 굵은 목소리에 잘 어울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새롭게 발견한 소프라노가 레이아나 카바이반스카 이다. 세계적인 목소리임에도 칼라스나 서덜랜드급의 대우를 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흘려 지나갔던 듯 하다. <일 트라바토레>에서 그녀는 고혹적인 미모와 그에 어울리는 기품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레오노라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곡인 '사랑의 장미빛이 날개를 타고'라고 노래하는' D'amor sull'ali rosee'같은 곡에서 그녀의 여리면서 기품있는 목소리는 은빛 메차보체를 끌어낸다. 그리고 이들 세명이 함께 부르는 삼중창 Di geloso amor sprezzato 도 좋다. 



그렇지만 내가 <일 트로바토레>를 들을때 가장 민감하게 듣는 사람은 아주체나다. 이 역할은 독성이 대단하다. 그래서 너무 이 역할을 잘하면 다른 역할에서 무디어질 수도 있다는 역설도 존재한다. 카라얀의 사랑을 받은 메조 소프라노가 바로 피오렌차 코소토이다. 그녀의 아주체나는 뱃 사람을 원귀로 만든다는 세이렌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세이렌의 미소 뒤에는 늘상 독이 발린 비수가 숨어 있다. 피오렌차 코소토의 목소리가 그렇게 강력하다. 종종 그녀를 전시대의 최고 메조소프라노 줄리에타 시묘나토에 비교하곤 한다. 시묘나토가 조금 더 귀족적이고 풍요로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레퍼토리에소도 시묘나토가 조금 더 넓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아주체나는 피오렌차 코소토이다. 그녀는 카라얀의 <일 트로바토레> 말고도 명반으로 알려진 툴리오 세라핀이 지휘한 음반에서도 아주체나를 맡았다. 도밍고보다 조금더 더 좋아하는 카를로스 베르곤지가 그의 아들 만리코 역을 맡았던 음반이다. 카라얀의 이 영상물에서 피오렌차 코소토는 가장 연극적인 분장을 했다. 마치 디오니소스 제전의 광란의 여사제같다. 백박마녀전의 마녀처럼 코소토의 아주체나는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무대 위에서 내뿜는다. 끊어오르는 독성의 용광로처럼 이글 거리는데 이 점이 가장 큰 매력이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주체나의 이중성-즉 복수의 화신이자 어머니로서의-이 그 강력함에 가려지는 부분이다.   

조각같은 외모의 카랴안답게 사운드는 풍부하고 미려하다. 영상의 화질은 아무래도 78년 작품이다 보니 요즘 것들과 비교하면 곤란할 듯 하며,또한 무대 연출은 전통적인 스타일이지만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제피렐리식과는 거리가 있다.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이 인상적이다. 한 세대 전에 좋은 가수들의 맹활약으로도 기억될만한 영상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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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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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가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 .... 콘스탄티노 카바피의 시<이타카>중

카바피의 시는 <오뒷세이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이 시를 보고 <오뒷세이아>라는 텍스트의 안팎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처럼 잘 함축한 시도 드물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떠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까지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오뒷세이아>를 다시 발견한 시간과도 거의 비슷하다. 이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의 10대 시절에 이 책은 '기이한 모험집'이었다. 그러나 먼 바다를 돌다가  나이 40 줄에 이르러 보니, 지난 시절 상상력을 붇돋우던 독성 강한 기담은 예전만큼 강한 자극을 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남루해진 오뒷세우스에게서, 또는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에게서 삶의 그림자가 끌고온 향기들을 맡게 된다.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흥미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 묵힌 밀주처럼 진득하다. 두 번의 <오뒷세이아> 사이에 나는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었고,-그것도 두 아이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을 채 해결하지도 못하고 또 다른 시간이 만든 짐들만 어깨에 얹고 있다. 지난 시간이 가져다 준 서당개 생활에서 주워들은 풍월들, '길 너머를 그리워하다' 결국 '길 위에서 죽고 말것'이라는 평범한 깨우침 정도를 얻었을까. 

벤야민은 낯선거리에서 풍경의 원근법이 무너짐을 이야기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사물들을 2차원 도상 위로 올려놓기 때문에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서 몇 개월 살아본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이해할 것이다. 동서남북조차 모호하고 매일 가는 길인데도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일주일 쯤 지나고 나면 비로서 사물들이 하나씩 독자적인 소리를 내고 한데 엉겨붙어 있던 사물들이 하나씩 자기 영토를 확인시켜준다.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면 이제 줄거리말고, 구성이나 음악,대사, 미장센들을 보게 되고 또 상징적 은유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과거에 본 책들을 다시 한 번 더 읽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문득 든다.  

마흔에 읽은 <오뒷세이아>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온 것은 구성이다. 역자 해제에 의하면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서사시권'의 8권 중  2번째,7번째 서사시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들을 앞도할 만큼의 분량과 내용이다. 그만큼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서사시들은 구비전승 과정을 통해 내용적 풍부성이 확보된 것이 확실하다. 호메로스를 단일인물인지 집단의 총체적 인물이지 두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것이다. 그 사실이 어떻든 간에 <오뒷세이아>의 구성이 가진 '압축성과 입체성'은 '시대의 연마'를 거쳐서 이룩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3장에서 호메로스의 우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는 앞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하자면 이점에서 다른 시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과 결말이 뚜렷이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을 다루었으며 그 밖의 사건들은 그저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호메로스의 뛰어난 점은 바로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가?  생각보다 쉽다. '한 남자의 귀향이야기' 가 그것이다. 신의 미움을 받아 고생 고생하다가 집에 돌아왔으나 다른 남자들이 아내를 탐하고 집안을 거덜내고 있다. 계략을 짜서 이들을 처단한다. <오뒷세이아>가 이 내용이다. 물론 각자의 에피소드들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뇌를 자극하고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맞서는 용기로 감동을 자아내고는 있지만 이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전개의 중심축에 탁월함을 부여하는 것이 구성의 입체성이 아닐까 싶다. 시간의 도치와 압축. 영화용어로 치자면 플래쉬백의 적극적 활용으로 극적인 탄력을 높이는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하나는 처음부터 4권까지 텔레마코스이야기, 5권부터 13권까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야기 그리고 이하 이타케에서의 복수극이다. 4권까지 '텔레마토스 이야기' 에서는 오뒷세우스의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를 통해 전후 사정들을 소개하고,또 미래의 갈등을 미리 보여준다.물론 오뒷세우스는 이때 바닷가에 있을테니 이를 전혀 모른다. 5권부터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데, 시작은 신들의 회의로부터다. 제우스가 칼립소로 부터 오뒷세이아를 풀어주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오뒷세우스를 방해하는 포세이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이진다.이 장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명백히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시점은 다음 장에서 바뀐다.  6권은 이타케를 앞둔 마지막 도착지인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편집으로 보자면 텔라마코스의 씬과 거의 교차편집되는 장으로 거의 동시간대 벌어진 일어거나 조금 후에 일어난 장면인 셈이다. 이렇게 현재의 시간들을 교차하는 형태로 붙여놓으며 6권까지 현재 상태의 갈등요소들을 재현한다. 하나는 완성되지 못한 귀향, 그리고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 오뒷세우스만 모르지 독자들은 이미 신탁의 내용을 통해 그가 고생끝에 이타케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독자들을 극의 파국 직접까지 도입부에서 끌고와서 긴장감을 높여놓는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그렇다. 지금봐선 요즘 TV드라마에서 초보작가나 연출가들도 쓸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이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졌다면-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런 형태로의 완성은 아마 더 후가 아니었을까 싶긴하지만- 이 작가를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앞두고 다시 서사시를 거꾸로 돌려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향하는 전환점을 만든다.  7권부터 시작되는 오뒷세우스의 고난들이 그 이야기이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오뒷세우스는 이타케에 도착한다. 후반부의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페렐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먹이기 위한 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후반부 '복수극'에서도 호메로스는 '지연의 효과'도 적극적으로사용한다.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영화 속에서 테이블 밑에 있는 폭탄이 갑자기 터진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즉 갑자기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멍해지는 것이다. 만약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도착해서 아이기스를 두른 아테네의 도움으로 일거에 구혼자들을 제거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오뒷세이아>는 분명 반쪽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지연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쉽게 이야될 것이다. 이런 '지연의 효과'를 위해서는 먼저 독자는 음모를 알지만 극중 인물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야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복수의 준비'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다.  

구혼자들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걸인으로 변한 오뒷세우스를 모욕하는 장면이 있다. 독자들은 '이런 바보같은 곧 죽게될 운명인데' 라고 연민과 함께 작중인물의 어리석음을 책하게 된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별거 아니다. 이미 텍스트에 깊이 빠져 버린 독자를 의미한다. 모욕의 정도가 높아질 수록 독자의 복수에 대한 쾌감은 비례한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작법은 인류학적인 공통 유산에서 나온 것 같다. (서사 구조라는 것 이야기다.)   

 우리의 전통 소설<춘향전> 또는 판소리<춘향가>를 떠올려 보자. 이몽룡이 과거 급제를 하고, 짐짓 거지 행세를 한다. 오뒷세우스도 아테네의 도움으로 걸인으로 변신한다. 오뒷세우스가 두 가지 목적으로 -하나는 누설 시 복수의 좌절 우려와 식솔들의 충성 여부 확인- 거짓 행세를 한 것 처럼 이몽룡은 '공무 집행'과 '춘향의 진정성'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또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화살의 시험을 거치는 것 처럼 이몽룡은 '금준미주 천일혈'로 시작하는 시 한 소절로 마지막 한 방을 예비한다. 이런 복수의 전조 앞에 몇 몇 눈치빠른 이들은 줄행랑을 치며,어떤 이들은 그런 징후조차 부인하고 결국은 '이빨로 흙을 물게 된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뒷세이아>는 오랜시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라는 인물에 대하야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간계와 지혜가 아테네에 버금갈 만큼의 지략가이며 전사이다. <삼국지연의>의 여포나 장비가 아니라 주유 정도 되겠다. 아킬레우스를 트로이 전쟁에 불러들인 것도,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것도 그의 지혜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그의 첫번째 대사는 의미심장하여 눈여겨 볼만한다. 칼립소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잡고 오뒷세우스를 풀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다. 

"여신이여! 그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에서 나는 오뒷세우스가 상징하는 알레고리의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을 본다. 그것은 '의심'이다. '오뒷세우스는 의심하는 인간'이다. 물론 텍스트의 맥락 상 보면 '신들의 장기판'에서 놀아나던 인간이 신들의 장난질을 못믿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에서 최초로 그가 뱉어낸 이 말은 '의심하는 인간'으로서의 신들의 세계를 의심하는, 그래서 결별하려는 '의심'으로 읽어내면 큰 울림을 갖는다. 

이렇게 <오뒷세이아>를 '탈신화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의 알레고리' 로 읽어낸 이들이 20세기 가장 음울한 책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이다. 그들은 <오뒷세이아>를 '주체가 신화적 힘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도정" 이라고 말한다. 

오뒷세우스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영리한 지는 뗏목을 떠다닐 때 그를 불쌍히 여긴 레우코테아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는데서도 보여진다. 그녀는 뗏목을 버리라고 말하는데 그는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아아 괴롭구나! 그녀가 나더러 뗏목을 떠나라고 명령하니...나는 아직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야. 나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그녀가 말한 땅은 아직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오뒷세우스는 신들에 의탁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적절히 조합해내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적 운명을 수용하고 거기에 이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운명의 거센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느며 운명에 맞서는 용기가 바로 그리스적 용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세이렌'과 관련된 우화를 통해 오뒷세우스의 '도구적 이성'과 자본 아래 '소외'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알레고리로 읽고 있는 유명한 글을 남긴다. 그들은 오뒷세우스로부터 '시민적 개인'의 탄생을 소급해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뒷세우스는 생존의 본능을 위해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반복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지배하려는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목적은 이렇게 지배적인 '자기동일성'에 근거한 '근대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다시 계몽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이 '계몽하지 않는 계몽'에서 무서운 폭력을 바라본것은 그들이 겪었던 나치의 정신을 근대적 이성이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최종적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초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즉 오뒷세우스의 '하마르티아'(비극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과오)인 셈이다. 이런 고통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의 잘잘못과는 무심하게 발생하곤 하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존재의 불가해적 운명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어찌 어찌 하여 오뒷세우스의 전함들은 퀴클롭스들이 사는 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퀴클롭스들이 양을 키우며 살고 있다. 오뒷세우는 외교적 방법을 택하다가 전우들을 잃는다. 우선 오뒷세우스는 크게 '참는다.'. 그리스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절제' 를 여러번 다짐한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눈물을 참던 그마저도 전우를 잃어야한다는 대목에서 눈물을 머금지만 그래도 그는 '참는다'. 그리고 어떤 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 기다림 속에서 나온 자기 지혜를 바탕으로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인다. 폴리페모스가 묻는다. 

 "너는 자진하여 그것을 한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오뒷세우스는 "내이름은 '아무도아니'요" 라고 답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의복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사고의 형식을 추론하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복의 외적 형식은 몸의 형식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오뒷세우스의 저 대답은 다른 퀴클롭스들로 하여금 그를 비존재화시켜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오뒷세우스의 '아무도아니요' 라는 대답은 단순한 기지라고 하기에는 거의 혁명적이다. 아도르노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이성의 자기동일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미 '랑그와 빠롤'의 자기 분리 마저도 포함하는 이성의 포용적 간특함이 들어있다. 삼류독자로서 나는 오뒷세우스의 대답이 중요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도 아니요'를 몇 년 전에 본 영화<브이 포 벤테터>의 마지막 장면과 연계시킬 때 쉽게 그려진다. 모든 이들이 '아무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영화에서는 동일한 브이의 가면을 쓰고 광장에 나타난다-  거대한 퀴클롭스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오뒷세우스의 여행이 자극하는 상상은 종류도 다양하니 그 정도를 하나 더 추가한다고 고전의 바다가 넘치거나 범람하지는 않을게다. 정치적 해방의 가능성은 지난 시절의 강박적 회귀나 또는 찬란한 반짝임에 대한 자기 상찬에서 나오지는 않을 듯 하다. 그것은 그저 '내가 자청한 고난'이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의 '뼈아픈 후회'일 뿐이다. 그날은 '사건'이라 할 만한 절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것' 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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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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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벤야민 선집의 첫번째 책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파편적 아포리즘의 백화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 단상들을 '의미 있는 맥락'으로 결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또 벤야민이 시도한 글쓰기의 의미에도 부합하지 않을 듯 하다. 물론 벤야민 전문가들은 이 책의 내용들을 빗금을 따라 잘 오려내어 색깔별로 도화지에 붙이듯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이후 그의 책에 나오는 내용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가 갖는 의미를 배치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역자는 해제에서 친절하게 그런 내용을 언급한다.    


<일방통행로>는 단순한 꿈과 기지에 찬 아포리즘들의 모음, 아방가르드적 산문형식의 특이한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폭발력을 갖는 벤야민의 중후기 사유의 모티프들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중략)... 그 모티프들 가운데서도 특히 정신/의식/인식 대신 신체/감각/경험, 의지,개념적 인식 대신 이미지(를 통한 신경감응), 예술의 (자율적,영역적 성격 대신 기술 (내지 영영 없는 예술)이 벤야민의 아방가르드 미학과 정치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60  

내용인 즉 1924년에 나온 이 '독특한 비학문적인 저술'에서 우리는 그 뒤에 펼쳐질 벤야민 사상의 맹아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브레히트로 부터 영향을 받은 유물론적 세계관, 초현실주의자적인 아방가르드 미학, 기술낙관론적 매체관, 또한 유대 신비주의적 경험, 이것들이 정치학과 결합되는, 다분히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제시한 벤야민의 상이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일단의 사유이미지들을 얻어낸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일방통행로>라고 지은 것은 도시의 철학자, '파사쥬'의 철학자 벤야민으로서는 일관성이 있어보인다. 그의 최후의 대작 <파사쥬>는 <일방통행로>의 아이디어와 소묘들을 더욱 확장하고 세밀하게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어떻게 도시를 여행했을까? 김유동은 <발터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라는 글에서 그의 여행방식과 독해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을 수동적인 수용기관으로 만들어 외부 세계의 떨림과 변화를 지진계에 기록한다. 그러나 그 지진계에 그려진 형상들을 판독하는 것은 문학 작품의 형상들 뒤에 숨은 의미를 천착해 들어가는 작업만큼이나 쉽지 않다.    <아도르노와 현대사상>p32-33  

일단 이 책의 구성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자. 벤야민이 애정을 둔 감각인 '시각'만큼이나 이 책은 '시각적' 이다.'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벤야민은 말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각적'이라는 것이 1차적 감각의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몸을 통해,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온 감각들이 그의 세밀한 지진계와 화학반응을 불러 일으켜서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글들은 실끊어진 미노타우루스의 동굴같이 더듬거리게 만든다.  벤야민은 이 책을 그의 연인에게 헌사했다. 벤야민의 세계는 그녀 아샤 라치스를 만나면서 모종의 전환을 이룬다. 벤야민은 여행을 통해서-대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 각종 인상들을 머릿 속에 스케치한다. 그의 시각이 특이했던 것은 그가 확대경을 쓰지 않고 현미경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발터벤야민>이라는 얇은 평전을 쓴 몸메 브로더젠은 발터벤야민의 작업을 '일상의 현상학'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 뚤려 있는 가장 깊은 갱도의 바닥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골동품 보관소가 놓여 있는 것일까? <일방통행로>p72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일방통행로>p 116

 중요한 것은 '일상의 증후'라는 것이다. 그가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토로하는 것들은  20세기 초 독일의,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들과 그 안의 인간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파생되는 영역들'즉 세기초의 혼란을 겪은 총체적인 사회와 인간의 증후들을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 이미지로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방통행로>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보자. 

 첫 글은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썬 더 가까이 있다.'로 시작되는 '주유소'이다. 이어서 '아침식당','지하실','중국산 진품','문방구','유실물보관소' 등등이 벤야민이 걷는 일방통행로에 배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벤야민은 이 공간을 유유자적 산책하면서 연신 샷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처럼 행세한다. 짐짓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처럼 때로는 심각하게 두 손으로 사각프레임을 만들어 구도를 제어보고, 때로는 접사를 위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독일의 인플레이션' 을 찍던 사진가는 잠시 담배를 피우면서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또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단편들을 이어 간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사진기 안에 담기는 (철학적)이미지들이다.  벤야민가 찍은 '주유소'에는 달려와 카드를 요청하는 감찍한 아가씨도 없고 '천문관 가는 길'에는 친절한 관측 해설가 선생님도 없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기술문명이 가져다주는 영상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 책 곳곳에는 그런 단초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부지를 임대함>을 보자.이 글은 비평과 광고 그리고 영상미학에 대한 단상이 주를 이루는데 '비평의 적당한 거리두기' 대신 새롭게 등장한 광고와 영화에 대해 말한다.그는 '더 이상 아무것데도 놀라거나 감동 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극장에서 다시 우는 법을 배우는 것 처럼' 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말한다. '다시 우는 법'이라는 것은 벤야민의 개념어로 표현하면 '충격'이며 공감을 통한 '미메시스' 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벤야민은 이 관계 속에 자본주의적 관절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새로움'으로서의 영상이라는 텍스트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광고를 비평보다 그토록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팥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그 글자의 붉은 빛이다' <일방통행로>p139 

벤야민은 어떤 확고한, 아날로그적, 영속성보다 단절과 정지가 주는 '충격'개념을 중요시했다. <두번째 안뜰 왼편, 마담 아리안느>라는 글에 이를 예견하는 표현이 있다.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야말로 미래의 진핵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일방통행로>p153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아우라붕괴' 시대의 새로운-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학의 증거품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벤야민은 특히 에이젠슈타인의 소비에트 몽타쥬-충돌의 몽타주같은-것들을 이런 '충격'의 예술적 표현방식으로 읽고 있다. 즉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충돌을 통해 인식에 어떤 '충격'을 가하고-벤야민은 지식인의 글쓰기란 '화재경보기' 여야된다고 믿었다.-그런 '정지상태'를 통해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세계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격은 붕괴를 이끈다는 사실이다.  ... 충격을 약속하는 그 사람들이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멈춤의 순간까지도 인정할 의사가 있겠는가?  <사유이미지>p194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다가서 그 뒤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일방통행로>p70
 

 이외에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의 속에는 벤야민의 '충격','정신산만','도취','환등상' 등의 미학적 개념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해방을 위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또 그의 비평과 철학에 대한 태도, 이론과 현실의 상호 개입문제, 글쓰기,꿈, 대중, 사랑,자연 등등의 문제들이 길거리에 부딪히는 군중들처럼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를 모두 학문적으로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정본 해석이 있을리도 만무하지만, 그 난해함을  좀 이겨 내며 순간 순간 보여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 기술적이지만 - 처세의 아포리즘이 아니라 다른 사유를 관통할 수 있을 벤야민의 아포리즘을 통해 잠시라도 문장을 부여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만큼 '충격'의 와인은 익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아포리즘 하나 하나를 실험적인 단편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이미 어떤 알레고리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상영을 마친 것들도 있으리라.  


   
  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 확신을 강탈하는 도쩍떼와 같다  <재봉용품>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하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긴급 기술 지원대> 

우둔함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독일 시민의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화법 중에서도 특히 생각해볼만한 것은 절박한 재난에 대해 말하는 화법이다.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안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뾰족한 대책없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안정과 소유 관념에 매달려온 일반 시민들은 지금 상황이 전적으로 새로운 안정성이 지배하는 상황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 .... 도처에 생에 대한 이론과 세계관이 넘쳐나는데 이 이론들은 종국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상황을 인준하는데 봉사하면서 이 땅에서 오만한 행세를 하고 있다.  <카이저 파노라마> 

성취는 오로지 이 의심과의 연관속에서 즉 구원,결단의 형태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성취가 이러한 형태로 실현되자마자, 벌거벗은 순전한 성취 자체에 대한 새로운 참을 수 없는 동경이 순식간에 들어선다.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지니고 다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소위 내적 이미지라는 것은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순전한 즉흥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앞에 들이대는 마스크에 전적으로 정향해 있다. 세계는 그와 같은 마스크의 저장고이다.<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언한 것들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그것의 밀려나 있고 움츠려든 충만 속에서 '삶의 정오' '여름정원'속의 사상가인 차라투스트라의 시간이 도래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자기 궤도의 정상에 다다른 태양이 그런 것처럼 가장 엄격하게 사물들의 윤곽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짧은 그림자들> 

누군가를 아무 희망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아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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