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말 중 자주 사용되는 말이 '압축근대'이다. 이 말은 한국의 역사적 좌표를 이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말처럼 보인다. '압축'이 의미하는 바는-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고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서구의 역사 과정과 비교하여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낸 근대화 과정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복합어의 두번째 단어인 '근대'라는 단어에 시선을 돌릴 필요도 있다.즉 '압축'되었을 망정 '근대' 라는 역사적 시간축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압축근대'라는 말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지만 기실 이 말을 사용할때는 '한국적 근대성의 부정적 요소'들을 언급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전근대적 권위주의의 잔존, 천민자본주의의 상식화, 시민 사회의 역사와 공간의 일천함, 정치적 다양성의 협소화, 다문화와 차이에 대한 이해부족 등등..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국은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신에 기인한 탈근대적 과제 역시 동시에 안게 된다. 결국 제대로 '이루지 못한 근대성'과 너무 '일찍 달려든 탈근대성' 사이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두가지 중층과제를 떠안게 된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한쪽의 우선적 해결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반독재세력에 대한 대항전선이 형성되더라도 그 지점은 출발점이지 결절점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써 피곤해질 '근대와 탈근대'의 논쟁은 재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액체근대>를 읽기 위해서는 수렁에 빠진 이 논쟁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다면- 그것은 그저 현학적인 학자들의 자기연명 수단정도로 생각한다면- 지그문트 바우먼의 <액체근대>는 별로 읽을 가치도, 읽는 재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들뢰즈가 말한 '권력의 모든 측면에 대항하여 싸울 힘'도 스스로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끼리 가짜 총싸움을 하더라도 그 지형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강화를 위한 지리한 동어반복의 구호보다 차라리 책에 코박는 편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물론 정답은 없다. 최소한 나는 인터넷상에서 100번의 'MB타도' 구호를 외쳤다고 100배쯤 더 진보적이 된다고 생각치 않는 비정상적인 1인 중에 하나다.) 

지그문트 바우먼이 말한 '액체근대'는 무엇일까? 여타 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개념적 용어로 설명한 '변화된 근대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소한 미묘한 차이들은 존재하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포스트모던'이다. (보편적 총체성의 거부를 보편적 단어로 설명해버렸다.문제는 이 '포스트모던' 이라는 것이 누구의 '포스트모던'이냐에 따라 또 상호비판적이며 때론 부정적이기까지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먼은 변화된 현재의 역사시대를 '유동성'이라는 액체의 특성에 빗대어서 말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인 '모든 굳어진 것은 녹아내린다.'라는 말에서 '액체근대'의 추이를 읽어낸다.( 내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넘겨집던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단어는 단연코 '변화'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변증법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토대가 되는 것 아닌가? 마르크스는 이런 변화를 헤겔의 변증법과 노동계급의 궁극적 승리라는 유토피아주의로 교직해낸다. 문제는 마르크스식의 사적유물론에서는 운동성이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멈추어 서는 공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이고 이에 대한 해석을 두고 비판과 반비판이 가득하다.) 바우먼의 시각에서는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상정하면서 운동의 종말을 스스로 예고한 것으로 읽힌다. 마르크스가 '녹아내리는 것'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대상은 -쉽게 말하자면- 전근대적 과제들이었다는 것이 바우먼의 이야기다. 그리고 -비단 마르크스 프로젝트뿐만이 아니었지만 그의 프로젝트를 가장 이상적인 근대적 계몽의 의지로 읽는다면- '녹여서 이루어낸 것'이 바로 '고체근대', '무거운 근대'이다.이 시대는 근대적 유토피아의 신념은 사라진 시대이다.바우먼의 비유를 들자면 '여호수아의 담론'이 종말을 고하고 바우먼은 이제 그런 '헤비메틀의 근대'가 다시 한번 '녹아내리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이며 이를 개념화해낸 말이 '액체근대'이다.  

물론 바우먼은 전근대-근대-탈근대의 도상에서 해체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전근대의 장점-예를 들자면 호혜성같은 것들-은 파괴되고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적 수용만이 강제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도 마찬가지이다. 바우먼은 '유동성'이라는 가치가 '상위 계층'의 독점과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밝힌다. 즉 가장 '유동성이 뛰어난 계층'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류층들이 차지하며 이익창출의 토대를 위해서 땅에 고착된 계급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바우먼은 '부재지주'라는 말로 유동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들을 표현한다.  

묶이지 않은 그들의 손은 손이 묶인 사람들을 지배한다.손이 묶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는 손이 묶인 사람들의 속박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p 193

물론 이쯤 되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결국 '액체근대'라는 것이 현실의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하고 그저 움직이는 자본과 그 일부의 영향력들을 과대하게 형상화해낸 것은 아닌가?" 라는 것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보다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행조차 이루어내지 못해서 다시 싸우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듯 보인다. 또한 다분히 제 1세계의 산업변동 구조에 따른 사회분석의 인상도 갖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바우먼이 말하고 있는 '액체근대'이 경향성들은 이미 한국 사회와 한국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의 결속성 문제'같은 것들에 대한 시각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노동자 개념'의 부족이다.(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작업때문이기도 하다.(이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우먼은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화-산업적 용어로 보자면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변화이다- 와 그에 따른 개인성와 유동성, 불확실성의 시대에 따른 개인의 선택적 합리성이기도 하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의 특성중에 중요한 부분으로 '상호결속의 시대의 종말'을 말한다. 일명 '결속 끊기'이다. 그는 푸코의 '원형감옥' 역시 한계효용이 다다랐다고 말한다.나름 유명한 개념이기도 한 '시놉티콘'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즉 '고체근대'의 시대는 '한 사람의 관리자가 여럿을 감시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리자 역시 여럿의 시각에 노출되어야 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액체근대'는 이정도의 비용조차 비효율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공간성의 폐기이다.(바우먼은 그래서 '액체근대'의 시대에는 '시간' 특히 '속도'가 중요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쉬운 예로- 네그리의 <다중>에도 미국의 전략 배치문제가 언급하며 유사한 내용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지상군 시대의 종말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최소한 지상군이 사라지진 않아도 지상군의 비중이 현격히 줄어드는 것이 바로 판옵티콘에서 시놉티콘으로의 원형감옥에서 탈원형감옥으로의 전환의 예증같은 것이다. 바우먼은 '결혼에서 동거로' 라는 표현으로  '고체근대'의 결속성이 녹아내리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결속성에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전후 지속된 포드주의적 타협, 즉 노동-자본의 결속 또한 포함된다. 바우먼은 여기서 이런 '동거'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서로 득이 되는 합의와 상호의존의 문제였다면 결속끊기는 일방의 문제이다. 일방이라 함은 결합의 한쪽 당사자가 늘 은밀히 바라왔지만 어렴풋하게라도 그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자율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p239-240 

바우먼은 '액체근대'시대에 '총체성의 신화'가 폐기되면서 '불확실성과 토대없는 개인주의'가 지배한다고 언급한다. (개인주의는 근대화의 특징인데 이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두가지가 화학결합하면 '불안'이라는 감정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현대인은 과하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며, 또한 신은 물론이고 자기 정체성, 근대적인 상상 속의 유토피아마저 사라진 하얀 지평선 위를 배회하게된다. 그가 의탁할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우먼이 강조하는 '소비'이다. 바우먼은 크리스토퍼 래쉬의 <나르시즘의 문화>를 인용하여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린는 일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주도권은 사물에 놓인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우먼은 '소비의 자유' 가 결국은 '버릴 수 있는 자유'의 자원에 따른 '자유의 재분배'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 부분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바우먼이 보기에 소비자본주이 사회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소비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종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소비문제를 다룬 전통적인 학자들-예를 들자면 베블렌같은- 이들은 차별화와 기호가치라는 부분에 촛점을 둔다. 바우먼은 소비에서의 자유는 결국 '자원'의 문제이다. 이 차원은 소유의 자원이 아니라 폐기할 자원이다. 즉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들은 '잘못된 선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위계층은 소비를 통한 욕구의 배설을 꾀하지만 그들에게는 '버릴 자유'가 부족하다.(쉽게 말하면 돈 있는 사람들은 실패하면 다른걸 할 자유가 있지만 돈 없는 이들은 실패하면 빚독촉에 의한 자살이다.) 바우먼은 결국 '쇼핑하기'를 통한 정체성이 해방적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하며 사회적 위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성되는 자유의 재분배정도의 역할이 전부라고 말한다.(그런 이것이 절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본이 생산자와 결속대신에 소비자와의 '상호의존'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찾은 유일한 공간인 '소비의 공간'은 기실 '빈 공간'이다. 바우먼은 레비스트로스가 <슬픈열대>에서 보여준, 타자성 극복의 두가지 대응을 인용하여 '소비공간'에 작동하는 유동하는 자본의 전략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타인의 타자성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전략이 사용되었다.하나는 '뱉어내는'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치우는'전략이다. ....소비의 공간은 '먹어버리는'공간으로 배치된 것이다. p164-165 

쉽게 말하면 전자의 전략은 배제의 전략이고 후자의 전략은 포섭의 전략이다. 바우먼이 보기에 현대의 개인은 자본의 포섭 전략에 완전히 노출된 존재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자유롭다고 느끼는 소비의 공간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주관적 만족'속에서만 복무하게 만드는 공간이며 외부와 단절되된 사물화된 공간인 셈이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주로 '고체근대'와 다른 '액체근대'의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우리의 여행가방 속에 넣고 시작하기 위함이다. 그는 '액체근대' 시대에 달라진 해방의 개념, 개인성의 문제, 시/공간의 변화, 일과 자본의 결속해체, 공동체주의의 탈색-바우먼은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라는 말을 꺼내는데, 전통적 연대방식의 무너짐과 동시에 인터넷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과잉기대 속에 있다면 그의 분석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등등을 흥미로운 비유와 표현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이 점에 이 책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덕목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액체근대'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사실 없다. 이런 경향성 자체를 완전히 거부한다는 것은 벽돌을 가지고 밀물을 막아보려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또한 바우먼의 <액체근대>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 책은 '해방전략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책 전반부에 바우먼은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전세대 '비판이론'을 경유함으로써 현재적 과제를 고찰한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전체주의와 총체성의 거부' 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해방적 성찰로서 유의미했다. 바우먼에 의하면 '액체근대'의 시대에 이런 '총체성의 거부' 자체가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말이다.(사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아도르노는 동의하지 않을것이다.그는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에서 오히려 총체화를 거부한다는 이름으로 다시 총체화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읽어냈기때문이다.) 바우먼은 '비판이론'의 과제를 재전도하길 요구한다. 그의 개념적 용어의 사용은 칼 폴라니의 '재배태' 개념과 유사하다.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겠지만, 비판이론은 그것이 다루어야하는 주제 자체가 사라질 형국이다...과거 해방이 지녔던 의미는 현재 상황에서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 되었다.해방의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비판이론의 손길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비판적 공공 정책을 기다리는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현대 인간 조건의 '액화된' 비전과 함께 부상하고 있다. p78 

바우먼은 비판이론이 거부했던 '총체화' 가 전후 서구 역사에서 '액화된' 것으로 본다.즉 모두 녹아없어지고 소비주의의 흐름에 몸을 맡긴 파편화된 개인만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가바라보는 시각이다. 결국 그는 폴라니의 '배태'개념을 재인용하여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며 '재배태'의 가능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법률상 개인과 실제적 개인의 간극'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부정적 자유와 진정한 자유' 등등의 간극을 돌아보고 여기를 메우는 것이 '비판이론'의 과제이며 해방의 선셜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대문자' 정치의 복원과 함께 '공적영역'의 복구를 요구한다. 폴라니식으로 말하자면 탈배태된 '공적 영역'의 재배태인 셈이다.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와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p82 

노파심 삼아 말하자면 마지막 결론부분만 방점을 찍어 읽어 내면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부분적으로 -결국 계몽주의적 자기강화를 위해 -응용하는 것밖에 안된다. 바우먼은 공동체주의의 부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또 근대적 프레임 속에서 헛발질하는 진보라는 관념 자체도 의문시한다. 그는 포스트모던한 현실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한 틀 속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동체적 결사보다는 이미 풀려난 개인의 자유주의적 가치에,생활정치 세계와 결속에 힘을 싣는다. 이것은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불안정','불안전' 이라는 세속의 삼위일체 속에 일시성과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통한 자유주의적 공동체 개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전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자유와 안전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p290 

듣기에만 좋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우먼이 '자유의 간극'을 메우는 실천적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활짝, 더 활짝!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지마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올려라,그대들 훌륭한 무용가들이여,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련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니체의 초기저작인 <비극의 탄생>은 고전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몰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책이 그런 문헌학적인 가치만 있었다면 고전 목록표에 오르기 보다는 전문가들의 도록에나 올랐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계와 예술,그리고 예술을 이해하는 유력한 방식을 강력히 피력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보여준 예술론과 개념적 용어들은 이 책이 씌여진지 100년이 넘은 시점메도 사람들의 귀를 현혹하고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는 저널리스트들의 타자기 위에서 그럴싸한 문화기사의 머릿말을 위해 쓰여진다. <비극의 탄생>에 나와서 이제는 보편명사가 되어버린 개념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아폴론적 예술'이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계보를 따지면서 적용한 개념이다. 이 말의 상식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분히 이항적인 분류법으로 구분하는 고등학교 참고서의 설명도 아직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렇게 구분할 수있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가 강조하는 방점은 '상호보충적'인데 있다. 그런고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대립적 개념으로 하나는 '감성 대 지성' 또는 '비조형대 조형' '직관 대 분석' 이런 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의 유용성보다 이 둘을 썀쌍둥이로 보는 것이,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의 유용성은 여전하다.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그라모폰지>와의 인터뷰에서 훌륭한 모차르트 연주를 위한 방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말하기와 노래하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애써 비유하자면 말하기란 아폴론의 것이고 노래하기란 디오니소스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백여년이 지나도 니체식의 화법의 변용을 거쳐 여전히 유효하다.  

<비극의 탄생> 1장에 첫 문장은 그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의존하는것과 유사하다."  <비극의 탄생>

 그런데 '나누기 좋아하는 '이성은 그런 과정을 철저히 몰이해한다. 니체의 용어로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아폴론적 인간의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벌인 일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출현을 고대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는데, 그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을 이론적 인간이라고 칭한다. <비극의 탄생>은 물론이고 그 이후 벌어지는 근대/탈근대적 철학논쟁을 따라가다보면 니체의 '소크라테스적 인간', '이론적 인간'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가닥이 잡힌다. 왜 니체가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불리는지 이해가 될 때 니체의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의미가 명확해진다는 말이다. 하버마스가 '고대의 탐구 속에서 진리의 조각이나 찾아 해매는 인간들' 이라고 비난했던 자들의 첫번째 명단 속에 '니체'가 있다. 이런 비난의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자면 계몽 이성의 강인한 신념, 니체의 용어를 빌자면 '이론적 낙관주의' 라고 할 만한 하버마스류가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에게는 철학이나 학문을 성찰하고 넘어서는 심미적인 미학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쉽게 말하자면- '미학'을 모른다. 니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에서 중요한 부분은-니체가 과연 전통적 의미의 미학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철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미학,또는 재현이나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위치까지 올린 것이다. 혹자는 철학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을 주장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니체를 예술지상주의자,예술본질주의자 정도로 축소평가하려는 비판적 오용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철학의 시녀로 살던 예술을 동등한 위치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철학의 과잉기대를 줄이려는 것이 선구자의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니체식으로 보자면  하버마스는 계몽 이성의 가능성을 위해 '세계를 인식 가능한 것' 으로 파악하고 이성을 통한 해결가능성을 낙관하는 자이다. 니체는 이런 전통의 기원에 소크라테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염세주의에 반해서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낙천주의의 원형이다. 그는 사물의 본성을 철저하게 규명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지식과 인식에 만병통치약과 같은 효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류야말로 악 그 자체로서 파악한다. 저 근거들을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참된 인식을 분리해 내는 것이 소크라테스적 인간에게는 가장 고귀한 소명,유일하고 진정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여겨졌다. 

물론 하버마스는 역으로'이성의 실천가능성'을 폄훼한 사람으로 니체를 지목한다. 이를 따라가면 결국 '포스트모던 논쟁의 전장'이 발견된다. 종군기자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것보다 여기서는 니체의 소크라테스가 다분히 허구적이라는 것에 대한 평가는 언급해야겠다. 즉 니체는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 개인-도망가라는데도 약먹고 죽은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종언을 선언한 사람들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테스 등을 들고 있는 니체인데 사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다면 그의 이성이라는 것이 결국 신적인 진리 앞에 복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신과 신화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인간' 이라고 하는 것은 -적이라는 말에 주목해야한다.-'계몽이성적 인간의 출현' 이라는 은유적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런 출현을 호메로스의 오딧세우스까지 올려보내기도 한다. 사이렌 신화에서 욕망과 환상을 거부하고 이성으로 자기보존하려는 오딧세우스말이다.

앞선 <비극의 탄생>인용 문장에서도 '가상과 오류에 대한...'이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니체에게 '가상'은 중요한 개념이다. 쇼펜하우어의 '표상' 개념을 이용하는 것으로 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개념을 니체에게로 끌어오면 예술은 '이중으로 매개된 가상' 즉 '가상의 가상'이 된다. 그 단초를 보여주는 문장이 이것이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비극의 탄생> 

  니체에에게 예술을 창조하는 두가지 기원은 '꿈과 도취'이다. 전자가 바로 아폴론의 기저가 되고 후자가 디오니소스의 것이다.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꿈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가상을 구현하는데-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들이다- 이것이 조형예술의 전제가 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현상의 인식이 무너질때 생기는 '전율'이라는 요소가 있다.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인 '도취'이다. 예술 형식으로 구분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다. 니체에게 세계의 심연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고 그리고 예술의 본체는 바로 '음악'이다. (불행하게도 그 음악이란 것이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소녀시대나 빅뱅이 아니라는 점...왜 음악이 다른 예술 장르들 중에서 가장 비모방적이며 본질적인 지는 미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음악이 다른 장르에 비해 니체처럼 본질적이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 차별적인 특수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는 그렇게 '아폴론적인 것' 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혼합'을 통해 표상된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탄생에 독특한 해석을 가한것은 이 혼합의 결과물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최초의 혼돈시기-거인족과 신들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부터- 아폴론적 중간계를 통해 혼동의 끔직함을 피했다. 그렇지만 이후에 디오니소스의 침입을 받았을때 그들은 순치라는 방식으로 디오니소스를 파괴하지 않고 체제 내에 포섭한다. 니체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고뇌에 대한 민감성과 그들의 뛰어남으로 인해 세계의 본질을,심연을 이해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들은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인은 명랑하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명랑성은 사계절이 봄이어서 생기는 그런 명랑성이 아니다. 니체의 '그리스적 명랑성'은 겨울-봄을 이해하고 그 몰락과 창조의 원리는 체화해낸 자들의 명랑성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이런 '실천적 허무주의'를  아폴론적인 형상으로-즉 무대 언어로- 상연하게 된다. 그리스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구도 하에서 보자면 비극의 출발점과 핵심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광기-축제의 심연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가? 니체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그리스인들이 아폴론적 형상을 이용하여 마치 비극의 중심에 아폴론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중심이며 기원으로 생각케 한다는 것이다. (태양을 맨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실연으로서 그리스 비극에서 중심 모티브는 연기나 대사가 아니라 음악이며 그 음악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실체이다. 음악은 마치 숨어 있는 배경처럼 느껴지지만 종국에가서 아폴론적인 것의 한계를 넘는 의미를 전달한다. 

음악은 세계의 본래적인 이념이며 연극은 이 이념의 반영,즉 그것의 개별화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 ...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난해한 관계는 진정 두 신의 형제결의라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언어로 말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아폴론이 디오니소스의 말을 한다. 이와 함께 비극과 예술 일반이 최고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비극의 탄생>

물론 니체이 '예술-형이상학'은 니체 후기에 자기에 의해서 부정되고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니체가 독일문화 중흥의 기대로 그리스 비극의 적자로 이해한 바그너에 대해 <비극의 탄생>의 재서문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바그너를 폐기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음악이 직접 내면에 말을 걸며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음악은 의지에 대해서도 사물들 자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그런 것은 내면적인 삶의 전영역을 음악의 상징성이 지배한 시대에에 비로서 지성이 꿈꿀 수 있었떤 것이다. 지성 자체가 이런한 의미심장함을 음향 속에 집어넣었던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앞서 언급했듯이 비극은 그렇게 시작해서 소크라테스적 인간들의 출현으로 몰락한다. 비극의 계보 속에서는 에우리피데스에 있어서 신화의 해체와 낙관주의가 드러난다는게 니체의 설명이다. 그는 근대의 전형을 형성한 '이성중심주의의 낙관성'을 '알렉산드리아 명랑성'이라고 칭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인들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적 명랑성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그물망을 깨기 위해 니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에서는 종교개혁,바그너로 상징되는 독일문화의 깨어남을 요구하고 있는데-그런면에서 니체는 반계몽주의자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시 계몽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좀 더 보편적 문장을 찾자면 이것이될 터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인기있는 말 중에 하나이다.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비극의 탄생> 

문장은 짧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기란 그다지 쉬운 말은 아니다. 수많은 해석이 가능할터인데,최소한 탈근대론 언저리에 있는 학자들은 '미학'과 '삶'의 연동에 관심이 높다. 푸코같은 이들이 "당신의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라고 말했다면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인 추악함과 부조화마저도 예술적 유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직접적 파악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음악에서의 불협화음의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한다. 니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언급한다. 어떤 의미에서 니체와 여러모로 유사한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에서 예술의 회생가능성, 세계를 버틸수 있는 힘을 찾았다. (내가 아직 쇤베르크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했다.) 협화음의 세상-즉 이론적 낙관주의의 세상-에서는 디오니소스적 밤와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움을 틀 자리가 없다. 그렇지만 니체에겐 이런 '몰락'의 이미지와 변화의 힘들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이런 불협화음의 이미지가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한 모습이다.

"그대들은 나처럼 존재하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영원히 창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하도록 영원히 강제하며,현상의 이러한 변천에 영원히 만족하는 근원적인 어머니인 나를!" 

디오니소소의 신화중에 하나는 디오니소스가 여덟조각으로 찟겨졌다가 다시 사는 영원한 창조성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창조와 쾌락과 생산의 신...디오니소스. vivo ergo cogito ! (나는 살아있다.고로 생각한다.) 사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문헌학적 고증을 얼마나 철저히 해냈는가가 아니다. 니체의 최초 작품으로 그가 이후에 도달하는 철학적 세계의 맹아들이 <비극의 탄생>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대략 니체사상을 요약하는 말이 '영원회귀','초인',' 디오니소스' 뭐 이런 것들인데....<비극의 탄생>을 눈여겨 보면 봄철 들판에서 보는 민들레처럼 그것들이 보인다.  

박찬국 역의 <비극의 탄생>은 역자해제가 60여페이지에 이른다. 주로 1,2장을 중심으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 인 것의 개념과 비극의 탄생과 몰락을 둘러싼 대립물들을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따라서 과거 <비극의 탄생>을 읽었던 독자라면-최소한 <비극의 탄생> 재발견을 위함이 아니라면- 역자 해제만으로도 지난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다. 그렇다. 깃털같은 가벼움이며 진흙뻘 같은 육중함이다.  

 시는 아폴론의 눈길 피한 위대한 패잔병이다. 젊은 신의 눈길을 피한 시는 화살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다. 뜨겁다.성마르다. 그들은 성에 굶주린 전쟁터의 군인들 마냥 가슴에 대고 검붉은 인두를 꺼내든다. 불에 달군 인두다. 아니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이름모를 이의 피가 묻은 칼이다. 상처에 더 깊이 살을 밀어넣는다. 그것은 칼이다.또 살이다. 시는 남은 모든 육체성을 그대로 대상에 전한다. 그 때 우리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불같은 고통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왼쪽 가슴 아래께'  온 깊은 통증은 여전히 쑤신다. 

문인수의 <배꼽>은 그렇다. 나는 작년에 이 시집을 여러번 펼쳐 읽었다.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다가 한 해를 훌쩍 넘겼다. 장마철에 읽은 시집을 다음해 장마가 시작되는 날 다시 편다. 아마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나는 시를 읽는 내 능력의 부족함일 것이다. 시인의 꾹꾹 눌러쓴 언어적 제련에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자괴감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개념어로 펼쳐낼 수 없는 시의 직접성 때문이다. 시나 아포리아를 다시 글로 옮길때 마다 느끼는 내가 느끼는 묘종의 불편함이 있다. 그것은 비재현의 문법을 가진 음악을 글로 옮길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언어의 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시나 아포리아가 낫긴 하다만. 이런 것들에 리뷰를 쓴다거나, 언어의 힘을 빌어 정리를 하고 나면 정들었던 물건들을 재활용센터에 보낼때 느끼는 만족감과 허탈함 같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탁탁탁 정리 끝. ok. 다음' 

문인수의 <배꼽>은 정말 여러번 곱씹어 읽어도 아깝지 않을 시집이다. 볼 때 마다 허공 한 구석을 보게 만든다. 읽을 때 마다 새어나오지 못하는 가라진 음성을 들어야 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쟁애인 마흔 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중략)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선생님 저 욱을 때도 아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울음보를 떠트렸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이것이 날개다> p84-85

시인에게는 '잃어버린 세계'와 '폐허가 된 현재' 를 쇠사슬처럼 연결하고 있는 증표가 바로 '배꼽'이다. 배꼽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모두는 '얼룩말 가죽'같은 법원 앞 횡단보도를 아랑곳없이 건너는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지우기도 하는' 모성의 세계가 있었다.  

저 할머니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신호등/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들어선다.까마득한/.....시꺼먼 길바닥이/문득 흰 젓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이 있다.    <얼룩말 가죽> 중에서 p22-23  

모성의 세계,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뻐꾸기 소리>,<조묵단전>등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몇 해전 돌아가진 할머니의 작은 은비녀를 기억하는 나는 아흔 일곱에 미장원에 가서 파머를 한 작가의 어머니와 그리고 한 세기를 짊어져온 잘라진 머리 칼 속의 비녀를 '탈골'이라고 더듬는 대목에서 정말 '헉'이란 소리가 나왔다...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 단단한 비녀! 아 (  )탈골이다. <조묵단전> 비녀뼈 p99 

 작가는 두고 온 세계에 대한 일종의 우수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웅크리고 있는','흉가'가 된 세상이 있다.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는 맛이 없다.대개/거칠고 쓴데,저기/들어가 웅크리는 슬픔은 또/누구인지.언제/ 둥근 종소리 날까,/ 그렇게 깊이 날고 전소되겠다/  <흉가> p30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이쯤에서 그만/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저것 깨묻는다.  <송산서원에게 묻다> p102 

작가에게 두 세계가 같은 고향을 같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배꼽'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배꼽'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땅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가지고 있는 '배꼽'. 사실 아이의 비릿한 탯줄을 자르기 전까지 나는 단 한번도 '배꼽'의 효용과 그 위대한 상징적 징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스무번은 넘게 읽었을 '배꼽'과 관련된 아이의 동화책에는 그 상징적 징표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정의한다. 대충 기억에 의존해서 말해보자면'배꼽'은 '우리가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의 표시'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증표'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배꼽'을 만들거나, '배꼽'을 자르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연결의 시간을 후대와 갖지 못한 것은 모든 남성의 영원한 빈틈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만 배꼽으로 연결될 뿐 나의 아들이나 딸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위대한 여성이여!)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배꼽>p 47 

이제 어떤 해소가 남아 있는가? 세계는 그렇게 사랑으로부터 이미 멀길을 떠나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폐허의 집뿐이다. 이것은 열혈 청년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허무주의인가 비관주의인가? 차라리 철지난 낭만주의와 저속한 낙관주의가 더 가식과 자기 기만,자기 협잡 은 아닐까? 작가는 '송산서원'처럼 '대답하지 않는다.'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떳다 가라앉다 하면서/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뒤에,두둥실/ 왠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비닐봉지>p26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왔다, 싶은 모양이다.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창공이다. <이것이 날개다> p85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별사가 따로 있다. <경운기소리> p19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동백 씹는 남자> p87 

작가는  다시 묻는다. 존재의 한 파편을 언뜻 바라본 자로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사람들에게 묻는다. 마치 최승호의 시<북어>를 연상시키는 <도다리>란 시다. 

대형 콘크리트 수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 겨우 알겠다/ 흐린 물 아래 도다리란 놈들이 납작납작 붙은 게 아닌가/......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바닥을 치면서 당장,솟구칠 수 있겠느냐,있겠느냐  <도다리>p32 

문인수의 <배꼽>은 -상투적이지만- '절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시들이 '물 반 고기 반' 처럼 득실거린다. 독거노인의 모습을 그린<꼭지>, "죽는 거시 낫겄어야,참말로" 라는 '절창'으로 끝나는 '절창'을 담고 있는 <만금이 절창이다>, '극약 같이 짧은 시'만 쓴다는 서정춘 시인에 대한 시들.시끌벅적한 생명을 노래하는 <녹음>,<봄>등등....어느 하나 '탈골'시켜서는 안될 시들이 가득하다.  

한해 딱 한 권의 시집만 읽기로 작정한 이가 있다면 문인수의 <배꼽>은 목록에 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지난 겨울, 나는 로쟈를 만났다. 일반적 용어로 '만남이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또 스쳐 지나갔다고 하기엔 너무 가깝다.' (<로쟈의 인문학서재> 리뷰를 쓰기 전에 그와의 개인적 인연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시길...) 

나는 1년에 두 서너번 쯤 서울에 간다. 지난 해도 그랬다. 잔설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 겨울, 모 대학 캠퍼스에 들를 일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여서인지 퇴행적 낭만성에 시달렸다. 입시전쟁에 시달릴 때, '대학 홍보달력'이 주던 캠퍼스의 판타지같은 것을 말한다. 달력은 매 달마다 모의 고사를 치뤄야하는 아이들에게 매 달마다 아름다운 판타지로 말을 건다. '조금만 더 참아라. 조금만 더 견뎌라. 저기 가면 자유와 사랑과 젖과 꿀이 흐른다.'  판타지는 과잉된면이 있지만 순간적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내가 로쟈를 만난 그 날도 판타스틱한 겨울 캠퍼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게 꽤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이미 나를 떠난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습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래 저래 습기 '촉촉'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대학 강의동 앞을 지나고 있었다. 멀리서 '중용적'인(중년의 치고는 날씬한) 몸매의 한 사람이 양손에 복사물을 잔뜩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겨울학기 강의 뛰는 강사 양반처럼 보였다. 그의 걸음은 경쾌했다. 거리가 가까와 지면서 나는 '어..어디선 본 듯 한 사람인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뇌가 파편적으로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내 곁을 지나갔다.  벌건 대낮에 나의 '래피드 아이 무브먼트'를 알아차린 것일까, 코가 닿을 만한 거리에서 그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게 끝이다. 그와의 만남의 전부다. 뭔가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스럽긴 하겠지만 나로서는 흥미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아직 몽타주 분석작업을 마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마쳤더라도 확신하지 못했다. 대학 강의동으로 돌아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몇 번 더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로쟈'임에 왠지모를 확신이 들었다. 전도연처럼 손나팔을 만들고 "저기요...혹시 로쟈님 아니세요?" 라고 불러볼까도 생각했다. 충분히 들릴 거리였고, 그 날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어도 무방한 햇볕이 은은한 겨울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1년에 서너번 서울에 올라가고 그 날 따라 안가던 대학 캠퍼스를 가게 되었고, 로쟈는 하필이면 그 때 도서관에서 복사물을 가지고 그 앞을 지나갔다.  

실증적으로 보자면 평범한 시선교차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의 시간이다. 하지만 불교적 의미로 우연이 맺어지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그 찰나는 거대한 부딪힘으로 변용된다. 물론 그걸 통해 실제적으로 내가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런 만남의 경험도 '만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만개감같은 것은 수확이다..그와의 단순한 인사가 주는 효용대신에 내가 얻고자 한 것은 이것이다. 일종의 '반시간성'. 어색함과 반가움이 공존하는 만남의 기회비용으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로쟈(이현우라는 본명보다 이게 더 익숙하다.)는 겸손하게도 스스로를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칭한다. 저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마당이니 종국에 '현고학생부군'의 이불을 덮게 될 나같은 독자는 '곁다리 독자'라고 하는게 마땅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란 것도 '곁다리 인문학자'의 생각을 훔쳐본 '곁다리 독자'의 감상 정도 되는것이다.(세상은 '현고학생부군'이 만드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선언>의 진부함을 돌려내 '만국의 곁다리 독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에는 그동안 로쟈가 '저공비행'하면서 지상에 떨어뜨린 작은 꽃다발들이 가득하다. 그의 격납고가 있는 알라딘은 그의 사상의 고향은 못되도 비행기의 집은 될 수 있다. 덕택에 알라딘의 주민들은 그의 '저공비행'을 밭일 하면서 또는 아이를 유치원보내면서 쉽게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가 새벽안개 속에 입김을 내뿜으며 발진하는 모습이나 붉은 황혼을 뒤로하고 털털거리는 기체를 몰고 돌아오는 모습들은 알라딘 마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의 비행기가 좋은 점은 주민들의 민원이 발생하는 '굉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아주 '친환경적'이다.) 누가 비행기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면 조종사는  만져보라고 이야기할 뿐, 과잉 친절도 과소 관심도 없다. 그 적절함은 격납고와 그의 비행기를 바라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조종사의 노련함 때문일지 아니면 소심함때문일지 그는 묵묵히 비행에 전념을 하고 꽃다발을 날리고 또 그에 보람을 느끼는 듯 하다.(그가 종국에는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개인연구실 하나 얻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저공비행'은 예전만큼 자주 못하게 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종이로 만들어진 <로쟈의 인문학서재>에서 그를 알게된 2006년 이전의 글들이 여럿 수록되서 좋았다. 책 전체에 '로쟈식 유머'가 많이 묻어 있지만 최근에 인터넷에 오르는 그의 글보다 과거 글에서 그런 '웃음'과 '비틀기'가 자주 등장하는 듯 하다.  <로망스와 포르노>라는 글에 등장하는 이런 대목들을 보자.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젓소부인'의 시대였다.... <젓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 하겠느냐?!)...<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의 죄의식의 공동체!),<젓소부인>의 관객은 대부분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 보는 경우다. <로쟈의 인문학서재> p141 

 <애마부인>을 부모들이 일나간 친구의 집에서 훔쳐보고 <젓소부인>을 다른 테잎 두 개 사이에 끼워서 빌려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키득거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로망스와 포르노>라는 글은 '포르노의 시선은 전체주의적 시선이다'라는 왠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그런 내용을 중심으로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와 지젝의 비평 사이를 오고 간다. 로쟈는 그러면서 슬쩍쿵 하고 '선정적'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모순에 대해서도 일갈을 가한다. 오히려 '선정적인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말이다. 

'이 삶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통해 니체가 외친 반형이상학적 주장을 '이게 다에요!' 라는 '아줌마철학'의 세속성으로 풀어낸 대목도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든다. 저자는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니체를 중심으로 한 철학사의 전환대목을 유머러스하게 풀어간다. 만약 이것을 학술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분기점을 설명하고 각각의 이론적 쟁투를 '학술적으로 표현'하려면-과연 누가 대중들이 읽게 될지 모르겠으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소용돌이에 잠긴 종이배처럼 아득하다. 하지만 로쟈는 다분히 유머러스한 문학적인 결론을 통해 이를 화해시킨다. 이미 슬글슬근 이야기는 다 끝냈다. 결론이 이렇다. "우산 셋이 나란히,티격태격 걸어갑니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제각각 살아남는 느릅나무들" 이라고 말이다. 이 말 뒤에 로쟈는 다시 뒤에 인용되기도 하는 '몰락하는 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론 4장에 나오는 말이다.(4장에는 하여간 멋진 아포리아들이 많다. 니체가 다그렇긴 하지만)  나는 -추측이긴 하지만-이 말이 후기에 나오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함께 현재 로쟈의 인간에 대한,학문에 대한,인식에 대한 어떤 자세를 읽게 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바 ( '-는 바' 는 내가 단 한 번도 쓴적이 없는 어투이고, 로쟈는 틈틈이 쓰고 있는 어투여서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그대로 인용한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p 222. 

사람도 두 다리가 있으니 교량일테지만 '왜 몰락하는자'여야하는 지는 각자 생각해 보면 되겠다. 로쟈는 '어깨 결림'이란 말로 또 '닭'이라는 말로 이야기한다.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것. <로쟈의 인문학서재>p20- 이성복,<세상과의 연애>재인용 

 내 조촐한 생각에 '눈 뜬 자들의 근대적 계몽의 오만'은 다시 찾을 때 찾더라도 잠시 잊어주어야 '몰락'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하얀 세상'을 만든 것을 나는 다분히 지젝의 실재계로 받아들였다. 그곳은 경계가 없는 백색의 허구이다. 진실은 그렇게 하얀 것일 지도 모른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더 많이 걸려 넘어졌다는 리어왕의 독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그리고 이런 개념을 '야만으로 가자는 말인가?'..그렇다 알레고리로 '야만인을 위하여' 이기도 하다만- 계몽으로 굳어진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두어도 좋다. 

로쟈는 하이데거의 '현존재'라는 유명한 개념을 비틀어, 문학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 그러게 '널브러져 있음'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구,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느냐구?' 라는 질문에 -나는 반어적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이해했는데- '그래도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인다.' 라고 말한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신이 없어도 안죽는다.' '희망적이지 않다고 절망한 것은 아니다.' '이데아적 목표가 없어도 우리는 헤쳐나갈 수 있다.' 이른바 '틈'이다. 경계이다. 그곳에서 해방의 싹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목표달성-과업수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해봄직하다. 우리의 철학적 실천이란 것이 '목표달성-과업수행'의 직선적 세계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말이다.   


내가 크게 박장대소한 표현은'자명종-벤야민'에 대한 이야기에서이다. 먼저 로쟈는 벤야민의 '충격'개념을 이야기한다. '충격'은 벤야민에 대한 브레히트의 영향력일 것으로 보는게 지배적인 듯 하다. 벤야민은 '충격을 위한''깨어남'을 위한 자명종이 되길 바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는 현실의 강적이 있었다. 바로 히틀러다. (벤야민의 육신은 결국 히틀러의 산을 넘지 못한다.)현실은  벤야민의 기술 문명에 대한 혁명적, 긍정적 해석에 반하여 일어난다. 괴링과 히틀러 역시 대중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당시 '독일이여 깨어나라!' 가 나치즘의 슬로건이었는데 벤야민의 '예술의 정치화' 대신 '정치의 미학화'가 지배적인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로쟈는 여기서 벤야민-히틀러의 대립을 '자명종-벤야민'과 '확성기-히틀러'로 표현한다. 간단한 표현이지만 함축성이 크다. 실제 역사적 파괴력을 보더라도 적확하다. 대중은 시계종소리보다 확성기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이후 많은 학자들을 먹여살렸다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에는 문학,예술,철학,번역 비평등이 소개된다. 각각의 글들을 통해 해박한 지식과 자기해석을 거친 설명들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 앞서 말한 유머러스함은 서비스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로쟈의 글쓰기의 범주와 스타일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일게다. 난이도에 대해서는 알아서 판단을 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 '대학 신입생에게 추천하는 책 '이라는 어떤 신문의 서평 기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대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학생들의 수준이 내가 졸업한 후 꽤나 높아졌는지-오래전이니 가능성도 있겠다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 이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상적 궤적들이 이 책에는 줄줄줄 흘러나온다.(왼쪽부터 쓰기를 기본으로 사진순서를 이해하면 '지젝에서 시작해서 라캉'으로 끝난다. ^^ ) 특히 로쟈는 '지젝'에 대하야 아애 한 챕터를 할애했다. 주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지젝이 만난 레닌>,<이라크> 등을 1차 텍스트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지젝이 기대고 있는 몇몇 라캉의 개념들과-로쟈는 이를 비유를 통해 비교적 쉽게 말하긴 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정치,사회,철학적 베이스가 없으면 '딴나라'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 도 있다. (미용사의 판타지를 위해서도 우리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알아야된다.)  

 로쟈는 책의 시작에서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라며 '인문학으로의 초대'로 살짝 유혹하지만 실제 '인문학'은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경험축적'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바둑에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바둑을 둔다고 모두 이창호나 이세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대신 바둑의 포석을 알고,싸움의 기술을 알고,묘수풀이를 '아하'하면서 신통방통해 할 수 있어야 '바둑TV'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내게 '바둑TV'는 그저 컬러로 방송되는 '흑백TV'이다.) 인문학도 부산말로 '내나 마찬가지다.' 고로 초대는 달콤하지만 초대 이후는 산행길이 될 수도 있다. 쉽지 않은 길이다. 제대로 학문하는 사람들은 알피스트가 되어야 한다. 장비를 갖추고 전문적 훈련을 받고 정상의 쾌락을 위해,또는 밥벌이를 위해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을 참고 간다. 대개 그들은 말이 좋아 전문인이지 비정규직 생활을 오래 해야한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만이 '산'을 느끼고 아는 것은 아니다. '낮은 산이 좋다'는 말처럼 조금의 인내와 피로를 즐거움으로 여기며 산을 완상한다면 이것도 즐거움이고 깨달음이 돨 수 있다. 그리고 그 숲 어디에선가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이 가져다 주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우리 세계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고 또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면 도전해 볼만한 산행이 아닌가.^^ 그런면에서 로쟈는 분명 젊은 프로 산악인이지만 또한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주말 등산가이드이기도 한셈이다.

지금까지 곁다리 인문학자의 책을 즐겁게 읽은 곁다리 독자의 리뷰였다.  

P.S) 아..격납고 주변인의 요망사항은...로쟈님이 이 책으로 돈방석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것. 열쇠는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이 쥐고 있다. 부디 이명박 장로가 눈길 한번주시길. 월스트리트도 좋아한다는 마르크스도 아닌 레닌이 여기에도 있는데 왜 여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가 권력의 분산된 전체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작용지점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질 들뢰즈-

'파쇼' 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파스케스'이다. 이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맨 앞에 세우던 나뭇가지에 둘러 싸인 도끼를 말한다. 20세기 초에 이 말은 세계적인 비극을 몰고 오는 정치 혁명의 대명사가 된다. 우리가 '파쇼'라는 말을 생각하면 몇 몇 얼굴이나 몇 몇 장면들이 자동연상된다. 무솔리니, 프랑코, 히틀러,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하겐크로이츠, 홀로코스트...등등하지만 이런 고정화된 몇 가지 이미지들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인상으로 한정 짓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또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단절론'과 '의도주의'이다. 쉽게 말하자면 20세기 초에 발생한 유럽발 비극은 유럽 역사에서 비정상적이고 부정되어야할 독특한 기억이라는 점이고 이것의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망상적인 의도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의롭고 편리한 발상이란 말인가?)  

<파시즘>의 작가 로버트 팩스턴은 20세기 초반 유럽발 정치혁명으로서의 '파시즘'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역사적 파시즘 연구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 유럽 각 국가에서 발생했던 파시스트운동의 여러가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독일,이탈리아 뿐 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파시즘 운동은 발생했다. 팩스턴은 이런 파시즘 운동의 역사적 보편성을 부각하면서 이것이 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운동의 단계를 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고찰한다. 즉 '파시즘의 조건'과 실제 '유의미한 파시즘 정치실험'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남발되는 '일상적파시즘'이나 '연성파시즘'논리에 한가지 대답이 될 수도 있다.  팩스턴의 <파시즘>에서 파시즘 정권이 추구한 것이 '대안적 근대성'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60년대 이후 파시즘 연구에서는 '근대성'의 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메이슨은 '나치즘 속에 작동하고 있는 합리적 동력, 근대적 힘'에 대한 부분을 말한다. 즉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파시즘 문제를 접근한다면 파시즘의 권위주의적 독재문제 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을 횡으로 가르고 있는 근대화론의 문제 역시 중층적으로 다루어져여 한다는 입장이다.  

  팩스턴의 <파시즘>이 역사적 파시즘론에 비중을 두고 비교파시즘론을 통해 실체적인 파시즘의 현상에 주목한다면 포이케르트의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독일의 나치시대에 집중한다. 시각은 더 미시적이다. 포이케르트가 들고 있는 돋보기의 소실점이 모이고 있는 지점은 '나치 시대의 경험'이다. 

일상사는 나치 체제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3제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당한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나치의 도전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포이케르트의 <나치시대의 일상사>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나치 체제를 조망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결코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상사가 '새로운 영역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우선 포이케르트는 "나치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는 '바이마르 체제' 였다. 대중들은 패전 이후 '바아마르 체제'가 가져다 준 조합주의적 혼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방향감 상실, 대공황의 여파등으로 퇴행적인 정상성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대중들의 불만은 '더 이상 안된다'는 식의 일상적 합의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여기서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여 점짐적으로 그런 불만들을 자기 영역으로 포함해 낸다. 히틀러는 '모든 악은 바이마르 체제다' 라는 식으로 복잡한 사회관계망을 정리해 버린다. 여기서 나치즘에 대한 중요한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나치즘은 어떤 일관된 정치적 목표와 정강이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당이 일관된 정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역시 변화무쌍한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유혹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데클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나치당은 유권자의 직종에 따라 맞춤형 구애 작전을 실시한 독일의 첫 정당이었으며, 그 공약들 사이에 모순이 있건 없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이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일상사를 중심으로 하지만 결코 거대서사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가 '일상사'를 '새로운 전망'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는 역사적 연속성의 틀 속에서 나치즘을 배치시키는데, 즉 나치즘을 유럽 근대화의 정상적 과정 속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라고 평한다. 그는 나치제도의 특성으로 '운동으로서의 존재론적 특성','근대화의 힘','다극체제',' 철저한 계서제',' 인종주의','대외적 성공'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60년대 이후 파시즘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능주의론적 해석,즉 근대화론의 연속성의 도상 위에 포이케르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의 나치와 절연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서독 역시 '나치의 근대화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나치를 움직였던 근대화의 동력이연속적인 횡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가지 -앞으로 이야기할 '저항'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점은 나치가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나치의 정권 운영방식은 다극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공약의 남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나치권력 내부에 존재하는 기관사이에는 서로 다른 이해와 힘의 관계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했다. 로버트 팩스턴의 말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파시즘 정당들이 써먹었떤 고안물 하나는-권력을 장악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도 사용한 방법니다- '동형기구'(parallel structures)였다. -로버트 팩스턴,<파시즘>  

이것은 유명한 파시즘 연구가인 프랭켈의 '이중국가'로 표현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프랭켈은 히틀러 정권때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라는 '표준국가'와  당의 '동형기구'로 구성된 '특권국가'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런 권력들 사이의 갈등은 '저항'의 공간으로 이용된다는 것이 포이케르트의 주장이다.

포이케르트의 관심은 이제 '저항'의 문제로 넘어간다. '저항'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더 자주 언급되는 것은 '순응'이다. "도대체 왜 독일의 중간계급, 또는 두터운 노동 계급마저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것인가? "  나치의 비합리적 프로파간다에 속았기때문인가? 국가주의의 망령때문인가? 그저 정권의 폭력에 동의하는 척 한 것 뿐인가?  대중의 '순응'의 매커니즘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고 나치시대를 그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그 대답 역시 어물전의 생선만큼이나 다양하며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다. 한가지 피해야할 답은 -물론 이것 역시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계몽주의적 태도이다. 바흐식 표현으로 하자면 "눈뜨라 부르는 소리있어."쯤 될 것같다. 심봉사 눈 뜨듯 확 눈을 뜨면 -마치 브나로드운동의 지사같은- 그런 불행한 역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적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런 모든 사람이 눈을 뜨는 유포티아는 벌어지지 않는다. 대개 운동가들은 그런 지사적 존재로 현장을 찾았다가 이미 인민들이 눈을 뜨고 있는 존재였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경험적으로 허다하다. 모택동은 역설적이게도 하방운동이라는 방식으로 그 역을 강제한다.  

포이케르트는  '일상의 순응'이 총체적이고 전일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푸코의 명제처럼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라는 것을 나치에게 가장 탄압받던 노동계급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기획의 주목대상인 청소년층의 저항을 통해 보여준다. . 즉 대중들이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저자는 그 저항은 '조직화',내지는'전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작은 저항들'은 있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소극적 저항' 내지는 '묵인'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포이케르트는 거대한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일상의 저항은 '소극적' 형태나 '은유적' 형태를 띨 수 밖에 없었음을 비교적 긍정한다. 특히 저자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한 도전을 흥미롭게 제기한다. 거의 준강제적인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해 일찌감치 어린노동자가된 청소년들이 만든 '에델바이스단'이 그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안티집단'인데 그것이 단지 불평불만의 수준을 넘어 에델바이스단에 대한 사적 폭력으로 까지 이어진다. '에델바이스단'이 비교적 중하층계급의 청소년 하위문화 수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좀 더 상류층 청소년 그룹은 '스윙재즈'에 몰입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머리이자 입이었던 괴링은 최기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이벤트들을 만든다. 대중들은 신격화된 인물과 정치쇼 속에 자신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투사하고 동일화의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데괴링은 그것이 대중들에게 효과가 있으나 일시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중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의 스펙터클은 지속적으로 동일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괴링은 대신 일상적으로 제공하는 여흥을 대중기만의 술책으로 이용한다. 특히 당시는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의 도약기였고 괴링은 이런 특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당시 대중매체들은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정서적 파탄을 위무하는 작업들에 들어간다.쉽게 말하면 3S 정책과 동일한 맥락이다. 문제는 그 여흥의 제공은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것,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이다.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제3제국의 여흥은 목적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 일탈하는 문화적 행위는 도발이된다. 청소년층이 열광한 '스윙재즈'는 그런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자유분방한 성, 비권위적 방식, 목적성없는 삶 등을 지향했다. 나치는 이런 도덕적 일탈을 악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보기에 스윙재즈는 흑인들의 저속한 문화이고 빈둥거리는 쓰레기들의 음악이었다. 포이케르트는 스윙재즈를 즐기며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중상류층 청소년들이 정치적을 '반파쇼'그룹은 아니라고 명확히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비정치적' 문화행위는 지배계급의 패권적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고 하위 체제 전체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기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정치적 문화행위가 광범위한 저항행위인지 아니면 결국 체제 포섭적인지의 문제는 하위문화 논쟁에서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걸 조금 더 알고 싶다면 문화연구쪽- 특히 하위문화연구쪽-을 살펴보면 좋다.) 에릭 홉스봄같은 좌파 재즈매니아는 저서<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에서 재즈 역사에 좌파세력들이 관여했고 또 재즈가 좌파공간을 확보해주었다는 점을 말한다.    

<나치새대의 일상사>의 결론에서 저자는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요약한다. (밑줄 그어야할 중요한 지점은 '근대' 이다. '근대'는 해방의 역사이자 또 억압의 역사라는 점.) 저자는 나치의 '인종주의'과 관련된 근대성을 논의하는 과정에 푸코의 '배제','훈육','규율' 그리고 '권력-지식'의 문제를 큰 틀로 상정하고 논의한다. 포이케르트가 '근대적 병리사'로 바라본 나치의 몇 가지 특성 중 그의 견해를 축약하는 문장들은 이렇다. 

제3제국을 관통하고 있던 격심한 사회적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가 설정한 전선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파쇼 운돈이 희망하던 주전선, 즉 "지배와 사회", 나치와 인민 사이의 전선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전선들은....근대적인 산업적 계급사회의 장기적인 발전 경향이 관철되고 있었다. 

나치즘은 전쟁을 통해 근대적 기술의 파괴적 힘을 보여주었고,일상생활에서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경원하는 원자화된 생활방식의 사회,사회적 통합이 관료제적인 절차와 포섭 그리고 대중소비의 공허한 자극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침울한 전망을 현시했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그의 일상사 분석과 접목시킨 '근대'의 문제가 '근대=야만'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파쇼의 도전은 근대의 발전사가 자유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자유란 언제나 새로인 그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천에서 싸우는 것일 터이다. -<나치 시대의 일상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49살의 나이로 애석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1987년에 썻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는 전편이 될 것이다.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좋은 책이다. 이런 책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이라는 저자의 말이 울림을 갖는것이다. '나치=히틀러, 대중독재=악' 으로 포켓 사이즈로 정리하고 행동하는 삶은 얼마나 편리하게 명료하며 아름다울만큼 빈약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