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일반판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리나 레안데르손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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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페이퍼에 쓴 것들을 옮깁니다. 

눈은 침묵이다.

눈 오는 날은 그래서 아름답다. 세상이 동양화의 마지막 여백처럼 남아 있는 날은 읽던 책을 뒤로 물리고 눈이 완성하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내가 '차가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잘 얼린 네모난 얼음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햇빛을 머금은 민들레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아폴론의 미'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하다.  '차가움'은 일단 '단순함'을 준다. 우리가 가끔 모든 로코코적 수식을 걷어낸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정말 세련된 디자인들은 선을 줄인다. 눈은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선을 단 몇 개의 줄로 환원시킨다. 본질을 향한 질주같은 그런 선들은 아름답다. 우리는 눈이 지워지면 다시금 세상의 선들을 만나겠지만, 삶의 어떤 순간 순간에는 그런 선들을 생각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북극'을 사랑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갇혔다는 것은 침묵에 갇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폭설로 공항에 묶였던 날이 생각난다. 공항 대합실의 소란과 대비하여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은 조용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날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들이 흡음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끊겨버린 비행기에 대한 마음은 놓고 나니 하루를 거저 얻은- 남은 일이야 알아서 되라지 뭐-자의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디로 갈야할 지 결정하기 위해 나 앉은 공항 벤치에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눈이 건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다른 지역에 눈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어느 북구의 겨울과 그 침묵을 만나러 갔다.

영화 <렛 미 인>(여기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아서들 보시오. 그것까지 배려하면서 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구리구리한 요구요.)



영화 속의 스웨덴은 계속 눈에 덮여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눈이 펄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웨덴의 겨울풍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다. 하지만 결코 공포물은 아니다. 영화는 '성장영화' 이고 '사랑'의 영화이며 '봉합'(?)의 영화다. 왕따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가 주인공이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의 금발과 햇빛이 부족한 피부빛은 스웨덴의 겨울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칼로 나무에 분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를 만난다. 그녀는 '맞받아 치라'고 오스칼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한다.('소통'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마치 이 말이 이제는 '혁명'의 모든 조건인양 쓰이는 경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가나 '소통' '소통' '소통'이다.  남발하는 '소통'의 만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서로 '외롭다'는 조건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기존 공포물의 뱀파이어와는 다른 동화적 구현의 '렛 미 인' 에서 첫 번째 깜찍한 전환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그렇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이다. 나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 장승이나 솟대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뱀파이어'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구의 감독은 '외로운'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에 '왕따' 소년의 '외로움'에 침입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으면 - 스토리라인에 온 신경만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뱀파이어 이엘리는 오스칼의 '얼터에고'인 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엘리의 존재를 알게된 오스칼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엘리는 '나는 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오스칼의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내는 얼터에고로서의 이엘리를 감독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식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야' 오스칼의 망상이야라고 스토리를 따라간다면 관객의 상상력 협착증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중요한 장치가 스웨덴의 눈오는 풍경이다. 오스칼의 내면처럼 그곳은 눈으로 흡음된 침묵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상징계의 상징이 언어라면 상징계를 거세하는 표상은 침묵이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오스칼을 창 안에 있는 아이로 설정한다. 창 밖과 창 안이 모두 눈 속에 있는 셈이다. 북구의 겨울은 어둠과 묵음으로 이에 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무채색이며 이유없는 뱀파이어의 희생양이다. 감독은 여기서 음향효과를 이용한다. 어른들의 장면에는 몇 가지 시끄러운 일상의 소란을 설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는 단순한 기타멜로디로  덮어버린다. 단절이며 거세다. 동성애적 코드가 보이는 오스칼 아버지와 친구의 대화장면은 오스칼이 이런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된 존재임을, 즉 거세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없다.(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올려보자.)

오스칼은 눈오는 밤이 세계와의 소통의 단절을 말하듯이 오스칼 역시 언어들도 부터 단절된다. 상징적 질서와의 단절이다. 그는 '외로움'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성장통이지만 감독은 파괴나 일탈 같은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극단적인 폭발을 내재한 이 성장의 아픔은 결국 '뱀파이어'의 흡혈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흡집을 내기 시작한다.(하지만 상징의 질서는 힘이 세다.) 

이 영화 초반에 이엘리를 돕는 아버지 또는 애인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그는 이엘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흡혈을 하지 않도로 살인을 통해 이엘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는 유일한 제도적 안전 장치가 되는 셈이다. 뱀파이어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실패했을 때, 뱀파이어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잔인한 방식의 사랑의 완성이다.( 다분히 잔인한 것은 성장할 오스칼이 곧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는 마지막 암시 같은 것 때문이다.) 





영화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가방에 넣어서 어른들의 세계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결국 어른들의 언어는 그들을 침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오스칼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적인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런면에서 현실적이다.) 결국 오스칼은 언젠가 자신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인정함으로서만 그 여행을 마감할 수 있다. 오스칼의 셈세함은 그 선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는 이미 우리다. 우리들 역시 오스칼같은 봉합의 기억이 있었을지 모른다. 상징계로 통합되기 위해서 우리는 일정 정도 뱀파이어야하고 또 그런 기억조차 잊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런 태고의 섬세한 기억을 잃고 뱀파이어를 완전시 소거해 버린 순혈적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나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뱀파이어를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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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명창 임방울 - 고독한 광대의 생애 이상의 도서관 20
천이두 지음 / 한길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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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궁시렁 궁시렁"쑤욱..대에...머리" 를 흥얼거리니 모두 <개그 콘서트>에 나온거라고 폴짝 거린다. 그 프로그램은 예전에 서너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당최 재미가 없어서 이후 절연하고 있다. 그런 반응을 보고 개그 소재로 "쑥대머리"를 이용했었나 보다하고 추측했다.  쑥대머리는 개콘, 개콘 은 쑥대머리...더질더질. 짖궃게도 질문을 하나 던진다. "쑥대머리가 무슨 뜻인지?"..조금 전까지 총기어렸던 눈빛과 전광석화같던 추임새는 백열등 전구 터지듯 펑하고 사라진다. 교실 앞에 나가 수학 문제를 풀라는 것도 아닌데 다들 머뭇 머뭇 멀뚱 멀뚱.. 천장에 만원짜리 붙었는가. 그래도 다행히 '쑥대머리' 가 판소리인 줄은 안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하니 또 저 멀리 잔별도 많은 하늘에 오늘은 오버로드가 떳나보다. 오버로드 정찰 보낸 질문은 이거다. '쑥대머리는 판소리 어디 나오는 노래인지?' 
에이..때는 바야흐로 "오버로드 정찰 갔다 돌아온다 황급히 들어와서 정확히 두 시 방향 프로토스 발견했소" 하는 시대이니(한 때 유명했던 또랑광대의 판소리 스타크 사설이다.) 뉘를 탓하랴. 마침 2시 방향에서 저그들이 러쉬하니 지상병력을 모으러 다들 흩어진다. 더질더질

우리 시대의 판소리의 위상이 그렇다. 이건 현실이다. '우리 소리를 무시하지 마라.' 라고 각성의 소리를 외치는 것은 기실 아무 소용도 없다. 차라리 맥도날드가서 파전을 주시오라고 외치는게 더 빠를 지도 모른다. 결국 이건 계몽적 의지로 응혈되어 남아 도는 피를 쏟는-차라리 헌혈을 해라-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 좋은 것을 몰라주는게 서럽다는 투정은 10대 후반쯤에 종료해야 한다. 예술에서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그렇다. 간혹 통속적인 예술 매니아,정치 애호가(?) 중에는 "진정을 몰라주는 대중"에 대한 원망을 여기 저기 섞곤한다. 그런 말을 오래 듣고 있다보면 진짜 지겹다.  한다는 소리를 단적으로 정리하면 '이 좋은 걸 몰라주는..',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수준의..' 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푸념을 통해서 낮추는 건 '대중'이요 높이는 건 '자기'임을 자신은 모른다. 여기에는 은근한 엘리트 의식-각성된 자의-이 숨겨져 있다.  

  판소리 대목중 '쑥대머리'는 일제시대 명창 임방울의 트레이드 마크다. '쑥대머리는 개콘이 아니라 임방울'의 전매특허다. (판소리 용어로 '더늠'이라고 하면 될 성 싶다)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漢陽郞君) 보고지고.
오리정(五里亭) 정별후(情別後)로 일장서(一張書)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 글공부에 저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춘향가>의 옥장한탄 장면에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은 따로 떼어 부르기도 하지만 완창 <춘향가>에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다른 더늠을 넣는 넣는 것인데 그것은 판소리 창자의 특권이다. (<쑥대머리>의 내용분석은 정양 시인 <판소리 더늠의 시학>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하여간 임방울은 이 곡 하나로 1930년대 일약 판소리계의 스타가 되었다. 당대 SP음반사들이 서로 임방울을 불러서 녹음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천이두 선생의 책 <천하명창 임방울>에는 '쑥대머리' 녹음이 3번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최근 자료를 보면 총 4회 각기 다른 레이블에서 녹음한 걸로 나온다. 판소리의 고음반자료들과 명창들의 흔적들이 재발굴되면서 이런 자료들은 수정되기 때문에 그리 흠잡을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임방울 선생과 사연 깊은 곡이 지난해 한 번 크게 울린적이 있다고 한다.(나는 현장에 가보지는 못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때 안숙선 명창이 임방울 작사 작곡의 <추억>을 불렀다는 것이다. <추억>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임방울의 여성 편력과 그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음악적 표현력을 이야기할 때 꼭 언급되는 내용이다. 기생 산호주의 죽음을 애통하는 일종의 단가이다. 산호주는 임방울 선생의 소리에 반한 기생이다. 둘이 눈이 맞아 살다가 어느날 임선생 목소리가 망가진 걸 알고 독공하러 훌쩍 떠나버린다. 산호주는 임방울을 찾으러 가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이후 젊은 나이에 산호주가 죽자 선생이 그녀를 애도하며 만든 곡이다. 가사의 내용이 망자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담고 있으니 추모곡이라 할 말 하다.  

내가 가진 책은 <천하명창 임방울>이다. 저자는 동일인이고 책의 소제목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천이두 선생은 이 책에서 임방울 선생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이브라이드한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스스로도 일종의 에세이라고 칭하는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주가 되는 것은 일종의 평전 형식이다. 임방울 선생의 지인들로 부터 들은 이야기와 전설같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한 편 한 편씩 소설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책의 첫 대목에 임방울의 국장과 광주 각설이들의 조문이야기도 일련의 에피소드에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서술한 대목이다. 그 외에도 공창식 명창으로 추정되는 스승으로부터의 수련 과정, 칼칼한 스승 유성준 명창으로부터의 배움과정 등은 모든 소설 형식으로 꾸려진다. <전설의 명창 임방울>을 알라딘의 미리보기로 읽어 보니 첫 장면에서 소설적 부분이 좀 더 보강된 듯하다. <천하명창 임방울>에 실린 에세이류의 글들이 <전설의 명창 임방울>에도 실려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어쨋든 내가 가진 책에는 소설류의 글 다음에는 판소리 에세이라고 할 만한 글들이 주로 실린다. 중심에는 임방울 선생의 소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판소리 특성이나 전승과 관련된 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그런 면에서 천이두 선생이 소설과 에세이를 결합한 방식은 임방울 선생의 일대기를 따라가면서 판소리를 둘러싼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임방울 선생이 동편의 소리와 서편의 소리를 동시에 배워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법을 만들어 낸 것을 저자는 높이 평가한다. 이런 장면에서 동편과 서편의 전승계보 그리고 또 고제 판소리와 신제 판소리의 차이등을 송만갑,정정렬 명창들이 에피소드를 통해 비교한다. 또한 당대의 라이벌이라고 할 말한 명창 김연수와의 대립구도를 통해 임방울의 장단점을 엿볼 수 있게도 한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김연수는 아폴론적이고 임방울은 디오니소스적이다. 김연수는 판소리 오마당을 정리하여 자신만의 동초제를 만든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한다. 판소리의 현대화라고 할 만한-저자는 좀 부정적이지만-창극 운동에서도 정정렬 명창의 뒤를 잇는다. 임방울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다. 창극을 싫어했고, 제자를 남기지도 못했다. 소리만큼은 당대 최고였지만 김연수처럼 완벽한 발음을 전달하지도 못한다. 김연수 명창의 음반을 들을때 무언가 명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발음에 대한 강조때문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이면론에 기인하기도 한다. 하여간 이 둘은 여러모로 달랐으나 판소리계에서 각각 존경을 받을 위업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임방울 명창의 소리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요즘들어 봐도 임방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다만 음반취입을 꺼린 그이기에 녹음도 별로 없고 있다한들 음질이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방울의 소리는 다른 명창들이 갖지 못한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다. 명창 강도근 선생은 임방울선생의 청을 '찬물 날아가는 소리'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 비유다. 특유의 청구성에 수리성을 얹은 소리로 당대 대중들의 폐부를 찌른 것이다. 여기에는 임방울이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상황이 있다. 임방울 선생의 따님이 했다는 말에 핵심이 있다. 요약하자면 '선배들이 누린 통정이니 대부니 하는 이름도, 정부의 비호 아래 겨우 숨이라도 쉴수 있게된 인간문화재라는 칭호도 얻지 못한 가객' 이라는 것이다. 임방울 명창은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한국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비극 시대를 민중과 함께 겪어온 사람이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청중이란 것은 선배들처럼 '양반들'도 아니었고,또 후배들처럼 '정부'나 '일부 애호가들'도 아니었다. 전근대와 근대의 이행기 속에서 그는 망국의 한을 가진 민중들을 토대로 그들과 함께 울고 노래할 수 밖에 없었다. 판소리 사회사에서는  이 시대와 관련하여 '판소리 계면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아무래도 앞서 말한 역사적 한이 청중들의 기호와 소리에 반영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임방울이 큰 몫을 차지했다는 것도 그릇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천이두 선생은 그것을 '민중성'과의 결합이라는 판소리 본연의 정신과 연결시킨다. 또한 임방울의 소리는 통속적 계면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면의 예술성을 극대화시켜 판소리에서 저어하는 노랑목의 위험성을 건너고 있다고 말한다.     

 거친 시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간 명창 임방울.  엉뚱한 상상을 한다. 온갖 부귀와 미녀들이 있는 옥황상제의 궁전 '광한천허부'에서 탈출하려고 눈을 쫑끗 뜨고 있는 임방울 말이다. 그의 소리를 사랑한 옥황상제가 그를 계속 옆에 두려고 하고, 그는 자기 소리를 사랑하는 민초들과 여염집의 자유로움으로 달아나려 실강이하고...더질더질

** 내가 리뷰를 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문학에서 나온 천이두의 <천하명창 임방울>이다.그러나 현재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전설의 명창,임방울>이며 앞선 책의 개정,증보판 인 듯 하다.

**임방울 명창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www.imbang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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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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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역사의 반복 문제를 말하며,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 도상학에 나오는 이 거대한 뱀은 영원 회귀, 또는 생의 반복, 불교적으로 말하면 육도윤회를 상징한다. 끝없이 순환하는 세계가 자기 꼬리를 무는 원형의 뱀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와 반복>에서 이 우로보스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반복'에 대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구조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지 개개의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은 매번 차이를 발생시키는 일회적인 것이다. 또한 이런 반복은 사후적 파악이 가능한 것이지 의식적으로 실현할 수도 없는 것이란 점을 고진은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가라타니 고진의 '반복'은 거시적으로 월러스틴의 '체계론적'  순환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그는  60년 경제 변동을 뜻하는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따라 세계사 의미를 도표화한다.(월러스틴의 세계체계론을 알고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1810



1810-1870



1870-1930



1930-1990



1990-



세계자본주의



중상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국가



(제국주의적)



영국



(제국주의적)



아메리카



(제국주의적)



자본



상인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국가독점자본



다국적자본



세계상품



모직물



섬유공업



중공업



내구소비재



정보



국가



절대주의



네이션스테이트



제국주의



복지국가



지역주의


.


 예를 들어 그는 현재 시점을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즉 '제국주의적' 시대로 이해한다. 마지막 헤게모니인 미국은 흔들렸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의 시대 인식 방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고진은 되묻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0년대의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는 1870년대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본론에서 고진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다시금 읽는다. 이 책은 그에게 <자본론>의 쌍생아이다. 물론 다른 이면을 다루고 있는. 그는 <자본론>과 <브뤼메르18일>이 대칭적으로 '반복강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론>은 알다시피 자본축적 운동이 자기증식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고진은 이를 자본의 '반복성'으로 읽는다. 자기증식하며 차이를 만들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만 <브뤼메르18일>에서 그가 찾아내고 있는 강박은 무엇일까? 이게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톨킨식의 '왕의 귀환'이다. 지젝이 말한 것처럼 '제대로 묻히지 못한' 왕이 햄릿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럼 제대로 묻힌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두 번 묻히는 방식, 즉 반복적 매장 만이 역사 현상학적으로 가능했다.

   언젠가 어떤 분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뿌리없음을 말하며 그 이유 중 '왕을 목메달지 못한 나라'라는-1789년 프랑스 혁명을 상정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역사적 단죄의 중요성을 말하고자하는 바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얼핏 맞는 듯 하지만 역사적으로 늘 상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루이16세를 목메단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왕을 죽였는데도 말이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나폴레옹 제국이다. 그리고 이를 반복하고 있는 1848년 혁명은  이 책의 주요 주제인 보나파르티슴으로 귀결되고 만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에서 이런 반복 가능한 시스템을 '표상의 문제'에서 읽어낸다. 즉 반복강박이 만들어지는것은 억압 자체때문이 아니라 그 표상 시스템 자체가 가진 '구멍'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실재계의 구멍을 메우려는 대상 a 같은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 국가를 쓰러뜨리고 출현한 부르주아 국가는 마치 전자와 무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실제로는 위이게 그것이 죽인 왕을 다시 소환화게 된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고진은 보나파르티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답인, 엥겔스의 답변을 보완한다. 보나파르티슴에 대해 낯선 이들을 위해 먼저 이 대목을 정리해 보자. 엥겔스는 이 독특한 현상을 두고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균형상태에서 어느 한 쪽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자립성을 띤 국가권력'이라고 말했다. 고진의 문제제기는 이렇게만 보나파르티슴을 이해하게 되면 절대적 왕권 하에서의 균형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왕권의 균형은 계급적 균형이 아니라 '봉건세력과 브루주아의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어떻게 계급적 균형이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고진은 엥겔스의 보나파르티즘을 보완하면서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 한다. <브뤼메르18일>의 표상 문제와 관련된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보통선거와 대의제'의 것이다.  대의제는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사이에 자의성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계층들-마르크스는 농민을 지목했다. 마르크스에게 혁명 주체는 계급적으로 집산된 산업노동자였다-은 '대의제'의 자의성으로 인해 보나파르트를 지지할 수 있게된 것이다. 고진은 히틀러 역시 대표적인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보면서 그가 총통이 된 것에 국민투표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앞서 말했듯이 '왕'을 죽인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왕을 죽인 그 시스템 안에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추대한 반복적 강박의 구명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의제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고진은 '반복의 표상'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가 보기에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을 일종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런 반복 자체가 더 멀리 있는 역사의 재현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다. 1789년 혁명에서 왕을 죽이고 나폴레옹이 나온 것을 '시저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반복적인 제국의 형성의 고투는 '국민국가외 정복 정책의 내적 모순'에 부딪힌다. 결국 나폴레옹시기에 각국은 내셔널리즘과 독립운동에 열을 올리게 되고 결국 '네이션=스테이트'의 연장으로 제국주의 모순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유럽의 제국주의는 또 세계에 더 많은 네이션=스테이트를 반복하게 된다. 고진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것이 이런 '제국'의 반복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견한다. 이제 반복의 구조는 세계자본주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보나파르트의 '모든 이해를 해소하려는' 절충주의적 방식은 결국 당대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경제'의 대립을 불러온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의미의 '제국과 국민국가' 모순의 재연이다. 현재 글로벌경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후진국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인데 이것은 네이션=스테이트를 희미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이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의 분석을 토대로 이제 일본자본주의의 반복 강박을 살펴본다. <브뤼메르18일>의 일본판 응용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면 조금 더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과문하다보니 구체적 사안보다는 일반론적 흐름으로 이해하며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한일관계의 특성상 거론되는 인물 중에 이름이 낯익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고진은 여기서 '천황제 파시즘'의 문제를 파시즘의 '동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보나파르티슴의 다른 표현 양태로 설명한다.  1925년 보통선거의 도입으로 메이지 시대 부활한 '천황'은 의미론적으로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이후 '쇼와 유신'에서 천황은 다시 부활한다. 죽은 왕이 다시 귀환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25년 보통선거제의 도입과 함께 2.26 쿠테타의 실패가 한 몫을 했다. 청년장교들의 쿠테타는 실패하고 군부통제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그리고 이 군부를 비롯해서 의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이미지와 영향력을 가진 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가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다.(우리와는 별로 안좋은 인연의 인물이다.) 그는 황실 귀족이었고, 군부에 영향력도 있었다. 그런고로 군부를 견제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고노에 내각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아지만 2.26쿠테타 당시 기타 잇키같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평등론을-토재분배, 재벌억압같은- 추진한다. 고진은 고노를 보나파르티즘에 가장 어울리는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럼 그는 왜 히틀러가 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를 천황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일본 우익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진은 역설적이게 일본 파시즘을 방해한 것이 천황이라고 말한다.(현재 만연하는 파시즘에 대한 기표적 소비로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 천황은 일본 파시즘 자체이기때문이다.) 

 여기서 고진은 뒤에도 이어가게 될 일본 담론 공간을 구분하는 주요 방법론을 제기한다. 이는 전쟁 중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온 '일본 근대의 초극'이라는 논쟁을 재독하는 것이다.  크게 일본의 근대담론의 공간은 두가지 모순은  '국권/민권' 그리고 '아시아/서양' 사이에서 형성된다.  복고와 유신,존왕과 양이,쇄국과 개국,동양과 서양...이런 것들이 기본축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스스로 서양 세력에 맞서 아시아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한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로 귀결되고 말지만 최소한 담론영역에서는 '아시아적'이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은 그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자 또 서양에 대한 아시아의 해방전쟁이 되는 셈이다. 물론 고진은 이것을 이렇게 해부하려는 시도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하여간 일본의 '근대초극'의 문제는 메이지와 다이쇼..그리고 쇼와를 거치며 반복되는 과제로 고진은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성 문제와 아울러 일본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지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문학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사상가 고진과 비평가 고진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국권





2 제국주의







1 부르주아국가







3 아시아주의







4 민주주의(사회주의)





                             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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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고진이 보기에 오에 겐자부로야 말로 일본적 근대문학의 성취로 보는 듯 하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오에는 동시대의 미시마 유키오와 내적으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다. 이 둘은 서로 비판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근대의 쌍생아였다. 반면 고진은 80년대의 하루키를 등장시키면서 오에와 하루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말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의미를 오에와 하루키를 통해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진은 구체적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몇 년 전 읽은 최고의 소설이었다.) 과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을 일종의 패러디적인 오독을 하면서까지 대립시킨다. (패러디인지 아닌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고진은 말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은 고진이 분석한 '일본 근대의 초극'에 의거하여 캐릭터를 분석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꼇던 것들 예를 들자면 소설 속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생과 역사의 반복 문제,그리고 자기 소멸을 문제 등에 대한 고진의 분석은 흥미로왔다. 거기에 주인공인 나와 동생의 관계,또는 그가 동일시하는 증조부의 관계를 정치적 근대 모순의 좌표 속에 설정한 시도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어서 내게는 작은 발견과도 같았다. 결국 자기소멸이란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명성 마저 이해되는 듯 했다.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을 1960년대와 쇼와 35년의 정치투쟁에는 바쿠후 이래 일본의 정치적.사상적 역학이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만엔원년의 풋볼>이외에 그 '총체'를 또는 그것이 분열된 '근거지'를 파악하려고 한 작품은 없다. 1960년 6월의 정치행동과 만엔원년의 봉기를 결부지음으로써, 이 작품은 말하자면 1960년과 쇼와 35년이라는 시차에 존재하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은 근대적 담론이 탈근대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의 고유명사는 분별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고진은 오에의 주인공들과 비교해서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일종의 '초월론적 자기'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로 묘사한다. 그는 이것을 '풍경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또다른 초월적인 자기의식이 하루키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근본적인 도착이 있다. 이런 초월적인 자기의식은 상찬도, 패배도 모른다. 고진은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탈근대성에 대해  '고유명을 가진 역사가 초월되는 그곳에서 풍경이 등장한다.'라고 말한다. 고진은 이를 단순한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전도된' 이란 말에 밑줄을 긋고 싶어하는 듯 하다. 그가 하루키의 소설을 독해하는 용어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인데, 이 말은 '모든 것이 장난이며 또 진지하다'를 뜻한다.결국 유의미한 것은 무화하고 무의미한 것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세계. 이것은 결국 나르시즘적인 '자기대화'임에 틀림없다. 고진은 이런 흐름이 이미 근대문학계열 속에 있었음을 주지시키며, 이런 독아론적 세계가 최근 작가들의 기본적이 토대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세계로부터의 도피'내지는 '타자성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는 이제 근대문학에 대한 마지막 장으로 향한다. 여기서 그는 헤겔의 노년 비유를 통해 노년을 받아들인 오에 겐자부로, 노년을 거부한 미시마 유키오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규범의 자기 해체 이전에 규범 스스로 자살해버린 시대의 나카야마 겐지의 이행기적 전후작품을 통해 일본 담론공간의 모습이 재구현되고 또 다시 해소되어가는 예를 보여준다.

<역사와 반복>의 마지막 장은 <불교와 파시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선불교가 성장하게되는 정치적 계기들과 지식인들 중심의 선불교의 세계관이 가진 비행동성 내지는 관념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내 선불교의 성장은 정치권력의 민중적 불교인 정토종계열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일본 불교는 한국 불교와 다르다. 주로 정토종 계열로 알고 있다. 일종의 '타력종교'로 '자력' 해탈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선불교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고진은 선불교가 일본내에서 소수 지식인 중심으로 확산된 이유를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이런 대목은 일본보다 오히려 선불교 중심인 한국에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성 싶다. 기독교에도 종파가 많듯이 불교도 다양한 종파가 있다. 한국에서는 조계종의 선불교 전통이 사실 주류가 아닌가 싶다. 즉 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불교 중에서 선불교적 에피스테메 안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선불교가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 할 지라도 법통상 그런 것이고 일반 불교신자들은 - 순전히 기복신앙부터 시작해서- 훨씬 다층적으로 수용한다. 앞선 글 들에 비해 짧은 분량이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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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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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푸코의 맑스>를 읽다가 고등학교 때 <수학 정석>을 떠올렸다. 뒤편에 실린 문제 풀이 해설서와 내 연습장의 풀이과정이 똑같을 때 느끼는 소소한 쾌감. 물론 이 말은 내가 푸코를 학문적으로 온전히 이해했다는 말도 아니고, 또한 푸코의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여 푸코주의자가 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푸코에 대해 어떤 고원에서 바라 보는지는 다를 수 있다.(나는 최소한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은 해야한다.) 다만 푸코를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내 입질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정도이다. 여타의 증언들이 '푸코'의 입을 통해서 나오니 지나가던 수학 선생님이 '그래 그렇게 하는 거지.'라고 일종의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화록은 재미있다. 물론 그의 주요 저서보다 얇으며 읽기 쉽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제목이야기부터 해보자. <푸코의 맑스>, 국역판 제목이다. 영역판이 <맑스에 대한 언급>이고, 불어판이 <푸코와의 대담>이다. 국역판은 이에 비하면 제목부터 짧고 굵다. 묵직하다. 하지만 실제 책은 얇다. 역자는 국역판 제목을 이렇게 정한 이유를 푸코 자신의 주장을 인용하여 밝힌다. 푸코는 '경험주의적 철학이 맑스주의의 한계와 인간해방적 관점을 새롭게 재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했다. 먼저 책 제목만 보고 너무 머리를 긁적일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맑스주의자 뜨롬바도리와의 인터뷰 내용을 묶은 것이다. 난해한 프랑스 철학 용어가 난무하지 않는다. 푸코는 소파에 앉아서 하는 인터뷰하는 사람인 양 편안한 어투로 자신의 이론적 관심과 변화, 학문적 접근 태도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관계에 대하여 답변한다. 푸코가 '경험-책'으로서 자신의 이론적 작업과 실천을 설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철학-즉 철학적 활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철학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   미셀 푸코, <쾌락의활용> 

 푸코는 '현재 진행형'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어떤 규정된 틀로,또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리우길 거부했으며, 그렇게 될 수 도 없음도 여러 차레 강조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호기심많은 '실험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론가와 달리 실험가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을 추종하는 일군의 '푸코주의자'가 나왔을지라도 이미 그 자리에 '푸코'는 없다.  이런 태도는 인간 푸코로서의 삶과 이론가 푸코로서의 삶이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이란 주제 그리고 그 대상으로 '주체'라는 문제를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들을 마치 길을 가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처럼 해체하고 재전유해 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역사가'요 '현미경을 가진 역사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푸코는의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천착했던 '권력'의 완결된 상을 만들어 세상에 선사했을까? 하지만 애초부터 푸코는 그런 완결된 '권력'의 모습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푸코의 일련의 미시적 작업을 통해 '권력과 주체' 상당한 다른 모습을 눈치 채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조금 달리 보기 시작한다. 푸코가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그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횡단을 통해 우리는 푸코를 따라 '새로운 관계 맺기' 를 시도하게 된다. 그것은 그것은 단지 세속적 의미의 뇌의 쾌락,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 대한 자기 이론의 통찰이 혁명적 잠재력을 내포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문제를 실천적 영역에서도 감행한다. <감옥정보집단>활동을 말한다. 감옥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상식적 프로그램에 무슨 이론의 경험적 실천이니 정치적 실천이니 대단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푸코의 <감옥정보집단>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실천이 아니다. 오히려 푸코는 '반-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건다.(여기서 '휴머니즘'은 철학적인 개념이다. '인간을 위합니다'같은 류의 휴머니즘이 아니다.) 푸코는 '휴머니즘' 안에 예속적 존재로서의 주체가 있고, 그 '휴머니즘'의 이름 하에 권력에 대한 시선 회피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적인 의미의 반 휴머니즘이다. 결과론적으로 '어쨋거나 저쨋거나 인권을 옹호하니 좋은거 아닌가?' 라고 해버리면 사실 푸코니 들뢰즈니 뭐니 철학적 가치들을 논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게 철학을 매장시키는 행동이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책에서 푸코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뜻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철학자임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실험가'라고 말하는데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그가 '경험'을 강조한 '실험가'적인 작업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광인, 의학, 감옥, 성 과 같은 미시적 문제들의 역사를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증명해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에 대한 그의 강조가 니체, 바따이유, 블랑쇼 등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들인가? 푸코는 그들이 체계를 구축하는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들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주체의 '한계 경험'을 통해 주체 자체를 '뿌리 뽑는' 일에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더 이상 과거의 주체가 아니다. 대담자인 뜨롬바도리는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경험으로서의 작업, 방법에서의 극단적인 상대성, 주체 해체의 긴장'을 푸코의 지적 태도의 핵심적인 측면이라고 지적한다. 푸코의 이런 태도는 그의 비판자들의 타킷이 된다. 메르키오르 같은 사람들은 그를 '신 니체주의자'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 '근본주의적인 강단허무주의자' 같은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메르키오르의 지적은 곡해이거나 과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푸코의 작업에 대한 그런 비평의 맥락 역시 충분히 병행하여 고민해야 하는 바가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푸코가 '맑스의 성전화'를 비판하했듯이 '푸코의 성전화' 역시 함께 지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에서는 푸코의 입을 통해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 철학계의 흐름이라던가 사상적 영향, 그리고 그에 대한 푸코의 응대같은 후일담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푸코가 현상학과도, 사르트르식의 실존주의와도 거리를 두게 되는 이유가 자못 흥미롭다. 예를 들어 푸코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다분히 자유주의적 주체관으로 받아들인다. 푸코에게 사르트르의 주체는 주관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푸코의 의문은 -당연하게도- 주체가 유일하게 실존의 형태일 수 있을까.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자기 동일성 소게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을 없을까, 하는 그런 것이다. 푸코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던 당대의 비판에 대해서도 하나씩 대답한다. 먼저 구조주의자라는 평가에 대한 푸코의 답변들이 흥미롭다. 푸코는 레비 스트로스를 제외하고 알뛰세르나 라캉 같은 이들-물론 자기도 포함해서-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구조주의'라는 개념 적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같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럼 도대체 왜 당신을 구조주의자라고 하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푸코의 답변이다. 푸코는 당대 정세에 영향을 받은 '외인론'의 결과물로 이를 설명한다. 길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스탈린의 소련 이후 맑스주의자들의 불안으로 푸코는 말한다. 즉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좌파문화가 구조주의에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이에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라는 점이다. 푸코는 구조주의 논쟁의 본질이 동유럽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세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해방적인 가치를 읽고 있었던 반면 서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지지가 여전했다. 이런 점은 예전에 읽었던 박노자의 책에서도 나온적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구습으로 읽히는 맑스-레닌이 한국에서는 진보로 읽히는 정세적 모순) 뜨롬바도리는 푸코의 이런 답변이 자의적이라고 응대한다. 

푸코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애정도 이 대담집에 언급된다. 김유동의 <아도르노의 사상>을 읽다보면 푸코와 프랑크푸르트 1세대와의 관계가 언급된다. 푸코는 뉘늦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책을 접했고, 만약 어린 나이에 접했다면 그들의 주석서나 썻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또 너무 늦게 접해서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지 못했다는 점도 말한다. 푸코같은 창의적인 학자로부터 또 많은 읽을 거리를 얻는 독자로서는 그런 늦은 조우가 오히려 득이다. '자아 동일성'의 문제나 근대성 문제에 있어서 '계몽이성과 합리주의의 지배' 같은 프랑크푸르트의 문제 의식에 푸코는 친화성을 느낀다. 물론 푸코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유사성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푸코가 니체적이라면 프랑크푸르트사람들은 조금 더 프로이트적이다. 푸코는 주체문제를 조금 더 멀리 밀고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프랑크푸르트 쪽은 본질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회귀에 해방적 가치를 두고 있다는게 푸코의 입장이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푸코에게 큰 영향을 끼친 68혁명과 튀니지에서의 경험, 그의 정치적 실천 그리고 이런 일련의 행동에 근거가 되는 생각의 바탕들이 흥미롭게 전개되어간다. 대담자 뜨롬바또리는 비교적 푸코의 입장을 듣고 그 때 그 때 푸코에게 누적되어온 세간의 평가-즉 비판적 내용-을 질문한다. 특히 '권력담론'에 대한 장에서는 뜨롬바또리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맑스주의적-자코뱅적인 의미의- 권력 이야기로 푸코의 권력담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는 푸코가 거부한 '집합적' 권력의 총체성이란 문제를 들어 푸코 권력론의 현실성과 실천성을 묻고 있다.뜨롬바또리는 푸코의 권력담론이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폭넓은 정치적 실천이나 프로그램과 절합되기 어렵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반면에 푸코는 -들뢰즈도 말했듯이-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속에서, 권력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의 투쟁이 오히려 더 일반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푸코는 어떤 형태로든 '대의적' 분신에 대한 의심과 역사적 반복의 거부의지가 담겨있다. 푸코는 '우리는 대변인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뜨롬바도리는 '정당이나 제도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를 부차적으로 만드는 효과'에 대해 질문한다. 푸코는 '좌익분파의 오래된 비판'이라고 말한다. 푸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선한 권력' '악한 권력'이 아니다. 그에게는 '권력'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접근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푸코는 그런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을 통해 저항의 결을 이끌어내는 것 뿐이다. (물론 푸코의 이런 태도는 '근본주의적이다, 아나키즘적이다' 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하여간 뜨롬바도리가 책 후반부에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질문들은 푸코 비판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내용들이며, 푸코의 강점이자 또 약점이 되는 부분들이기도 하다.뜨롬바도리는 그것도 못내 아쉬웠는지 저자 후기를 통해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푸코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를 달아 놓았다. (나는 현실정치에서 권력의 얼굴이나 실체에 대해 조금 더 직접적이어야 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반권력적인 담론일 지라도 현실정치의 권력자장 안에서 적용할 때는 함께 작동하게될 권력의 문제에 대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담론적으로는 자코뱅적인 요소를 버리고 성찰할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요소 역시 역사적 실재로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푸코의 긍정적인 점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기 때문에 푸코의 작업이 가진 '해방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권력이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면 권력에 대한 저항 역시 모든 곳에 편재해 있을 수 있다는 푸코의 낙관주의는 오래전에 큰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주의자' 이건간에 그의 대선사께서 만든 이론과 생각을 텍스트로 수용하고 해석해서 이론가로서 실천한답시고 여기저기 끼워넣는 방식에는 늘 부정적이다. 현실의 역사성,복잡성, 그리고 거기에 야수성은 문학텍스트가 아니다. 문학텍스트처럼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우리 대선사께서 하신 이런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그대로 적용가능하다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푸코의 맑스>는 푸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푸코의 입을 통해, 그리고 비판적 질문을 통해 그의 생각의 큰 줄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후에 나오는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은 <푸코의 맑스>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재확인하는 짤은 인터뷰이며 <선악을 넘어서>는 68혁명과 제도권 교육에 대한 고등학생들과의 대담으로 평이하지만 흥미롭다.  

 권력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때는, 권력의 악독한 영향하에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권력이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이,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그들의 적절한 능동성(혹은 수동성)을 가지고 투쟁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이 투쟁들이 권력 체계에 봉사하는 통제와 구속들에 맞서 싸우는 한, 이 투쟁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과 깊은 관련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투쟁의 일반성은 확실히 총체화의 형식, "진리"의 형식을 띤 이론적 총체화의 형식을 띠지 않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투쟁의 일반성은 권력과 동일한 체계이며, 권력이 행사되는 형태일 뿐입니다. 

                                                                     -미셀 푸코 <푸코와 들뢰즈의 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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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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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의 세계는 평화롭다. '평화롭다'는 것이 핵심이다.모두 행복하다. 이게 핵심이다. 이 둘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원하는 미래상이 아니던가. 여덞가지 어려움(불교에서 말하는 '팔고')의 세상 속에 고립무원으로 던져진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만큼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화씨 451>의 세상은 표면적으로 평화롭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좋은 평화와 행복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이 봉쇄되고 억압되는 한에서만 만들어지는 위선적인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는 용납되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권력에 의해 차단당한다. 의문을 갖는 행위, 다르게 생각하는 행위, 즉 철학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막는데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묘미가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방화수 몬태그에게 이웃집 사는 소녀 클라리세가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질문을 하면 그냥 생각 없이 금방 대답을 하시고, 대답을 생각해 보려고 걸음을 멈추거나 하시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뭔가 어리벙벙해하는 그에게 사울이 바울되는(여기엔 이견이 있다.원래 두 이름을 동시에 썻다는) '사건' 이라 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아저씬  행복하세요?"  몬태그는 비로소 존재와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자화된 개인에서 타자에 대해,관계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화씨 451>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회의의 거미줄 속에 있는 걸린 사람이된다. 방화-기계로서의 몬태그는 책 전체에서 보자면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에 대한 의심은 클라리세를 만나기 1년전 공원에서 만난 파버 노인과의 조우에서부터 내재해있었다. 클라리세를 만난 후 1년전 기억이 환기된 것은 그 안에 이미 회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소설의 흐름상  '방화-기계' 몬태그에 대해 그다지 길게 할애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몬태그는 방화서에 배치된 로봇개(수배자 정보를 맹목적으로 쫓도록 만들어진 기계동물)에게 불편함을 느끼며 그 도구를 통해 '도구화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유비한다. 

"우리들이 저놈(로봇개)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몬태그의 '흔들림'은 그래서 중요하다.이것은 일종의 '본원적 경험',즉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몬태그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일은 클라리세의 실종과 분서 과정에서 책과 함께 분신한 어느 노파와 관련된 사건이다. 이런 체험은 몬태그를 더 이상 주입된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한나 아렌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세계성'이 '사건'을 통해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변모한 것이다. 

 몬태그가 로봇개와의 유비를 통해 예시했듯이 <화씨451>의 세계는 '억압가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권력 집단 내지는 권력의 중심 같은 것은 소설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그저 힘으로 관계속에 작용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임재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권력의 말단 대리인은 소설 속 갈등의 구현을 위해 존재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직한 방화서장 비티이다. 그런데 비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신비에 쌓여 있다. 내러티브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연극적 인물로 더 적합하다. 비티와 몬태그의 대화 장면들은 마치 헤롤드 핀터의 희곡 속 상황같다. 그가 각색한 영화<추적>속의 마이클 케인과 주드로의 대화장면 같기도하다. 소설 속에서는 노련하며 냉소적인 비티가 늘 이긴다.  

 '물처럼 존재하는' 권력의 집행기구를 찾긴 힘들어도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억압 구조를 찾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직조한 소설 속 세상은 가시적인 두 개의 억압 장치 안에서 작동한다. 이 뒤에 권력 기구가 숨어있다. 먼저 하나는 거대 외연을 싸고 있는 '전쟁의 공포'이다.('전쟁'은 디스토피아 세계의 감초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전쟁의 정치화' ,즉 전쟁이 늘 낮은 구름 위에서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 <화씨451>의 세계이다. 폭격기가 수시로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데도 도시 속 사람들은 무감각할 만큼 나른하다. 또다른 장치때문이다. 마치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구현한 듯한 것이 브래드버리가 예견한 미래상이다. 입체 벽멱 TV와 난무하는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 안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인민의 아편 TV가 되시는 것이다.(브래드버리는 후기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영화<물랭루즈>와 TV CF를 예로 들며 0.5초의 짧은 컷트의 자기장 속에 빨려 들어가는 수동적 대중들의 비존재성을 지적하고 있다. )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는 전형적인 TV피플로 등장한다. 그녀에게 세계는 TV와의 매개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문명에 비판적인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 60년대 도시 외곽의 중산층 부인처럼 무미건조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녀다. 그러면서도 행복해하고 이어질 드라마의 귀추에 생의 행복을 투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TV와 수면제를 빼놓고 그녀는 아무런 관계적 만족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는 소설 초반부터 수면제라는 소품을 통해 그녀가 누리고 있다는 만족감이 사실은 왜곡된 형태임을 보여준다.(진정 행복한 사람은 수면제를 먹지 않는다.!!)   

 <화씨 451>에서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 50년전의 것이다 보니 올드패션하다. 또한 구성이나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무언가 성긴 구멍들이 있다.사실 SF소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급진적 진행에 비해 얼개가 성긴 경우가 종종 있어보인다. 예를 들어 악역으로 등장하는 비티 서장의 경우 해박한 그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에 대한 전후 설명이 부족하다.( 연극 대본 작업에서 작가 역시 이부분을 다시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올드패션한 설정도 살펴보자. 작가의 상상력 역시 그 시대의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만 한다. 핵전쟁이 등장하고 불로 책을 소각하고, 헬기가 수색하고 하는 장면들은 완벽한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가까운 실현가능성이 있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상상적인 글쓰기이다. 66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만든 영화처럼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래된 미래'같은 미래상이다. 스티븐 다라폰트감독이 <화씨 451>을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각색 과정에서 미래세계를 그린다면 이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아마 하늘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소각 대상인 책은 종이 책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은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우화적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는 SF 소설의 거대한 지류와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화씨451>에서 중요한 주제는 통제되는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런 전체주의적 질서와 통제 권력의 억압, 그리고 그에 따라 왜곡되는 인간성과 사회상의 측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상에 대해서도 사실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디어에 대한 것을 좀 보자. 브래드베리는 '책의 소각'이 단지 물질적 소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우리도 몬태그처럼 책을 물리적으로 태우고 있지는 않지만 '분서'행위를 하는 문화 속에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한 장으로 요약 정리할 수 태도 , 그리고 그것을 바쁜 세상에, 알아야 할 것 많은 세상에 합리적이라고 믿는 태도,이 역시 '분서'와 같은 것이다.결국 책의 그 내밀함과 접촉하여 소통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가 당대의 다이제스트식 출판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듯 하다. 이는 악역으로 나오는 비티 서장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 '햄릿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해서 보면 기껏해야 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 놓은 게 다가 되었지. 그러면서 광고엔 이렇게 나오고,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알겠나? 보육원을 나와서 대학을 들어갔다가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거네. 지난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지적인 문화형태라는 건 그런 식어었네"   

반대로 TV는의 향응이다. 통제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구실을 하고 있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TV 프로그램은 크게 쌍방향 소통형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조지 오웰의 <1984> 버전 텔레비젼보다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까?) 하나는 린디와 이웃 집 여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대략 추측컨데 시청자의 피드백이 반영되는 드라마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상상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브래드버리의 상상력만큼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TV 실험들과 징후들은 한 두가지씨 보이곤 한다. 리얼리티 쇼는 몬태그의 추격씬을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마치 영화<트로먼쇼>의 야생버전처럼 어떤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생중계하는 방식은 요즘 기술로도 가능하다. 한때 미국에서 바람난 남편부인잡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브래드베리는 전쟁을 통한 디스토피아의 전체적인 붕괴를 새로운 희망의 전제조건으로 그린다. 지배집단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전면적 파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보인다. 마치 나치 독일의 철저한 패망 이후 재건이 가능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브래드버리가 가진 한계의 한 측면이 될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새로운 미래의 맹아로 그린 '북피플들'은 제 때에 저항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주류다. 그들에게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이 잔존할 뿐인다. 그런면에서 그들은 '분서'의 공모자는 아니어도 협조자들인 셈이다. 지식인 파버의 자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대의 후퇴'를 방관했던 업은 결국 그들에게도 돌아왔다. 브래드버리의 혜안 중에 뛰어난 점은 권력과 이 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병존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발본색원 자체는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치시키는 편이 나았고 실기한 지식인 그룹들은 양팔을 잃은 장수처럼 소수의 유목민이 되어 세대 유전을 통한 지식의 전수만을 먼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어떤 중핵만 건드리지 않는 다면 무엇과도 공존할 수 있는...') 지식인 파버와 방화수 몬태그의 저항을 위한 대화는 통속적이긴 하지만 '지식인-대중'의 상호관계에 대한 브래드버리식의 비유다. 몬태그식의 '이성없는' 급진적 행동주의가 갖는 위험과 '행동없는' 관조적 이성주의가 갖는 문제를 거의 대놓고 보여준다. 물론 브래드버리식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증법적 타협의 길도 슬쩍 흘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놓고... 그렇다고 사회주의 소설처럼 구호조로 꺼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미국적 세련됨이라고 해야하나..

<화씨451>은 '분서'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분서될 수 없는' 책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이다. 우리에게 도서관만 있다면 다시 인류 문명을 세울 수 있다는 말처럼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에 대한 브래드버리의 숨은 애정이 배어있다. 물론 인류는 도서관에 다 적혀있어도 같은 실수를 여러차레 반복할테지만 말이다. 다시 영화화가 곧 된다고 하니 수 년 안에 스크린으로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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