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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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녁이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 놓은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튼 날의 아침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김명인,<천지간>중에서 

상실은 사람을 부유(遊)하게 만든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언제 터질지 모를 거대한 고무풍선에 몸을 맡긴 것과 유사하다. 대부분은 운명의 여신이 다른 대상을 찾아 우리를 시큰둥해하며 내려놓을 때까지 묵묵히 올라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삶의 일정 부분은 운명의 여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삶은 다른 '너머' 를 만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조차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 항구적인 항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매번 이름을 바꾸어 달고 또 다른 처방전을 요구하는 변종 바이러스같다. 

  
  아이들이 모여 산다는 '달콤한 내세'는 없다. 아니 역설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달콤한 내세'는 '쓰디쓴 현세'를 심장이 찟기는 통증만큼이나 강하게 인정하는 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상태이다. '젓과 꿀이 흐르는' 피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천국'이니 '이데아'니 하는 류의 '내세' 따위는 없다. 그것은 도착적이며 기만적인 환상이다. 삶 너머는 아무것도 없다. 그 너머의 것은 애써 상상해보려해도 불가지의 영역일뿐이다. 불가지의 영역은 헤아려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뿌리 뽑힌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우리는 비극적 전망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애초부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 충실히 비극적 삶이어야 할까?  존재의 조건이 존재의 양식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생각은 즉물적이며 허무주의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부서진 채 -니체의 말처럼- 춤을 출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나와 니콜,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살아남지 못한 아이들. 우리 모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마을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달콤한 내세에서 외딴 마을을 구성하고 사는 것 같았다."  러셀뱅크스,<달콤한 내세> P299 

   눈 덮인 뉴욕 북부의 시골마을, 평소와 다름없던 그날,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한다. 다수의 아이들이 사망한다.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적 정의감인 '분노'로 자신의 업을 정당화하는 합리적인 변호사 미첼 스티븐슨. 그는 이 사건의 원인 규명과 배상을 위해 희생자들의 부모들을 만나러 다닌다. 단순히 운전자의 과실이 아니라 도로의 상태나 안전 시설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 당국과 교육 당국에 막대한 배상을 목적으로 소송을 할 요량이다. 비교적 순탄하게 소송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사고 생존자 니콜 버넬을 만난다.   



  소설은 사건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가려진 모습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에서 니콜은 마지막 대사를 통해 '각자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이라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한다.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혼까지 이제 '다른 세계'의 마을 사람이 되었다. 각자의 '달콤한 내세'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라는 공통의 현존재들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부여안고 사는 존재들이다.  마을 공동체가 죽음을 조금의 잔여도 남기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 안고 가는 모습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지만 결국은 타자의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통속적인 깨달음의 것과는 다른 차원을 만난다.  마을 공동체 전체와 그 구성원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서, 존재의 기본적 전제로 안고 가는 것이다. 죽음의 뼈를 그대로 드리운 채 삶을 이행하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삶의 본질로서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송이라는 법률적 절차를 통해 죽음의 직간접 원인에 대해 대속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방식이 변호사 미첼의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반대방향을 향한다.  

소설 속 희생자의 유족이자 베트남 참전군인인 빌리 안셀이 사건 이후의 삶을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와 비유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빌리 안셀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결국 마을 전체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즉 마을 전체가 이제 아이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대면해야하는 요청에 맞닥드린 것이다.  영화 속 아톰 에고이안은 이런 죽음을 통한 삶의 영위라는 과제를 오래된 유럽의 구전설화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통해 상기시킨다. 피리부는 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라져 버린 아이들의 세계에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적 변화를 겪어내고 강요받은 삶과 대화할 것인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은 평온한 마을 공동체의 이면과 삶의 다층적인 변부들을 보여준다.  우화적인 사회소설이 추구하는 추악한 공동체의 위선 같은 것과는 크게 상관없다. 물론 무탈한 마을 공동체 안에 도덕적인 흠결 등이 있고 그것이 사건의 중대한 반전을 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설이 마을이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도덕적 일탈을 고발하거나 집어내기 위해서 씌여진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 근친상간의 트라우마는 사건 진행의 숨은 열쇠이며 사건의 방향을 변모시키는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된다. 그것은 결국 사고 피해자인 니콜과 돌로레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봉합과 새로운 지속을 위한 사건 전개상의 도구이지 그것이 공동체의 도덕성과 숨겨진 개인의 성적 음험함등을 고발하기 위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얼음길에 미끄러져 세상을 등진 아이들 말고도 사실 숨은 아이가 하나 더 있다. 변호사 미첼의 딸이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이 역할에 비중을 좀 더 많이 둔다. 그리하여 '변호사 미첼-딸/ 마을주민-희생된 아이들' 이라는 이중 구조가 연결된다.  영화 첫 장면도 변호사 미첼과 딸의 대화부터 시작된다. 미첼의 딸 조이는 부모의 이혼,마약과 방탕한 생활 등으로 이미 부모와는 척을 지고 있는 상태다. 오로지 마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이 필요할때만 뉴욕의 변호사인 아빠에게 읍소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조이의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영화 포스터의 스틸화면으로도 알려진 그 이미지이다. 미첼의 과거 회상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 지금처럼 뒤죽박죽이 되기 이전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기도 하다. 아톰 에고이안은 아예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딸의 친구와의 비행기 속 만남이라는 씬을 설정하여 변호사 미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딸아이를 '내세'로 보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한다. 소설과 영화 둘 다 딸의 HIV양성반응이라는 전화장면을 통해 파국적이지만 단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모종의 재회를 암시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포스터로도 쓰인 평화로운 장면은 변호사 미첼의  인상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앞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될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예의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성 싶다. 그 일화 속에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삶/죽음' 에 대한 은유가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버스가 추락하고 난 이후 다음에 등장하는 컷트도 바로 그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미첼이 이야기 했던 그 경계선에서의 섬뜩한 '명쾌함'이란...참으로 ...(소설 속에만 이 '명쾌함'이란 단어가 나오는데...미첼이 들고 있던 소독한 면도날도 어쩔 수 없는 '명쾌함'이란 단어가 주는 예리함보단 날카롭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서 가장 적절하며 필요했던 단어가 바로 그 '명쾌함'이었다니 그것을 찾아낸 작가에게 경의를) 이 책은 어쩌면 '죽음의 그 명쾌함'에 대한 역설적 오마주, 그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는 사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달콤한 내세>를 보고 난 이후 찾아 읽게 되었다. 영화가 좋을 경우만 하는 짓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러셀 뱅크스의 소설은 사건의 진행과 주인공들의 사건 전후의 일상,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내면의 움직임등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입체화한다. 반면 아톰 에고이안은 주로 미첼 변호사의 시선과 생존자의 증언을 병치 시키고 있다. 대신 효과적인 교차편집과 인서트편집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 내밀한 정서들을 표현한다. 매체는 다르지만 둘 다 매우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임에는 틀림없다.   

  죽음이나 죽음을 통한 상실은 매일 분만실에서 신생아가 세상 빛을 보듯 발생한다. 병원에서, 차도 위에서, 쓸쓸한 여관방에서. 상실의 문턱을 넘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또 영원히 함께 하기도 마땅치 않다. 애써 그것을 떼어내려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그것에 묻혀있어도 부자연스럽다. 결국 부서진채로 다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슬픔은 그런 질문을 정당화 해준다. 그리고 언젠가 행복이란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쓸어담으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진부한 진실과 만날 때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 질문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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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인디영화 콜렉션 Vol.1 박스세트 : 피터팬의 공식+거북이도 난다+보이지 않는 물결 (3disc 디지팩)
바흐만 고바디 외 감독, 소란 에브라힘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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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로 쓴 글을 이 쪽으로 옮겨놓는다 

TV로 폭격 동영상을 보면서 아내에게 농담처럼 전화를 했다. "TV 켜봐. 난리도 아니다. 쌀이나 라면 사놔야 되는거 아닌가? ^^"  - 아직 쌀이나 라면을 사놓치는 않았다. 
 결국 한반도 영구평화체제가 만들어지거나 한쪽이 완전 박살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은 과거 그랫던 것 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될지 모른다. 그런데 '한쪽이 완전 박살나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하는 방식이다. 전쟁을 WAR, 대문자로 파악하는 자들은 '박살' 사이에 숨겨진 비극에 대해 모른 척 한다. 뭔 일만 터지면 금새 장농에 모셔둔 과거의 제복을 입고 '전쟁하자'고 들끓고 일어나는 무도한 모험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정신 차리시오' 라는 말 이외에 달리 더할 말이 없다. 항문기때 미해결된 욕구의 문제라면,그대들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군대 시절의 기억을 다시 재연하고 싶다면, 몇 만원 들고 서바이벌장으로 가라.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정체성이 멈춰진 시간이 군대시절이었다면 그 인생에 대해서는 '못났다'는 말대신에 '안타깝다'는 말을 해주는게 나을성 싶다.  

최근에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영화<거북이도 난다>를 봤다. 이 영화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개봉했을 때 특이한 제목때문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개 그랬듯이-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제가 벌어지는 근처에 있으면서도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근에 알라딘에 올라온 '파고닥세운님'의 <거북이도 난다>라는 페이퍼는 기억의 항아리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이 영화를 다시 생각나게 했다. 영어로 하면 '리마인드'다. (감사를..)  현재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불법 다운로드와 DVD  CJ인디영화시리즈를 통하는 길이다. 나는 DVD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봤다. 영화관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작은 컴퓨터 모니터나 그것보다 조금 더 큰 TV 화면으로 보게 되어 늘 안타깝긴 하다.   

영화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을 겪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말한다. 사람들은 근거없는 착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을 한다' 라고 믿는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전쟁을 겪을 뿐이다.'   

 

영화 줄거리는 쓰기 귀찮다. 포털의 영화 소개로 글로 대신한다. 

 <이라크 국경지역의 쿠르디스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문에 사담 후세인의 핍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들 중에는 어린이답지 않은 리더십과 조숙함으로 또래 아이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위성"이라는 소년과 전쟁 속에서 팔을 잃은 소년 "헹고"가 있다. "위성"은 "헹고"의 여동생인 "아그린"을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지나, 그녀는 전쟁 중 받은 상처로 늘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위성"은 지뢰를 내다팔고 무기를 사두는 등,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아그린"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아그린은 그런 "위성"과 자기를 아껴주는 오빠 "헹고", 그리고 불쌍한 아들인 "리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군인들에게 겁탈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악몽 때문에 늘 자살을 생각하는데.> -네이버 영화소개-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감독의 '슬픔에 대한 예의'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느 멜로드라마들처럼 눈물이 잔에 흘러넘치게 만들지는 않는다. 분노로 치아를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며 잘 우는 나도 고인 눈물을 천장 한 번 바라 보고 말릴 수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헐리우드적 방식으로 '잘 만들어졌다' 면 이 영화는 극장 바닥을 온통 적셔서 모두들 영화관을 나서며 젓은 신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영화의 감흥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 아이들을 멜로드라마나 단순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함으로써 이 영화가 담고 있는,또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를  영화관객들의 자족적인 몇 천원의 문화적 소비로 끝내게 하지 않는다. 고바디 감독은 극도로 눈물을 자아내거나 또 치마를 부여잡으며 분노케할몇 몇 장면을 대단히 빠르게 처리한다. 예를 들어 슬픈 아기 '리가'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 말이다. 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거의 없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상처처럼 그렇게 필름은 스윽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관객의 가슴을 밴다. 여기서 감정을 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사치이고 그것은 이들의 비극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다. 감독은 거리두기를 통해 슬픔에 대해, 비극에 대해, 현실에 대해 깊은 예의를 보낸다.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다. 비극의 겪는 이들에 대한 예의를 통해 슬픔을 가볍게 하지 않는 방식말이다.  

 

그 결과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는 않지만 잠자려고 누운 어둠 위에는 영화 속 어떤 장면의 적막함들과 비통함들이 다시 재상영된다. 

 거북이. 물소리. 지뢰. 아이들. 파란 하늘과 절벽. 아그린의 보랏빛 고무신. 팔이 없는 헹고의 절규. 위성의 공포에 젖은 안경. 붉은 물고기... 

거북이가 날 수 있을까...그렇다. 우리가 평화롭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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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 - 할인행사
알폰소 쿠아론 감독, 클라이브 오웬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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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에 눈이 내릴 수록 눈은 '희망'을 향한다.  역설적인 징후다. '희망'이 사라질 수록 '희망에 대한 욕망'은 커진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희망을 원한다.'고 선언할 수 있으리라. 불과 몇 년 사이에 '희망'이라는 말을 봄철 돋아난 연두빛 새순처럼 좀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비록 그 희망이 봄날의 아지랑이거나 또는 흘러넘치는 술잔의 잉여일지라도 말이다.  
  
  모든 '희망'은 애둘러온 '희망'이어야 한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희망'이며 일종의 '부정성의 희망'이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절망 쪽에 늘 고개를 주억거리는 '비극 친화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키지도 못할 허언이나 낭만적 상상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 잘될거야' 또는 '언젠가 되겠지' 는 술자리에서나 결혼식장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것도 싫다.'바닥을 봐야 튀어오를 곳이 있다'는 닮아빠진 전언에 문종이 한 장 더 바르는 짓 말이다. 나는 '절망'이나 '포기' 이후 뭐가 있는 지 모른다. 정확히는 '그 이후 뭐가 있는지 없는지 내 알바가 아니다'가 모토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성향은 여전하다. (쉬크하기는...) 

하지만 '부정성의 희망'이란 것. 골똘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희망의 실재'가 아닌가 싶다.  '희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 아닌가? 68혁명이 원했던 그 불가능성말이다.  

내게 '희망' 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나의 아이들이다. 아이 이전/ 이후에는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애 낳아봐야 어른된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류의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희망'의 전도사가 될 생각은 없고 되고 싶지도 않지만 '희망'이라는 공간에 대한 재영토화의 계기는 있어야 했고, 또 그런 일이 있었다면 1m도 안디는  작은 그 아이들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희망'을 다시 창조해야 했다. 소급해서 보면  인류라는 족속들 중 일부는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목록을 세대 유전하기 위해서 이어져 온게 아닌가 싶다.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은 아이가 사라진, 아이들을 잃어버린, 즉'불임의 세계'가 배경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옥외 전광판은 인류의 마지막 아이가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속보를 전한다. 인류는 마지막 아이의-실제적 나이는 청소년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한다.  

 그렇다면 이 미래 세계에서 무엇이 불임을 만들었을까? 사실 원인은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치 않다. 제대로 언급되지도 않는다.(환경 호르몬때문이었을까? ^^) 이미 인류는 '불임의 시대'를 조건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실제감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가 현실의 조건인 것 처럼 말이다. 현재의 자본주의를 생각해보자. (좀 더 정확히는 우리가 의식적/무의식적 이데올로기로 믿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말이 정확하겠다.) 자본주의는 끝임없는 흐름을 목적으로 한다. 즉 무한 생산-소비가 전제조건이다. 그런고로 앞서 말한 '불임' 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하지만 자기증식하는 자본주의는 그외의 것을 타자로 만들며 '(타자의) 불임'을 생산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이외의 것은 없다'  '역사의 종언'이니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니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그로 우리가 '불임'속 인류임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자본주의 외엔 없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개인을 그런 방식으로 호명하는 순간-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자본주의하의 불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분고분해지게끔 만든다. 

  물론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론>을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이 자본주의의 욕동-일종의 자기증식형 경향성-이라고 말한바 있다. 자본주의 외에 다른 것을 상정할 때 우리는 더 커다란 괴물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래, 그러니까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 충실하며 행복해지자' 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불러온 세계의 풍요와 그 안팎의 비참 속에서 어떤 이론적 구멍, 어떤 가능성의 돌파구를 내보자는 것이다. 가라타니식으로 말하자면 '가능성의 중심'으로서 '불임'을 돌파해보겠다는 것이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이제 인류에게 남은 것은 서로를 대적하며 머리통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으로 입을 닦는 것 뿐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우골리노 백작처럼 말이다. 우골리노는 탑에 갖힌 채 배고픔으로 인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을 버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탑 안에서 비극적으로 아사한다. 그의 복수는 오로지 지옥에서나 가능할 뿐..

"그 때 한 구멍에 두 놈이 함께 얼어 붙은 것이 보였다. 한 놈의 머리가 다른 한 놈의 머리에 모자터럼 얹혀있었는데 굶주린 놈이 허겁지겁 빵을 먹듯이 위에 있는 놈이 밑에 있는 놈의 머리와 목사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 32편  

 그런데 주인공 테오는 이런 현실로 부터 무감각하다. 일종의 무감각. 정치적 용어로 하면 '냉소주의'다. 그 만인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들 마지막 인류의 죽음에 애도는 하지만 인류의 사멸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테러는 테러이고, 격리는 격리일 뿐이다. 이 영화에 대해 높이 평가한 지젝이- 그의 인터뷰가 유투브에 있지만 슬라브식 영어탓에 오래 듣고 있기 힘들다- 이 영화의 앞면과 뒷면, 즉 배경이 되는 정치적 갈등의 -인종주의, 정치적 과잉 억압등-과 그에 반해 이질적으로 평온해 보이는 내부 정상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는 점도 거기에 있다.  지젝이라면 우리가 '냉소'에 빠져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또는 '민주주의' 라는 이름의 그곳 아닌가?

  지젝이 지적하고 있듯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디스토피아의 현실이 은폐된 평범하고 전통적인 의미의 영국 일상 풍경이다. 한쪽은 폭동에 격리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 또 한 쪽은 여전히 근위대가 낡은 위용을 자랑한다. 먼 미래같지만 공간의 축소만 제외한다면 '여기'아닌가? 여담이지만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반가왔다. 내 또래의 락 음악 애호가들은 흥얼댈만한 곡이다. 공포에 쩍 벌어진 입 자킷으로 유명했던 킹 크림슨의 'court of crimson king'이다. 80년대 락매니아들은 이 앨범과 동시에 이 앨범의 히트곡 'epitaph' 를 기억할 것이다.  

테오의 사촌이 근무하는 곳은 일종의 미술관이다. 영국정부가- 불임의 시대, 다른 나라들은 이미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다. 오직 영국만이 어찌되었든 통제되고 있다- 인류의 유산들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계 각국의 작품들을 컬랙션하는 곳이다. 테오가 그곳에 들어가자 마자 처음 만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이다. 미술관답게 매우 모던하고 매끄러운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홀에 걸린 그림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리고 또 하나 창밖으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의 돼지와-또 모른다 .락밴드CAKE의 돼지일지도- 핑크플로이드의 자킷에 나온 굴뚝 비스무리한 것도 보인다. (나는 가끔 영화 속에서 감독들이 배치해 놓는 이런 소품들이 좋다.잔재미를 주니까) 테오는 곧 인류가 없어지면 이런 작품들도 의미가 없을텐데 왜 수집하느냐고 묻는다. 사촌은 미래는 관심없으며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분히 세속적이며 또는 냉소적인 현실주의다.  

  

 
 주인공 테오도 한때는 반정부테러리스트였다. 그가 어떻게 전향(?)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저 '운명'을 택했다는 정도의 설명뿐이다. 하지만 전 부인이자 이민자 권리를 위한 -극중에는 이들은 '푸지'라고 부르며,지워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그런데 인류의 '희망'은 또 그들로 부터 나온다. 매우 정치적인 설절아닌가? - 테러리스트 집단의 지부장이 그를 찾는다. 그리고 그에게 자의반 타의반 프로메테우스의 의무가 지워진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분히 신학적이며 신화적이다.(아마 지젝이 이 영화를 좋아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 '테오'의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테오'란 이름은 '신과 관련된' 것이란 뜻이다. 영화 속에서 테오의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는 베들레헴을 찾은 요셉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세레자 요한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삼위일체중 성자는 앞으로 '딜런'- 밥 딜런이 연상된다-이라고 불리우게 될 여자아이다.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장소는 베들레헴의 마굿간 처럼 푸지들의 쓰레기같은 집단거주지의 폐허 속이다. 예수가 마굿간이라는 가장 낮은 장소에서 태어낫듯이. 

 

  

좀 뒤로 가서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마지막 롱테이크의 탈주씬을 보자. 주인공 테오는 모세와도 같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어린 시절 교회사람들과 함께 가서 본 찰튼 헤스튼 주연의 <십계>를 떠올렸다. 바짝 쫓아온 이집트인의 추격 앞에서 정말 통렬하게 갈라지는 홍해.(당시 극장 곳곳에서 '할렐루야'가 터졌다.) 테오가 안고 있는 아이 앞에서 경이에 찬 침묵에 쌓여 갈라지는 무리들의 모습은 마치 그 장면의 패러디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유대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나룻배씬도 그렇게 일치한다.    
   

 쿠아론 감독은 영화 중간에 넌지시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작은 질문을 상정한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 그리스 비극이 던졌던 질문이다. 쿠아론감독은 히피처럼 사는 제스퍼(마이클 케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운명'에 대항하는 '신념'이라는 과제를 던진다.  그는 예감되는 죽음의 상황 앞에서 디스토피아에 사는 마지막 인류를 위해 친절하게 고안된 알약을 통해 편안한 마감을 택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식물인간이 된 자기 아내를 위해서만 그걸 사용할 뿐. 주체적인 죽음 즉 신념에 따른 죽음을 선택한다. '불임의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저항력은 '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실주의 이데올로그에 맞서는 주체의 윤리적 자기선택이기나 한 것 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한다. 감독은 그냥 그렇게 유동하는 불안 속에 끝낼 의도였다고 하나 결국 다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상투적이게도 -'미래호'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좋았느냐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미래호'는 분명히 치명적인 사족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긴 한다. 이 영화가 상업영화였으니-이건 여러 입김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했으리라.  

    
 늦은 밤까지 DVD로 이 영화를 본 나는 주말도 집안 팎으로 분주하다. 그래도 집 안에 있는 녀석들과 노는게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제일이다. 나는 일이 없으면 땡하고 집으로 가는 사람인데, 요즘은 빠질 수 없는 일 때문에 잠든 아이들 옆에 소리를 죽여 눕는 경우가 많다. 11월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나는 여전히 ' 희망하는' 존재이다. 소중한 내 아이들과 귀중한 그 아이들의 친구들을 위해서,  이 땅에서 내게 할애된 시간만큼 세상이 한뼘만큼은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하는게 평범한 아빠로서의 소망이자 다짐이다.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시대'이다. 최소한 희망을 물려줄 수 없는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희망을 아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도 열량 제로 것들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련다. 희망의 가능성에는 늘 무게가 있다. 

<바람구두님 홈페이지 대문 사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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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 김진석을 알게 된 건 21세기 초입이다. 당시 나는 계간지 <당대비평>(삼인)과 <사회비평>(나남) 을 보고 있었다. 두 계간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 문제와 담론 공간에 개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당대비평>은 탈근대적 지평 위에 있었고 <사회비평>은 근대적 지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평가는 그 잡지의 전체 성격과 필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뉘앙스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당대비평>에는 편집위원으로 권혁범,임지현,문부식 등이 있었고, <사회비평>에는 김진석이 편집주간이었다. (김진석은 현재 <황해문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당시 내가 이 두 계간지에 관심을 갖게 된것은 임지현 교수가 제기한 '일상적 파시즘론'을 두고 이 두 잡지가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각기 지면을 통해 비판과 반비판이 이어졌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에서도 김진석은 '미시 파시즘론 비판'이란 형태로 이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 한다. '파시즘'이란 것은 20세기 정치에 나타난 매우 흥미로운 정치현상이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하에서 '유사파시즘'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반복의 우려'라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늘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임지현 교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미시 파시즘' 문제를 세간에 부각시켰다. 임지현의 이 책은 미디어의 관심을 받으며 인문서 중에서도 꽤나 대중적으로 읽힌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일상적 파시즘론'이 더듬어낸 한국 사회의 진단에 크게 공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일까? 이런 생각의 와중에 <사회비평>의 글들은 내게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공감에 비판적 횡선을 그을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파시즘'을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그 의미의 확장을 이해하고 그 문제 의식도 공유하지만- 주의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거기에는 김진석 교수가 과거 <사회비평>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미시 파시즘 비판'에서 받은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  

김진석의 이야기를 하다가 '미시 파시즘론'부터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일단 간략하게 마무리는 해야겠다. 김진석은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은 들뢰즈.가타리의 '미시파시즘론'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저작 <앙띠 오이디푸스>가 '일상적파시즘','미시파시즘'의 수원지가 되는 셈이다. 들뢰즈주의자들의 비판과 반비판이 그 동안 많이 일어났던 문제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 책에 나타난 김진석의 주장만 요약하자면 '미시 파시즘론'은 근본주의의 위험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즉 '삶은 미시적 권력의 경연장' 이라고 설정할 때,모든 권력을 파시즘적 요소로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모든 권력=파시즘'이 되는 근본주의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이 모두 애국주의에 휩싸인 일상적 파시즘의 구성인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월드컵의 붉은 악마나 한국의 스포츠 애국주의,또는 인터넷의 애국주의 폭력성-2PM의 재범이 사건같은-것을 두고 '파시즘 도래' 운운한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에도 '저강도 파시즘'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 앙칼진 비판을 한  개인은 최소한 그로부터 분리된 - '반파시즘'의 사제로서- 자기 선명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긴 하다. 그렇다면 '촛불 집회'에 모인 전국적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아닌가?  물론 그들이 공적인 목적으로,더 이성적인 자신의 정치적 또는 상식적 주장을 바탕으로 했다고 말한다면 차이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촛불의 '대중'은 모두 '각성된 엘리트' 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패거리와 힘을 부정할 경우 생기는 자가당착이다.즉 '모인 패거리'의 힘을 '파시즘'의 미심쩍은 시선으로 볼 때 그것은 '파시즘 근본주의'가 되어 스스로의 목도 조이게 되는 것이다.  김진석이 보기에 '미시파시즘' 에 대해 들뢰즈가 제시할 수 있는 방식은 '분열증적 혁명' 이나 '탈주' 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초월'이지 김진석의 말하는 '포월'은 되지 못한다. 김진석은 '폭력과 권력'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임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기우뚱한 균형찾기'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파시즘이란 지도 위에다 '미시 파시즘'을 올려 놓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고 미시 파시즘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조금 더 섬세하고 한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파시즘'이란 주제가 좀 길어졌다. 하지만 이 내용 역시 책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와 어깃장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김진석은 먼저 한국에서 지금까지 수용된 니체가 '정치철학적' 요소가 배제된, 즉 탈정치화된 니체라는 점을 문제시 한다. 애써 정치철학과 결합한 경우는 니체의 '반민주주의요소'를 나치나 또는 파시즘의 수원지 정도로 이해하고 비판하는 방식이다.(김진석은 박홍규의 <반민주적인, 너무도 반민주적인>을 이런 류의 텍스트로 본다.) 그 외에 니체 수용은 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요소만 강조되고 그의 정치적 반민주성, 반페미니스트적 요소들은 외면하거나 축소시켰다. 김진석은 데리다, 들뢰즈등을 경유하여 유입된 '탈근대론적 니체론'이 이 흐름을 주도했다고 본다. 그는 이런 해석들이 니체 열풍을 불러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사상 중 걸림돌이 될만한 '반민주적 요소'들을 슬쩍 피해감으로서 오히려 또 다른 곡해만을 나았다고 본다. 결국 김진석은 니체의 반민주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니체라는 현실로 뛰어드는 것이다. 

니체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는 꽤나 알려져 있다. 이런 인용을 보자

"우리,(무리짐승의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가진 우리는 민주주의적 운동을 단순히 정치조직의 타락형식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인간의 타락 형식이며 왜소화 형식, 그리고 인간의 평준화와 가치의 낮춤이라고 여긴다."  .... <선악의 너머에서> NO.203 

대중, 민주주의, 평등, 선함, 베품, 연민 등등에 대한 니체의 모진 발언들은 니체 중기 이후 철학적인 양상의 진전과 함께 전면에 드러난다. 거기에 니체의 아포리즘적인 문체와 상호모순적 발언들은 니체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김진석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제가 역사적 결과물로서 문제가 많지만 역사적인 차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는 지평에서 니체에 접근한다. 결국 역사적 선상에서-현재의 흐름 위에서 본다면- 니체는 '반시대적'이며 '반민주주의자'였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니체같은 위대한 지성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김진석은 니체의 텍스트가 아직 민주주의가 도래하고는 있지만 아직 정착되기 이전의 것이었음을 말한다. 니체는 그런 이행기에 귀족적이며 엘리트주의적 입장에 서 있지만 또한 민주주의가 펼쳐보이게 될 몇 몇 지평에 대해 뛰어난 예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진석이 보기에 니체의 가장 큰 모험은 -겹치기도 하지만- 구분 되어야 할 '철학적 개념'의 선분과 '정치적 지평'라는 선분을 무리하게 중첩시키려고 한데 있다. (김진석은 이 둘 사이에 분명히 틈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니체에 대한 접근법은 먼저 이걸 전제해두고, 그의 반민주적인 발언들을 철학적 태도로 설명한 이후, 다시 정치와 역사라는 현실의 프레임 넣어서  가두어지지 않는 부분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그런 면에서 책의 성격을 잘 요약해 냈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 평등의 저울, 가치의 파괴자 니체의 망치, 그리고 상호 여집함을 남기는 세가지의 프레임들....현실에서 우리는 조금은 해괴한 다형의 틀을 쓴 니체로 만날 수 밖에 없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를-여기에는 사회주의도,공산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무리짐승의 도덕이라며 악담을 퍼부었을까? 그냥 박홍규 선생이나 김상봉 선생처럼 말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의 절반 정도를 할애한다. 요약하면, '위대한 정치'에 대한 그의 정의, '강자의 고귀함'에 대한 그의 강박, '격차의 열정' 에 대한 그의 응원이 결과적으로 평등을 전제에 깔고 있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니체가 서양 역사와 사상사의 전복자였다는 점과 동시에 읽어야만 한다. 그에게 '위대한 정치'는 고결한 정신이 이끄는 정치이다. 이 정신은 기독교적 죄의식 또는 도덕과는 관련이 없다. 니체는 '권력의지'라는 강자의 철학이 이런 '선한 정치'가 아닌 '좋은 정치' 를 만든다고 믿었다. 니체의 강자 역시 그런 '영혼의 위계성' 에 바탕을 둔 철학적 개념이다. 이는 현실적 변용과정에서 보수주의적으로 적용되고는 한다. 김진석은 이 점에 대해 니체의 태도를 단순한 귀족적 보수주의와 구분하여 '귀족주의적 급진주의'라는 말로 설명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철학사의 반성과 성찰 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니체는 거기서 나아가려했다는 것에서 '위험한 철학자'가 된 것이다. 쉽게 이해해서 '철학'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대입하려 했다는 것이 김진석의 니체 기소 내용의 핵심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 권력이나 격차의 위계라는 것 역시 비역사적 공간이나 초월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책의 절반 정도는 니체를 경유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다.들뢰즈와 데리다의 니체 해석이 주요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일단 '미사 파시즘론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이 작업은 진행된다. 김진석은 이들의 작업이 '신선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시대의 변호를 예측하고 예고한' 점은 인정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사회적 변화를 서술하는 일을 지나치게 상징화하고 추상화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니체 텍스트를 '탈정치화'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힘의 의지'로 번역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그런 예로 거론된다. 그는 들뢰즈의 탈코드적인 노마니즘을 예로 들면서 그의 '바깥사유'의 강조가- 정작 들뢰즈는 안과 밖의 단절과 연결을 매우 강조했음에도- 일련의 오해과 통속적 이해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김진석이 비판의 선을 대고 있는 부분은 오히려 '포스트사상의 한국적수용'에 있지 않나 싶다. 그는 이것이 전체적으로 사회적 대항철학의 공간을 잠식하게 될 부분을 우려한다.(반대편에서는 이는 대항-철학 공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어쨋거나 그는 '망치로 철학하기는 부수기라도 하지만 부수지 못한 채 떠돌기만 하는 비결정성은 자칫하면 공허한 보수성을 띠거나 텍스트의 우울함에 빠지기 쉽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그는 일련의 포스트모던한 관점들이 다 유효성이 없는 공허한 말장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효과들에 대해 보완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다는 점, 특히 현실 세계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점을 말한다. 그가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을 '오, 니체, 여기는 한국이오'라고 정한 점은 서구 철학을 열심히 파고들어 결국 한국 사회를 지도삼아 적용하려는 작업들에 주의를 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 지식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나마 어려운 말들로 담론 공간에서나 활약하여 대중파급력이 미약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결론적으로 김진석은 니체를 읽는 독자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우선 니체의 시대와 현시대가 인식틀에 변화가 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니체를 철학사적인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티-플라톤주의자였지만 철학사의 우월성을 현실로 적용하려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와 닮아 있다는 것이 김진석의 주장이다. 니체 철학을 깨끗한 표백제로 탈색하려는 것 역시 니체의 핵심을 비켜간다고 말한다. 폭력이라는 것은 '문화'의 숨겨진 이면이다. 그러므로 모든 폭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력적이다.폭력-권력의 문제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반민주주의적 요인들은 니체 중반기 이후의 텍스트에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텍스트의 심장을 뛰게하는 근원과 닿아있다'라고 그는 말한다.이렇게 해야지-비록 오남용의 위험도 있지만-능동적 가능성도 동시에 열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니체를 통해 일방적인 평등주의를 지양하고 '싸움을 인정하는 탈현대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로랜스 해텁을 인용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김진석은 '니체 텍스트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을 통해 니체 해석의 역사가 만들어 온 지평들을 부분수용,보완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체를 교대하고 교체하면서, 어렵게 땅을 찾고 길을 찾는다. 우리는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에 착지한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그동안 김진석이 보여준 관점의 반복일 수도 있다. 김진석도 가끔 회색주의자란 말을 쓰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가끔 ' 진리는 회색 속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최소한 그 어딘가에서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 다양한 번역본의 니체 저작이 나오고 또 다양한 해석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 책이 학술적으로 꼼꼼함이 돋보인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이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니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던져준다는데,또 대중적읽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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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평전 - 부치지 않은 편지
이윤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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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셋에 죽은 김광석 보다 오래 살았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더 일찍 죽은 이들을 추월하여 살고 있다. 김광석은 언제나 내게 '형'의 이미지였다. 그런 마음 속 이미지와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는 작은 충격을 만든다. 그가 죽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멈춰세운 후에도 나의 시간은 떠밀려 가듯 흘러 왔기 때문이다. 젊은 김광석을 보면서 드는 낯섦은 그렇게 떠밀려온 시간이 만든 틈이다. 나무의 옹이를 쓰다듬는 심정으로 실로 오랜만에 김광석을 만난다. 

나는 김광석을 좋아했다. 그렇다. 정말 좋아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왜였을까?  <김광석 평전>을 읽으며 내가 왜 그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아꼇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선 '보이지 않는 특별함'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 세대 사람들 중에는 김광석을 좋아하는 이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나름 팬이라면 팬일 수도 있는 층이 꽤 넓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라도 그에 대해서라면 거들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의 애정은 그런 '보편적 애정'을 거두어드리는 방식에 있다. 그를 내 마음 속에 더 특별하게 남겨 놓는 방식은 그에 대해 그런 보편적 애정을 수동적으로 퇴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광석'에 대한 이야기도, 그의 노래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지나온 20대를 김광석과 함께 봉인했다. 나의 20대는 김광석과 함께 흔들렸고 그와 함께 사멸했다. 여기서 사멸은 그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죽고 난 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서른을 넘겼고 서른 어느 즈음부터 나는 김광석을  피했다. 장마가 시작되어도, 코 끝에 겨울 냄새가 흘러도, 아무 일도 하기 싫은 흐린 날에도, 돌이키고 싶은 추억들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올 때도, 나는 애써 김광석을 피했다. 나는 내 20대를 그와 함께 묻어두고 싶었다. 가끔 서글픔이 밀려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의 심연으로 다기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결국 이런 생각들임에도 김광석을 운운하는 것은 내 내밀한 공간을 들먹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대중음악의 보편성이고 거기에 삶의 노래와 사람의 노래를 들려준 김광석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내 20대를 사랑했기에 섬세하게 그에 공명했으며 또 어느 시점에선 그것 조차 물 밑으로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김광석을 처음 알게된 건 고등학교 자율학습 시절이다. 친구가 듣던 카세트를 빌려 들었는데 그게 <동물원 2집>이었다. 나는 그들의 순수한 노래에 빠져들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필두로 <혜화동>까지. 어떤 노래 하나 버릴 곡이 없었다. 이 음반에서 나는 김광석, 김창기, 박기영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 때는 김광석에 비해 김창기나 박기영의 설익은 목소리를 더 좋아했다. 2집에서 나는 특히 박기영이 부른 <이별을 할 때><별빛 가득한 밤에>같은 발라드를 좋아했다.(나는 아직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동물원에 대한 관심은 1집을 듣게 만들었다.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와 함께 김창기가 부른 <잊혀지는 것>은 한동안 나의 18번이었다. (나는 김광석이 <다시부르기>에서 노래한 버전보다 김창기 버전을 더 좋아한다. 무기교로 덤덤하게 불러서 그렇다.)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도 나의 '동물원'에 대한 애정은 가시지 않았다. 김광석이 탈퇴하고 난 이후에는 그의 솔로 앨범도 찾아 들었고, 박기영의 솔로 앨범도 들었다. (이 둘은 모두 카세트로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테잎의 상태는 웅웅 거릴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김광석의 1집에서는-확실히 그의 이후 음반들에 비하면 범작일 수 밖에 없는데- <기다려줘>,<너에게>,<슬픈우연>등을 좋아했다. 1집만 비교해 볼 때는 비슷한 시기에 구한 박기영의 앨범이 사실 더 애정이 갔다. <백마에서>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 곡은 동물원 5집에 재수록된다. 하지만 박기영 솔로앨범에 있는 곡이 훨씬 좋다. 눈이 내리는 날마다 이 곡을 얼마나 들었는지.) 다른 멤버들중 기타를 치던 이성우가 프로그레시브 장르로 음반을 내었는데 사실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다.  

김광석이 동물원 멤버들 중에서 눈에 확 들어오시 시작한 건 2집부터다. 나는 이 앨범을 대학 동기들에게 무척 많이 선물했다. 마땅히 줄만한 선물이 없으면 김광석의 음반이었다. 나는 동기들 사시에서 음악을 좀 안다는 축으로 평가 받았고 내가 고른 음반에 친구들의 반응은 '역시'였다. 더 신이나서 동네 방네 김광석 2집을 선물했다. 그리고 과방에서는 그의 첫번째 히트곡이라할 만한 '사랑했지만'을 기타를 치며 불러댔다. '사랑해에지..마....안.    그대를' 이 곡은 물론 내게 좌절을 안겨준 곡이기도 했다. 김광석 처럼 잘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잊혀지는 것'이 좋은 지도 모른다.더 문제는 우리 과에 지금은 연극 연출을 하는 한 선배가 있는데, 이 곡을 나보다 10배쯤은 잘 불렀다는 데 있다. 하여간 나는 나름 '김광석 전도사'로 맹렬히 활약했다. 하여간 조금 지나니까 모두들 김광석에 주목했다. (내가 열심히 뛰어서 그런건가? 아닐것이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뛴 건 역사에 기록되지 못햇다.^^) 

1000회를 넘긴 학전의 콘서트에도 나는 세 번쯤 갔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학전 위에는 작은 커피샵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인테리어가 꽤 괜찮았다. 거기서 공연을 앞두고 있는 김광석을 흘깃 흘깃 보기도 했다. 쑥스러워서 싸인 같은 것은 부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고 있는데 제일 앞 보조석에 앉은 여자 하나가 노래 하는 내내 울었다.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김광석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손수건....이거 라도 쓰세요. 괜찮아요. 좀 지저분하긴 해도...괜찮아요.자" 하며 사양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면서 " 애인이 군대 가있나요. 하여간 전 좀 짧게 단기사병,6방으로 갔다 왔는데...요즘 30개월인가요.좀 줄었나요. 하여간 너무 길어요. 군대 간 사람도 그렇고, 기다리는 사람도 그렇고...그런 생이별이 없지요. 빨리 통일이되서 좀 ...."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중가요는 원래가 동새대와 호흡한다. 그렇기 때문에 60먹은 사람도 젊은 시절 듣던 노래를 들으면 지난 추억이 떠오르고, 70먹은 사람도 그렇고...내게는 김광석이 또 그렇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나의 20대의 시련과 좌절, 사랑과 배신, 고민과 탈출 속에 있었다. 학교 다니며 이런 모든 고민들을 기다려주던 곳은 술집이었다. 나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혼자 술마시러 내려가기도 했다. 가끔은 6시쯤 들어오는 같은 과 친구들이나 선배들을 만나서 머쓱해지기도 했다."야..왜 혼자 와있어" 하여간 이 술집에서는 늘상 김광석 노래만 또 틀어놨다. 술집 형과 친했기 때문에 아무 때나 혼자 가서 술 먹어도 눈치를 주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가끔 청소도 해주고 심부름도 해주고. 이 양반은 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이 나오면 '야...거 봐라. 광석이도 그러지 않냐.' 라며 위로가 되지도 않는 말을 해 주었다.(사실 진짜 위로는 그 형과 그 술집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거였다. 그 형은 내가 대학을 1-2년뒤 가게를 정리했다. 가끔은 그가 보고 싶기도 하다. 무척이나 반겨줄 텐데) 재미난건, 내가 아내와 처음 만난 날 아내를 데리고 간 곳도 그 술집이고 그날도 김광석을 주구 장창 틀어댔다. 그 술집은 의자 하나 제대로된 세트가 없을 만큼-여기저기서 주워와서 그렇다- 후졌는데 아내는 그런 분위기를 무척 좋아해주었다. 언젠가 내게 "그날 그 술집에 가지 않았으면 아마 나랑 흐지부지되었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인생 재밌는거는 그런거다. 사랑와 번민의 20대의 난망함을 소진하던 곳이 결국 희망의 싹도 키워준거..인생 참 재밌다.  

나는 김광석 노래 중에 <기대어 앉은 오후>를 좋아한다. 한 낮의 컴컴한한 이국의 단칸방, 열리지 않는 창문,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 멀리 지붕 뒤로 보이는 작은 바다한 조각,낯선 언어들 속의 고립...중고 오디오에서 <기대어앉은 오후>를 좋아하게 된 건 그 때 기억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데 나와 내 공간만 차갑게 동면하고 있었다. 김광석의 앨범 중에는 박기영이 피아노 반주한 곡과 기타로 연주한 버전이 각각 있는데 모두 마음에 든다. 

김광석이 죽던 날, 내 주변 사람들은 술을 마셨다. 김광석이 죽다니...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어땟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술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많은 나이를 살고 있다는게 부끄럽지 않아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끔은 그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누가 그의 상처와 고민들을 알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나와 그는 분명히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인연의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의 작은 인연도 생겼을 것이다.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마저 그의 이른 죽음이 앗아갔다. 그래서 살아생전 나는 그와 노래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나의 20대는 그의 노래가 배경이 되지 않고 울린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삶을 깊은 우울로, 때로는 희망으로 채워주었던 광석이 형, 지난 힘든 시절, 형의 노래로 함께 그 시간을 견뎌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도 60이 되면 해보고 싶다던 오토바이 여행을 하시며 아름답고 자유로운 노래를 울리고 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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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리뷰에 <김광석 평전>에 대한 책이야기는 거의 없다. 김광석은 그렇게 동시대를 산 사람에게 항상 과거의 추억과 함께 오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부조된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는 늘 지난 시간 속에 고정된 풍경이다.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김광석의 삶을 따라간다. 그러면서 각 앨범을 통해 그의 음악이 어떻게 성숙해나가는지를 그려낸다. 김광석 노래가 가진 힘'삶의 노래,소통의 노래'에 대해서도 구체화 해나간다. 무난한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가지 크게 아쉬운 점은 이 평전이 그다지 '발로 뛴' 평전이 아니던가 아니면 그 흔적을 스스로 지운 것이다. 대개 인용되는 인터뷰들은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거나 신문,PC통신의 자료들이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미묘한 문제,유가족에 대한 배려 등등으로 작가가 더 이상 쓰지 못한 부분이 있음은 작가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떠나서 김광석의 주변인물들이나 동료들의 증언 등등이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예를 들어 김광석이 자기 음악 인생에 큰 선생님이라고 했다는 김민기의 인터뷰도 하나 정도 들어있으며, 김창기나 안치환,강산에 등등 동료들의 인터뷰도 거의 실려 있지 않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발로 뛴' 평전을 처음부터 기획하지 못했다면 좀 아쉬운 부분이다. 작가 역시 이것이 '김광석 평전'의 시작이되길 바란다는 소망처럼 더 충분한 자료와 인터뷰들으로 그의 이야기가 다시 쓰여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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