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크 독트린 -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살림Biz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스파이크 리 감독의 <제방이 무너졌을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습한 뉴올리온즈를 다룬 영화다. 스파이크 리는 재난에 대처하는 미국 사회 모습을 통해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허술한 지 여실히 보여준다.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이곳은 이디오피아나 이라크가 아니라구요. 여기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맞습니까?"  그리고 다른 스파이크 리의 영화처럼 이 영화도 카트리나라는 재난 앞에 드러난 미국 사회의 흑백문제(그리고 이의 물적기반) 를 건드린다. 이미 오래전부터 침수가 예상되었다는 점들, 또는 음모론이긴 하지만  부유한 백인지구를 지키기 위해 제방을 붕괴시켰다는 소문 등등.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이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는 그런 소문들이 돌았다는 것은 흑백갈등과 이에 비롯되는 빈부의 문제가 오랫동안 이 지역의 쟁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재난 앞에 사리진 '국가'를 보여준다. 부상당한 아이를 앉고 부실한 대응책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건 흑백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백인이고 내 아이는 지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 그는 재난 앞에서 '국가의 공백,국가의 무능,국가의 책임 방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후안무치한 국가는 재난을 마치 바랬다는 듯이 발빠르게 움직인다.

  재난의 예방과 복구에 수수 방관하던 이들이 갑자기 열기를 띄며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재즈의 고향' 뉴올리온스를 새로운 실험실로 여기기 시작한다. '재난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과 스파이크 리의 <제방이 무너졌을 때>가 서로 얼굴을 맞대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노 로고>로 반-신자유주의측의 여전사로 등장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 역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실제 뉴올리온스를 취재하며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이나 자연 재해등의 충격적인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일련의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허리케인이나 쓰나미등의 자연 재해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대외정책이 만들어낸 사회가 공통적으로 겪는 트라우마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것을 '쇼크독트린'이라고 명명한다. 사회적 '쇼크 요법'은 일부에게는 죽음에 가까운 치명적인 것이지만 일부에게는 새로운 기회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런 다양한 예들을 찾는다. 그녀는 다양하게 변주된 '쇼크'요법 속에서 이를 주도하는 한 세력들에 주목한다. '밀튼 프리드먼과 시카고 학파'가 그들이다. 나오미 클라인에 의하면 그들의 '자유방임적 시장주의, 민영화, 세금감축'같은 프로그램들은 케인즈의 실험이 끝나가는 70년대 부터 지구 방방 곳곳을 돌며 재난을 일으키거나 또는 재난을 통해 자신들의 복음을 설파해왔다. 그녀는 프리드먼의 실험을 '경제적 쇼크요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오미 클라인이 말하는 '쇼크'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녀는 단순히 인식상의 충격같은 가벼운 느낌의 통증을 쇼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적인 쇼크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열 치료법으로 연구되던 이웬 카메론의 실험을 은유적으로 예를 든다. 이 실험은 CIA의 지원을 받아 적국의 요원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기도 한 것이다. 일종의 '고문'인 셈인데, 그럴싸한 말로 '감각박탈법'이다. 시공간의 감각을 없애고, 폭력과 전기충격을 가한다. 자기 정체감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다량의 정보를 무처별적으로 제공한다. 피고문자는 한마디로 넋을 놓아버린 상태가 된다. 이웬 카메론은 정신병의 치료를 위해 '백지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가설로 부터 이 실험을 시작했다. 즉 완전히 새로운 인간형을 주입하겠다는 것이다. <시계 태엽장치 오렌지>의 알렉스처럼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프리드먼과 시카고 학파가 남미를 비롯해서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 한 짓이 이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또한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방법이 동원되었다. 전쟁을 통해 폐허가 된 이라크나 쓰나미로 어촌 공동체가 붕괴된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들은 동일한 수법을 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유방임적 시장주의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경제가 붕괴되거나 독재정권의 폭력이 일상화되면 국민들은 공포에 시달린다. 일종의 쇼크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모든 것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난 다음 이들은 새로운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칠레의 아엔데 정권을 붕괴시킨 '시카고 보이즈'들의 이야기부터 이런 틀에 맞추어 설명한다. 미국이 자국의 정치적 이해와 대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남미에 독재정권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본주의를 설파하기 위해서 공포정치가 필수적이었다는 것 역시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3200명이 행방불명 되었고 8만명이 투옥되었다. 그리고 20만명이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들은 노조나 좌파적 문화 인사들을 일거에 척결한다. 국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온순해진다. 자유시장은 이런 공포를 동원해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시카고 학파'만이 이런 요소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할 뿐이다. 또는 아예 거론하지 않는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런 '공포정치'의 요소를 단순히 '인권유린'의 부차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유엔을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의 인권 보고서들이 이 공포정치와 경제 정책을 분리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브라지의 <네버어게인>보고서만이 이 둘 사이의 공모관계를 제대로 언급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남아 있다. " 한 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는 경제정책의 경우엔 무력으로 집행하는 수 밖에 없다." 남미의 대다수 가난한 소작농들과 빈농,인디오들이 그들의 땅을 부자들에게 넘기거나 국유화된 자본을 민영화하는 것에 찬성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남미의 독재정권들이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밖에 없다. 잔혹학 폭력이다. 그것은 칠레나 남미에서 자유방임시장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나오미 클라인이 현재 기부 자본주의의 전도사로 변신한 제프리 삭스를 비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의 볼리비아 성공담에 가려진 그늘에 대해 그는 정말 모르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이라는게 클라인의 비판이다. 어쨋거나 시카고 학파에게 경제학은 수학이었고 그들의 처방은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이 형성된 곳에서는 하나의 유일한 정답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공식은 '모든 것은 시장이 해결한다. 개입은 시장을 왜곡한다.'라는 원칙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한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시장 개방이나 자유화가 자신들의 실험실이 요구하는 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늘상 항변한다. 실제로 이들의 프로젝트가 실시된 곳에서는 몇가지 공통된 현상이 발생한다. 하나는 사회 불평등이 극도로 발생한다. 쉽게 말해서 다 죽는 건 아니다. 대신 잘 사는 자는 더 잘살게 되고 못 사는 자,또는 보통 사는 자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이라크, 폴란드 등등에서 공히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를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경제 정책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쉽게 말해 돈 줄 좀 쥐고 있다면 신자유주의가 나쁠 이유가 하나 없다. 사업 기회는 늘어나고 기타 공공요금 등이 좀 올라도 그까짓거 원래 이용 잘 하던 것도 아니고, 돈 몇 푼 더 내면 구질구질한 꼴 안보고 다닐 수도 있는데 그 정도 기회비용이라면이야...)

그렇다면 미국입장에서 보면 외국에서만 이런 시카고 학파의 '자유시장주의'가 작동했을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추락한다. 닉슨 대통령은 지금은 '케인즈 시대'라는 언명을 통해 프리드먼을 실망시켰다. 또한 남미에서 벌인 추악한 정책들이 속속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원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은 회교혁명으로 쫓겨나고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역시 물러나게 된다. 남미와 아시아를 통해 호기에 찼던 프리드먼의 자유주의는 궁지에 몰린다. 그런데 바로 그 때 1세계에 역대 가장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대처와 레이건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대처의 성공을 포틀랜드에서의 애국주의와 연결시킨다. 떨어지는 지지율의 반전을 가한 대처는 이후 영국 최대 광산노조를 붕괴시키고 '주주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각종 민영화 정책을 취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영국병의 치유'로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가장 추운 겨울이 되기도 한다.  대처와 레이건 시기에 대해 클라인은 크게 다루지는 않지만 한가지 중요한 시시점을 건넨다. 나오미 클라인이 서있는 경제사적 위치와도 관련이 있다. 시장 붕괴에 대해 현실적이며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좌파 계열에서 말하는 '공황-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시장 붕괴가 좌익혁명만이 아니라 우익 반혁명도 촉진한다는 이론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지지하는 방식은 케인즈주의적 온건한 시장 조정이다. 프리드먼이 전통 좌파보다 케인즈주의를 적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도 그런 취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처와 레이건 시대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이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은 미국의 국내정책보다는 대외 정책과 경제정책사이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국의 대외정책문제를 다국적 기업의 경제적 이해 관계의 반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일면적이긴 하다. 여기에 설령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군사적,정치적 이유들 까지 동시에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911테러로 본토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실험하기 전부터도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확산과 이데올로기적 강화작업에 대한 내부적 고찰역시 필요 하다고 보인다. 호미바바의 식민지-피식민지의 상호 양가성 문제라는 틀을 빌어보자면 미국이나 영국의 자국내에서의 신자유주의 영향력 문제도 결코 간과해서는 곤란한 부분이다. 특히 나오미클라인이 경제적 침탈 문제에 집중하느라 국내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독자들이 스스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대처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외치면서 사상적으로는 복고주의적 보수성을 보여준다. 그녀가 도덕적 승리를 위해 써먹던 구호가 '빅토리아시대로 돌아가자' 였다. 60-70년대 혁명의 시대가 보여준 급진적 문화변동에 대한 반혁명적 구호이지 퇴행적인 호소였던 셈이다. 그런데 '강한 영국'이라는 구호와 함께 대처의 보수주의 혁명은 국민에게 먹혀들어간다. 이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레이건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부시정권의 '기독교세력'과의 연대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이 책 <쇼크독트린>에서 특히 눈에 들어온 내용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권 이양과정과 재난수출국가 이스라엘의 부분이었다. 남아공 부분은 진보정권의 국제적 감각의 부재나 정치적 감각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하나의 예가 된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은 정권 이양을 앞두고 경제적 부의 집중과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들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ANC 정권은 정치 협상의 중요성만을 생각하다가 그런 경제적 운용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 결국 정권 이양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아파르헤이트 기간동안의 부채와 경제적 불평등이 만든 사회문제 밖에 없게 된다. "ANC는 명목상으로만 다스릴 뿐이고 실권은 국민당이 갖고 있었습니다. ANC 정부는 정치권력을 잡긴했짐나 허울상의 통치를 했을 뿐이죠. 실제 통치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의 비유를 인용하면 '달랑 집 열쇠만 주고 금고 비밀 번호는 알려주지 않은 셈'이다. 이런 문제는 독립국가나 신생정부의 역사를 가진 곳에서는 늘상 반복하는 일임에도 남아공의 정부는 그런 역사의 경험을 살려내지 못했다.  

 '국가의 아웃소싱'이라는 대목도 무척 흥미롭다. 흔히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의 공통된 부를 사영화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신제국주의>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 강탈에 의한 축적이 수행하는 것은 매우 낮은 비용으로 일단의 자산을 방출하는 것이다.과잉축적된 자본은 이러한 자산들을 취득하여 즉각적으로 이들을 이윤 창출이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감가된 자본 자산은 과잉축적된 자본에 의해 불티나는 가격으로 판매되어 이윤 창출이 가능하도록 자본순환과정에 재회전 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국가의 공적 자산을 다양한 작업을 통해 저평가된 상태로 만들고 민영화를 통해 매입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본의 입장에서는 공적 자산으로 접근이 금지되었던 영역들이 새롭게 황금알을 낳는 시장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안보시장'이다. 근대 국가의 기본기능이라는 '국토안보'가 '아웃소싱'의 영역으로 변하는 것이다. 언젠가 MB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대하여 농담삼아 '휴전선도 외주주어서 캡스에서 지키게 하지' 라고 빈정거렸는데 우화적으로 보자면 틀린 비유는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안보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안보시스템'의 판매로 이미 악명이 높다. 전쟁과 테러 속에서도 이스라엘 경제가 꿈쩍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서구 선진국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에 '안보상품'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가 주변 아랍국가로부터 섬처럼 존재하는 국가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국가 전체에 실제적인 장벽이든 보안장벽이든 '국토안보'에 필요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테러리즘이 전세계적인 이슈로 부각되는 순간 이스라엘의 첨단 안보시스템은 성장하는 새로운 사업이 된 것이다.나오미클라인은 이스라엘과 관련된 다양한 보안정보회사들의 성장세를 보여줌으로써 세계 경찰 미국과 미국에 납품하는 이스라엘의 공존관계를 보여준다.   

나오미 클라인은 결론에서 쇼크 효과가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쇼크효과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것이 노리는 지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점점 자구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여러국가들이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해 지역연대를 강화한다거나 자구적 대안들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르몽드 디플로마> 한국판 10월호에 보면 이스라엘 가자지구에 대한 정책에 반대하여 이스라엘 불매운동과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또한 오바마 정권 하에서 등장한-물론 오바바라고 별반 다를 수는 없지만- 진보적 유태인 그룹인 J 스트리트 기사도 볼 수 있다. 나오미 클라인은 남미에서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한 '미주볼리바르'의 연대에서도 희망을 본다. 물론 남미의 현재 상황도 사실 만만치는 않아보인다. 미국은 언제나 중동과 남미에 각각 쓸 수 있는 카드를 들고 있다. 중동이라는 카드에는 '테러리즘'이라는 씌여있고, 남미에는 '마약' 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다. 이 두 카드는 필요에 의해서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미국이 쓸 수 있는 카드다.  <르몽드 디플로마>를 보면 미국의 반격 역시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페루 등은 친미국적인 성향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남미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며칠 전 셀라야 대통령의 복귀 문제에 대해 합의를 끌어낸 온두라스의 경우는 향후 남미 정책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될 듯 보인다. 전세계적 금융시장 붕괴와 오바마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와 일방주의는 끝났다고 보는 것은 여전히 간절한 소망에서 나오는 환상에 가깝다. 물론 오바마의 미국이 부시의 소통부재의 미국보다는 유연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바마가 양떼를 모는 목자도 아니고 한 국가의 외교정책이나 방향을 대통령 한 사람이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득세에 경종을 울린 것은 사실이다. 대안적 자본주의들이 조금 기지개를 켤 수 있는 기회를 얻긴 했다. 하지만 자본의 근본적 속성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가 될 것인지는 여전히 끊임없는 투쟁과 고민 속에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농사꾼 세르미호 토마셀라의 말로 끝을 맺자. 그는 독재와 연합한 다국적 기업들의 거대한 착취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국엔 진실과 정의가 승리를 거둘겁니다. 수세대가 걸릴지도 모르죠.저는 이러한 투쟁을 진행하다 죽음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젠가는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 저는 적이 누구인지 압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햇빛에 반짝이는 몽돌같은 소설이다.  

동글 동글한 자갈돌들이 서로 부딪히며 까르륵 거리듯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손 끝에 웃음이 묻는다. 그런데 넘긴 손 끝에는 늘상 조그마한 그을음이 따라 붙는다. 까만색 그을음. 그렇다. <영국왕을 모셨지>는 몽돌처럼 '까맣게' 빛난다.  '블랙 코미디'라고 하던가. 그러나 차가운 금속성의 검은색은 아니다.  비로드의 검은 색이다.  판소리에서 좋은 광대는 사람을 웃기다가 울리다가 쥐락 펴락한다. 좋은 블랙 코미디 작가도 이와 같다. 쥐고 흔드는 면에서는 그 역시 광대이다. 그들의 일광설을 따라 들락 말락 하다보면 해는 어느 새 뉘엿 뉘엿 산너머로 떨어지는 법이다. 보후밀 흐라발 역시 좋은 작가답게 그렇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독자를 '쥐고 흔든다'. 웃음의 스타카토와 한숨의 리타르탄도로 말이다.    

 주인공 디테는 꼬마라는 뜻이다. 견습 웨이터다.  
"명심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 하지만 또 명심해라. 넌 모든 걸 봐야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  
 마치 구중궁궐 내명부에 들어간 신출내기 궁녀에게 상궁마님이 건네는 말 같다. 초보 웨이터 디테의 처지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전제 권력을 중심으로 탐욕과 음모가 넘실대는 궁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권력과 부의 이면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시골출신의 웨이터 보조 디테는 부자들의 삶을 보며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돈'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그에게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디테가 바라보는 부자들은 좀 오묘한 인물들이다. 멋진 옷을 입고 멋진 여인들과 함께 멋진 요리를 먹지만 무료한 삶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부질없는 재미나 싸움, 토론을 즐긴다. 그 모든 것이 '부자들의 취향'일 뿐이다. 디테는 티호타 호텔, 파리 호텔 등 조금씩 성격이 다른 호텔을 거쳐 가며 그들을 겪는다. 거리의 여인들을 사서 관음의 쾌락만 즐기는 금융인들, 근엄함을 잊어버리고 아이로 돌아가버리는 장군, 대통령 등등. 디테를 그들을 관찰하고 그 이야기만을 그대로 전할 뿐 다른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비춰지는 인물들은 그냥 한편의 오페라부파의 주인공들처럼 소동을 벌이고 또 언제그랬냐는 듯 돈을 지불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디테가 그리는 인물들 면면은 그 모두 줄이 달린 목각인형들 처럼 희화되어 있다.  

 디테는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의 지도 아래 제법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웨이터로 성장한다. 그리고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웨이터가 되기에 이른다. '영국왕'을 모셨던지 '이비니시아황제'를 모셨던지 그닥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자기 프라이드로 언급되는 일이지만 그건 오랜 경험의 축적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디테의 경우도 실제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경험적인 사건과 그가 '아비니시아 황제'를 모신 일의 경험적 가치,또는 의미론적인 가치에는 시차가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디테는 더 많은 '아비니시아들'을 모시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를 모신 웨이터'로서의 '초라한 위용'이라는 역설적 위치에 다다르게 된다. 그건 오랜 풍파를 겪어온 사람이 가진 삶의 혜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텔 웨이터로서 세상의 부조리함과 부와 권력의 뒷모습들 바라봐오던 디테의 삶에도 이제 역사적 사건의 끼여들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체코에도 "드리운 것이다. 그 동안의 희비극은 소동극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과해야하는 힘없는 디테를 가학적인 상태로 던져놓는다. 디테는 우연히 민족주의적 체코 청년들에게 곤경을 겪는 리자라는 열성 나치당원을 돕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제 친독 부역자가 된 셈이다. 작가는 이제 허구와 역사가 중첩되는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의 연출에 골몰하게 된다. 독일 신부 리자를 임신 시키기 위한 당국과의 합법적 교섭이 시작된다. 

"젊은 간호사 손이 어찌나 능숙한지 그녀는 몇 분 뒤에 정액 두 방울을 종이에 묻혀 들고 나갔다. 삼심분 뒤 내 정액은 아리안 여자의 질에 적합하며 수태를 시킬 수 있는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결과 독일 명예-혈통 보호청이 내가 독일 혈통의 아리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도장을 힘있게 찍어 결혼허가서를 건네주었다. 반면에 체코 애국자들은 같은 도장을 그렇게 꾹 눌러 사형에 처해졌다" 

 후에 디테가 공산 체코정부로 기소당한 주된 이유는 '독일 신부의 임신'과 관련이 있다. 디테 역시 자신의 죄가 직접적으로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상황을 이용하거나 외면한 죄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문기사는 여기 이 사람들과 또 다른 네명을 판결에 따라 총살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매일 죄 없는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손에 성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 책상에 놓인 포르노 사진을 넘기고 있었다." 

 굳이 이런 인용을 한 것은 디테가 겪게 되는 불운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는 처음부터 성적인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애로틱하다기 보다는 귀엽거나 혹은 위의 예처럼 아이러니하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독일은 패망한다. 그러면 리자와 디테는 이제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사이에 유전적으로 우수하며 과학적으로 개량된 혈통의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여간 내게 이 희비극의 결말 부문이 주는 청각적 자극과 그로 인한 상상력은 나중에도 이 책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진격해 오는 탱크 소리 '쿵쿵쿵'과 끊임 없이 못 박는 소리 '쿵쿵쿵' 이라니... 솔직히 나는 그 청각적 효과가 너무도 강해서 이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책이 '쿵쿵쿵'거리는 것 같았다. 작가도 디테도 못질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을 과감하게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그 침묵의 효과가 청각적 이미지를 더 긴 잔향으로 남긴다. 이정도 까지만...  

 물론 이 책에서 좀 어색한 부분도 있다. 인물 개인의 심경변화에 중요한 사건이 되는 부자들의 수용소 '비둘기' 장면-일종의 존재론적인 발견-이나 벌목하는 곳에서 만난 불문과 교수와의 만남-일종의 인문학적 발견- 같은 것들은 극적 전환 대목이 된다. 그런 두 번의 계기 후에 변하게 된 디테의 모습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좀 급작스러운 것 같다. 또는 인생을 깨달은 자들이 닿게 되는 예의 '수도승'과도 같은 삶이 통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배경 마저 눈 덮인 인적 없는  산골이 되다 보니 더욱 그렇다. 호사스로운 호텔리어의 삶과 눈 덮인 수도자의 삶이 극적 대비를 이루게 되어 효과적이기는 하다만 말이다.  

 소설은 희극과 비극을 종횡무진하지만 작가는 결말부분에서 눈덮인 겨울 산속에 인동초를 하나 피운다. 설원을 뚫고 온 마을사람들말이다. 그들은 와서 별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없었다면 책장은 분명 쓸쓸히 덮여 졌을 것이다. 사람을 '겪어야','영접해야만' 만 했던 늙은 디테에게, '아비니시아황제'를 모셨던 바로 그 디테에게, 사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흰 눈 처럼 쓸쓸하지만 그렇게 해피앤딩인 셈이다. 

 그런데 혹시 사람들 떠난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햇빛쬐는 몽돌들, 그 포옹 사이로 바닷물 빠지는 소리 들어 보셨나요? 이 소설에서는 그런 소리가 납니다. ^ ^ ;  

p.s) 제목에 나오는 '프레드릭'이 누구냐구요?  햇빛을 모으는 프레드릭이에요. 엄마들은 많이 아실껄요.그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주인공이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 할인행사
앤드류 도미닉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이 영화 dvd를 찾다가 지난 페이퍼들을 찾게 된거다.결국


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영화제목이 좀 길다. 제목만큼이나 상영시간도 길다. 대략 2시간 40분 정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수 없다.

바로 DVD로 나왔다. 전주 국제 영화제를 찾았던 행운아들은 이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행운아들이고 그들의 심미안에 박수를...

올해 나를 가장 기쁘게 했던 영화는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내 주변 반응은 '그게 도대체 뭔 말이에요' '뭐야..끝이 그게' '아...진짜 답답하네' 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봉태규가 나온 <가루지기>에 더 큰 박수를 보낼 듯 하다. 취향이야 취향이니까..박수를 보내도 상관없다.(진짜루) 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경험의 일천함과 텍스트를 읽는 노력의 부재를 자신의 무기로 삼아, 당당하게 진지한 영화를 매도할 때-대개는 재미없다는 말로 통합된다. 도대체 재미란 무엇인가?- 는 정말 정말 마야코프스키의 싯구를 실행에 옮기고 싶어진다.

이 영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에 가장 훌륭하다. 서부시대 실존했던 제시 제임스라는 갱 역학을 맡았던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로 부활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영화는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열차 강도 한 번 이외에는 별 다른 액션이 없다. 영화 제목이 이미 제시 제임스의 죽음을 밝히고 있으니까 제시 제임스가 로버트 포드에게 죽는다는 것을 알려도 그닥 스포일은 되지 않을 듯 하다. 제시 제임스가 죽는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20살이 된 로버트 포드가 제시 제임스 일당에 합류하면서 시작한다.로버트 포드 역을 맡은 유약하며 지적으로 보이는 친구는 커시 애플렉이다. 이름이 좀 낯익지 않은가? <굿 윌 헌팅> <아마게돈> 등에 출연했던 밴 애플렉의 동생이다.

로버트 포드는 제시 제임스의 추종자다. 요즘말로 하면 열혈 팬이다. 그의 기사를 수집하고 그와 관련된 픽션들을 모두 읽는다. 심지어 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까지 기억해낸다. 이 소심해보이는 청년이 장차 제시 제임스의 암살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제시 제임스는 우상이자 아버지이고 또한 절대적 가치이다. 그랬던 그가 왜 제시 제임스를 죽이고자 할 까? 프로이트적으로 말하자면 살부를 통해 아들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함이었을까...아니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절대적인 미' 에 대한 타나토노스적 충동이었을까...왜 채프먼은 그래서 존 레논에게 총구를 겨누었을까? 결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돌아온 브래드 피트를 보자.

브래드 피트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뽀쏭 뽀송한 그였을때가 가장 좋았다.

그 이후..나는 그에 대해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파이트 클럽>에서 뭔가 좀 다른 느낌을 주었지만...

결국 내게 그는 이 영화로 그가 허방이 아닌 한방임을 보여준 셈이다..

제시 제임스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정말 매력적이다. 그가 '안티 히어로'로서 매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악마적으로 집요한 갱 두목이지만 이웃집의 선량한 가장이기도 하다. 그가 어린 아이를 상대로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고 이어서 잔설이 남아 있는 벌판에나와 말에 기대어 우는 장면은 그의 복잡한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성과 속'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또한 '폭력과 침묵'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이다. 브래드 피트는 이런 양가적인 내면을 가진 인물을 하나로 브랜딩해 내는 일에 성공했다. 무심한 듯 아름다운 서부의 풍광을 연출해낸 감독의 미장센도 큰 몫을 했다. 



영화는 아주 느릿 느릿 진행된다. 중반부까지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나 싶을 정도다. 마치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교향곡을 듣는 느낌이다. 지붕에서 땅을 향에 떨어져 내리는 거미줄처럼 흔들거리며 중심으로 치닫는다. 장면들은 눈 내리는 소리처럼 침묵과 침묵 사이를 매운다. 실제 영화에서도 눈 덮인 장면이 자주 나온다. 서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눈 내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처음 본다.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느린 템포 속에서 극적 사건을 맞아서 느림과 느림을 충돌시켜 긴장감을 극화하는 방식이다. 이건 정말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장면들에서 그런 '느림의 긴장감'을 맛볼 수 있는데...위 사진에 나온 씬도 그런 장면 중에 하나이다. 두 형제가 제시 제임스라는 거목을 잡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선을 나누는 장면이다. 누런 풀빛이 눕는 와중에 아무런 대사도 없이 둘의 얼굴과 펌프질하는 물 떨어지는 장면가지고 거사를 앞둔 긴장감을 표현해낸다. 이런 표현이 좀 뭣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화는 씬과 씬 사이의 이동장면이나 나레이션 장면에서 매혹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때로는 화각을 왜곡하거나 유리를 통해 비춰지는 장면들로 미장센을 구성함으로써 다분히 몽환적이고 선적인 느낌을 준다. 

영화는 제시 제임스 암살 이후에 조금 더 진행된다. 제시 제임스를 800번을 죽인 로버트 포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슴을 누군가에게 한 웅큼 움켜 잡혀 있는 먹먹함을 준다. 돌아보니 영화 내내 제시 제임스는 타자였을 뿐 로버트 포드가 나의 한 구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조연같은 주역이기도 했고 그의 시점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려는 카메라 앞에서도 나는 로버트 포드의 좌심방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시 제임스는 로버트 포드의 뒷덜미를 바라보면서 의자에 앉아 시거를 피우고 있다.  

영화 길다. 그런데 이 영화 정말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 나이트 (2disc)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 


이 친구가 배트맨이다.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약간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친구다.

물론 잘생겼고 돈도 많도 믿음직한 친구들도 몇 명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약간 '과대망상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의 '과대망상증'은 '악을 섬멸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그는 '아이구...주인님 이제 그만 쫌' 이라고 말하는 늙은 하인에게

"배트맨이 넘을 수 없는 선은 없어요"

라고 마치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어요'라는 철부지 부자같은 말을 한다.

물론 배트맨도 '악'을 전부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밤 마스크 쓰고 쇠가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는 것도 힘든일이다. 그래서 배트맨은 살짝 '자경단'의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이에게 그의 임무를 건네려고 한다.

늘 상 입으로 이런 말을 달고 다닌다. "배트맨이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라고 말이다. 지쳐버린 영웅이거나 벽에 부딪힌 영웅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는 '영웅의 자기정체성 혼돈'을 잘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배트맨의 고담시도 역시 그렇다. 가짜 배트맨도 나타나고 얼굴에 분칠 한 녀석이 나타나 오히려 '배트맨'덕분에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 그리고 물론 대중들은 그에 동의한다. ....'배트맨을 잡아라' 

 빌헬름 라이히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이(물론 여기서 라이히가 말하는 것은 속류 맑시즘을 말한다.그리고 이것이 또한 저변화되어 있기도 하다.)  대중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무능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가난한 이들이 도둑이 되는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왜 도둑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욕망을 스스로 즐기는가' 라는 지점에 칼을 들이댄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이명박을 찍었던 것에 분개하고 '계급의식이 없어' 라는 세살 먹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개탄보다 '왜 스스로 알아서 이명박을 노동자들이 지지했는가'의 '대중심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성격상으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계급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계급을 넘어서는 인간들의 심리적 한계이자 또 보편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모든 '독재'를 파쇼라고 칭하지만 실제 파시즘은 좀 다르다. 학자들마다 파시즘의 발생원인과 성격에 대해 좀 다르게 평가를 한다. 하지만 그 핵심에는 모든 파시스트 정당이 '대중동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비교적 제한된 파시즘론을 주장하는 로버트 팩스턴같은 경우에도 파시즘의 성장에 있어서 '대중동의'를 인정한다. 그는 파시즘이 초기에는 퇴역 군인같은 무리들이나 주변부 무리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말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파시즘의 가장 큰 토양이 된 것은 -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바로 '중간계급'이다. 즉 히틀러의 계급적 토대는 '중간층'이라는 거다. 요즘 말로 하면 '중산층'이다. 파시즘은 진행과정에서 국가별로 좀 차이가 있다. 몇 가지 공통된 점을 보면 '기존 우파들의 무능에 대한 반동,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척결, 강력한 민족주의'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20세기 초에 나타난 일종의 '뉴라이트'인 셈이다. (이걸 지금의 한국의 '뉴라이트'와 매칭시켜서 '이명박은 파쇼다' 라는 공식으로 쉽게 도출하진 마시길...내가 대중진보에 가장 혐오감을 느낄때가 그럴때다. 그것도 '포퓰리즘'이다. )

건강한 시민사회의 토대가 되는 '중산층' 과 '대중동의'의 중간계급은 차표 한 장 차이다. 물론 그 한 장 차이가 넘을 수 없는 차이이긴 하다. 어쨋거나 그런 위치에서 자신을 너무 강하게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불확실성의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 '성찰'을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불안정한 위인데 그 안에서 무엇을 그리 강하게 확실할 수 있겟는가? 그러다보면 이것 저것 '불안정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걸 멋들어진 말로 하면 '성찰'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세상물정 모르게 덥썩 믿다보면 하비 덴트를 믿게 된다. 어떤 영화 편집장은 미국 정치에 빗대어 하비덴트를 오바마에 비유했다.

우리나라에 빗대어 보면 아마 노무현이 될 듯하다. 지난 이야기 해서 무엇하리오만...'너네들 말이 다 맞아. 근데 그래도 노무현 밖에 없잖아' 를 기억한다. 대개는 영화 속 대중들처럼 나중에는 하비덴트를 몰아세운다. 배트맨 잡아오라고 말이다. 아니면 ' 진보니 뭐니 해봐야 별 볼일 없네'라고 '애라 모르겠다, 내 일 아니다.' 주의로 돌아간다.  배트맨도 밤 마다 옷갈아 입기 귀찮아서 하비 덴트를 후원한다. 부자들의 파티에 조커가 총질하면서 직접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조커는 총질을 하는데 무차별 살해는 잘 하지 않는다. 그건 양아치나 하는 짓이라고 조커는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의 웃음과 아버지,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는 조커...조커의 과거사? 그런데 조커의 말을 믿나?

 

'낮의 기사' 하비 덴트는 개인적 분노와 조커의 약발짓에 반쪽을 해가지고 팔팔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이런 과거의 '낮의 기사'들 지금 국회가면 많다. 현재 뉴라이트의 리더들...21세기의 대중진보들이 엄두에도 못 낼만큼 날아다니던 사람들 많다.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뉴라이트의 현재 리더들이 과거에 '거리'에서 얼마나 날아다니던 사람들이었는지.  


내게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바로 바로 이 친구 '조커' 다. 히스레저의 연기가 멋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순수 악이다. 푸잇...언젠가 써먹었던 말인데 또 써보자.

"...그래서 결국 너는 누구란 말이냐? " "나는 영원히 악을 원하면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괴테가 하신 말씀이란다.

다들 자기가 선이라고 믿기를 좋아하는데 조커는 스스로 '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당히 '너희들은 나의 자식이다' 라고 말하는 것같다.(나는 이런 캐릭터가 정말 좋다.) 괴테가 '악' 스스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이라고 말한 것이 그 이유때문이다. 배트맨이 멍청한 것은 이런 것 자체뿐만이 아니라 '영원히'라는 말 자체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때문이다. '선/악'은 영원한 수레바퀴이다.

 선은 악에 의해 만들어진다. '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즉 악이 있지 않으면 선이 생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알라딘에서 그냥 조용 조용 글쓰고 음풍농월과 비분강개, 농담따먹기로 소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선'이 되었다. 이명박이라는 '악'이 등장하면서 부터 말이다. 다른말로 하면 '이명박'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저기 멀리 있는 '신자유주의'에 강 건너 돌던지면서 무던히 살았을 것을 말이다. 인하대의 김진석 교수는 이런 '선'들이 발끈할지도 모를 말인데 "'신자유주의에 모든 돌을 던지지 말라." 라고 일침을 가한다.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이해될 일이지만 세상의 배트맨들에게 '악'이 필요하다. 존재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말이다. 나는 김진석 교수의 메시지를 슬쩍 '진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을 요구해보라고 읽는다. 뭐 더 나쁘게 읽어도 할 수 없다. 

조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메시지다. 이미 틀 밖에 있다. 배트맨이 린치로 조커의 입을 열려고 하지만 조커는 '그런 걸로 통하지 않는다' 라고 웃는다. 열나게 얻어터지면서도 말이다. 배트맨도 그걸 알아버렸다. 결국 조커는 모든 판을 짜고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배트맨을 움직인다. 자기가 입을 열고 싶을때 열고, 또 일이 적당히 꼬이게끔 만든다. 본인에게도 시간을 벌고 말이다.

두 개의 배 씬은 좀 작위적이긴 했다. 일종의 게임이론이다. 버튼 눌러라 안 누르면 제들이 누른다. 둘 다 안누르면 둘 다 죽는다. 한쪽은 일반 시민, 다른 한쪽은 간수를 비롯한 제소자. 건강한 시민들은 학습한데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1인 1표 보통투표'를 한다. 제소자들은 뭐 웅성거리기나 할 뿐, 간수들의 총앞에 부재자 투표란 없다.

결과가 아주 재미있다. '대의민주주의제.. 엿먹어라.' 라는 결과다. 건강한 일반 시민의 투표결과는 거의 두배 차이로 상대방 배를 터뜨리는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소심한 시민들중 누가 마지막 버튼을 누를 것인가 이다. 죄수들 중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죽기 싫으면 눌러야한다. 간수가 기폭장치를 들고 벌벌 떨고 있을때, 덩치 큰 죄수가 스스로 그 역을 맡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버튼을 바닷가에 버린다. 그러니까...뭔 고하니 예전에 내가 언급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네가 만든 게임의 룰을 따르지 않겠다.' 라는 일종의 '탈주'방식이다. 물론 비슷한 일이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대롱대롱 빌딩에 매달려 있던 배트맨은 기세등등하다. 세상에는 너처럼 나쁜 놈만 있지 않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독이 약한 마음이 들었던지 아니면 착한 이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던 듯 하다. 몇 몇 개인의 양심적 선택. 물론 이것이 세상을 나아지게 해준다. 그런데 이거 완전히 운에 기대거나,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 위태한거다.

내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나는 제소자들의 배를 터뜨렸을 것이다. 물론 게중에는 ' 우리처럼 양심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 어차피 중죄를 지은 저들이 죽는것이 더 낫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야만 한다. 게 중에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버튼을 누르세요' 라고 말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도 있어야하고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버튼을 누르시오.' 라는 이도 있어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조커를 위해서라도 '제소자'들 배를 터뜨리고 싶었다. 아니면 시민들이 토론을 다 끝내고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제소자들이 먼저 버튼을 눌러서 모든 토론을 허공으로 날려보래던가...배트맨에게도 '네가 막지못하는 것이 있다' 는 메시지 정도는 하나쯤 남겨주었어야 하는데....안타깝다. 다음 기회에... 

------------------------------------------------------

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날.....지금 막. 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었다. 판타스틱!! 마태와 악마의 대화가 나오는 멋진 장면이 등장한다. 결국 내가 하려던 배트맨/조커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나는 주절거리고 거장은 역시 더 짧고 강한 이펙트를 남기는 문장을 구사한다. 나는 루비콘 강은 넘어도 저건 못 넘을 듯 하다.  클래식 만세!!

" 넌 이곳에 나타나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어. 그게 뭔지 말해줄까? 문제는 너의 말투야. 너는 마치 그림자들을, 그리고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며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

 "늙은 소피스트, 나는 너와 논쟁할 생각이 없다." 레위 마태오가 대답했다.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불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베니치오 델 토로 감독, 할리 베리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과거 페이퍼에 올린 걸 리뷰란으로 옮깁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Things we lost in the fire' 이다. 우리 말로 바꾸어도 달라 질게 거의 없는 착한 번역이다.

이 영화는 국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 지난 달인가 곧장 DVD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동네 비디오가게에 가서 시를 읊듯이 낭낭한 목소리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주세요.라고 하면

주인이 '그게 뭔데요?' 라고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흑진주 할 베리와 사령관 '체' 의 베니치오 델 토로이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영화여서 간략하게 줄거리를 좀 이야기해야겠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X-파일'의 히로인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나온다. 그의 극 중 이름은 브라이언이다. 그는 굉장히 착실하고 가정적이며 사려깊은 가장이다. 오드리(할 베리) 와의 사이에 10살 먹은 여자 아이와 물에 머리 담그기를 두려워 하는 6살의 남자 아이를 두고 있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절친한 친구가 있다. 마약 중독자 제리(베네치오 델 토로)이다. 브라이언은 제리에게 유일한 친구이다. 모든 사람이 제리를 포기했을 때 조차 브라이언은 그에 대한 우정을 져버리지 않는다. 오드리는 그런 남편이 못마땅하다. 

제리의 생일날,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제리에게 간다. 싸구려 모텔에서 마약에 쩔어 있는 제리를 만나고 브라이언은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말이다. 그런데 공원에서 한 여자를 두드려 패는 남자를 본다. 그를 저지하려는 브라이언. 남자는 갑자기 총을 꺼내든다.

영화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제리. 오드리와 제리는 이것이 첫 만남이다. 오드리는 제리에게 당신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며칠 후 오드리는 제리의 모텔을 찾아가서 창고로 들어와 살라고 말한다.

과부와 죽은 남편 친구의 로맨스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상실'을 다루는 영화이다. 여성감독 수잔 비에르는 잔잔한 삶에 파멸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을 대하는 개인들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는 감각적인 클로즈업을 사용하고 바디캠이나 핸드핼드 카메라를 이용해서 조용하지만 상처로 흔들린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특히 눈이나 손같은 부위에 대한 세심한 클로즈업이 빈번히 사용된다. 반면에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내에서 상실감을 극대화시킬수 있는 롱샷등을 통해 할 베리의 처연한 마음을 그려낸다.

영화에서 오드리와 제리는 둘 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다. 오드리는 소중한 남편을 제리는 세상의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오드리는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제리를 침실로 불러들인다. 통속적인 상황인가? 그렇지 않다. 오드리는 정말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다. 남편이 잠들기 전에 귓볼을 만져주었듯이 제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제리는 그렇게 한다. 물론 성적인 긴장감이 도는 장면들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 지점에서 살짝 씩 현명하게 비켜나간다. 

오드리의 딸이 제리에게 '아빠가 되면 안되겠냐?' 고 묻는다. 제리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브라이언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서는 안되지않겠냐고 말이다. 영화 내내 감독은 이 약속을 지킨다. 그렇지만 의리의 돌쇠같은 스트레오타입화 된 방식은 아니다.

오드리는 제리가 점점 브라이언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에 분노한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감독은 오드리의 이중적인 감정을 잘 잡아낸다. 한편으로는 제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도 또 제리가 브라이언의 영토를 침범하게 될 까봐 두려워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 둘은 '상실'이라는 커다란 트라우마 앞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뚜렷이 들어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마치 시간을 찍어내듯이 그렇게 상처와 싸우고 상처와 화해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의 미덕이 그곳에 있다.

영화의 제목은 브라이언 네 집에 있었던 화재와 관련이 있다.

<단테 신곡 강의>를 쓴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책에는 유명한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개인적 일화가 잠깐 소개된다.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입을 빌어 '신이 인간에 준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마르셀은 작별 인사를 하러간 도모노부에게 묻는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있지.그게 뭔지 알려나?".....도모노부가 머뭇거리고 있자 마르셀은 이렇게 말한다. "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물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영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가브리엘 마르셀과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짧은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것 같다. 영화는 그런 가르침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절망'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더 주목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삶과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도 함께 말이다. 영화는 말미에 브라이언이 말한 '좋은 것은 받아들여' 라는 글귀로 끝맺는다. 현실이 지옥같아도 결국 그것을 헤쳐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진정 '좋은 것'을 잃었을 때이다. 그 좋은 것이 이름이 '믿음'이든 '사랑'이든 '희망'이든....정할 나름이다.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언젠가 '상실'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라면 더더욱. 할 베리와 델 토르의 연기는 훌륭하다. 특히 델 토르의 마약과 담배로 뇌의 절반 쯤 빈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듯한 연기와 눈빛은 인상적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와이프와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와이프가 좋아할 만한 영화다. 확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