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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상과 종교공부 -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나이가 불혹을 넘어 지천명으로 가는 중간 지점, 주변 분들은 논어를 읽기도 하고 주역을 공부하기도 한다. 내 윗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천명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그런 시기에 이 책을 만났다. 20세기의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가졌던 사상에 대해. 비록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역사에는 한줄 남짓 외에는 기록되진 못했지만 그들이 가졌던 생각에 자랑스럽게 K를 붙여도 된다고 말하는 이 책을 말이다.
1장 정도를 읽으면서는 안중근도 천주교 집안이었다고 하고(그러니까 서학일 것이다) 유관순 언니(열여섯에 죽었지만 언니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이 분!)의 집안은 기독교집안(역시 서학)이었고 윤동주 역시 그러했다는 부끄러운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동학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 책에는 문학에 있어서도 동인지 창조, 백조 보다 개벽이라는 잡지가 훨씬 많은 부수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민중들이 선택한 동학, 그게 대체 무엇이냐 궁금하다면 바로 이 책을 집어들어야 한다.
사실 근처에 휘경이라는 이름을 단 학교가 있어 원불교라는 종교가 낯설진 않았다. 0교시 채플시간에 한국어인 듯 한국어가 아닌 경전을 읊는다는 그 학교의 재단이다. 대체 불교와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전혀 몰랐지만 이제는 대충 안다. 수운과 소태산에 대해 백낙청 저자로부터 들으며 상당히 스케일이 크고 그들이 꿈꿨던 세상의 디테일을 보며 이렇게 욕심 이 많은 사상가였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욕심을 글로 쓰며 이 분들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근대의 그 시대는 얼마나 암울했나를 생각해보면 대단하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인이 절대 피해야 할 대화 주제인 정치, 종교, 육아에 들어가는 터라 내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경계선을 세워야 다음이 읽히는 책이기도 했다.
이 책은 백낙청 저자님이 서문에 “종교학 공부는 아니고 개벽사상과 개벽운동을 탐구하며 심화하는 것이 주된 목표”(p.5)였음을 밝히고 있다. 처음에 제목을 보았을 때, ‘개벽’이라는 단어가 옛것처럼 보이면서도 이날 이때껏 살며 경험해보지 못한 명사라 새롭게 다가왔음을 고백한다. 이 책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개벽은 물론 후천개벽인데, (...)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천천개벽’ 같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대변혁을 ‘후천개벽’으로 규정하고 추진한 것은 유독 한반도에서 시작된 현상이요 사건이다.”(p.6)라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이 단어를 사용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용담유사>에서 ‘다시개벽’이라는 표현을 한 차례 쓴 것에 대해 시작된 이 개벽은 해월 최시형,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등으로 이어진다. 이 개벽사상이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고 3·1운동과 4·19, 5·18, 6월 항쟁 그리고 2016~2017년의 촛불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백낙청 저자님을 포함한 대담자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사실 서문만 읽어도 저자가 무엇을 담았는지 잘 보인다. 그는 1장에서 ‘K사상의 출발’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한반도가 세계에 내놓을 고유의 사상이 동학에서 더 멀리는 “원효나 최치원에서, 늦춰 잡아도 조선시대에 중국과는 여러모로 구별되는 유학 전통이 성립됐고 유·불·도 회통의 노력도 병행했다는 점에서”(p.8) 동학을 시작으로 잡는 게 부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말한다. 하지만 “동아시아문화권 내에서도 완연히 구별되는 사상적 돌파가 그때 획기적으로 이루어졌고 21세기 지구인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역사가 출범했다는 점에서 예의 부제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p.8), “‘K 사상’의 자랑은 그것이 남다른 실천의 역사와 함께해왔다는 사실이다.”, “수운, 증산, 소태산 등이 각자 뚜렷한 특징과 성향의 사상가들이지만 크게 보아 한반도의 후천개벽사상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고, 그 전통이 소태산에 이르러 한층 세계화된 ‘K사상’에 도달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소태산에 와서 후천개벽이라는 한반도 특유의 흐름과 불교라는 오래전부터 세계종교의 반열에 올라 있던 사상의 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세계사적으로 의미있는 새 길이 열린다는 인식” 등을 설명하고 저자의 결론까지 일찍이 밝힌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동학에 대한 이해로 시작하지만 여기서 파생된 종교인 원불교의 이야기가 절반 이상, 기독교가 반성해야 할 지점 1/4정도로 읽혔다. 분량면으로는 그렇고 기독교를 다룬 4장이 나에게는 개벽과 같은 장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신학에 대해 무식했고(지금 이 책 한권 읽었다고 유식해진 건 아니겠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점에 반성했다. 개인적으로는 ‘욥기’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에 대한 토막토막 문장들이 의미있었다. 이 책을 덮으며 나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동아시아인으로서 한국인이다. 여성이며 부모님으로부터 모태신앙을 선물받은 기독교인이다. 이 중 나의 사고 근간을 생각해본다. 기본적으로 한국인 여성의 시각으로 생각하지만 나에게 닥친 윤리 문제의 끝에는 기독교가 서 있다. 무식한 기독교인에게 숙제를 안겨주는 책이었다. 아마도 풀어내지 못할 것 같은 숙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