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
니키 얼릭 지음, 정지현 옮김 / 생각정거장 / 2023년 8월
평점 :
* 어느 날 아침, 지구에 사는, 22살 이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끈이 담긴 작은 상자가 배달된다. 이 설정만 판타지 장르다. 그 상자로 인해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에 대한 묘사는 리얼했다. "일부 유럽 연합국은 겁에 질린 짧은 끈 이민자들이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고자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기 쉬운 국가로 넘어오려고 할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국경지대로 추가 병력을 보냈다. 미국 국경수비대도 경계를 바짝 세운 상태라고 전해졌다.(...) "미국에선 짧은 끈들이 세상을 위협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요"(pp.92-93)
이런 발췌문은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준다면, 행크가 일하는 병원에서 짧은 끈인 환자들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래서 병원을 찾아온 이(조너선 클라크)를 내치고, 그 내쳐진 존재가 벌이는 이 후의 일들(읍읍)을 묘사한다. 내게는 상자로 인해 소용돌이치는 개인의 변화가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 이 책에는 8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니나, 모라, 벤, 행크, 에이미, 앤서니, 잭, 하비에르가 주인공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인물은 모라. 백인 니나의 파트너이면서 흑인인 캐릭터다. 니나가 모라의 집을 네 번째 방문했을 때 벽에 걸린 포스토와 머그샷들을 보는 장면이 있다. 모라는 이에 대해 "교훈을 주잖아.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법이 우릴 엿먹일 때도 있지만 열정과 대담함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은 세상에 멋진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다고 말이야. 중간에 있었던 저런 안 좋은 일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p.69) 라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 중 ‘열정과 대담함’이라는 단어에 줄을 그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모라가 니나만큼 나도 좋았다. 니나 역시 흑인이면서 짧은 끈인 모라를 걱정한다. “긴 끈 환자와 짧은 끈 환자 중에서 긴 끈 환자를 먼저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딜레마 중에서도 이렇게 엿 같은 경우는 없을 것 같았다.”(p.97)라며 자신은 긴끈이고 백인이지만 그렇지 못한 모라를 걱정한다. 무엇보다도 희망찬 캐릭터는 니나의 여동생이면서 학교 선생님인 에이미다. 그녀는 끈이야기에 뒤덮여버린 세상에서 아이들을 걱정하기도 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멘탈이 튼튼해보인다.(역시 책이란!)
* 두 개 들어 있는 상자는 있을 수 없듯, 인간이라면 단 한번, 짧게든 길게든 살다가 이렇게 관이라는 상자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인간이 유일하게 공평,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이다. 아무리 이 사실을 잘 안다해도, 나는 인간으로 처음 태어나 처음 살아보고 처음 죽어보는 일이니 어떻게 원초적 공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본다. 그래도 그 한번 뿐인 삶 불안해하다가 끝낼것인가! 라는 생각하는 지점을 준다 하지만 난 기후위기로 불안한 요즘, 마치 지구가 시한폭탄 타이머가 켜진 느낌도 없지 않은데 이 책을 읽으며 근미래가 상상된 측면이 없지 않아 씁쓸했다... 근데 또 다른 생각으로는 그때도 사람들은 불안해하긴 하겠지만 똑같이 노동하며, 죽을 사람 죽고 부자인 사람들은 살아가지 않을까, 지금과 별 다를 게 있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무자비한 세상의 시스템에 각성하라고 이런 소설을 썼을지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수명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세상이 바뀔까? 의아심을 품고 책을 펴들었지만 넘나 재밌게 읽었다. 올해 그래도 재밌는 책들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난 이 책이 베스트일세. 강추!
p.s 1. 개인적으로 <공정하다는 착각>의 소설판이 있다면 이런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상자에 들어있는 것이 수명이 아니라 ‘능력’으로 읽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의 맨 밑바닥 계급이나 짧은 끈인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해서다. 어떤 위기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그 위험에 내몰리는 그 상황이.
2. 땅이 좁아 화장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는 끈이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겨서 왔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