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기 전에 돌아와라] 

스승님은 잠시 우리를 보다가 그렇게 마무리를 하시고 지나갔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멍해졌다. 스승님은 나에게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하다. 티비에서 보면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던데..스승님은 조금도 그런 티가 안 난다. 완전 무관심이다.  

[야! 정신 차려]
[어? 응]
[누구냐?]
[스승님]
[너..학교 다녀?]
[아니. 뱀파이어가 된 직후에 날 보살펴주고 가르쳐주셨어. 그래서 스승님이라고 불러]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그가 끄덕였다. 나는 기분이 축 쳐져 돈이고 뭐고 다 귀찮아졌다. 그러나 집에서 새로운 피를 가져오길 기다리는 아줌마와 배고프다고 떠들어대는 멍청한 위 때문에 가서 받아야만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힘겹게 내딛어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가 코앞에 보일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도 웬일인지 조용히 따라왔다.
 



뱀파이어 주민센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현재는 20층짜리 건물인데 최근 리모델링을 하여 미래형 건물로 탈바꿈했다. 멀리서보면 대기업 건물처럼 번쩍이는 자재를 붙였고, 중간 중간에는 구멍을 뻥 뚫어놓아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한강 둔치에 놀러오면 꼭 이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지금처럼 밤이 되면 빨강, 파랑 네온사인이 휙휙 건물 외관을 쳇바퀴 돌듯이 지나가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환호성이 나온다. 솔직히 저런데 쓸 돈 있으면 나같이 최하층 뱀파이어에게 수당이나 더 올려주면 좋겠다. 

[여기서 기다릴까?] 

내가 계단을 올라가려고 발을 내딛는데 그가 말했다. 뒤돌아보니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아 한강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는 멘트를 날려주었다. 그가 사람들이 가득한 곳으로 가는 걸 잠시 본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곳의 문은 인간들에게는 열리지 않는다. 문손잡이에 뱀파이어 인식 시스템이 붙어있어 그들이 손을 대면 문이 잠겨있는 걸로 느껴지게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문을 밀자 매끄럽게 열리며 클래식 음악이 나를 반겨주었다.  

[몇 층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눈 튀어나오게 아름다운 여자 뱀파이어가 민망할만한 길이의 짧은 치마를 입고 서서 인사를 했다. 12층 복지과라고 중얼거리자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밖에 서 있는데 오늘 내가 입고 온 옷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웅크렸다. 장애 수당 받으러 가는데 차려입고 가기도 뭣하고, 직원과 말이 잘 되면 주민 수당도 한꺼번에 탈 예정이라 최하 빈민층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니 그녀의 미소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12층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문이 열렸다. 항상 얼굴을 보지만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 담당자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시영씨, 반갑습니다]
[아..네..안녕하세요] 

쭈뻣쭈뻣 그를 따라 방문객 전용 창구로 가 장애 수당 청구 서류를 작성하고자 펜을 들었다.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하니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어서 하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검정 사인펜의 뒤꽁무니를 잘근잘근 씹으며 칸을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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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저희에게 한 마리 있었던 바로 그 요괴가 맞습니다. 제가 새끼였을 때 다리에 표시를 해두었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군요] 

그가 왼쪽 다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제서야 나는 새지의 다리를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왼쪽 정강이 쯤에 십자 모양의 작은 상처가 나있었다. 살이 안쪽으로 함몰 된 듯 약간은 징그럽기도 한 상처가 일부러 낸 것이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이런 곳에...?]
[이렇게 표시를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팔색조로 변하였을 때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누가 주인인지를 알아야 말을 듣고 명령에 따릅니다] 

새지는 마음이 여리다. 굳이 누가 주인인지 아픔을 주면서 까지 알려주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이 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일을 잘 모르니 섣불리 의견을 말하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법사와의 대화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끼면서 말을 아끼게 되었다.  

[최근에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이렇게 깨어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당장 대답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 곳에 묶으면서 같이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따로 부르지 않았는데도, 아까 그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람이 아닌 것이 맞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가 사역한다는 요괴인 듯 싶다. 

[따라가시면 묶을 방으로 안내할 겁니다. 팔색조는 제가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그에게 건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별 다른 이유를 댈 수 없어 그가 안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동도 없는 새지가 내게서 떨어지는 것이 영 꺼림직했다. 여인을 따라 안채로 가다가 뒤돌아보니 어느새 법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채도 역시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없다. 그러나 매일 청소를 하는 듯 먼지 하나 없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갈아 입을 옷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답답한 기분이 들어 창을 활짝 열었다. 벚꽃이 가득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꽃잎을 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울적해졌다. 만약 전쟁터에 가지 않았다면, 사신들을 만나지 않았다면..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 열심히 대장간의 일을 배우며 종종 새지와 냇가에서 놀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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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빼려고 하자 힘을 꽉 준다. 프릭스가 이렇게 힘이 쎈가..따뜻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 고양이로 변했을 때 자살하려고 했었거든] 

뜻하지 않은 말에 굉장히 놀랐다.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럴 때는 그가 내 생각을 못 읽는 게 고맙다.

[어제 오늘 보니까 넌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잖아, 보통 뱀파이어처럼]
[고마워..근데..좀 저리 가주면 안 될까?]
[왜? 내가 너무 잘생겨서 부담스러워?]
[머리 아파서 미치겠다, 정말! 내 향수를 쏟아 부었니?]
[니가 냄새 풍기면 들킬 거라고 해서..게다가 재체기도 심한 것 같고..]

그는 겨드랑이와 팔목, 옷에서 냄새를 맡느라 킁킁 거렸다.

[어? 스승님?]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의 꼭대기 부분이 나타날 정도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스승님이 보였다. 오늘은 핸섬하게도 검은 양복차림이었다. 그는 곧장 나에게 걸어왔다.

[여긴 무슨 일이니?]
[수당 좀 타려구요. 얘는..]

스승님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길래 말은 시작했지만 뭐라고 소개해야할지 난감했다. 프릭스는 위험 생물로 분류되어 구속해야할 10가지에 속하니 정직하게 말하기가 그렇다.

[저는 남자친구입니다]
[그래?]

내가 망설이는 사이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니 아직도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기에 그 말이 그럴싸한지 스승님은 말없이 내 눈을 쳐다보았다. 나도 이 상황에서 다른 생각이 안나 고개를 어설프게 끄덕였다.

[언제부터?]
[며..칠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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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씀씀이가 헤프니?]
[무슨 뜻이야?]
[돈이 없다니까 하는 말이지. 집도 크고 일하는 아줌마도 있는데 돈이 떨어져서 쥐피를 먹어야할 정도면 니가 펑펑 쓴다는 소리잖아]
[아니거든. 그 집이랑 아줌마는 스승님 꺼야. 내껀 몸뚱아리뿐이고. 난 장애가 있는 아~주 가난한 뱀파이어야. 그래서 지금 장애 수당 받으러 간다, 그거라도 있으면 당분간은 버티니까.]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데려가고 싶지 않아 말없이 나왔는데 어느새 그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쫓아왔다, 여전히 백합무늬 파자마를 입은 채. 주변의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빠르게 뛰자 그도 헐떡이며 뒤따라왔다. 서로 실랑이를 하면서 오다보니 한강 둔치에 15분 만에 도착했다. 내가 마침내 천천히 걸어가자 궁금했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장애가 있어? 다리도 팔도 말짱해 보이는데..머리가 이상한가?]
[이가 없어] 

그가 눈썹을 올리며 못 알아들었다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으니 잘 안 들렸을 수도 있다. 

[이가 없다고, 이가] 

딴 곳을 바라보며 말하자 얼른 내 앞으로 다가와 입을 벌려보더니 탁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이 전부 있구만, 없긴 뭐가 없어?]
[너 아이큐가 몇이냐? 뱀파이어에게 있어야할 송곳니가 없다는 말이야]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일이야 처음 겪는 것도 아니니 별반 신경 쓸 게 못 되지만, 기분 나쁜 건 나쁜 거다. 자신이 가진 약점을 스스로 말해야 하는 건 누구라도 하기 싫을 테니까.  

그가 동정을 하거나 놀리면 화를 내려고 했는데, 의외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슬며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넌 참 멋진 뱀파이어구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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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고개를 끄덕이던 여인은 새지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듯 한 참을 처다보다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조금 열려있는 사당문 사이로 보니 법사의 뒷 모습이 보였다. 나를 사당 옆에 있는 작은 정자로 안내하고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후, 사당 안으로 사라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내 머리카락이 날리는 느낌이 상쾌하다기 보다는 눅진하다. 이제 겨우 봄의 시작이지만, 이 저택 안은 공기가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설 때부터 들었는데, 사당이 있는 뒤쪽은 더 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면 탁하고 무겁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건장하고 키가 큰 법사가 정자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품에 고이 안고 있던 새지를 그때서야 바닥에 내려 놓았다.  

 

 

[팔색조로군요]
[이 요괴를 아세요?]
[저희도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정자에 올라와 건너편에 앉았다. 잠시 동안 새지를 바라보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그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잠시 주저했다. 그는 그것을 곤란해하는 것으로 여기고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손을 저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그는 새지를 앞으로, 뒤로 자세히 살피더니 숨을 들이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요괴는..이 곳에서 키우던 놈입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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