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져 나는 뱀파이어로서 발휘할 수 있는 청각적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내 마음을 고백하면 지금의 상태마저 사라지고 스승님을 볼 수 없게 될까봐 꼭꼭 숨겼지만, 때로는 입 밖으로, 눈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아 항상 조심스럽다. 그러나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잡아주신 손이 생물학적으로는 차가워도, 나의 마음에는 가장 따뜻했고, 어쩌면 조금은 나를 마음에 담아주시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그러나 스승님이 내 마음을 알지만 동시에 곤란해 하신다는 걸 이 대화로 깨달았다. 내 짝사랑은 좀 더 오래, 깊게 묻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워야할지도..

와장창...쨍그랑..

갑자기 현관문에 달린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졌다. 계단에서 바닥으로 바로 뛰어내려 한 걸음에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더니 스승님과 아줌마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머리를 집어 넣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였다.

[나..돌아..왔어]

그의 희미한 목소리가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암흑과 정적. 그는 부르르 떨다가 기절했다.

[스승님, 도와주세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여기로 돌아오기 위해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목숨을 걸었는지 흙투성이 몸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은 그런 나를 잠깐 보신 뒤, 프릭스를 들고 손님방으로 걸어갔다.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데 프릭스의 몸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눈은 피에 고정된 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으려고 해도 혀가 그 피를 핥으려고 마지막 관문인 이를 거세게 두드린다. 눈에 핏발이 서면서 벌벌 떨리던 무릎이 꺽였다. 피를 보고 흥분한 나를 아줌마가 말리려고 팔을 붙잡는데 배고픔에 정신이 나간 나는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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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도련님, 언제 그 유명하다는 대장장이가 되실 건가요?] 

새지는 마치 내가 대장장이라는 사람으로 뽕하고 변신하기라도 할거라 기대하는지 눈을 반짝인다. 

[시끄러워! 니가 한 번 해봐라. 이게 쉬운 일인 줄 아냐?] 

안그래도 한 여름이라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데, 불 앞에 있자니 죽을 맛이다. 오전 내내 풀무질에 매달렸더니 팔이 떨어지게 아프다. 새지는 아까부터 주머니 속에서 부채질을 하면서 살살 웃는다. 

[정진아~불이 약하다]
[네에~] 

다시 죽어라 풀무질을 한다. 그 때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삿갓을 쓴 중이 대장간 앞에 서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살짝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백제. 그곳에 제어하기 힘든 요괴가 나타났다고 하네]
[죽이시지는 않으실거지요?] 

그는 삿갓을 살짝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법사는 히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의 옆에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인이 얼굴에 탈을 쓰고 서 있었다. 아마도 얼굴을 심하게 다친 것 같다. 

[주머니 속의 그 놈이 무서워서 이제는 함부로 살상을 할 수 없어] 

그가 뒤돌아 가는 것을 바라보던 새지는 공중으로 떠올라 자신의 모습을 팔색조로 바꾸었다. 순간 빛이 반사되어 수만가지 색이 공중에 뿌려졌다. 

[도련님, 전 언제가 되야 야철신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대장장이가 될 때쯤?]
[그럼...밥이라도 좀 넉넉히 주세요] 

그 말을 마치고 새지는 휙 날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아름다운 날개짓을 보며 문득 그 날의 내 변화에 대해 곰곰이 되씹어 본다.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할 만큼, 또는 아버지를 모함한 자들에게 복수를 하거나, 무찌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고통을 피할만큼 강하지 못했다. 늘 나약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감싸여 살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아내는 것,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새지와 만나고 나서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날 나는 두려움을 이기고, 모두를 살리기 위해 마음의 힘을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증오와 미움, 아픔, 사랑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인간과 요괴의 생김새는 다르나 분명한 것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 상대가 무엇이든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가지고 기적이 생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믿는 또 한가지는 언젠가 미래에 나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고, 새지는 고구려 최고의 신인 야철신이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날을 위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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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끝났습니다. 곧 2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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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등 뒤로 몸을 감춘 채 얼굴만 살짝 내밀어 그들을 한명씩 살폈다. 제일 먼저 내린 남자는 스승님께 격식을 갖춰 인사했지만, 나를 때린 남자와 나머지는 고개만 까딱했다. 스승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는 체 하지 않고 피가 묻어 있는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핏자국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아는 놈인가?]
[검사를 해봐야 확실하겠지만..현재로는 데이터에 없는 맛입니다]

스승에게 깍듯한 남자는 셋 중에서 키가 제일 작지만 와이셔츠가 터질 것 같은 다부진 몸매를 지녔다. 그는 작고 뭉툭한 손가락에 뭍은 피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대답에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나를 때렸던 남자에게 원하든 원치 않던 온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그가 한 발짝 다가섰다. 본능적으로 놀란 내 몸이 뒤로 물러났다. 내 반응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겁주지 말아. 내 사람이야]
[흠..그런가요? 이런 꼬맹이가?]
[언제부터 제자를 키우셨습니까?]

내 사람..스승님의 제자라는 뜻인 걸 대화를 통해 알았지만, 그래도 단어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스승님 꺼고, 스승님은 내 꺼라는..나도 모르게 히죽 히죽 웃음이 나오려고 해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수사에 필요하니 경찰서에 데려가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일어나는 강력범죄의 유력한..]
[지금?]

스승님은 눈썹을 바짝 올리며 말을 끊어버렸다. 불쾌함을 온 몸으로 나타내자, 남자는 입술을 축인 후 대답했다.

[그러면 좋죠]
[내일 나와 함께 갈 테니 기다려주면 좋겠군. 보시다시피 자네에게 맞아서 몸이 안 좋아. 지금도 무서워하잖아]

스승님은 내 손을 잡았다. 검은 구두의 남자는 잠시 스승을 바라보다가 그러시라는 말과 함께 차로 돌아갔다.

[결과 나오면 알려줘]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스승님께 깍듯한 남자가 운전석에 앉자 나머지 남자가 손에 뭍은 피를 납작한 플라스틱에 묻히더니 형광 케이스에 넣고 차에 올라탔다. 검은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내 손을 잡고 있던 스승님은 그제야 놓으며 말했다.

[집에 갈까?]

나는 스승님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가 왼쪽 눈썹을 올려 갈매기 모양을 만들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서워서요]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는 모르나, 스승님은 뿌리치지 않았고, 집에 도착해 아줌마가 요란하게 맞아 줄때까지 잡아주셨다.





스승님께 혈액을 하나 얻어 허기를 면한 후 침대에 들어갔다. 얼마 뒤 눈을 뜨자 잠이 들었었는지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나있었다. 천장에 붙여둔 볼록한 해바라기들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일을 되짚어보았다. 프릭스를 알게됐고, 그가 갑자기 실종되었고, 보고 싶지 않은 뱀파이어와 대면했다. 아..텔레파시가 빠졌다. 스승님은 내가 그와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층으로 연결된 나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데 아줌마와 스승님의 대화가 들렸다.

[세상에..프릭스라니..제가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몰랐네요. 보통 고양이처럼 아가씨를 어찌나 따르는지..말씀 안 해주셨으면 상상도 못 했을거에요. 근데..지금 바로 나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아가씨가 깨시면 실망하실 텐데..]

나는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내 기척이 들리면 스승님의 말이 끊어질 것 같아서. 그는 나보다 아줌마에게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걸 알기에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실망하던가?]
[그럼요. 아가씨가 왜 창문을 열어두시는지 아시면서..]

아줌마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열린 창문을 통해 스승님이 돌아오시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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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죽이면 안되! 그들은 죄가 없어!] 

내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새지의 울음소리만 크게 들린뿐, 피를 흩뿌리는 거칠고 무서운 싸움이 계속 되었다.  

[당신이 구해준 소중한 요괴가 죽어가고 있어! 법사,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야? 당신이 하찮게 여기는 요괴보다도 못한 짐승이냐고! ] 

나는 울부짓었다. 붉은 눈의 새지도, 죄 없는 요괴들의 죽음도 모두 마음을 애이며 나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나의 눈에 검은 안개를 뚫고 나에게 날아오는 새지가 보이고, 법사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검은 안개를 향해 불어보낸 것과 동시에 내가 알 수 없는 빛에 휘감겨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빛은 곧 내 눈을 멀게 하였다. 그리고 새지와 법사, 검은 안개가 모두 눈에서 사라졌다. 

[웃지마세요..신이 되고 싶어요]
[니가 진심으로 원하고 노력하면 신도 될 수 있다. 아마 니가 요괴 사상 최초의 신이 되겠구나] 

[기왕이면 야철신이 될까요?] 

내가 새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인다. 신이 되고 싶어하던 새지..그리고 대장장이를 꿈꾸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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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노력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재빨리 밧줄을 풀어주었다. 단지 안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는 법사를 감고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이 안개는 뭐야?]
[원망과 원한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빨리 제를 멈추지 않으면 이 안개가 주인님을 헤치려고 할 것입니다] 

검은 안개를 뚫고 빛이 밖으로 퍼져나왔다. 새지가 깨어나는 것 같다. 그 때 갑자기 법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검은 안개가 법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팔에 얇은 금 같은 핏줄기가 생기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피가 검은 안개에 닿자 더욱 거칠게 소용돌이 치며 무시무시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여인이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곧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내 몸에 핏줄기가 생기며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흐릿해지려는 눈 앞으로 새지가 떠올랐다. 머리와 날개를 늘어뜨린 채 공중에서 빛에 감싸여 빙글빙글 돌았다.  

검은 안개 중 일부가 다시 법사에게 쏘아져들어오자 그 사이에 끼어든 여인이 안개에 휩싸였다. 멈추지 않고 계속 조여들어 법사를 감싸고 있던 여인이 흰 연기를 뿜어내며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돼!!] 

그 광경을 본 법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안개는 멈추지 않고 우리를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빛과 함께 붉은 눈의 새지가 우리의 눈 앞에서 힘차게 날개짓을 시작했다.그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죽여라!] 

법사의 외침에 새지는 검은 안개 사이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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