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야철신 

 

[계세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 안은 마구 자란 풀들로 빽빽했다. 사람이 다니려고 만들어 놓은 돌 길도 풀들이 구석구석 자란 상태다. 법사가 오랫동안 없던지, 있어도 관리를 전혀 안 하는 모양이다. 몇 번을 불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의 저택이면 문지기가 있을 법한데 정말 모두가 어디론가 출타한 모양이다.  

 풀들을 헤치며 들어서니 아름다운 연못이 한 중간에 있었다. 분홍 색 연꽃 봉오리들이 올라오고, 이름도 잘 모르는 수중 생물들이 맑은 물 속에서 흔들거리는 것이 보인다. 물 속을 잠시 내려다보니 작은 물고기를 닮은 요괴들이 헤엄쳐다닌다. 법사의 연못에는 요괴들 말고도 반정도 투명해서 안이 보일 듯 말듯한 구슬 모양의 알들이 떠다녔다. 희안한 연못이다.  

 문득 어떤 눈길을 느껴 고개를 들어보니 연못가의 작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등불이 바람도 없는데 약하게 흔들리고 있는었다. 이 집은 등불에도 요괴가 붙을 정도인걸까? 고개를 갸웃하며 연못을 지나 안채 쪽으로 연결 되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 쪽 역시 아무도 없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왼쪽으로는 부엌, 고깃간, 차고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외양간, 마굿간, 방앗간 등의 부속 건물들이 있는 것이 아마도 법사가 살기 전에는 어떤 귀족의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걸어들어가면서 슬쩍 살펴보니 역시나 귀족의 집이었던 것이 맞는지 조리방과 상차림방으로 나뉘어져 있는 부엌에는 가마솥에서 김이 새어나오고 있다. 차고에는 둘레가 탁 트인 남성용 수례가 하나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마굿간은 예상과 달리 텅 비었다. 안채에도 사람이 없을 듯 싶어 집 뒤쪽에 지어져 있다는 사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복을 빌러오는 사람들은 보통 사당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뒤쪽의 쪽문으로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정문으로 들어와 아무도 못 만난 것이 아닐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곱게 저고리와 치마를 차려입은 여인이 사당의 문을 열고 나와 인사를 했다. 얼핏 보아도 눈과 입매가 아름다운 게 필시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외모다. 그러나 희디 흰 얼굴이 어딘지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반쯤 하며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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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인지 사람인지 때문에 아까운 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내가 말없이 일어서자 아줌마가 고양이를 든 채로 따라왔다. 

[아직 못 씻겼는데..]
[제가 좀 있다 샤워할 때 같이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안돼요! 아..내 말은..내 고양이니까 내가 씻기고 싶다고요] 

내가 기겁을 해서 갑자기 멈춰 서자 아줌마가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뭐 상관없는데~~]
[시끄러워!..아..아줌마에게 한 말이 아니라..그러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줌마를 계단에 내버려두고 난간을 넘어 1층을 향해 뛰어내렸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파카글라스에 담긴 혈액과 아줌마의 저녁인 유리병에 담긴 가공된 피, 그리고 고양이의 밥인 듯한 음식찌꺼기가 납작한 접시에 놓여 있었다. 

나는 코를 막고 파카글라스를 들어 입에 부었다. 매번 느끼지만 뱀파이어인데도 입으로 피를 마셔야 하는 건, 정말 미치게 싫다. 어찌나 역한 맛인지, 누가 무슨 맛이냐고 물어보면 한 번 먹어보라고 하고 싶다. 장담컨대 바로 다 뱉어버릴 음식이다. 지금 먹은 피는 특히나 더 구역질이 났다.

[이거..좀 이상해. 약간 상한 거 같은데..유효기간 확인해 본거에요?]
[아가씨..그게..] 

아줌마가 눈을 안 맞추는 게 뭔가 이상하다.

[돈도 없고, 혈액도 떨어져서..급한 데로 구한 거라..] 

[무슨 핀데요?] 

아줌마는 고양이를 탁자에 내려놓고 발끝만 바라본다. 왠지 속이 거북해지는 느낌이 들며 채근했다. 

[쥐요] 

그 즉시 변기로 달려가 입에 손을 넣고 몽땅 게워냈다. 쥐라니..쥐라니.. 

[쥐가 문제 있어?]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그의 목소리. 

[쥐피가 얼마나 더러운데! 뱀파이어들은 줘도 안 먹어!]
[쥐..맛있는데. 냄새도 안 나고 쫄깃한데다가 잘만 고르면 배에 새끼도 많이 들어서..]  

[악!!!!!!!!!!!!!!!!] 

그의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답변이 귀로 넘실넘실 들어오자 나는 변기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가 밥을 먹다말고 뛰어왔는지 입가에 피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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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남자친구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들고는 아줌마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샤워부터 시켜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문을 닫자마자 화를 못 이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순간 그는 다시 사람이 되었다. 나의 어떤 부분이 그의 변신을 도모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찝찝한 기분인데,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웃으며 방 안을 뛰어다녔다.  

 

[그만 좀 해! 나체로 그러고 싶어! 내가 여자인거 안 보여?]  

 

 그는 그제야 사람 약 오르게 만드는 미소를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다 봐놓구선 이제와 남녀유별이냐..성격도 참..]

[내 성격이 어때서? 이것부터 입어!]  

 

 침대 가에서 집히는 대로 그의 얼굴에 던진 게 백합무늬 파자마였다. 사실 그건 희한한 패션감각을 지닌 스승님의 하사품이고, 아무리 내가 스승님을 좋아해도 차마 입을 수 없어 모셔두기만 했던 거라 새거나 진배없었다.   

 

 그는 그 옷을 입은 후, 허락도 없이 침대 위에 앉았는데, 나와 키 차이가 제법 나다보니 파자마가 그의 무릎 가까이 까지 올라가 상당히 우스운 몰골이었다.  

 

[그러니까..고양이로 있으면 내 생각이 들리고, 사람으로 돌아오면 안 들린다 그거지?]
[응]  

 

 우리는 알고 보니 나이가 동갑이었다.  

 

[매우 기분 나쁘고 불쾌해]
[왜?]
[마치 발가벗겨진 거 같잖아. 누가 내 머릿속을 들락날락 한다고 상상하면..]
[어쩔 수 없어. 나도 기분 나쁘긴 마찬가지지만 니 생각이 밀려들어오는 걸 어떡하냐. 온갖 잡생각이 파도치듯이 쉬지 않고 달려든다고 생각해봐. 피곤해서 돌아가실 지경이다]

갑자기 똑똑..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문이 열리자 그는 알아서 고양이로 탈바꿈했다.  

 

 [어머~고양이가 파자마 속에서 꿈틀거리네. 귀여워라]  

 

 고개를 들이민 아줌마는 침대가로 다가가 백합무늬 파자마 안에서 고양이를 꺼내 입을 맞췄다. 또다시 내가 속으로 으웩...하자 나도 으웩이긴 마찬가지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세요?]
[저녁 식사 하셔야지요. 시간이 벌써 3시에요]  

 

 그 말에 벽을 바라보니 정말 시간이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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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아줌마에게 나체의 남자가 보이면 어떤 사단이 벌어질지 겁이나 고양이, 고양이, 빨리 고양이..라고 소리쳤다. 내가 고양이라고 하자마자 그는 다시 새끼고양이로 돌아갔고, 아줌마는 그 때야 마당을 살피다가 그를 발견했다. 그가 떨어진 직후부터 이렇게 될 때까지 너무 긴장해서 나는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머~고양이잖아!] 

아줌마는 육중한 몸매에도 쉽게 창문을 뛰어넘어 고양이를 단숨에 잡았다. 그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을 바짝 세운 채 갸르릉 거렸지만 몸집이 작다보니 그다지 무섭지 않다. 오히려 나체의 남자가 심하게 두려웠다.  

[누군가 키우던 거 같아요. 야생 고양이는 사람 손을 타면 피가 나도록 무는데, 이 녀석은 안 그러네요. 아효..간지러워라..] 

아줌마는 그가 엄지를 물고 있지만 그다지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사랑스럽다는 말을 한다. 나는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다가가서 고양이를 넘겨받자 그는 또 내 손을 핥기 시작했다.  

[이거 키우실거에요?] 

[그게..아직 결정을 못 했어요] 

[키우면 아가씨도 덜 적적하시긴 할 테지만..문제는..]  

[문제는?] 

돈이다. 먹고 줄을래도 없는 상황이라 당장 내일부터는 아르바이트라도 찾아야할 판에 고양이 먹이랑 병원비는 어떡하실 거냐고 묻는다. 그 말에 대꾸할 거리가 없어 말없이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나에게 윙크를 했다, 웃는 입을 하며. 

[어머, 어머! 지금 보셨어요?] 

아줌마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윙크하는 고양이는 별로 없으니 그 앙증맞은 모습에 아줌마, 한 눈에 반했다. 나는 속으로 으웩..이라고 대꾸했다. 

[주인어른은 외출 하셨으니, 일단 집 안으로 데리고 가봐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도 안 늦으니까] 

아줌마는 여전히 망설이는 나를 잡아끌며 집으로 돌아갔다. 내 손에 들린 그는 실실 웃는다. 그가 원하는 게 뭘까?  

[당연히 같이 지내는 거지] 

순간 깜짝 놀라 고양이를 떨어트렸다. 

[아이고, 아가씨! 고양이가 다치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세요!] 

바닥에 떨어진 고양이는 문제없다. 착지도 못하면 그건 고양이도 아니니까. 하여간 나는 머릿속에 울려 퍼진 그의 말에 기절하게 놀랬다.  

[미..안해요. 간지러워서..] 

아줌마의 바짝 올라간 눈썹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어 들었다. 단, 꼬리를 엄지와 집개로 들어 거꾸로 잡았다. 고양이는 물구나무 자세로 헤엄을 치듯 공중에서 발을 마구 흔들었다. 그 자세 그대로 아줌마에게 건네려고 내밀었다. 

[주지마! 가기 싫어] 

또..들렸다, 그 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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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바다 2010-10-2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정말 재밌네요..
너무 짧아 아쉬움이 남을만큼..그 전 글도 마음이 동감하며 읽었는데..
 

 

 

 

1부. 야철신 

 

[콜록콜록...콜록콜록]  

 

 

 싸리문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문 간에 서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이대로 방 안에 들어선다면 옷에 베인 피 냄새를 아버지는 알아채실 것이다. 무관 출신이시니 누구보다 피의 향에 익숙하신 분.  

 

 

 [아버지..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나는 말 없이 절을 하고는 발 걸음을 돌렸다. 그저 오월이가 아버지를 잘 보살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산 길은 밤에 더욱 무섭다. 어둑어둑한 숲들이 좌우로 펼쳐져 있고, 운이 나쁘면 호랑이도 만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귀신과 호랑이였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호랑이가 정말 무서운 존재인지, 귀신이 정말 나쁜 존재인지..그 요괴의 말대로 우리들이 대대로 만들어 내려온 편견일 뿐이지 않을까..가슴에 안고 있는 새지를 내려다보니 깃을 타고 흘러내린 달 빛이 푸른 빛과 흰색을 더해 온 몸에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준 뒤 재를 빨리 넘어 이웃 마을에 도착하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 

 

 이웃 마을에서도 숲에 둘러쌓인 지역이 있고, 그 안에 법사의 저택이 있다. 그는 일 년에 반 정도 집을 비우고 전국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귀신과 요괴의 퇴치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 댓가가 상당히 비싸다. 그가 정말로 요괴를 사역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문이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날리는 없다.  

 

 

 그가 집을 비웠더라도 거처나 사당에는 나의 짐작을 확인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아까부터 새지를 노리고 내 뒤를 따라오던 요괴의 무리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보니, 저택 근처에 오자 그 흔하던 요괴들이 한 마리도 없다. 정말 법사의 기가 강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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