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야철신 

  

[전쟁터에서 죽겠다고? 만약 살아 돌아오게 되면?]

[그것은 동명왕께서 저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일 거라 생각합니다. 전쟁은 무릇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와 같은 것. 제가 사는 일은 죽을 경우보다 높지 못합니다. 하오니 제가 만약 살아 돌아온다면....온전히 제게 주어진 명만큼 살 수 있게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


[도련님~정말 영명하시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옆에 단정히 앉아 있던 새지가 큰 절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우리는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살아 돌아온 것이다. 절대로 안 된다는 수많은 요괴들을 누르고 현무와 청룡이 우리를 보내주었다. 전쟁터에서 보자는 요괴들의 말들이 걸어 나가는 등 뒤에서 들렸다.

[그래서..좋냐?]

[좋고말고요~역시나 제가 바로 보았습니다~영명하신 분임을 또 한 번 느꼈습니다~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 기백이 넘치시고 특출하시온지~] 

[너...깨어 있었구나..]

무아지경인 것처럼 덩실거리며 춤을 추던 새지는 급격히 낮아진 내 목소리에 잽싸게 방구석으로 도망쳤다.

[그게..제가 워낙이 약하여..심장에 무리가 올 까 두려워..팔색조로 변하지 말라고 하셔서..]

새지는 이 말 저 말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듯 끝을 맺지 못한다. 머리를 숙이고 발을 베베 꼬는 것이 한심해서 야단 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돌아서서 집을 나온 뒤 대장간을 향해 걸어가자 새지는 눈치를 보며 따라왔다.

대장간은 새벽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따라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지나 대장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직공들이 자리에 앉아 도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어~이, 얼른 대행수님께 가봐. 좀 전에 오시자마자 너 찾으시더라]

떡보는 내 얼굴을 보자 안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안채로 향하는 문을 넘어섰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장들이 있는 대장간이라 왕실에서도 주문을 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고관들을 접대하려고 대장간으로서는 드물게 화려한 안채를 지었다. 대장간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첫 날 딱 한 번 와 본 게 다라 낯설게 느껴졌다. 나라에서 제일 높은 분이 임금인 것처럼, 여기서는 대행수가 그런 분이니 나 같은 막내가 사실 몇 번이나 그분을 지척에서 뵙겠냐 싶다. 그래서 다들 대행수가 나를 보자고 한 것에 호기심의 눈초리를 보낸 것이다. 물론 나도 궁금하지만, 어제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만나기는 해야 했다. 
  

[어서오너라. 지낼 만은 한 것이냐?]

[네. 아주 좋습니다]

문을 여니 대행수는 매매 장부인 듯 한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자 그는 반대편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을 한 뒤 서책을 덮었다.  

안채는 넓고 컸다. 오른 편으로는 노란색 비단으로 만든 휘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침상이 있다. 그 앞으로 주둥이가 달린 쇠병들이 작고 반원형인 화로에 올려져 있으며, 가끔씩 피픽 소리를 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와 탁자는 검정색의 옻칠이 되어 번쩍거렸다. 나는 살짝 주눅이 들어 의자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앞으로 얼마 후에 북쪽 오랑캐와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도 군영에 무기를 수리하러 갈 직공들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저도 가는 것입니까?]

[너는 가도 도움이 안 된다. 낫조차도 못 만드는 널 무엇에 쓰겠느냐?]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말이 맞는 게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물 떠오기, 장작 나르기, 바닥 쓸기, 불 지키기가 다다. 기절하는 게 특기인 새지도 할 수 있는 잡일이다.

[영민하신 도련님께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하다니! 내 이놈을..]

어느새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던 새지가 갑자기 튀어나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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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중벌이란 게 뭐야?]

[아마도..저는 몇 년 쯤 가두어 두고 도련님은 팔 다리 중에 하나를 내놓거나..] 

새지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벌이 무엇인지 대답하고는 고개를 꺾어버렸다. 극심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것이다. 

우리가 속삭이는 동안 요괴들의 집단 행동은 땅을 울리며 그 수위가 높아졌다. 이에 주작은 그들을 향해 번개를 내리쳤다. 붉은 빛이 땅에 내리꽂히자 요괴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순식간에 주위가 정리되자 이 때다 싶어 가장 인간적이라고 들었던 현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한 말씀 아뢰도 될지요?]

사지 중 뭔가를 잃는다는 건 대장간도 나갈 수 없고, 진짜 밥줄이 끊어진다는 의미이니, 엉망으로 얽힌 것 거래나 해보자 싶어서다. 호기심 때문인지 그가 특별히 거부하지 않는 듯해 보이자 슬슬 말을 풀어 나갔다.

[먼저, 저희를 단죄하시기 전에 도깨비들을 처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인간을 먹지 말라는 규칙을 거부하고 저를 먹고자 집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제가 만약 그 때 깨어나지 않았으면 그들은 틀림없이 저를 조각내어 먹었을 것입니다. 이는 사신님들을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일입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해 공정히 벌을 주신다면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비슷한 일들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현무는 주작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눈빛 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지 갑자기 공중에 떠있던 도깨비들이 쳐절하게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줄은 점점 빛을 내며 몸을 옥죄이는지 비명은 죽기 직전의 사람이 내는 듯 두려움과 아픔이 배여, 듣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다. 사람이든 요괴든 느낌은 비슷한지 바닥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요괴들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땀을 흘렸다. 나 또한 오줌이 찔끔하는 걸 느꼈다. 얼마간의 비명이 지속되다가 펑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사방으로 도깨비의 조각인듯한 끈적한 점액질의 무엇인가가 튀어 마침내 그들이 사멸되었음을 알았다. 현무는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신이시여, 한 번 더 생각해봐 주실 수 있다면, 이 곳에서 사지를 찢으시거나 죽이시기 보다는 전쟁터에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전쟁터?]  

현무는 갑작스러운 말에 흥미가 생기는 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신님들은 동명왕을 수호하시는 위대하신 분들이십니다. 이 나라는 동명왕의 은총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최근 북쪽의 오랑캐들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바, 미천왕께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랑캐들과 조만간 전쟁을 벌일 것이라 하옵니다. 제가 오늘 벌을 받아야한다면 이렇게 의미없는 것 보다는 동명왕과 이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이 한 목숨 바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녕 이 나라의 백성 됨이 아니겠사옵니까?]

두근두근 하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다. 꼭 쥔 두 손에서는 땀이 계속 흘러내린다. 요괴들도 사신들도 조용히 현무를 쳐다본다. 그는 과연 무엇이라 말할까? 나의 제안이 그럴 듯 하긴 한 걸까? 아니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에 대해 호통을 치지는 않을까? 나는 살고 싶다. 병석의 아버지를 그냥 두고 먼저 갈 수는 없다. 오월이 손도 아직 못 잡아 봤는데 죽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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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너는 인간이 아니냐? 그리고 네 손에 든 것은 팔색조인가?]

공중에서 소리가 내려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현무가 낸 목소리였다.

[감히 인간이?]
 

[팔색조가 왜 인간과 같이 있어?]

[먹으면 살살 녹는 다는 그거 말하는 거지?]

시끌시끌, 웅성웅성, 시전 판보다 더 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요괴들이 들썩이며 말소리를 높인다.

[조용!]

현무가 일갈을 하자 아까처럼 고요해졌다. 나와 새지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그대로 서 있었다.

[도련님, 이제 어쩌죠?]

[나도 몰라.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일이긴 마찮가지야]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새지가 기절하지 않고 깨어 있는 게 낫다고 본다. 의논할 요괴도 없이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면 정말 미쳐버릴 것이다.

[너는 왜 여기에 왔느냐?]

[그게..도깨비들에게 쫓겨서..요]

[도깨비? 그 놈들이 왜 널?] 

[몇년 전에 제가 마마를 앓면서 누워있을 때 저를 잡아먹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실패했습니다. 그에 오늘 우리를 발견하고는 꼭 먹어주겠다고 따라오니..피해서 도망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대답이 잘 한 건지는 모르지만, 주작이 갑자기 붉은 기운을 펑펑 내보내며 화를 냈다.

[절대로 인간은 먹지 말라고 했거늘! 이놈들이..]

지난번에 걸리면 큰일 난다고 했던 게 이건 가 보다. 마른 침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주작이 던진 붉은 줄에 뒤에 있던 도깨비들이 묶여 공중에 떠올랐다. 그들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자 요괴들이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이런 소동을 일으켜 일 년에 한 번 뿐인 회합을 망치고 축제를 중단 시켰으니 인간도 죽이셔야 합니다]

[죽여라! 죽여라!]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나온 요괴 하나가 외치자 다른 놈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새지처럼 조른다.  

[우리의 회합을 망친 것은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 인간과 같이 다니는 팔색조 역시 똑같이 처리할 것이다]

백호의 결론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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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이루다 2009-11-2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재미있어져요! 백호는 엄격한 성격인가 보네요.

최현진 2009-11-23 13:45   좋아요 0 | URL
백호나 주작은 성격이 급하고 강합니다. 요괴로서의 마음이 더 크죠. 반면 현무나 청룡은 인간을 많이 생각합니다.

happy 2009-11-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왔어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1부. 야철신 

 

둘 중에 좀 더 우락부락하게 생긴 도깨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새지를 부여잡고 앞으로 돌진했다. 어차피 잘 안 보이기는 어느 방향이나 마찬가지고 도깨비가 휘든 방망이가 바람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데 잘 달리든, 못 달리든 뛰어야 살아도 살 것이 아닌가!

[도련님~이게 뭔 일이래요?]
[도깨비들이야. 이제 어디로 가지?]

무작정 앞으로만 달리다 보니 울창한 숲이다. 길이 없다.  새지도 생각이 안 나는지 잠시 대꾸가 없다가 변신을 하겠다고 중얼거린다.  

[절대로 변신하지 마]
[하지만~]
[절,대,로,안,되!]

마지못해 대답하는 새지를 고쳐 잡고 비스듬히 앞 쪽으로 보이는 숲속 틈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에 마구 부딪히는 가지들을 걷어가며 달리자니 자꾸 느려진다. 새지가 아야..하며 소리를 지르니 도깨비들에게 여기 있소, 빨리 오시오다.  

[소리 좀 내지마, 정말 죽고 싶어?]
[너무 아프다고요]

소리를 없애 보려고 한 손으로는 새지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지를 치우느라 정작 나는 계속 생채기가 났다. 왼쪽 뺨에는 피도 흐르는 것 같았다.

[도련님~피가 나요]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지금은 닦을 수도 없어]

정신없이 도망 가다가 발을 헛디디면서  비탈길로 굴러떨어졌다. 등과 다리가 흙바닥과 바위에 부딛혀 고통이 밀려오는데도 비탈길이 계속되는 바람에 멈추지 않고 오히려 속도가 붙었다.

새지가 계속 뭐라고 말을 하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도깨비들의 외침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마침내 비탈길이 끝나 한숨을 돌릴 때 였다. 


[도.련.님!]

겁먹은 목소리에 아픈 목을 주무르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넓은 광장에 들어가 있었다. 숲은 다 사라지고 평평한 광장이었다. 여기는..아까 우리가 구경하던 사신들의 회합장이었다.  

주변에 정적이 흐른다. 하늘에는 현무와 주작이 떠있고, 광장 왼 편에는 백호와 청룡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 쪽에는 정말 놀라울 만큼 엄청난 수의 요괴들이 앉아 있다. 모두가 당황했는지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질 못한다. 나도 이번만은 도저히 긍정적인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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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시합이 시작됐어요. 청룡이 번개를 때렸네요]

새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 설명한다. 흥분했는지 공중에 붕 떠서 쳐다보며 호기롭게 말한다. 청룡이 백호를 향해 번개를 보내자, 백호는 힘차게 도약을 하며 피했다. 한 동안 둘은 서로를 쫓으며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버리려는 것처럼 큰 소리를 냈다. 그러다 갑자기 뒤로 돌아 거꾸로 반바퀴를 움직인 백호가 청룡의 목을 물었다. 청룡이 하늘을 휘저으며 백호를 떼어내고자 몸부림을 치지만 소용 없었다.

[백호 이빨이 제 것이랑 비슷해서 확실하게 물면 절대 안 놔요. 심지어는 본인이 죽을 때까지도 붙잡고 있을거고들 하더라고요]

그리고 보니 새지가 천주의 다리를 물었을 때 천주가 아무리 노력해도 떨어지질 않았다. 이 녀석도 요괴는 요괴구나 싶다.

[아무래도 청룡이 진 것 같아요. 저렇게 쉽게 목을 보이다니..늙었나?]

새지는 내게 말한 다기 보다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끝을 맺고는 곧 주작과 현무를 기다렸다.

[현무는 비록 거북이지만 진짜 까다로운 상대예요. 뱀을 감고 있다가 여차하면 날리는데다가 등 껍데기에 맞으면 살이 다 파여요. 아마도 넷 중에 가장 위일 수도 있죠]

주작과 현무가 공중에 떠오르는 것이 보여 고개를 드는데, 뒤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냄새가 난다. 아는 냄새야]

[어디?]

[우리 앞쪽]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몇 년 전 돌림병으로 자리 보존할 때 나를 먹어치우겠다고 머리맡에서 의논하던, 꿈에도 못 잊던 도깨비 두 마리가 보였다. 어쩌다가 그들이 요괴도 피한다는 냄새나는 천민 부락에 왔는지 모르지만, 분명한건 이대로 있다가는 붙잡힐 거라는 사실이다. 이번에 잡히면 진짜 쇠고기 신세가 된다.

[어디 보자~이 냄새는...살아나서 못 먹었던 그 인간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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