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좋아서인지 마당의 풀들이 쑥쑥 자란다. 종류가 여러 가지겠지만 이름을 아는 건 애기똥풀 하나라 나머지는 잡초로 여긴다. 이름을 알고 부르면 마음이 가고 정이 생기니, 어차피 싹 뽑아버릴 예정이라면 모르는 게 좋다.

[뭘 드시는 거예요?]
[된장이랑 표고]

  귀찮은 마음에 잡초들 정리는 내일로 미루고 산책을 나섰는데 마을 앞 정자에 청산 할매가 앉아 계셨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는 모습에 호기심이 동하여 물어보았다.

[이렇게 먹으면 피떡을 방지해 준다잖아]
[피..뭐라고요?]
[피떡도 몰라?]

  할매는 내 무식함을 탓하듯 쯧쯧 혀를 차시더니 피떡을 설명해주셨다. 얼마 전에 보건소에서 실시한 검진 결과 고혈압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보건소 의사가 혈전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게 바로 피떡이란다.

[피 혈자, 앙금 전자. 혈전이 피떡이라는 말이잖아. 시골 할매들은 무식해서 혈전이라고 말하면 몰라. 참, 거기도 나이가 마흔이 되간다고 했으니까 건강 관리해]

  피떡이라는 단어는 결국 청산 할매의 창의적인 번역 작품이었다. 내가 지난달부터 살기 시작한 이곳은 학마을이라는 정식 주소를 가진 시골 동네인데 열분 정도의 어르신들만 사신다. 청산 할매와는 이웃사촌이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거의 내가 얻어먹는다.

[하나 먹어보시게]
[아..네..잘 먹겠습니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된장을 듬뿍 찍은 표고를 건네시는데 안 먹기도 멋하여 입에 넣었다. 시골 특유의 진한 된장 냄새가 입 안에서 코로 이어졌다. 30여년 서울 생활에선 좀처럼 먹기 힘든 전통 된장이다.

[고혈압에는 소금 섭취를 줄이셔야해요. 된장을 너무 많이 드시는 건..]
[내 이날까지 밥 잘 먹고 살았어. 피떡은 내 알아 신경 쓰니 거기나 잘 드시게]

  오히려 피잔만 한 바가지 먹고 물러섰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고집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 역시 옳다고 생각하는 걸 우기며 남 말 안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 80살이 넘은 할매야 오죽할까 싶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얼마 사시겠냐 싶어 먹던 대로 드시다 돌아가시는 것도 복이지..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막걸리 한 잔 주세요]

  시골의 햇볕은 유난히도 따갑다. 30분 정도 걸었더니 목도 칼칼하고 등에 땀도 나기에 슈퍼에 들렀다. 학마을의 단 하나뿐인 슈퍼라 음식점도 같이한다. 5평 남짓한 가게에 한쪽을 비워 탁자 2개를 둔 게 음식점인 셈이다. 또한 도로 앞에 위치했다는 장점으로 택배 아르바이트도 겸하니 참 쏠쏠한 벌이다.

[크~]
[권선생, 안주도 먹어야지 안 그럼 속 버려]

슈퍼 주인 할매는 김치 그릇을 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한 때 교직에 몸담아 이 곳 사람들은 권선생이라고 부른다.

[마당에 풀이 가득하던 데 안 뽑아?]
[내일 하려고요]  
[구들댁은 참 부지런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칭찬하시던 슈퍼 주인 할매는 건너편에 앉으시더니 막걸리 한 잔을 따라 드셨다. 나는 김치를 벗 삼아 두 잔 더 마신 뒤 풀을 뽑기로 약속 하고 일어섰다. 휘적휘적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햇볕이 쨍쨍 내리 찌는 게 대청마루에 늘어지고 싶다. 하지만 슈퍼 주인 할매가 나물 캐러가는 길에 마당을 볼 게 확실하니 하고 자는 게 좋겠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팽개쳐두었던 장갑을 찾아 끼고 마당에 쪼그렸다. 
  자세히 보니 한 놈 한 놈이 모두 예쁘고 튼튼한 데 뽑아버리자니 문득 미안해졌다. 이놈들도 다 먹고 살자고 여기에 뿌리내린 것을 인간에게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생을 마감하니 안 불쌍하겠는가. 하여 마음속으로 사과하면서 잡아 뽑았다. 1/3쯤을 정리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획 돌리는 순간 현기증이 난다.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살랑살랑 피어오른다. 균형을 잡으려고 왼 손으로 바닥을 집는데 순간 물컹했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길이 40센티미터쯤 되는 뱀이다. 천만 다행인 게 이미 죽었다.

[미물이라도 고이 묻어줘야지. 어째 그리 태우는가?]

  풀을 뽑아 쌓아 놓은 더미에 마른 장작들을 올려 불길을 만들고 뱀을 던졌는데 어느 결에 오셨는지 청산 할매 목소리가 들렸다.

[묻어주기도 좀 그래서..]
[나무관세음보살]

  할매가 불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 순간 알았다. 뒷짐을 짓고 휘적휘적 돌아가시는 걸 보니 갑자기 만사 귀찮아진다. 뱀이 타는 연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어던지고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 다른 형제들과 뱀 잡이 사냥을 갔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한창 크던 때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과자 같은 건 아예 상상도 못했다. 대신 꿩이랑 개구리, 뱀 등을 잡아 구워먹는 게 최고의 간식이다. 보통 용감한 셋째 형이 짐승의 목을 따면 첫째 형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주어 그 옆에서 구경하는 나는 군침을 흘렸다.

[어이~막내야. 빨리 와서 먹지, 뭐 하냐?]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데 셋째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청마루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뱀을 태우던 그 자리에 난데없이 셋째 형이 장작을 쌓아놓고 토끼를 굽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왼 손에는 뱀도 한 마리 보였다. 그는 칼로 뱀의 머리 쪽에 열십자를 그었다. 껍질을 잡아 당겨 생선 비닐을 벗기듯이 깨끗하게 발라냈다. 언제보아도 깔끔한 솜씨다.

[형? 여기서 뭐해?]
[뭐하긴..보면 몰라? 이리 와라]

  눈이 매운 듯 셋째 형은 손으로 비비며 소리쳤다. 얼결에 일어선 나는 마당으로 내려가 옆에 앉았다. 뱀이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를 풍기며 구워진다. 형은 뱀을 들어 올리더니 잘 익은 살을 건네주었다. 과거에 형은 모두가 징그럽다며 고개를 저을 때도 저렇게 나서서 해결해주더니 지금도 변함없다. 왠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짜식..잘 먹네..더 주랴?]

  입 안에서 장어와 비슷한 식감을 내뿜는 뱀을 우적우적 씹고 있자니 형이 빙그레 웃으며 들고 있던 나머지 부분도 흔들었다. 솔직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뱀이란 게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나 먹기에 좋지 그냥은 별로인거 같아 거절하였다.

[막걸리 한 잔 할래?]
[좋지. 집에 있어?]
[받아오면 되. 잠깐만 기다려]

  토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굽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점심에 마신 막걸리가 생각났다. 이렇게 목이 칼칼할 때는 시원하게 넘어가는 한 잔의 술이 필요한 법이다. 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엌에 가서 주전자를 꺼내왔다. 그 때 그 시절처럼 고기를 구워먹는 거라면, 막걸리 역시 주전자에 담아야 흥이 난다.

[너, 오다가 몰래 마시고 물 섞어오지 말아라]
[오케이]

  내가 종종 써 먹던 수법을 형은 아직도 기억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나는 한 걸음에 슈퍼로 달려갔다. 막걸리를 받은 뒤 잔돈 200원은 팁이라고 하자 돈이 넘쳐나냐며 핀잔을 들었지만 아무려나 좋았다. 어서 형이랑 한 잔 해야지..하는 생각에 또 다시 한 걸음에 집으로 뛰어갔다.

[형~막걸리 사왔어]

  마당에 들어서며 외치는데..아무 것도 없었다. 형도, 한창 구워지고 있어야할 토끼도, 한 쪽에 버려둔 뱀의 껍질도.

[권선생, 거기 서서 뭐해?]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청산 할매가 길가에서 손짓하신다.

[그게..뱀을 구워먹다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청산 할매는 고개를 흔들며 불경을 외우시더니 멀어져갔다. 아마도 뱀을 태우다보니 추억이 신기루처럼 나타났었나보다.

[그나저나 이 막걸리는 어쩌냐..]

  허탈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별이 뜨    

에 뽑다 내버려둔 풀들을 빨리 해결하고 저녁 식사 준비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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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마을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후배는 선비의 낙향이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심정일 뿐이다. 35살이 넘어가는데도 실패만 되풀이하는 도시의 삶에 지친 어느 날, 꿈속에서 어린 시절을 본 후 갑작스럽게 결정하고 움직였다. 지렁이보다도 굼뜬 내가 이렇게 과감한 결단을 몇 번이나 해보았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토리묵 장수가 지나갈 테니 출출하면 기다려보시게]

  저녁 해가 질 무렵이 되서야 동네 산책을 마치고 천천히 돌아오는데 옆집 청산 할매가 한마디 하셨다. 

[그런 장수는 겨울에 다니지 않나요?]
[여긴 계절 안 따져]

  청산 할매는 10남매를 낳았다. 그 중 5명만이 살아남아 장성한 후 모두 도시로 보내 이제는 혼자 사신다. 연세가 80이 넘고 허리가 호미처럼 굽었는데도 열심히 밭농사를 지으신다. 지금도 고추가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두꺼운 철사를 묶어주시던 참이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아. 들어가서 쉬어. 얼굴이 빨간 게 술 한잔 한 것 같은데..]

  눈썰미도 좋으시다. 슬리퍼 끌리는 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리셨던 게 단데..나는 인사를 한 뒤 몇 걸음 더 걸어가 마당에 들어섰다. 본래 이 집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으로 된 재산이다. 시가로 천만 원도 안 되는 낡은 집이다보니 어느 형제도 들어와 살기를 마다하였다. 덕분에 몇 달 간 비어있어 방문을 연 순간 빈 집 냄새가 밀려왔다. 첫날은 오전 내내 쓸고 닦아 그럭저럭 내 몸 누일 방 한 칸을 정리하고 나서야 바닥에 푹 퍼졌던 일이 기억난다.    

  찬 물에 식은 밥을 말아 훌훌 떠 넣은 후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다 져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문득 정말 도토리묵 장수가 올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은 5월이 다 되가는 봄인데 과연 누구에게 묵을 팔겠다고 무거운 짐을 지고 나타나겠냐 싶다. 할매 역시 웃으셨던게 기억난다. 농담이었구나..라고 결론을 지으며 배게로 삼기에 적당해 보이는 책을 들고 대청마루로 나왔다. 한 때는 그렇게나 목매던 놈이 베게 신세라니..삶이란 참 알 수 없다.

[도토리묵~도토리묵~]

  시원한 바람에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묵이라는 단어를 다시 확인한 순간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묵 좀 봅시다!]

  나는 얼른 슬리퍼를 꿰어 차고 마당 밖으로 나갔다. 헐레벌떡 뛰어가면서 큰 소리로 부르니 산길로 들어서던 장수는 그제야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지만 생각보다 젊고 다부진 체격이다. 그는 가로, 세로 50센티 정도의 나무통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숙였던 뺨에 시원한 기운이 닿는다. 보기와는 달리 성능 좋은 냉장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드릴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을 꺼내 즉석에서 자른다. 통 안에는 도토리묵이 통째로 층층이 쌓여 작은 충격에도 탱글탱글 거리며 좌우로 흔들렸다.

[이런 밤에 묵을 파시다니 신기하네요]
[오늘은 산신제가 있어서 밤 장사를 나왔소. 대량으로 만드느라 오후 내내 애 좀 먹었지]
[직접 다 만드셨나요?]
[묵은 손으로 해야지 정성이 들어가는 법이요. 손님이 안 불렀으면 내 벌써 고개를 넘었을 것을..이러다 늦겠구먼..]

  그는 손목시계를 본 후 말을 멈추었다. 오른 손으로 반듯하게 잘린 도토리묵을 비닐에 담는다. 남은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끌더니 묵을 올려주었다. 아기의 뺨처럼 부드러운 감촉에 부셔질까봐 재빨리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정성이 들어간 것이니 버리지 말고 다 드시구려] 

  그는 내 윗옷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 밀고 있던 천 원짜리 한 장을 쓱 뽑아 들고 가버렸다. 참으로 걸음도 잽싸다며 감탄을 하고 있다가 청산 할매랑 나누어 먹으려고 조심스럽게 발길을 돌렸다. 집에 들러 쟁반에 받쳐갈 생각도 못한 채 그냥 걸어갔다. 두 손을 배 앞 쪽으로 모아 도토리묵을 고이 받치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내딛었다.

[할매, 묵 좀 드셔보세요]

  청산 할매는 주방에서 쟁반과 젓가락, 칼을 들고 왔다. 듬성듬성 자른 묵은 언뜻 보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블록 같다. 이 봄 밤에 먹는 묵 맛이 어떨까하는 호기심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나름대로 고소하네요]

  청산 할매도 묵을 입에 넣고는 그 맛을 음미하듯 오물오물 천천히 씹었다.   

[산신제가 뭔가요? 아까 묵 장수가 그 말을 하던데..]
[저 고개를 넘으면 사당이 하나 있어. 거기서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산신께 지내는 제사지]

  말씀 도중에 갑자기 수를 세듯 손가락을 꼽으신다.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시며 나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이런 날 늦게까지 집 밖에 있으면 귀신 만나]

  우리 집이 바로 옆이라 몇 걸음만 가면 되건만 배도 부르고 호기심이 생겨 나온 김에 산신제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잽싸게 가버리던 도토리묵 장수의 뒷모습을 기억해내며 한 밤의 산속 길을 걸어가자니 기분이 묘하다. 시골은 밤이면 칠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둡고 수 십, 수 만 가지의 소리들이 사방에서 다가온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 나만이 홀로 있다고 느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것은 비단 겁쟁이 여서가 아니라 우주처럼 크게 다가오는 자연 때문이다.   


  느릿느릿 천천히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가자니 작지만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의 음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음색이다.

[여긴 뭐 하러 왔소?]

  그 음을 따라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선 순간 말소리가 들렸다. 기척도 없이 옆에 서 있는 도토리묵 장수를 보고는 야단맞는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산신제 구경을 하려고..]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본 후 말없이 걸어갔다. 따라와도 좋다는 허락으로 생각하며 나는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확실히 그는 움직임이 빠르다. 이 끝없는 어둠에서 눈이 얼마나 좋으면 저리 성큼성큼 갈까 싶어 혹여 놓칠까 조바심을 치며 뛰다시피 걸었다.

[소리 내지 말고 보구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은 오면 큰일 나거든]

  그는 나무 밑을 가리키더니 곧바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를 찾는 걸 포기하고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양 팔로 감싼 뒤에 턱을 기댔다. 눈으로 건너편의 풍경을 쫓기 시작하면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 뽀얀 느낌으로 사물이 보인다. 왠지 모르게 현실의 감각이 사라져간다.  

 
  건너편 위쪽으로는 빨강, 파랑, 노랑의 긴 끈들이 나뭇가지에 매여 늘어진 채로 바람에 흔들린다. 나무는 저항하듯 간간히 자신의 몸을 털어 나뭇잎을 뿌린다. 그 앞에는 여러 가지 제사 음식들이 놓인 상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뒤편에는 엄청나게 많은 묵이 쌓여 있어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이건 마치 묵 파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토리묵 장수의 가방에 정말 저 양이 다 들어있었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박여도 분명 4-5단 높이의 묵들이 여러 접시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면 탱글탱글 흔들렸다. 살짝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리다 다시 왼쪽으로 기우뚱.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균형을 잡으니 신기하다. 이런 종류의 상차림은 나에게나 놀라운 것인지, 건너편의 사람들은 묵을 처다 보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한 참을 구경하는데 화려하게 차려입은 무당이 정면으로 걸어왔다. 세 번의 합장 후에 무당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서는 처음 보는 노인 양반이 초를 들고 나무 주변을 돈다. 바람이 내게로 불어와 아릿한 향이 느껴졌다. 그들은 그렇게 독경을 읊고 절을 하는 등의 행동을 반복하였다. 사람이란 비슷한 말들을 계속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오는 법이다. 꾸벅꾸벅 졸다가 몸이 앞으로 수그러져 머리를 땅에 박았다. 다행이 풀이 가득하여 다치지는 않았지만 잠은 확실하게 깨버렸다. 얼른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아까 본 이들 대신 낡은 한복을 입은 아낙만이 게걸스럽게 묵을 먹고 있다.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입에 넣으니 보는 내가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든다. 하여 나도 모르게 일어나 다가갔다. 내 슬리퍼 소리가 조용한 산에 울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와중에도 입에 묵을 넣는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빨리 먹는다. 나를 째려보는 기세가 더 다가갔다가는 화를 내지 싶다.

[천천히 드세요..체하겠어요]

  처음에는 아랑곳 하지 않더니, 한 접시를 다 먹은 후에야 그녀는 내게 먹어보라는 듯이 다른 접시의 묵을 내밀었다. 과연 손을 씻었을까 싶을 정도로 검은 손가락 때문에 머뭇거리자 한 걸음 다가와 입에 불쑥 넣어주는 게 아닌가. 놀라 뱉지도 못하고 얼결에 삼켜버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매끈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조금 더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아는 듯 더 내민다. 사실 한 번 먹는 게 어렵지 그 다음은 일도 아니다. 결국 그녀와 나는 새벽 닭 소리가 들릴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배가 올챙이처럼 붓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오는 게 보인다. 그녀에게 나눠 먹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방금 전까지도 내 옆에서 못 먹고 죽은 귀신처럼 허둥거리던 아낙이 사라졌다.

[이봐~뭘 하는 겐가?]

  청산 할매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몸이 무거워 머리만 간신히 돌렸더니 호미와 광주리를 든 할매는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묵을 하도 먹었더니..배불러서 못 움직이겠어요]
[사람 참..어제 먹은 묵이 얼마나 된다고.. 젊은 사람이 싱겁게..]
[아니에요. 제사상에 있던 걸 다 먹었어요]

  손짓을 하면서 쳐다보자니 내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여러 가지 색의 낡은 끈이 묶여 있는 나뭇는 이미 고사한 듯 가지를 전부 늘어뜨렸고, 봄이라면 한창이어야 할 나뭇잎도 없었다. 게다가 좀 전까지 보았던 제사상도, 음식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귀신에 홀렸나보네. 그러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건만..]

  청산 할매는 느릿느릿 조금씩 걸어 내 곁을 떠나갔다. 모습이 고갯길 너머로 사라질 무렵에 한 마디 말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어제가 우리 어머니 제산데 좋아하는 묵도 못 해줘서 어쩌나. 먹으러 왔을 텐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에이 모르겠다..하는 기분으로 못 잔 잠이나 마저 자야지 하며 대청마루에 올라서는데 작은 쟁반에 담긴 도토리묵이 나를 반긴다. 불어오는 바람에 탱글탱글 흔들리며 인사하는 묵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떠오른다. 그 밤, 그 묵 맛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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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2009-10-0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1편부터 봐보려구요.
 

"학마을에 낙향한 남자가 경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그리고 사랑"

경상북도 영주시에 위치한 학마을.
이곳은 소백산에 둘러쌓인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현재 주민이 10명이며,
모두 고령의 어르신들만 남아 밭농사를 짓습니다.

학마을은 1년 내내 학이 머무는 마을이며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섞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느 봄 밤에 만나게 된 도토리묵 장수..
사람으로 둔갑하여 돌아다니는 너구리 아가씨 등

주인공인 권선생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학마을에 돌아와 살게되면서 기억보다 더 아름답고 신기하며
때때로는 기이하기 까지한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이 글을 통해..
시골이 고향이신 분들은 향수 어린 느낌을..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온 분들은 아~그런 일들이 옛날엔 있었구나..하는 기분을..
느끼시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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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마을에 낙향한 남자가 경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그리고 사랑"

경상북도 영주시에 위치한 학마을.
이곳은 소백산에 둘러쌓인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현재 주민이 10명이며,
모두 고령의 어르신들만 남아 밭농사를 짓습니다.

학마을은 1년 내내 학이 머무는 마을이며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섞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느 봄 밤에 만나게 된 도토리묵 장수..
사람으로 둔갑하여 돌아다니는 너구리 아가씨 등

주인공인 권선생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학마을에 돌아와 살게되면서 기억보다 더 아름답고 신기하며
때때로는 기이하기 까지한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이 글을 통해..
시골이 고향이신 분들은 향수 어린 느낌을..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온 분들은 아~그런 일들이 옛날엔 있었구나..하는 기분을..
느끼시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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