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목소리 

 

 

엄마가 나를 부른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첫째 언니와 막내 놈이 밥을 먹고 있었다.   

 

 

 [너는 먹지마라]  

[왜?]  

[못 생겼으니까]  

[먹을 자격이 없어]  

 

 형제들이 한 마디씩 하며 내 앞에 놓여있던 밥과 국을 치워버렸다. 너무나 서러운 기분이 들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수저와 물그릇도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  

[쉬, 쉬. 괜찮아]  

 

 북극의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이 이마에 닿았다. 엄마의 손은 따뜻한데, 너무 추워. 누구지..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빨간 꽃무늬 파자마 차림의 스승님이었다. 창피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옷 매치를 보고야 그가 진짜 스승님이고, 좀 전의 일은 꿈이었음을 느꼈다. 얼마 만에 흘린 눈물인지 깨닫자 어색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후다닥 닦았다.  

 

 [꿈을 요란하게 꾸길래 깨웠어]   

 

 허리를 살짝 들어보았더니 말짱하다. 어젯밤에 일방적으로 구타당한 것마저도 꿈같다. 팔, 다리 역시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니 뱀파이어의 재생력은 정말 훌륭하다.  

 

 [어제 일 어떻게 된 거에요?]  

[네가 한 일이 아닌거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라]  

[제가 안 했다고 스승님도 믿으세요? 진심으로?]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뱀파이어는 현혹시킬 의도가 아닐 때는 가능한 한 상대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는데, 지금은 그가 나를 믿는 건지 너무 궁금해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내가 눈을 뜬 이래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넌 송곳니가 없잖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부. 야철신 

 

[내가 있어서 당분간은 위험한 놈들은 못 오니 상관하지 말고 씻어라] 

다가오고 있는 요괴에 대한 내 마음을 아는 듯 한 마디 덧붙인 뒤에  풍류를 즐기듯 몸을 좌우로 흔들며 눈을 감았다. 그는 능력이 좋은 요괴임이 틀림없다. 생각해보니 그가 나를 따라 올 때부터 더 이상 다른 요괴들이 보이질 않았다. 지금처럼 한 번에 한 놈만, 그것도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일은 보기가 드물었기 때문에 색다르게 느껴졌다.  

저렇게 사람처럼 행동하는 놈을 만나고보니, 나중에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하든 지금 이 순간은 마음이 놓였다. 입을 벌리고 달려오던 바가지 모양의 요괴는 정작 내 발꿈치만 살짝 물고는 물을 퇘..뱉은 후 잠수해버렸다. 물린 다리가 따끔하기는 하지만 그정도는 별일 아니었다. 

물에 새지를 담그자 핏물이 흐른다. 살살 문지르며 깃털 하나하나를 닦고 있자니 팔색조라는 이름에 걸맞는 수만가지의 색이 햇빛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아름답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라지만, 분명 팔색조의 색은 지금까지 살면서 보아온 중에서 단연코 으뜸이다. 어찌보면 화로 속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쇠뭉치의 붉은 기운 같다가도, 또 어느 순간엔 담금질을 한 후 물 표면에 떠오르는 검보라색을 띤 청색 물방물처럼 보인다. 새지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는 댓가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반대급부라던가. 그와 만난 후 이렇게 자세히, 오랫동안 그의 색을 보기도 처음이다.  

[팔색조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귀하지] 

연잎으로 부채질을 하던 요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꽤 오래 살아온 나도 몇 번 못 봤을 정도니까. 게다가 인간이랑 같이 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참으로 신기하지. 인간에게 의지하다니..도데체 무슨 생각인걸까] 

[새지는..사람의 마음을 가진 요괴야] 

[사람의 마음?] 

요괴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다가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노,애,락을 느끼고, 고통을 알며, 동료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마음] 

[그래? 목숨을 내놓은 결과가 그건가?] 

그의 힐문하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참으로 교활한 존재야.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듯이 굴다가도 위급할 때는 자신을 먼저 찾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눈 앞에서 나를 밀치고 죽어간 무기 직공이 떠올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래서 스승님이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구나]

눈꺼풀이 1분당 1000회씩 움직이고 이가 달달 떨리자 스승님이 첫날 말한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동시에 이럴 때 스승님이 슈퍼맨처럼 나타나 나를 구해주시면 좋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 분은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갑자기 돌아오는 사람이라 이런 생각은 지금의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차라리 나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낳겠다. 있는 힘껏 컥 소리를 내며 손수건을 뱉었다. 

[살..려..주..세..]  

 쥐어짜는 목소리로 반짝이는 검은 구두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하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뱀파이어는 고통 속에서 더 예민해지는 법인지 지금의 나는 최고의 청각을 구사하는 중이라, 그들이 소곤거리는 말과 달려오는 발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레고리가 만든 것 같은데..어떻게 할까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야]  

그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달려오던 발자국 소리가 멈췄기 때문이다. 나는 분당 120회로 떨어진 눈꺼풀의 움직임을 의식하며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했기에 비록 갈색 구두와 검은 바지 밖에 볼 수 없어도 스승님이라 생각했다. 이제 허리뼈는 가장 크게 부셔진 5번 디스크 쪽을 맞추는지 불에 달군 철로 허리를 지지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에 견디질 못하고 새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내 시야로 분명 스승님이 나갈 때 들고 있었던 검은 가방이 보였다. 스승님이라는 확신을 하며 눈을 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겁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이나 뱀파이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동그랗게 난 두 개의 구멍을 독으로 뒷마무리를 하지 않아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채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출혈이 자연적으로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 이대로 두면 이 남자, 곧 사망한다. 나라면 조금만 먹고 예쁘게 상처를 막아놨을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제길..제길..] 

나는 사막에 떨어진 여우같은 기분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저 피를 마시고 싶다는 갈망이 발부터 머리까지 스멀스멀 잠시해온다. 점차 뇌가 마비되면서 먹으면 안 되는데..119에 전화해야하는데..라는 생각이 가라앉았다. 

[으윽..]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코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피의 향은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떠밀려 엉금엉금 그에게 다가갔다. 입을 벌리자 하나뿐인 송곳니가 달빛에 들어나 반짝였다.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목에 머리를 숙였다. 피. 피. 피. 나는 떨리는 입술을 목에 가져다 댔다. 

내 입술에 뿜어져 나오는 피가 묻는 순간에 해방감과 쾌락, 기쁨이 용솟음쳤다. 긴 혀를 내밀어 분수대의 물을 마시듯 솟구쳐 오르는 핏줄기에 가져다데는데 누군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나는 방어도 피신도 못하고 죽어가는 남자 옆으로 떨어져 머리를 땅에 박았다. 벌떡 일어나려고 다리를 모으는데 허리에 발길질이 가해지면서 뼈가 끊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시 옆으로 구르며 눈을 떴다. 호미처럼 몸을 굽힌 채 앞을 보니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나를 두들겨 팼음을 알았다. 달빛이 거대한 몸에 가려 그가 누구인지, 왜 나를 때리는지 물어볼 수 없었으나 엄청난 힘으로 보아 그 역시 뱀파이어였다. 사람이라면 내가 피를 빠는 순간 내보내는 환각 때문에 근처에 오지 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다가와 뱀파이어의 허리뼈를 단번에 부셔버릴 정도로 나를 구타할 수 있다면 절대 사람이 아니다.  

[그만] 

1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낮선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허리뼈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지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해, 이대로 있다간 또다시 공격 당할 수 있다는 문제에 대해 더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재생이 고통스러웠다.  

[하악..하악..]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하자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다가오더니 샤넬 향수가 진동하는 실크 손수건을 뭉쳐 입에 단단히 박아주었다. 허리에 집중된 신경들은 한 개씩 뼈가 움직일 때마다 전기를 흘려보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다리와 팔이 꺾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부. 야철신 

 

[난 팔색조를 먹는 취미는 없으니 걱정말라고. 꽤 오래 심심했는데 소문으로 들은 게 눈 앞에 보여서 온 거 뿐이야] 

[소문?] 

[인간이 팔색조를 들고 다니는데, 살이 올라서 맛있어 보이는 놈이라고] 

아..그래서 쉴 틈도 없게 덤벼들었나보다. 그들의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뭔가에 홀린 듯 했던 모습들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남아있으니 걱정이다.  

[내 체취 때문에 이 녀석의 냄새가 안 날텐데..] 

예전에 새지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내 냄새는 좀 비릿한데가 있고 강한 편이라 같이 있으면 자신이 덜 위험하다고.. 

[피의 향만큼 진한 건 없지. 지금도 코를 찌를 정도야. 이 부근에 너만큼 지독하게 냄새나는 생물은 없어] 

나랑 새지는 살육의 현장을 떠난 후로 목욕을 전혀 하지 않아 피가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채였다. 옆에 인간이 있다면 아마 이런저런 냄새 때문에 구역질을 할지도 모른다. 내 몸을 내려다보니 문득 씻고 싶어졌다. 가는 내내 요괴들이랑 싸우는 것도 이제는 지겹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하루 정도 후에 마을 근처에 도착할 것이므로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과 이런 괴물같은 모습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 근처에 혹시 냇가가 있을까?] 

내 물음에 요괴는 빙긋 웃으며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귀에는 물 소리가 들리는지 손을 들어 왼 쪽을 가리켰다.   

[사람은..없어도..요괴들은 있겠지] 

[물론 그렇지. 널 열열히 환영할 껄]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지 큰 소리로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퍼져나가며 근처 나무들이 몸을 떨었다. 가지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던 새들이 깜짝 놀라 박차고 날아올랐다.  

숲을 통과하여 내리막길로 들어섰더니 그의 말대로 그리 넓거나 깊지는 않지만 물이 맑아보이는 냇가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한 걸음에 달려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담그는 순간 물이 전달해주는 차가움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인지 물 속에 숨어 있던 바가지 모양의 요괴가 물을 팅기며 솟아올라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입을 벌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이곳에 데려다준 요괴를 찾았다. 그는 바위에 앉아 부채질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