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고양이의 가장 큰 장점은 낙법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엄청난 고도에서 떨어진 게 아닌 이상 공중에서 몸을 돌려 안전하게 착지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가 당황하여 갑자기 떨어졌고, 아래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으니 그가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앞으로야 어찌되든 호랑이의 입 속으로 그가 들어가기 전에 받아내기 위해, 바닥으로 점프했다. 공중에서 흙바닥까지 몇 초면 도착하기 때문에 호랑이의 입과 프릭스의 낙하 속도를 확인하며 내가 착지할 위치를 잡았다. 내 앞으로 호랑이가 입을 벌리며 달려왔고, 두 손으로 프릭스를 잡자마자 건너편 숲 속으로 던졌다. 이제는 내가 살아야 할 차례라, 호랑이의 거대한 입을 피해 몸을 옆으로 굴렸다. 뱀파이어가 낼 수 있는 속도는 1초에 40 미터까지 가능하지만, 그것은 타고났다기 보다는 지속적인 경험과 몸이 단련 됐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는 운동을 싫어하고, 도움을 받는데 익숙하니 그런 속도를 낸다면 기적이다. 결국 호랑이는 나무에 몸을 부딪친 후 도망치려고 바로 일어서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긴 발톱 여러 개가 포크처럼 등에 꽂히자, 나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완벽하게 등을 꽤 뚫지는 못했지만,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들어간 발톱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호랑이의 표호가 숲 속에 쩌렁쩌렁 울릴 무렵, 나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내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에 묻혀 핥았다. 호랑이의 다른 앞발이 내 어깨부터 나머지 팔 쪽으로 긁어내려가는 게 느껴지지만 고통은 피의 섭취로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만큼 내가 흘린 피가 많아졌지만, 나는 단 한 번만 힘을 낼 수 있다면 호랑이를 물리치고 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수리려 몸을 곧추 세우는데 호랑이가 갑자기 날뛰었다. 동시에 발톱이 박힌 내 등도 같이 털썩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여 피를 핥던 손이 바닥에 거칠게 쓸렸다. 고개를 돌려 호랑이를 올려다보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다시 돌아온  프릭스였다. 그가 호랑이의 귀를 물고 매달려 있었다. 

 

[그만하고 도망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지, 아니면 듣지 않기로 했는지 여전히 귀를 문 채 호랑이의 얼굴을 마구 긁었다. 호랑이는 나머지 앞발로 그를 떼어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작고 보잘 것 없는 프릭스를 앞발로 쳐서 날려보냈다. 나는 온 몸의 근육을 타오르게 해 그 반동으로 발톱이 밖으로 밀려나가도록 힘을 주었다. 내 몸이 마침내 호랑이에게서 벗어났을 때, 프릭스는 이미 나무 정면에 부딪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였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화가 치밀어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무시무시한 앞니들이 어깨에 박혀도 아프지 않았다. 두 개의 거대한 앞발을 들어 허리와 다리를 내리찍어도 두려움 없이 호랑이의 배를 공격했다. 다른 곳은 털로 덥히거나 발로 공격을 막을 수 있어도 분홍색 살이 드러난 배는 빈틈이 보였다. 내 이가 마침내 배를 물어뜯어 살점들이 떨어지자, 호랑이는 나를 떼어내려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내 다리가 공격을 받아 너덜너덜한 게 느껴지지만, 호랑이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입으로 들어오다 보니 재생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두 손으로 호랑이의 상처를 헤집으며 내장이 보일만큼 깊고 넓게 상처를 벌리자 호랑이는 공격을 포기하고 흙바닥에 무너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호랑이의 피를 마셨다. 재생에 필요한 양은 이미 채웠지만, 이 피는 마셔도 된다는 정당성을 스스로 인식하며 호랑이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입에 묻은 피를 대충 닦은 후에야, 프릭스를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걸었을 때, 그가 있는 쪽으로 다른 뱀파이어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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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읽기 2010-10-0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일까.. 잠시 생각해 보다 갑니다..

최현진 2010-10-03 16:0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집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세레스 2010-10-0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 여린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호랑이와 싸워 이겼네요. +ㅁ+

최현진 2010-10-05 20:4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공은...결국 주인공답죠..^^
 

 

 

  일부의 나뭇가지는 강한 앞발의 힘에 부러져 떨어졌다. 내가 어쩌면..이라고 예상했던 동물은 호랑이였는데, 실재로 나온 동물도 호랑이였다. 싸움을 시작도 하기 전에 프릭스가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무에서 뛰어내려 그와 호랑이 사이에 착지했다. 호랑이는 갑작스러운 바람과 움직임에 놀란 듯, 온 몸의 털을 곧추세우며 멈쳤다. 나는 바닥에 닿자마자 프릭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망가라고 하니까 뭐 때문에 이래?]
[너 혼자 죽게 나둘 수는 없어]
 

스승님의 발끝을 신경 써서 봤던 게 도움이 될 줄 상상도 못했다. 나를 들쳐 매고 지붕과 나무 위를 날아다니듯 움직였던 것처럼, 나는 흙바닥에서 바위에 왼 발끝만 살짝 닿게 해 반발하는 프릭스를 들자마자 건너편 바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 위로 점프했다. 우리 둘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자 밟고 지나갈 수 있는 나무가 있는지 돌아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호랑이는 내 행동 때문에 기분이 별로 인 듯, 낮게 으르렁거리며 우리가 있는 나무 밑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호랑이가 나무를 앞발로 치자, 하늘을 가리고 있던 수많은 나뭇잎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리 역시 균형을 잃을 뻔 했지만, 바로 옆의 가지를 붙잡아 약간의 흔들림을 겪은 후에 다시 안정을 찾았다. 주변에는 이제 막 자라고 있는 나무들 뿐이라 내려가지 않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넌 알면 알수록 묘한 데가 있어]
[뭐가?]
 

눈은 나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올려다보는 호랑이에게 고정시켜둔채 되물었다.
 

[너무 약해서 뱀파이어가 맞나..싶기도 하다가, 또 이렇게 행동하는 걸 보면 뱀파이어는 뱀파이어구나..]
[시끄러워!]
 

그가 몸을 들썩이며 웃자, 나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만약 이 상황에서 나 혼자 호랑이와 대치해야한다면 아무 것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와 함께 있으니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이 된다는 걸 느꼈다. 스승님과 있을 때면, 그에게 매달리는 어린아이가 되는데 비해, 프릭스 앞에서는 스스로의 안위를 챙기는 어른이었다. 그것이 그와 스승님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의 차이다.
 

[만약에..무사히 집에 돌아가면..한 번 생각해볼게]
[뭘?]
 

프릭스 역시 호랑이가 신경 쓰이는지 위협적인 소리를 낸 후, 나를 쳐다보았다.
 

[프릭스, 너에 대해..]
 

내 말이 그렇게나 놀라운 것일까? 프릭스는 자신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넋을 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호랑이가 있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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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고 있어?]
[응]
[지금 도망칠 꺼야. 따라와]  


프릭스에게 생각을 알려준 뒤 가능한 소리를 내지 않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나를 지키는 뱀파이어는 짜증스런 신음을 내다가, 휴대용 혈액병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다보니 내가 움직이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반대편으로 있는 힘껏 뛰어 숲으로 들어갔다. 몇 미터쯤 갔을 때, 창고 쪽에서 나를 찾는 소동이 났음을 프릭스가 알려주었다. 그와 나는 창고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울창한 지점쯤에서 마주쳤다.

[연기가 제법이었어]
[이런 일도 몇 번 겪으면 별 거 아니거든]  


나는 허리를 꺾으며 프릭스에게 대답했다. 요 근래 들어 누구의 도움 없이 내 몸을 지킨 게 처음이니 좀 뻐긴들 어떠냐..하는 마음이었다.

[스승님에게 빨리 알려야 돼. 이대로 끝날 리가 없잖아]

나보다 조금 앞서 걸어가던 프릭스는 뭔가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내가 툭 치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그들이 널 창고로 데려올 것 같아 먼저 와 있었는데, 지난번에 내가 깨트린 창문이 그대로여서 안을 들여다봤어. 생각보다 아기들이 많아진 게 본격적으로 블러디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것 같더라]
[스승님께서 알아보시겠다고 하셨는데..]

 

프릭스가 갑자기 멈쳐섰다. 그는 고양이의 모습이지만 마치 앞발로 팔짱을 끼려는 듯 서로 교차했다. 눈빛도 약간 거칠어져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넌 모든 거에 스승님, 스승님이냐?]

나는 부드러운 앞발에 손을 올리며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했다.

[둘이 그곳으로 돌아간들, 뭘 할 수 있겠니? 한 두 명 정도 운 좋게 데리고 나온다쳐도 그 다음엔? 차라리 지원군을 많이 데려가는 게 아기들에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의견다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아기들은 죽어가고 있을 거야]

내 말에 아무 대꾸가 없어, 프릭스가 고집을 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크르르르..소리를 내며 왼쪽 편으로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의 행동에서 그들이 따라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있는 바위 주변으로는 가지가 많은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는데. 바람이 부는 것처럼 스르르 흔들렸다. 나 혼자 있었다면 당연히 바람이 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고양이인 프릭스는 나보다 더 예민해 그것이 생물체의 움직임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들이 온거야?]
[아니. 다른 동물이야. 소리 내지 말고 움직일 수 있어?]
[노력해볼께]
[나무 위로 올라가]
[너는?]
[곧 갈 꺼야. 혹시라도..내가 못 올라가면 넌 바로 도망가]

 

나는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는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앞발로 나를 밀었다. 내가 앉아 있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 위로 올라가자마자, 나뭇잎이 조금씩 흔들리는 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프릭스와는 대각선 방향으로 얼룩덜룩한 갈색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프릭스에게 위치를 알려주자 그는 그 방향으로 이를 드러내며 전투 준비를 했다.

갈색의 생물체는 공포를 조장하는 방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자신이 그 곳에 있다는 건 알려주되,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도록 몸은 숨기고 위협만 하니 대략적인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게다가 간간히 들려오는 낮은 소리는 결코 작은 동물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프릭스는 고양이의 모습이라 전투에 적합하지 않고, 싸울 기술이나 능력도 그닥 대단한 편이 아니다. 그저 나를 지키기 위해 무작정 덤비는 정도니 만약 상대가 엄청난 힘이나 능력이 있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아까는 스스로 도망치긴 했지만, 그는 나를 구하기 위해 이 곳까지 와주었고, 지금도 내가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려고 또다시 목숨을 내놓았으니 이대로 내가 사라진다면 앞으로 그를 볼 면목이 없어진다.

크르르르...

위협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샤샤샥 거리며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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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스 2010-09-2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왔! 나왔다! 하고 보는 순간... 다시 엄청 긴장되는 순간에 끝났습니다. ㅎㄷㄷㄷ
 

 

 

이번엔 스승님도 프릭스도 없으니 스스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데, 그동안 그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며 운동이나 연습을 하지 않고 지낸 나의 자만심이 후회되었다.

제일 앞에서 다가오던 뱀파이어가 가구 그늘 속에 서 있는 걸 알아차리고는 개구리가 점프하듯 펄쩍 뛰었다. 그가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나도 옆으로 도망치려고 움직였으나 다리가 붙들렸다. 바닥으로 함께 넘어져 구르면서 낮선 뱀파이어의 거친 숨소리가 코앞에서 들리자 두려움이 솟아올라 평소보다도 더 힘을 쓰지 못했다. 허리를 붙들고 팔을 뒤로 거칠게 제쳐 나를 고정한 뱀파이어는 다른 이들에게 잡았다고 말하며 일으켜 세웠다. 나는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숨을 고르며 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불시에 당한 공격에 나를 잡고 있던 손이 약간 느슨해지자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그를 옆으로 밀었다. 아까 그와 함께 넘어질 때, 흔들리는 유리 창문을 보았고, 그것이 내 희망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균형을 잃자, 나는 그와 함께 유리 창문으로 돌진했다. 우리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유리는 바로 깨지며 흙바닥으로 어깨부터 떨어졌다. 우리의 뒤로 다른 뱀파이어들이 착지해, 도망치려는 나를 둘러쌌다.

[변신괴물은 어디 있어?]

누군가가 물어보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비명만 질렀다. 사실, 희한하게도 그들의 폭력이 상상했던 것 보다는 덜 아팠다. 어쩌면 요즘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공격을 수차례 받다보니 맷집이 생긴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왼쪽으로 딩굴다가 손에 잡힌 다리를 있는 힘껏 물었다. 소프라노의 비명과 함께 몇 배쯤 거센 폭력이 돌아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 몸에 생긴 피멍이 욱신거릴 무렵, 경찰들이 뛰어오는 게 뱀파이어들 사이로 보였다. 그들은 도망치라는 말을 하며, 그 중 한 명이 나를 어깨에 들쳐 멨다. 그들이 뛰기 시작하자, 내 몸은 말을 타듯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균형이 무너지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와 등에 위액을 잔뜩 뱉었다. 옷이 축축해진 느낌이 들었는지 나를 업은 뱀파이어가 그르렁거렸다. 경찰들은 겨우 두 명으로 뒤늦게 출발한 뱀파이어들과 싸움을 하는 게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였지만, 이내 그들이 무리에 다시 합류하자 내 계획이 틀어졌음을 눈치 챘다.

 숲길은 울퉁불퉁한데다가 거친 나뭇가지들이 머리와 어깨를 건드려 생채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프릭스가 말하던 창고에 도착할 무렵에는 피까지 흘러내리는 큰 상처가 이마 왼 편에 생길 정도로 그들은 나를 거칠게 다뤘다. 1시간 쯤 낮선 뱀파이어의 어깨에서 고생을 하다 땅에 내려오니 지독하게 어지러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는 도중에 계속 토해 나올 것이 없는데도, 내 위는 폭풍우 속 난파선에 있다고 착각하는지 요동을 치며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고통스럽게 쥐어짰다. 그들은 여전히 바닥에서 꺽꺽거리는 나를 흘끔 본 뒤 창고 문을 열고 대장을 불렀다. 저벅저벅 콘크리트를 울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는데 머리 속에 프릭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쳐다보지 말고 들어. 나 지금 왼쪽 나무 위에 있어. 타이밍을 찾는 중이니까 힘들어도 기다려]  

약간 진정된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쏟아낼 것이 많다는 연기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이라고 불린 갈색 머리 뱀파이어는 팔짱을 낀 채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릭스를 잡아오라고 했을 텐데?]
[집에 이 여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돌아오는 것 보다는 누구든 잡아오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검은 머리 뱀파이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찾으러 올 겁니다]
[안 나타나면?]

갈색 머리 뱀파이어의 말에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대답이 없었다.

[니가 옆에서 지키다가 나아지면 데리고 들어와]

나를 둘러싼 원에서 제일 멀리 서 있던 뱀파이어는 “내가?”라는 표정으로 대장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끄덕였다. 나는 그들이 어서 들어가기를 바라며 흙바닥에 얼굴을 바짝 대고 침을 뱉었다.

[그만 가자. 나도 바쁘다고!]

그는 참을성이 부족한지 겨우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하며 발로 툭툭 쳤다.

[이대로 들어가면..안에서 토할거에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는 더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데?]
[20분쯤?]

그의 입에서 생전 처음 듣는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으며 욱..소리를 내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에 질세라 더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그의 옆으로 기어가 욱욱..하자 그는 몸을 뒤로 뺀 후, 숲을 바라보며 빨리 끝내라고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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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스 2010-09-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으헉.... 비축분 끝났다....
이제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야 하는군요 ㅠㅠ

최현진 2010-09-17 20:09   좋아요 0 | URL
빨리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타..마타..]

작게 중얼거리며 책을 뒤적거렸다. M자로 시작되는 곳을 아무리 뒤져도 마리타나 마타 같은 건 아예 없어 한 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또 다른 의학서적 몇 권을 한꺼번에 꺼내 좌판에 물건을 진열하듯이 책을 쫙 늘어놓았다. 머리와 허리를 수그리고 책을 이리저리 뒤지는데 정원 쪽에서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쥐나 작은 동물인가 싶어 무시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이어져 귀를 쫑긋 세웠다.

[창문이 열려있어. 안에 누가 있는 거 같은데..]
[그래? 신속하게 처리하자]  


청각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상태라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나를 감시하는 경찰관들인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대화 내용이 이상해, 창가로 다가가 몸을 숨긴 채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세 네 명의 남자들이 몸을 낮추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집을 살피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노출된 그는 창고에서 프릭스를 괴롭히고 때리던 검은 머리 뱀파이어가 확실했다. 나는 깜짝 놀라 바닥으로 엎드린 후, 기어서 서재를 나갔다. 방문을 닫고 그 앞에 의자와 장식장, 책상 등을 쌓아올린 후, 복도를 달려가는데 서재의 창문을 통해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고 현관문 쪽으로 뛰어갔다.

소리가 나지않게 살살 현관문을 열며 머리 속으로 프릭스를 불렀다. 우리의 텔레파시가 몇 킬로미터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경찰서에서 불렀을 때는 그가 왔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문 밖으로 왼쪽 발을 내미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접근하는 게 틀림없다. 이대로 가면 그 누군가와 마주쳐 잡힐 게 뻔하니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문을 잠근 뒤, 벽에 있는 두꺼비 집을 내렸다. 그 즉시 집 안의 모든 전기가 나가버려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암흑이 사방에 내려않았다. 나는 벽을 더듬어 거실임을 확인한 후, 커튼을 조금 밀어 밖을 살펴보았다.

쾅쾅쾅...

서재 창문으로 들어온 뱀파이어들이 열리지 않는 문을 부수려고 몸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 때마다 쌓아올린 물건들이 하나 둘씩 떨어졌다. 현관문도 무섭게 흔들리다가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쪼개지며 달빛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서재문도 부셔졌다. 양 쪽에서 뱀파이어들이 거실을 향해 다가오는 게 느껴져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들의 움직임을 귀로 들으며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딱 두 가지라고 판단했다.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경찰들이 침입 사실을 알고 도와주는 것과, 저항 없이 깨끗하게 잡혀가는 것. 전자가 가장 좋지만 어떻게 그들에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다.

[가까이에서 기척이 들린다]

누군가가 동료에게 말했다. 뱀파이어의 청각은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기본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조만간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는 걸 알지만,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1미터도 안 될 때까지, 나는 통나무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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