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고 하는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하긴, 제가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아서 읽어보실 텐데 더 말해 뭐하겠어요]
[민시영!] 

귀가 울릴 만큼 큰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늘어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스승님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말 하지 못한 건 미안해. 내가 가진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네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우리 관계가 깊어졌을 때 말하려고 했어]
[언제요? 제가 스승님의 여자가 된 후에?] 

스승님의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 하려는데 끈질기게 울리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나를 놓아주고는 전화를 받았다. 1분여쯤의 통화 후에 차 문을 열고 내리다가 다시 상반신을 구부려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어디 가지 말고 이 안에 있어. 꼭!] 

나는 팔짱을 끼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승님은 그런 나를 잠시 보다가 문을 닫고 주차장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이제는 술 때문에 속이 아프다기 보다는 스승님께 속았다는 사실이 속을 더 쓰리게 한다. 내가 스승님을 바라보면서 했던 상상들도 다 알고 있고, 프릭스와의 아슬아슬한 감정도 적나라하게 들겼다는 게 마치 옷을 벗고 스승님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욱] 

속이 뒤틀리는 증상과 함께 아까 마신 술의 알싸한 향이 코에서 느껴졌다. 이어서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액체 때문에 입을 틀어막고 차에서 내렸다. 뛸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멀리 갔다. 주차장을 거의 벗어났을 때 쯤, 막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결국 누군가의 차 옆에서 계속 게워냈다. 내 속엔 단순히 술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스승님에 대한 복잡한 마음도 위액에 섞여 나오는 지 쏟아도 쏟아도 뭔가 남아있는 듯 불편하기만 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네. 그냥 술을 좀 많이 마셔서요] 

누군가의 말이 머리 위에서 들리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슴을 문지르던 손을 들어 괜찮다고 흔들었다. 그 누군가는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몇 번 등을 문질러주고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손에서 위액 냄새가 시큼하게 나고 입 안에서는 술 냄새가 맴돌았다. 입을 행구고 손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10여분 쯤 멍청히 있다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홀이 보이는 건물로 천천히 걸어갔다. 홀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웃음 소리와 작게 속삭이는 대화들이 귀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런 상태로 들어간다면 후각과 청각이 뛰어난 뱀파이어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겠다 싶어 몸을 돌려 건물 옆의 돌길로 들어섰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걸어갈수록 건물을 밝혀주던 주황색 등불들이 사라지면서 어둠이 깊어졌다. 홀을 빼고는 건물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잠시 동안 그냥 돌아갈까 고민을 하다가 옷매무새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오른편 건물의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손으로 현관문을 밀었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고, 그 옆의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이 저택에는 건물이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은지 돌길을 걸어갈 때마다 새로운 건물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매번 무겁고 육중한 현관문들은 굳게 잠긴 채 나를 거부했다. 숲처럼 울창한 나무들이 양쪽에 심어져 있는 길의 끝에는 담장이 쳐 있어 더는 갈 곳이 없겠다 싶었을 때, 나지막한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곽까지 장식이 요란하고 웅장한 다른 곳들과는 달리 허름하고 단순하며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나무들에 가려있어 과연 문이 열려 있기나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가가 확인하려고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끼이익] 

예상과 달리 문이 힘들게 열렸다. 소리가 약간 귀에 거슬렸지만, 열려 있다는 점만으로도 감사하다. 들어서는 순간 어둡고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오면서 살짝 열어둔 현관문의 외줄기 빛이 바닥에 조금 비추긴 하지만 벽과 그 주변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 왼쪽부터 벽을 더듬어 가는데 점점 머리 속이 시끄러워졌다. 수많은 전파가 지지직거리는 듯 한 느낌이 뇌를 흔들어 속이 다시 메슥거렸다. 게다가 이 곳은 청소와 담 쌓았는지 손에 먼지가 잔뜩 묻고 숨을 쉴 때면 코가 간질 간질거린다. 

[에취] 

참으려고 실룩거리기만 하던 코와 입이 크게 움직이며 기침이 나왔다.  

[누구십니까?] 

내 어깨에 갑자기 닿는 손의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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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따라오신 건가요?]
[음..반쯤은..]
[무슨 일로요?]
[그와는 어떤 사이지?]
[글쎄요..내가 왜 대답해야하죠?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세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과 마주치는 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그는 지나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여긴 왜 왔지?]
[파티에 참석하려고요. 그 것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그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은 게 틀림없지만, 말할 것이 없다는 게 왠지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내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려놓았다. 그가 손을 들어 어깨너머로 머리카락들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나서도 그의 손가락이 목과 어깨를 훑고 있어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카르페디엠] 

그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반대편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을 즐겨라..내일은 없을지도 모르니..]

 

---------------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 속이 점점 더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어 머리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사실 살아오면서 술을 먹어본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도인데, 오늘은 긴장해서 혈액마저 안 먹고 나온 터라 빈속에 들어간 술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중인 것 같다. 게다가 그레고리와의 기분 나쁜 순간도 한 몫 했다.  

[괜찮아요?] 

언제 온 건지 술을 가지러 갔던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는 내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속이 좀 거북하네요]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억지로 삼킨 후 그에게 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일어나다가 약간 비틀거리던 나를 부축하려고 허리를 팔로 감았다. 몸을 기대고 천천히 걸어 정원의 입구를 벗어났다. 눈앞에 홀이 있는 건물이 나타났고, 열려있는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스승님이 보였다. 그는 이내 나를 알아보고는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술이 좀 과한 거뿐이에요. 이 분께서 실례한 건 없으니 화내지 마세요] 

나는 웃으며 말하려고 애썼지만, 속이 거북해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말렸어야지]
[죄송합니다. 파트너이신 줄 모르고.]
[어라? 두 분 아는 사이에요?] 

나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는 스승님이 데려가려고 하자 바로 팔을 빼며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그가 공손한 포즈로 끄덕이는 걸 보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혹시 좀 전에 말하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또 다시 바로 끄덕거렸다.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져 쓰러질 뻔했다. 스승님은 재빨리 나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다시 한 번 매우 정중히 스승님을 향해 사과했지만, 화가 난 표정의 스승님은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주차장]
[벌써 돌아가게요? 이제 괜찮아졌는데..]
[너 얼굴이 파래. 좀 쉬는 게 좋겠어] 

주차장에 도착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탈 때까지도 스승님은 말이 없으셨다. 심기가 불편한 건 알지만, 나 역시도 기분이 매우 나빠 스승님이 운전석에 타길 기다렸다. 

[진짜로 직업이 뭐죠?]
[경찰]
[그냥 경찰이라고요? 순수하게?]
[어디까지 알고 물어보는 거냐?] 

우리는 서로 마주보았다. 나는 여전히 술이 한창 올라오는 중이라 몸을 가누기가 힘들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싶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몸을 꼳꼳이 세웠다. 그러나 곧 어지러워져 등받이에 기대어 이마에 손을 얻었다. 유리창 너머의 주황색 등불들이 모두 흔들린다. 

[스승님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정도?]
[화가 많이 난 거 안다]
[그럼 제가 웃겠어요, 지금? 스승님은 그 사실들을 여러 해 동안 숨기셨잖아요. 오늘 누군가에게 듣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말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저와 프릭스가 주고받았던 말들도 다 알고 계셨겠네요. 모른 척 하면서 절 놀리니까 재미있었어요?]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어 점점 빨라지고 소리가 높아졌다. 급기야는 조수석 문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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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홀 안을 들여다보실 수 있나요?]
[볼 수는 있지만, 그 사이에 투시를 방해하는 물체들이 너무 많아요. 아직 개발하는 단계라 부족합니다]
[좀 전에 의자와 테이블을 확인하신 걸 보면 뛰어나세요] 

그는 창피한 듯 멋쩍게 웃었지만, 칭찬을 감사해하며 잔을 비웠다.  

[팀장님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그래요? 그 분은 어느 정도신데요?]
[마음을 들여다보실 수 있습니다]
[파티에 같이 왔어요?]
[네. 홀 안 어딘가에 계실겁니다] 

나는 마타의 자질이 있어 프릭스들의 말을 듣는 건 가능하지만 다른 뱀파이어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열어보거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불편하시지 않으세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듣고 있잖아요]
[처음엔 나도 그렇게 믿었는데, 대장님은 조절 능력이 있으셔서 평소에는 열어두질 않으십니다. 사건과 관계 된 일이나, 피해자 심문 할 때..등등의 일에 사용하시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코끝에 봄의 향기가 느껴졌다. 약하게 올라왔다 꺼지고 다시 좀 더 높이 도달하려 뿜어져나오는 분수를 보고 있자니 뱀파이어들의 능력들이 저 분수의 물살 높이 만큼이나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도 그런 능력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저 안에 모인 뱀파이어들 중에도요]
[음..숨기고 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있겠죠. 초대의 뱀파이어들이 만약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대적할 뱀파이어가 없을거에요.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라고 하니까]
[전 평범한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왜죠?]
[어떤 종류의 특별함은 삶을 고되고 힘들게 만들어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만들거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건이 터지게 하잖아요.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 무탈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인거 같아요]
[아가씨는 묘한데가 있군요] 

그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술병과 잔이 가득한 쟁반을 든 웨이터였다.  

[나는 스카치로. 아가씨는 무알콜..]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을 달라고 말했다. 그는 술에 약할 것같다는 식의 표현을 했지만, 그게 더 날 발끈하게 만들어 술을 좋아한다고 응수했다. 그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집어들어 한번에 다 마셨다. 

[후..좀..쓰긴 하네요] 

웨이터가 다시 채워주는 걸 보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아까 뷔폐쪽으로 걸어오는 당신이 눈에 들어왔어요. 뭐랄까..귀여운 아이 같으면서도 여인의 느낌이 있어서..] 

오늘 나는 어깨를 드러내는 옷을 입었다. 한국인 특유의 살색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싶어 먹물보다 더 깊은 느낌의 검은 색을 선택했고, 움직일 때마다 치맛자락이 살짝 감길 수 있는 소재의 드레스를 입어 어떤 면에서는 고상한 느낌도 든다. 나의 선택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모두들 만족스러워한다.  

[혹시 특별히 만나는 뱀파이어가 있나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만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뱀파이어는 있죠]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아쉬움을 담은 듯한 숨을 내쉬었다. 

[누군지 복이 넘치는군요]
[글쎄요. 별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던데..] 

갑자기 그가 손을 잡았다.  

[그분이 당신을 몰라보는 거죠. 나라면..하하하] 

정원에 그의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웨이터는 내 술잔을 가득 채워준 뒤 사라져 이 곳엔 우리 둘이 전부였다. 나는 조금씩 피어오르는 묘한 느낌을 날려버리고 싶어져 손을 살짝 뺀 후, 술잔을 들고 그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그가 선선히 응해 우리 둘은 누가 먼저할 것 없이 술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술은 아까보다 더 쓰고 속을 태우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일로 이곳에 오신게 아니지요?]
[음..그건 기밀이라..] 

그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몸을 의자에 기댔다. 속이 약간 울렁거리는 것 같아 의자 등받이에 상반신을 대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반짝이는 별도 몇 개 보인다.  

[한 잔 더 할까요?]
[제가 가져오죠] 

그가 일어나 들어왔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고 난 후, 나는 스승님과 그레고리를 생각했다. 스승님이 누군가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건 처음봤고, 나 역시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났다. 나를 그레고리의 작품이라고..그 경찰이 표현했었다. 그건 무슨 뜻일까? 당장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들을 생각하며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혼자 있나? 그는?] 

머리 속에 있던 그레고리의 쇠소리가 현실에서 들려와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홀 안에요] 

어느새 내 앞으로 와 있는 그에게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건,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의미라, 긴장하며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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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왜 사라졌어요?]
[나와 파트너를 한 건 일종의 계약 같은 거니까..할 일 다 했다, 그거죠]
[계약?]
[여기 오려면 파트너는 필수니까]
[아...] 

그는 내가 마침내 웃었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전 이런 파티는 처음인데, 좀 실망이에요. 뭐랄까..영화를 보면 멋지게 춤을 출 공간도 있고..내가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죠?] 

그가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손에 든 뷔폐용 포크를 건네받아 내려놓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와 나는 동시에 웃었다. 

[무슨 일 하세요?]
[경찰입니다] 

내가 눈썹을 찡그리자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내가 격었던 악몽을 말하고 싶지 않아 대충 넘겨버렸다. 

[일이 마음에 드세요?]
[항상은 아니지만, 대체로는요] 

그는 슈트 안 쪽에서 작은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이지훈. 경감. 답변으로 나는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떤 일을 담당하시나요?]
[설명하려면 복잡하고 긴데..]
[그럼, 시원하게 바람 좀 쏘이면서 듣고 싶은데, 어떠세요? 이 안은 좀 답답하군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력이 좋다는 건 적당히 무시하고 집중을 해야한다는 뜻인데, 나는 초보 뱀파이어라 선별적 소리 집중이 아직 부족하다. 게다가 뷔페 음식이 있는 자리로 걸어올 때부터 그레고리의 눈길이 계속 따라다녀 불편했다. 그는 이 남자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분명 나에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와 행동으로 징그럽게 굴었을 것이다.우리는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가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샐러드 접시를 들고, 그는 잔을 두 개 들고. 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공기가 확실히 다르네요] 

 뱀파이어들에게 공기란건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사람과 섞여 살아야하니 배우는 과목 중에 자연스럽게 숨을 넣었다 빼는 활동도 있다. 이런 걸 몇 년 동안 연습해서 이제는 공기를 폐에 넣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네. 정말 상쾌하군요] 

그도 나처럼 공기를 가득 머금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 관료의 집은 10여 개가 넘는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차장은 남쪽 제일 끝에 붙어 있어 아치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정원이 펼쳐졌다. 제일 처음 마주한 정원의 이름이 여름인 걸 감안하면 나머지는 아마도 봄, 가을, 겨울일 것이다. 나는 홀만 있는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정면에 원뿔 모양으로 자리잡은 봄의 정원 쪽으로 갔다. 주황색 등이 건물에서부터 정원 입구까지 나란히 서 있어 검은 색의 나무 계단이 깔린 시작 지점을 바로 확인했다. 그 양 옆으로는 들꽃 정원과 장식 정원이라는 푯말이 예쁜 글씨로 써 있어 호기심을 자아냈다. 

[어디로 갈까요?]
[음..앉아 있을 만한게 있는 곳이요] 

그는 잠시동안 양쪽 정원을 바라보다가 들꽃 정원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고 대답했다. 나도 그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봤지만 들꽃 정원 입구에 무성한 나무들 때문에 안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어떻게 그곳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지 아는 걸까? 

[제가 시력이 뛰어납니다] 

내 표정을 보고는 먼저 대답을 했다. 

[그래요?] 

여전히 미심쩍은 느낌이 들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제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해 답을 들으시면 다 이해가 될 겁니다. 지금 말할까요? 아니면 앉아서?] 

나는 말 없이 먼저 들꽃 정원 입구로 걸어들어갔다. 해가 없는 밤인데도 나무들 사이에는 흰색 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 꽃들이 낮처럼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노란색의 꽃 사이에는 토피어리가 다람쥐 모양으로 도토리를 까먹으며 서 있고, 반대편에는 격자로 잘 가꾸어진 초록색의 낮은 덤풀 사이로 붉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색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몇 계단쯤 낮게 지면을 파 분수를 만들어두었다. 바로 그 앞에 그가 말하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가 먼저 테이블에 다가가 잔을 놓고는 내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의자를 빼주었다.  

[저는 RRS라는 팀에서 일합니다.]
[RRS?]
[네. 특기를 가진 경찰들로 구성된 팀이죠] 

그는 약간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을 담아 말했다. 

[특기?]
[예를 들면 저는 시력이 아가씨의 10배쯤 되죠. 투시 능력도 조금 있구요] 

그가 준 잔은 약한 샴페인으로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톡톡 거품이 터졌다. 살짝 여운을 남기는 맛을 즐기며 그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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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영이가 재미있는 말을 해서]
[그래? 나도 끼워줘, 같이 웃자]
[파트너는 어떻게 하고?]
[저~기] 


턱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몇 몇의 남자들이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게 보였다. 저 모습이 바로 영화에서 보던 외국식 파티 장면이다. 다른 때 같으면 배우를 바라보는 팬처럼 구경을 하겠지만, 바로 앞에 섹시함을 폴폴 풍기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여자가 있으니 눈길을 바로 돌렸다.  

[시영씨라고 했죠? 지난번에 본 거랑은..엄청 다르네요. 아주..예뻐요]
[감사합니다. 제이씨도 굉장하신데요. 여기서 제일 아름다운신 것 같아요] 

그녀가 위아래로 훑어보며 하는 칭찬에 나도 친철하게 답을 했다. 남자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멍청하게도 여자들의 칭찬이 진심인 줄 안다. 스승님은 다정하게 말을 주고 받는 우리 둘을 번갈아보며 즐거워했다. 나는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초록색 액체를 한 입 마셨다. 첫 느낌은 수박물 같고 뒷 맛은 시큼한 레몬네이드를 모방해 상당히 기묘한 음료다. 정말 무알콜인게 확실한지 다마셨지만 취기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잠깐 보다가 바텐더에게 한 잔 더 달라고 요청했다.  

홀은 어느새 뱀파이어들로 가득찼고, 어디선가 분위기를 띄워주는 현악기의 음이 부드럽게 들렸다. 말 소리도 그에 맞쳐 작지만, 특별히 귀 귀울여 들을만큼 재미있는 대화가 없었다. 요즘 인간들과 살기에 무엇이 불편하지, 뱀파이어 정부가 어떻게 해주길 바란다는 식의 정치적인 토론을 하기도 하고, 몇 몇의 여자들은 서로의 옷을 칭찬하며 뱀파이어 뱀화점의 봄 정기세일에 함께 가자는 시시껄렁한 말들을 주고 받았다. 문제는 이 곳에 내가 아는 이가 스승님과 제이라는 여자 뿐이니 수다를 떨 상대가 없어 이내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저..음식 좀 가져올께요]
[내가 가져다 줄게]
[아니에요. 뭐가 있나 구경하고 담아올께요. 최대한 빨리 올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죠?]
[어린 애도 아닌데 음식 가지러 가는 게 뭐 어렵다고..보내줘] 

얄미운 말로 거드는 제이에게 씩 웃어보였다.  

[네. 전 다 자란 여성이죠] 

스승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바로 오라는 부모같은 당부와 함께. 나는 몇 몇의 뱀파이어들을 지나쳐 걸어가다가 살짝 뒤돌아보았다. 약간 떨어져서 보면 객관적인 사실을 볼 수 있는 법이라, 그들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게 느껴졌다. 스승님은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간간히 움직이며 웃고 있고, 그의 팔을 툭툭 치며 친근하게 행동하는 여자는 몸매가 아름답고 피부도 황금빛이다. 그에비해 나는 키가 작고 그닥 내세울 것 없어 나보다야 백배 그림같다. 그런 사실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과 인정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의 문제라 뷔폐 음식이 놓여있는 자리에 도착할 무렵엔 화가 나, 포크로 쿡쿡 찍어 담는 내 포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래서야 어디 깨지겠어요? 좀 더 쎄게 해야지..] 

장난기어린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 고개를 돌렸다. 나보다 머리하나 쯤 더 큰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와 고동색의 눈을 지녔고, 스승님보다는 약간 낮은 코가 보였다. 전체적으로 미남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상당히 호감가는 얼굴이다. 

[그냥 좀 기분이 별로라서요. 포크 드릴까요?] 

과일을 담던 뷔폐용 포크를 건네주려고 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그렇게 필요하진 않은데..말을 걸어보려고 한거랍니다]
[저한테요?]
[네. 아가씨요]
[같이 오신 여자분이 기분 나쁠거에요]
[음..어디로 갔더라..] 

그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그 여자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사라졌네요. 버림 받은거니까 기분 별로여야 하는거겠죠?]
[당연히 그래야죠]
[아가씨의 파트너분은요?]
[글세..어디에 있더라..] 

뭔가 모르게 대화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했던 동작과 말을 따라했다.  

[하여간 저기쯤에서 아주 예쁜 여자와 이야기중이에요]
[흠..최소한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점에선 나보단 나은 편이군요] 

다른 때 같으면 내 성격상 처음보는 사람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게 된다. 사실, 누구래도 제이보다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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