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줘요!] 

[안됩니다.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면 무조건 안전하게 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뭔가 한 참 잘못된 듯 한 소리가 계속 메아리치며 증폭되어가 나는 그를 발로 차며 내려달라고 소리 질렀다. 그는 못 들은 척하며 계단을 뛰어올라가 육중한 문을 발로 차 활짝 열었다. 어두운 곳을 최단거리로 뛰어 현관문을 열고는 나를 내려놓았다. 

[가서 경찰을 불러주세요]
[나 혼자요?]
[저는 팀장님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나는 울면서 홀이 있는 건물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홀에 당도했을 때, 파티가 끝나 불이 모두 꺼진 걸 깨달았다. 그리고 설혹 누군가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누가 그들 편인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주차장으로 전력질주 했다. 그 곳에는 이제 2-3대의 차만 있을 뿐, 텅텅 비어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찾으려고 운전석과 조수석을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문득 아치 입구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듯해 백밀러로 살펴보니 모르는 뱀파이어 같았다. 나를 따라온 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멍하니 경찰서 쪽으로 운전하는데 목구멍을 넘어오는 훌쩍임이 느껴져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보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빵빵빵빵!
 

내 앞의 차가 신호를 지키려고 서자, 옆 차선으로 차를 거칠게 돌렸다. 나로 인해 두 개 차선이 엉망으로 얽히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1분이라도 빨리 경찰서에 도착하는 것 만이 스승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
 

북서울 숲의 붉고 검은 건물에 도착해서 뛰어내릴 무렵엔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슬슬 잠자리에 들어가려는 뱀파이어들이 하품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뛰어들어가 지난 번의 기억을 되살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나를 고문했던 남자를 찾는게 최우선이라 그와 마주쳤던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문이 잠겨 있었다. 쾅쾅 내리지차 졸린 눈을 부비며 나오는 뱀파이어와 부딛혔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밀치고 들어가 두 개의 방을 모두 뒤졌지만,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어제 작전을 나가서 아직 귀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다른..다른 뱀파이어는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체격이 크고..그..그..] 

나는 마음이 급해 말을 더듬었다. 상대는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지금 경찰을 출동시켜주세요. RRS팀이 위험해요]
[RRS? 그게 뭡니까?]
[지금 장난해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를 향해 화를 내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뒤로 돌았다. 바로 내가 찾던 뱀파이어였다. 

[내가 처리할테니 나가보도록] 

그는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힌 후 문을 닫았다. 나는 두서 없이 설명을 하며 빨리 경찰 병력을 그곳에 파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RRS의 존재는 경찰 내부에 비밀로 되어있습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병력이 가야한다면 먼저 존재를 공개해야합니다]
[이보세요! 당신도 아는 그 분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요. 적들에게 포위당한 채로요!]
[압니다] 

그가 너무 담담하게 말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도울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냥 죽게 나둔다고요?]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휘하에 있는 10명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또다시 솟구쳐 오르려해 발을 동동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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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아까 같이 이야기하던 남자도 보였다. 그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승님은 입에서 손을 떼셨다. 

[뭐야, 너희들?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프릭스들이 들어있는 방 앞에 도착한 누군가가 거칠게 소리를 지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여러번 들어 익숙해 누군지 이내 알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 뛰어 온 것에 짜증이 난 듯 발로 문을 여러 번 걷어찼다. 프릭스들의 비명이 문을 넘어 복도에 메아리쳤다. 나는 그들을 달래며 최대한 조용히 해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차츰 흥분을 가라앉히며 나에게 꺼내달라고 애원하는 말을 했다. 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자꾸 이러면 너희들부터 처리해버린다!] 

프릭스들이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협박 때문에 그들이 조용해졌다고 생각하는지 매우 만족스러운 신음소리를 낸 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차 안에 있으라고 했을텐데..]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프릭스들을 어떻게 했기에, 갑자기 흥분한건가요?] 

옆에서 나를 쳐다보던 남자가 물었다.  

[그냥...다가갔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를 들으려고 귀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하라 잡히지가 않습니다] 

스승님은 그에게 나를 데리고 먼저 빠져나가서 상황을 알리라고 명령했다. 

[같이 안가요?]
[좀 더 확인할 것이 있어. 바로 따라갈 테니 이번엔 꼭 차 안에 있어라] 

스승님은 갑자기 나를 안아주셨다. 그리고는 내 체취를 기억하려는 것처럼 목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자, 명령을 받은 남자가 바로 내 팔을 잡아당겨 나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방에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스승님과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더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걸어왔던 복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뒷모습은 긴장한 듯 어깨가 잔뜩 올라가있고 자주 양 옆을 확인하려는 듯 멈춰 섰다. 아까 본 말뚝 박힌 뱀파이어가 있는 방에 가까이 왔을 때 뒤에서 섬뜩한 비명 소리와 복도를 울리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그 방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갈색 머리 뱀파이어가 뛰어나왔다. 그는 우리를 본 순간 바로 달려들었지만, 나와 함께 나온 남자가 한 발 빨리 움직여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그는 문 쪽으로 날아가 모서리에 머리를 찧으면서 바닥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한 남자는 나를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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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진 2011-02-14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어느새 연재 1년입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꿈 읽기 2011-02-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재미있게 또 즐겁게 잘 읽고 있습니다.
독자의 욕심으로야 연재가 빨리빨리 올라와 주면 고맙겠지만..쓰시는 분은 힘드시겠지요?.. 올 겨울 너무 혹독하여 잔뜩 움추렸었는데 다행이 오늘 풀리네요..건강 조심하시고.
 

 

 

 
나는 망설이다가 좀 더 다가가 반대편을 보기 위해 몸의 위치를 바꿨다. 왼쪽 눈으로 들여다보니 의자에 뱀파이어가 앉아 팔짱을 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몸을 너무 바짝 대고 있었는지 문이 살짝 밀려들어갔다. 그 사이로 몸을 숙이고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잠든 뱀파이어의 얼굴이 보였다. 

[까...] 

비명이 나오는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그는 얼마 전에 도망간 갈색 머리 뱀파이어였다. 또한 벽에 말뚝이 박힌 채 매달려 있는 건 사람의 피를 빨다가 잡혔던 바로 그 뱀파이어였다.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슬러 뒷걸음질 쳤다. 그래도 프릭스들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덜덜 떨리는 손을 주무르며 복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프릭스들의 소리는 이제 몇 단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료해졌다. 그러나 나는 겁에 질려 그들을 빨리 확인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되풀이했다.  

몇 개의 빈 방을 지나 왼 쪽과 오른 쪽 모두 뱀파이어가 들어있는 감옥 같은 방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말뚝 박혀 있지 않은 대신 뭔가 정신이 나간 듯 이상하게 행동했다. 마치 사람에게 포획당한 짐승이 겁에 잔뜩 질린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문을 흔들어대거나 의미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당황해 그들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바로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뛰어갔다. 

드디어 내가 찾던 프릭스들이 가득한 방에 도착했다. 그 곳은 지금까지 본 방 중 가장 넓고 많은 생물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20마리는 넘어 보이지만, 서로 붙어 있거나 개중에는 구석에 숨어있는 놈들도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대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들에게 마타임을 알리는 순간,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털을 곤두세우고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나는 문 밖에 있어] 

그들은 내 말을 듣자 모두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덜컹덜컹] 

한꺼번에 문에 부딪히거나 긁어대는지 나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걸어온 복도 저편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그들에게 누군가가 온다고 알린 후 건너편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살짝 닫았다.  

[어?] 

입에서 또다시 놀란 목소리가 나오는데 스승님이 바로 입을 막으셨다. 내가 들어간 방의 문이 열려있었던 건 스승님과 3명의 뱀파이어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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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건물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폐에 들어 있는 공기를 모두 빼내고 입을 닫았다. 진공 상태로 만들어 건물 안의 나쁜 공기와 폐가 접하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들어가기 전에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몸 위쪽으로 감싼 뒤 양 끝을 적당히 묶어버렸다. 최대한 문소리가 나지 않게 들어 올린 후 잡아당겨 몸이 지나갈 만큼만 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벽을 등지고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머릿속에 다시 전파가 흐르기 시작했다. 파도가 바위를 때리고 물러가는 것처럼 지지직거리는 음파와 흐릿한 중얼거림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그 소리가 커지는 쪽을 향해 방향을 꺾었다. 발을 따라 피어오르고 퍼져나가는 먼지가 최정점에 달할 무렵, 손잡이 같이 길쭉한 막대기가 손에 잡혔다. 위 아래로 더듬어보니 잡아당기면 열릴 것 같다.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 두려워 아까처럼 들어올린 후 당기려고 했더니 엄청난 무게의 문인지 들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소리가 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다행스럽게 문은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 문 안으로는 회색에 가까운 등이 점점이 있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의 모습이 쉽게 식별되었다. 계단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신고 있는 하이힐이 돌계단을 내려갈 때 또각 거리는 소리를 내, 뒤꿈치를 들었다.  

계단은 둥글게 휘어지는 느낌으로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고, 종아리가 저릿한 느낌이 들 무렵에야 겨우 바닥이 평평해졌다. 들고 있던 뒤꿈치를 내리고 허리를 주먹으로 때려 몸이 결리는 걸 푸느라 몇 분 쯤 허비한 후,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웅성거리던 소리들은 더욱 강하고 분명해졌지만, 아직도 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 판단이 서질 않아 조용히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계단이 끝나고 바로 연결된 복도는 미로처럼 구불거렸다. 몇 미터쯤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거나 왼쪽으로 휘어져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 혼동이 될 정도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갈림길이 없다는 점이다. 계단이 끝나고 5-6번쯤 커브를 돌았을 때 처음으로 오른쪽 방을 볼 수 있었다. 나무로 성기게 만든 문이 달려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조금 벌어져있는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려고 얼굴을 바짝 붙였다. 나무 틈새가 크지 않아 방 전부를 꼼꼼히 둘러보긴 어렵지만 대략 눈에 들어오는 건 2평정도 되는 넓이로 직사각형 모양이다. 창문이 없고 주황색 불이 천장에 하나 달려있는 게 다인 매우 간소한 방이다.  

첫 번째 방에는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 허리를 펴고 좀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복도는 걸어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네 번째 방에 도착할 때쯤엔 성인 남자 2명도 나란히 지나가기가 애매해졌다. 만약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도망치기도 곤란할 넓이인데 아직까지 아무하고도 부딪히지 않음을 감사해하며 네 번째 방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뱀파이어가 있었다. 쇠사슬로 팔 다리를 묶여 벽에 고정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사람이 아님을 안 이유는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뱀파이어로 변했을 때, 배운 것 중 하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뚝을 박으면 영화에서처럼 재로 변해 소멸할 것이라 믿지만, 실재는 그렇지 않다. 심장에 정확히 박히면 그 순간부터 잠이 든 것처럼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뇌사상태에 빠진다. 이 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야만 우리는 영원히 사라진다. 반대로 뇌사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말뚝을 뽑자마자 분수 같이 터져 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고 상처를 재생시킬 수 있도록 아주 강력한 피를 흡혈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강력한 피..그것은 또 다른 뱀파이어의 피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건 말뚝이 뽑히고 다시 움직이게 되면 그 뱀파이어는 본능이 앞서 상대가 누구든 죽을 때까지 피를 마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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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벽에 기대어 몸을 돌려보니 190센티는 되보일 정도의 남자가 나를 향해 서 있었다.  

[화장실을 찾으려고요. 건물들이 모두 잠겨 있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도데체 화장실이 있기는 한건가요?] 

그는 잠시 동안 생각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이 있는 지점쯤에서 흔들었다. 

[손이 더러워져서 냄새가 나는데 홀은 초만원이고 화장실을 찾아 여기까지 오게 하다니.무슨 파티를 이렇게 해요?] 

신경질적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지만, 스승님에 대한 화가 덜 풀렸는지 목소리가 점점 히스테릭해졌다. 그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것 까지는 없고, 어딘지만 가르쳐주세요] 

나는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는 나를 인도해 현관문 밖으로 나온 후,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가다가 두 번째 붉은 건물이 나오면 옆문이 열려있다는 말과 함께. 그는 자신이 가르쳐준 데로 가는지 나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돌길이 굽어지며 그를 볼 수 없을 때가 돼서야 숨을 몰아쉈다. 그의 말대로 두 번 째 붉은 건물은 옆문이 열려있었다. 그 곳으로 들어가자 작지만 복도를 충분히 비춰주는 등이 곳곳에 있어 화장실을 쉽게 찾았다. 물을 틀어 손을 씻고 입을 행군 후,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니, 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머리카락도 많이 흘러내려 전체적으로 창피스러웠다. 물을 묻혀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 온 후의 일을 되짚어 보았지만 스승님의 비밀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그러나 내가 잘 아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화장실을 나와 붉은 건물을 벗어났다. 환하고 뱀파이어들로 북적이는 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데 오른쪽 정원의 으슥한 곳에서 어떤 여자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남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여자는 쥐가 지나갔다고 대답했다. 그 때 갑자기 팍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프릭스들. 그리고 회색의 숲. 그들이 한꺼번에 떠들 때 머리 속을 흐르던 해일 같은 전파들.
아까 그 건물에 들어갔을 때 바로 그런 느낌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흰색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곳에 그들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전파가 머릿속을 떠돌 수가 없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어디 가지 말고 이 안에 있어]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걸까? 혹시나 이 저택에 스승님과 RRS가 움직여야만할 일이 있는 걸까? 그레고리는 그것을 의심한 걸까? 나는 주먹을 쥐고 땅을 발로 툭툭 치다가 뒤돌아섰다. 흰색 건물에 다시 가봐야만 할 것 같다. 가서 그들이 정말 있는 건지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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