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과거의 일로 마음이 많이 아프고, 마타라는 존재를 미워할지도 모르지만, 니가 승낙한다면, 나는 너의 맹세를 듣고 싶어. 너와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나에게 올래?] 

좀 전에 토끼의 고백을 들었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었다. 일전에 맹세를 받을 때, 나와 함께하게 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나 용기를 내 제안했다. 내 말이 끝나자 광장 안은 무중력 상태처럼 변했다. 시간마저도 사라진 듯 얼어붙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피부로 느꼈지만 토끼만 응시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천년이 지난 듯 한 기분이 들 무렵, 토끼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격해지는 감정이 공기를 타고 다가와 부딪히자 내 몸도 조금씩 흔들렸다. 토끼는 뒤로 돌아 여전히 멍한 표정의 석고상들을 둘러보았다. 잠깐 머리를 들었던 늑대가 앞발에 고개를 묻었다. 토끼는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바르게 세웠다. 

[나의 주인, 나의 목숨. 당신은 내 영혼의 마타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토끼가 말을 마친 후 내 앞으로 다가와 손등에 코를 문질렀다. 그러자 나 역시도 뭔지 모를 격한 감정이 발끝부터 밀려와 덥석 안아버렸다. 부드러운 털에 코를 박자마자 토끼가 사람으로 변했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지닌 여자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나는 아름답고 눈부신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 감촉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손 안에서 춤을 추며 부드럽게 움직였고, 그 아래엔 길고 하얀 속눈썹과 동그란 눈이 촉촉한 눈물에 젖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 잠시 가져봤던 바비 인형의 향수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참 아이러니 한 건, 이 순간 그녀의 피가 먹고 싶어졌다. 내 송곳니가 간질간질해지며 그녀의 가늘고 어여쁜 목이 확대되어 보인다. 입술이 본능을 따라 조금씩 벌어졌다.  

[드시고 싶으세요?] 

그녀의 눈이 내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알았구나]
[뱀파이어니까 당연하죠. 드셔도 되요]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척 아플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 희생을 하겠다는 그 마음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 대한 책임감도 솟아올랐다. 나를 허기지게 만드는 본능을 잊기 위해 간신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광장 반대편에 모여 있는 프릭스들이 우리의 대화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좀 있으면 해가 뜰 거야. 집으로 돌아가야되]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가 생각을 보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토끼를 향해 말했다. 

[저녁 때 우리 집으로 와]
[네] 

간단하게 대답한 그녀는 다시 토끼로 변해 내 품을 벗어났다. 그만 돌아가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자, 웅성거리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힐끔거리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마타이기 전에 뱀파이어야. 너희들을 갑자기 해칠 수도 있고, 피를 빨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최대한 노력해서 너희들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옅은 주황색이 섞인 미세한 새벽빛이 바닥에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다시 앞장을 서 회색의 숲속 길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몇 발자국 걸었을 때, 토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에스더에요]

-----------


[너는 관계를 두려워 해]
[내가?]
[너의 곁에 있은 후로 단 한 번도 니가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지 못했어] 

가디건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숲길을 되돌아올 동안에 프릭스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예리함에 놀라며, 조용히 경청했다. 

[너의 스승님, 아줌마 그리고 나, 아니 이 세상의 너를 뺀 모든 생물들은 모습만 있을 뿐, 의미가 없어. 아까 네가 한 말이 진심이 되려면 마음을 열어야되]
[이름이..그렇게 중요해?]
[꼭 이름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네가 안아준 토끼도 에스더라는 자신만의 이름을 너에게 말했잖아. 니가 그걸 부르지 않으면 에스더는 저 숲 어딘가 있는 수많은 토끼들과 똑같아져] 

집에 도착해 안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나를 남겨두고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창문으로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사람이었을 때, 소중한 이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쩌면 그건 형제들 사이에 흔히 생길 수 있는 일들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그 기억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혹시라도 또다시 상처 받지 않을까... 


-------------

뱀파이어들은 보통 새벽빛이 올라올 무렵에는 잠자리에 든다. 계속 깨어 있다 보면 체력 소모가 엄청나 정작 밤이 되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몇몇의 뱀파이어들만이 낮에도 밤처럼 빛을 피해 돌아다니는데, 내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지친 나와는 다르게 스승님은 활기찬 모습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건너편에 앉아 말없이 바라보았다. 프릭스의 말처럼, 나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진짜 이름을 볼러본 적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슨 할 말 있니?] 

핸드폰을 탁자에 놓으며 나를 바라보는 스승님의 눈이 엄마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요. 그냥..옆에 있으려고요] 

스승님은 탁자를 돌아와 옆 자리에 앉았다. 크고 강한 팔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스승님은 가족이 있었나요?]
[가족?]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음..있었지]
[누구누구요?]
[부모님과 동생 둘 셋 정도..아니 더 있었나?]
[에이..몇 십명도 아니고 겨우 두세 명을 정확히 모르다니..] 

농담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스승님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그는 진심으로 아픈 척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는 남자들이 정식 부인 이외에 다른 부인을 여럿 두는 게 당연했거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형제만 스무 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어]
[와~고대 이집트에서 살기라도 하신거에요?] 

대답은 없지만 표정이 상당히 진지했다. 순간 진짜 이집트에 살았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몇 천 년도 더 된 뱀파이어일 것이다. 나는 그의 팔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피부가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한 도토리묵 같은 게 너무 완벽해 정말 그만큼을 살았나 의심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들의 머리가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얼룩무늬 토끼에게로 향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어두운 달빛이지만 토끼를 덥고 있는 털들이 솜이불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여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올랐지만, 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까 걱정되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늑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마타는 어디 있지?]
[몰라요] 

토끼는 상체를 들어 올려 두 발을 모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왜 몰라? 넌 그 마타와 연결 되었을꺼 아니야?] 

대장 늑대의 왼쪽에 앉아있던 원숭이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덧붙였다. 

[버림 받았어] 

토끼의 마지못해 말하는 듯 한 대꾸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모습이야. 싸움은 하지도 못해. 위급할 때 마타를 도울 수 없다면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지. 그 마타가 날 거부한 건 당연한 거야] 

토끼는 상체를 바닥으로 내린 후, 빠르게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시큼하고 텁텁한 슬픔이 쏟아지는 물처럼 내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오자 나는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가지 말고 이리와. 네가 필요해] 

먼 곳 어디선가 부엉이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떼로 날아갔다.  

[제가..정말 도움이 되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지만 희망을 품은 목소리가 들렸다. 

[응. 너의 경험과 생각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네가 날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곁으로 와줘]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토끼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궤적을 쫒아 눈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뱀파이어의 청각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바짝 날을 세우자, 토끼가 조금씩 광장을 둘러싼 어둠을 거쳐 내게로 접근하는 게 들렸다. 마침내 내 앞에 당도하자 토끼는 상체를 세웠다. 나는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를 지켜보던 참석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어떤 냄새가 손 안에 있을지 상상이 안 되지만, 토끼는 킁킁거리며 나의 체취를 빨아들였다. 

[좋은 마타같아요]
[단지 냄새로만?] 

내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본능으로요. 동물들의 감각은 뱀파이어만큼 강하고 정확해요] 

토끼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주먹 하나의 거리만 남았다.  

[난 뱀파이어지만 동시에 마타야. 물론 어느 쪽이 더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뱀파이어 쪽인 거 같은데요] 

토끼가 앞발로 송곳니를 가리켰다. 그 제스처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광장을 둘러싼 두려움과 어색함이 왠지 누그러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설혹 그것이 내 착각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웃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주바다 2010-11-3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월의 끝에서 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그 누군가..다른 영혼과 마음이 닿아있다면..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될듯하네요..상처받기를 두려워한다면 그 위로조차 짐이 되겠지만..

최현진 2010-11-30 17:32   좋아요 0 | URL
여주인공이 새로운 삶을 선택했던 건..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인데 그걸 이제야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소설이 아닌 실제도 그렇죠..어떤 계기..어떤 상황..그런 것들로요.
 

 

 

 

[나는 대장이다]
[프릭스들도 집단생활을 해?] 

혹시라도 그가 나를 헤칠까 걱정이 되는지, 고양이로 변한 프릭스가 우리 사이로 들어와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고양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읊조렸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모여 있다] 

그가 늑대 특유의 무시무시한 울음 소리를 공중으로 내뱉었다.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광장을 둘러싼 나무들 속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너희들끼리 생활해? 내가 알기론 마타가 있어야 변신이 가능하던데]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딱딱하고 거친 음성은 그들이 여전히 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곳에 왔어. 너희들과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너희들”이라고 말할 때 강조하듯 천천히 전달했다. 대장뿐만 아니라 무리의 다른 이들도 보고 싶다는 의미를 이해하길 바랬는데,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길고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광장 주변의 숲이 샤샤샥 움직이며 흔들렸다. 나무들의 검은 그림자 속에서 한 마리씩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와..]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그들은 얼핏 봐도 10여 마리는 넘는 숫자였고, 작게는 토끼부터 크게는 늑대까지 각양각색이 모여 집단을 이룬 상태였다. 그들은 광장의 반대편에서 늑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겁을 먹은 듯했다. 

[내가 무서워?]
[넌 뱀파이어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아..] 

그제야 삼차신경통이 멈추고 송곳니가 솟아올랐음을 알았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능력이 없는 뱀파이어라고 해도 피를 갈구하는 건 똑같으니 달빛에 간간히 송곳니가 들어날 때면 그들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당연했다. 

[나는 너희를 해치지 않아] 

내 앞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를 들어 올려 감싸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가볍게 뽀뽀를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옅은 달빛에 비친 두려움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늑대는 몇 걸음 뒤로 가 그들과 나 사이에 자리 잡았다. 앞발을 쭉 뻗어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편하게 자리를 잡자, 다른 이들도 따라했다. 지금 이 광장의 모습은 언젠가 책에서 본 고대 로마의 회의 장소 같아졌다. 발언자가 청중을 바라보며 중앙에 있고, 나머지는 둥글게 포진하여 원의 형태로 기다리며 수군거린다. 단지 청중들이 프릭스들이다보니 그들의 수군거림이 내 머리 속에 직접 전달되어 머리가 멍해진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   

[나 말고 다른 마타를 만나본 적 있어?] 

내 말이 끝나자 그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높아졌다.  

[난 마타를 본 게 처음이에요]
[또 다른 마타가 있었어?] 

파도처럼 밀려갔다 헤일처럼 다가와 나를 한 번씩 건드리고 가는 소리들은 다른 마타라는 존재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당황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알아요] 

가늘고 높은 소프라노의 음성이 소음 속에서 똑똑히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내 옆으로 돌아온 프릭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너무 시끄러워. 한꺼번에 떠들어]
[그들이 여기 있구나]
[너,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가고 있었던 거야?] 

나는 머리를 지압하듯이 꾹꾹 누르며 말했다. 프릭스는 앞발 한 개를 들어보였다. 

[이 숲 어디 쯤 있겠지 하고 온 거야. 그들이 널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의 대화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전파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내가 들어야할 부분을 찾아내고 가려내는 건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와 겨우 몇 마디 나눈 게 다인데 이제는 오른쪽 이가 들썩거렸다.   

[더는 못가. 내 앞으로 나오라고 해줘] 

광장을 둘러싼 나무들 중 하나에 기대앉았다. 무거운 머리를 단단한 나무에 붙인 후, 프릭스에게 부르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광장 중앙으로 걸어가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그는 쉬지 않고 불렀다. 야옹 거리는 소리가 다지만, 작게, 크게, 길게, 짧게 변형하며 끊임없이 광장 구석구석에 다다를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광장은 넝쿨들이 서로를 의지해 나무와 나무를 연결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빛은 그들의 작은 틈을 뚫고 들어와 바닥에 점을 수십 개, 수 만개씩 그리며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밝음을 만들지만, 전체적으로는 걸어오던 길목처럼 회색의 숲이라는 말에 걸맞게 여전히 어두웠다. 빛도 이기지 못하는 어둠. 그것이 이 숲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프릭스들은 이런 칙칙하고 외로운 곳에 모여 있을까? 나의 프릭스처럼 함께 살지 않고..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를 “나의 프릭스”로 취급한다는 걸 깨닫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음 안에 마치 방이 여러 개 있어서 그도 사랑하고, 스승님도 사랑하고 있다는..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시작된 웃음은 다른 프릭스를 부르는 그의 소리에 맞춰 메아리쳤다. 그가 소리를 멈추지 않은 채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여전히 웃느라 그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왜?]
[무슨 일이야?] 

내 머리 속으로 그들의 질문이 들어와 손을 흔들자, 프릭스가 야옹 소리를 멈췄다. 나는 그제야 웃음을 누구러트렸다.   

[마타가 왔어. 너희 모습을 보여줘] 

그의 말이 끝나자 조용하던 광장에 여러 가지 잡음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나무를 건드리며 부르르 떠는 소리, 자박자박 밟는 소리, 서로의 몸이 부딪혀 만들어지는 소리 등이 귓가에 뱅그르르 돌았다. 하나, 둘, 셋..나는 눈을 감고 그들의 무리를 느껴보려 했지만, 광장을 가득 채운 소음들이 점점 커져 손으로 귀를 막았다.  

[조금만 참아] 

프릭스의 따뜻한 앞 발이 내 다리에 닿으며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잠시 동안 최고조를 향해 올라가던 소리들이 드디어 조금씩 낮아지고 줄어들면서 마침내 고요해졌다. 귀에 올렸던 손을 살짝 떼고 확인해도 더 이상 소음은 없었다. 그저 약하게 노래하는 벌레들의 합창 정도다. 그 때 어둠 속에서 광장 중앙으로 회색 늑대가 걸어 나왔다.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하고 민첩하게 내 앞까지 와 멈쳤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마타인가?]  

그의 낮고 거친 음성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근처에 있어?]
[응. 숲으로 좀 들어가면..]
[안내해줘.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 

내 말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닥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내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말하자, 한숨을 쉬며 고양이로 변했다. 그는 창문을 넘어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는 몇 발 앞서가다가 나를 힐끔 돌아본 후, 집 뒤쪽으로 연결된 회색빛 숲 속으로 들어갔다. 봄이지만 밤의 숲은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종종 지나가 얇은 가디건 속으로 추위를 몰아넣었다. 팔을 비비며 그를 따라가자니 마타가 아니었다면 뱀파이어로서 부족하고 장애가 있다는 걸 이해받을 수 있는 변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이 약하고, 삼차신경통이 있으며, 피를 입으로 마셔야한다는 사실에 마침내 면죄부를 줄 근거가 생겼건만, 기분은 사형대에 끌려가는 죄수 같았다. 뱀파이어가 될 때는 내 의지가 있었으나, 그 이후로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보는 일 없이 주어지고 당했으니 그렇다. 

[널 인형으로 취급하지 않을게, 약속할 수 있어] 

작고 약한 목소리로 앞서가는 프릭스에게 말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생각을 보내왔다.  

[괜찮아. 너를 마타로 받아들일 때,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기로 결심했어. 죽어야한다면..그것도 할 거야]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님에 대한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마음에 미묘한 무언가가 쌓이고 있다. 단순히 그가 날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려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와 있을 때는 내가 어른으로써 뭔가를 결정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사람을 놓고 저울질 하는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못났다. 고개가 바닥으로 수그려지며, 눈물이 조금씩 솟아올랐다. 

[그런 생각 하지 마] 

프릭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앞서가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들을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미안.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너의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와]
[앞으로는 귀 좀 막아. 들어도 아는 척 하지마] 

나뭇잎을 발로 차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대답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회색빛 숲으로 들어온 이래, 빛은 손바닥만 한 점을 만드는 정도로만 바닥을 비쳐주었다. 커다란 나무들과 그들의 덩굴이 하늘을 얼기설기 엮어, 보름달의 정취도, 눈부신 빛도 숲을 이길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밤에 움직이는 생물들의 기묘한 소리와 내가 밟은 나뭇잎들의 부셔지고 망가지는 울림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딘가 있을 을씨년스럽고, 싸늘한 공동묘지같아, 깊이 들어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누구?]
[누구지?]
[넌 누구야?] 

탁 트인 광장에 들어섰을 때, 머릿속으로 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지러운 메아리들 때문인지, 삼차신경통이 더욱 거세져 눈 위쪽 부분을 망치로 두들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