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이야기 해봐]
[그러니까.. 그녀석이 잡혀간 거 같아요]

나는 아까 그 장소로 뛰어가면서 대략의 이야기를 했다.

[프릭스니까..혼자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알고 계셨어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스승님 역시 멈쳤지만 표정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응]
[근데..왜 아는 척 안하셨어요?]
[남자친구라고 하니까]
[아..그게..그러니까..]
[거짓말인 거 알아]
[도대체 스승님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꿰뚫고 계신건가요?]

나는 다시 뛰면서 물었다. 운동을 별로 안하는 나는 허리를 잡고 뛰지만, 그는 여유롭게 숨을 내쉈다. 일절 대답을 안 하는 모습에, 집에 들여놓고 내 방 바닥에서 재운 것도 다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밭에 들어설 무렵 살짝 물어보았다.

[집에서 재운 것도요?]
[그래]
[와!!! 혹시 천리안을 가지셨나봐요!]
[너는..정말..]

스승님은 킁킁 하는 소리를 잠시 낸 뒤 내가 발견했던 장소로 다가가느라 말을 멈췄다. 그는 벤치와 나무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흙을 집은 뒤 냄새를 맡았다. 스승님의 옆에서 말없이 기다리려니 어디선가 피 냄새가 약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뚝방 쪽을 보았다. 풀밭 너머로 자전거 길이 있고 그 옆에 두 팔을 벌리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한강으로 내려갈 수 있는 비스듬한 뚝길이 나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뚝방이라고 불렀다. 스승님은 흙을 버린 후 일어나 풀밭을 벗어났다. 자전거 길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피 냄새나죠? 혹시..프릭스의..건가요?]
[잘 맡아봐라. 너에게 익숙한 건지]

숨을 잠시 멈춘 뒤, 폐 안에 남아있는 공기를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내 가슴은 진공 상태가 되었고 곧 피 냄새를 가득 빨아들였다.

[이건 사람의 피에요!]

프릭스의 피가 아님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풀밭에서 대각선으로 이어진 뚝방 길 중간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른 주먹 크기 정도로 거뭇거뭇하게 물들어있는 게 흘린 지 오래되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났다면 이만큼 피의 향이 남아있을 수 없다. 스승님은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입에 넣었다. 나도 따라 쿡 찍어 먹었다. 약간 시큼한 게 독이 느껴졌다. 동시에 허기도 목구멍으로 올라왔지만, 뱀파이어의 독이 섞인 피만은 먹기 싫어 꾹 참기로 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레스 2010-09-1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이 계속 배가 고파서 그런지, 읽는 사람도 허기가 지네요. ㅎㅎ
 


 

 

1부.야철신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러나 그냥 들어가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은 조금 열려진 문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와 들여다보기 수월했다. 안은 여느 사당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정면에는 여러 신들이 그려져 있고 그 바로 앞에 위패가 3단으로 놓여있으며, 그 앞에 입구를 종이로 봉한 단지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틈으로는 그 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정확히 읽을 수가 없다. 안에 아무도 없어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천장에는 긴 줄들이 가득 매어져 그 위에 알 수 없는 글이 적힌 종이들이 흔들린다.   

 

[모두 요괴들입니다] 

 

갑자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본 여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종이들이? ]
[네. 이름이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 여기에 봉해져 요괴들은 사당 주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왜? 이들이 다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켰어?]  

 

 여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개중에는 그런 것들도 있지만..대부분은 주인님의 필요에 의해 잡혀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내일..모두 사멸될 것입니다]  

 

 사당은 문이 열려있지 않아 바람이 불 곳이 없는데 종이들이 흔들린다. 팔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 많은 요괴들을 모두 없앤다?]
[네]
[혹시..혹시..팔색조 때문에 그래?]  

 

 아까 들었던 대화가 생각나 물어보니 여인은 무응답으로 종이만을 처다보았다. 아마도 내 추측에 대한 대답인듯하다.  

 

[왜? 왜? 그래야하지? ]
[여기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등한 요괴들. 그들을 사당에 묶은 것은 팔색조를 탄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멸될 때 내 뿜는 원념이 수천, 수만 개가 모여야 팔색조에게 그 기가 전해져 알이 깨지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들어냅니다. 오래전에...한 마리가 그렇게 태어났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변을 이 잡듯이 뒤져도 냄새만 머리가 울리도록 느껴질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의 교신도 끊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승님께 도움을 청하는 게 다다. 

나무에서 내려와 재빠르게 뛰어 주민자치센터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 후 아까 그 아름다운 안내 아가씨에게서 휴대폰을 빌렸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라] 

그 아가씨의 눈치를 보며 소곤소곤 말하니 안 듣는 척 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의식해 나는 꼭 해야 할 말 몇 마디만 했고, 스승님은 내가 혼자 움직이면 위험하다며 기다리라고 말한 뒤 끊었다.  

[커피 한 잔 줄까요?] 

내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복도를 왔다 갔다 하자 그녀가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물 좀 주세요] 

그녀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우아함을 무기로 하는지 바람을 일으키며 탕비실에 다녀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저런 사소한 게 눈에 들어오다니..나는 정말 구제불능이다. 한 숨을 쉬며 그녀가 건네준 물을  마셨다. 

[브라이언이 온데요?]
[누구요? 브..뭐?]
[참, 여긴 한국이지. 뭐라고 하더라..하여간 머리가 약간 웨이브지고, 눈 크고, 코 오똑한..]
[아~스승님! 왜 궁금하신데요?]
[아는 사이라서..그냥..] 

그녀는 나와 대화 한 이래 최초로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스승님을 좋아하나? 그리고 보니 스승님을 브라이언이라고 불렀다. 

[브라이언이 스승님의 진짜 이름인가요?]
[뱀파이어는 이름이 많아요. 살아온 세월만큼 있다고 할까..]
[왜요?]
[한 곳에서 오래 살면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외모를 의심하니까 주기적으로 이사를 해요. 만약에 나라를 바꾸는 거면 이름도 그 나라에 맞게 바꿔야죠. 뭐, 간혹 죽어도 한 이름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스승님이었다.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약간 붕 떴고, 헝클어졌지만 그 모습 역시 매력이 넘쳤다. 그녀도 그런 생각인지 나랑 표정이 비슷했다. 스승님은 그녀를 아는지 인사 한마디를 한 후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녀가 현관문에 매달려 손을 흔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부. 야철신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뒤에서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가 옷을 받아들었는데도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자 피에 젓은 옷을 건내받고는 말 없이 사라졌다. 그 후로 저녁때까지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밤이 되어 곳곳에 등불이 켜졌다. 낮과는 다르게 새들의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훨씬 시원해졌다. 뭔가 움직여 공기를 정화한 느낌이다. 계속 방 안에만 있기도 답답하여 사당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채와는 다르게 사당 근처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다. 약한 달빛 만이 쓸쓸히 비출뿐 전제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다. 나는 정자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어떻게 될거 같아?]
[내일 저녁에 팔색조를 깨우기 위해서 제를 올릴 예정인가봐]
[오호..]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쪽에서 들려왔다.  

[그럼..다 죽는거야?]
[아마도. 이번엔 더 큰 힘이 필요하니까] 

대화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살그머니 나무들 쪽으로 다가갔다. 내 머리보다 조금 위에 있는 가지에는 외눈박이 요괴와 뿔이 두 개 달린 요괴가 서로 마주보며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부엌에서 가져왔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꼬치구이가 들려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으억! 인간이다~] 

둘은 깜짝 놀랐는지 두 손을 번쩍 들어보이고는 사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5.사건  
 

 

[문제가 생겼어! 빨리 나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할 그 놈이 내 머리 속으로 다급한 말을 전했다.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아니요] 

번개처럼 휘갈겨 써서 종이를 다 매꾼 뒤 그의 손에 얹어주고는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간 후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장애 수당에 주민 수당까지 합쳐서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안 그러면 굶어죽어요! 계좌이체 아시죠?] 

눈을 동그랗게 뜬 직원은 폭풍같이 몰아치는 내 말에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 가장 빠르다고 할 만한 속도로 현관문을 열고 주민자치센터를 빠져나왔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머리 속으로 어디 있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풀 밭..나무 밑에..]
[어느 나무? 나무가 한두 개야? 똑바로 말해!]
[커다란 나무, 그 옆에 벤치가 있어]
[내가 들어갔던 건물에서 어느 쪽이야?]
[왼..쪽..조금..더..가면..] 

그의 말이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뭔가 아주 잘못 된 것 같아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나는 건물에서 왼쪽으로 돌자마자 길을 빠르게 걸었다. 벤치와 인접해 있는 나무 주변을 눈으로 스캔하며 경보를 하듯 움직였다. 이렇게 나무와 벤치의 조합을 찾다보니 왜 그리 똑같은 게 많은지 속이 탄다. 그를 불러도 이제는 아무 대꾸가 없어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10 그루 정도를 지나자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그 주변으로 벤치와 커다란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아까 냄새가 지독하다고 짜증을 부렸던 그 향수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가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 나는 손에 잔뜩 배인 땀을 청바지에 닦으며 풀밭 주변에 쳐진 줄을 넘어갔다. 

[들어가면 안 되는데..]  

공을 가지고 놀 던 아이 중 한 명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옆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부모인지 벌떡 일어났지만 내가 노려보자 공포를 느끼고는 아이를 불러 다른 곳으로 갔다. 풀밭에선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제법 큰 규모인데 이정도로 느껴지면 고양이로 변하기 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많다.   

[야! 내 말 들려?]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많고 내가 뭐하나 멈춰 서서 보는 구경꾼까지 있어 머리 속으로만 외치려니 두통이 스멀스멀 잠식해온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두운 풀 밭에 왠 여자가 엎드려 움직이니 희한하다고 생각하는지 점차 멈추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늘었다. 그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반대편까지 샅샅이 킁킁거리며 훑었다. 

내가 들어온 방향에서 왼쪽 끝부분에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두꺼운 가지를 축 늘어트리고 바람에 간간히 은행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밑에 있는 벤치에 내가 빌려준 백합무늬 파자마가 있었다. 두 손으로 집어 올리니 여기저기 찢겼다. 모양새로 보아 날카로운 손톱으로 박박 긁혔다. 벤치 아래에도, 나무 밑에도, 심지어는 나무 위에도 그는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