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데려온 거니까..스승님께 폐가 되지 않게 해볼께요]
[손님방에 머물라고 해. 거기 비어있으니까]
[그래도 되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지로 내 입술 주변에 뭍은 피를 닦아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좀 전에 있었던 사건은 깡그리 잊고 새롭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였지만 스승님의 손이 내 입술 위에 있었다는 사실로 심장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럴 때는 나에게 조금 마음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정말 스승님은 어려운 분이다.

[아가씨?]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돌아봤다.

[아가씨방 청소..어? 무슨일 있으세요? 얼굴 표정이..]

나는 프릭스에 대한 스승님의 결정을 알려준 뒤 계단을 올라갔다. 복도로 들어서기전에 뒤돌아보니 스승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철장에 갇힌 뒤에..]

나는 침대에 누워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프릭스는 손님방에 있지만 다시 고양이로 변한 상태라 나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 잠시 후에 대답이 들렸다.

[몸에 채워진 수갑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라 탈출할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주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지. 내가 있던 창고는..]

프릭스는 생각을 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걸 더 좋아하는지,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갑자기 방법을 바꿨다. 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목주변까지 단단히 감싸고 머리를 흔든 뒤 눈을 감았다. 그의 영웅담이 상영되는데 자꾸 스승님의 손가락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창고는 자동차 10대 정도를 주차 시킬 수 있는 넓이로 보였다. 그 안에 벽을 따라 크고 작은 철장들이 천장까지 쌓여있고, 프릭스는 그 중 왼쪽 벽의 다섯 번째 줄에 있는 철장에 묶여 있었다. 그 위치에 있어서 좋은 점은 창고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앙에는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크고 긴 탁자가 줄지어 놓여 있고, 좀 전에 뱀파이어들이 받은 것과비슷한 유리병들이 그 위에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더니 홍삼을 달일 때 쓰는 듯한 가마솥들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고 안은 여러 가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마치 아마존의 밀림 속에 뚝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도마뱀의 이가는 소리, 거북이의 모래를 발로 미는 소리, 어디선가 간간이 다가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등. 예민해진 프릭스의 귀는 머리가 울릴 정도로 심한 청각적인 고문에 점점 지쳐갔다.

털컹..끼이이익....

육중한 창고 문이 밀리며 갈색 머리 뱀파이어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토끼 한 마리가 들려있는데 바둥거리며 살려달라고 끼이이익 소리를 냈다. 그는 문 근처의 철장 쪽으로 걸어가 비어있는 곳에 넣은 뒤 자물쇠를 채웠다.

[토끼 두 마리, 거북이 한 마리는 준비 됐고, 아기는..모자라는군]

위로 넘기는 장부를 들고 철장을 왔다 갔다 하며 수량을 적던 뱀파이어는 프릭스가 있는 곳에 멈춰 서서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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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어. 그냥..혈액인가 보다 했지]
[그럼 어떻게 알았어? 마셔보기라도 한거야?]
[고양이가 혈액을 어떻게 먹어? 우유처럼 핥아 마실까?]

그는 상상을 하자마자 토하는 시늉을 하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 모습이 웃겨 나도 모르게 프릭스의 등을 툭 쳤다.

[어! 어..어]

내가 장애가 있고 초짜 뱀파이어긴 하지만 어느정도의 힘은 있기 때문에, 생각 없이 한 행동으로 그는 창문틀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나는 얼른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1층이지만 바로 밑에 울퉁불퉁한 돌로 만들어진 정원이 있어 다쳤을까봐 걱정 되었다. 몇 번을 불러도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더럭 겁이 났다. 1층에서 떨어져 죽은 고양이 소식은 들은 바 없지만, 뱀파이어의 힘 때문에 어딘가 부러져 기절한 게 아닌가 싶었다. 달빛에 바닥을 살펴보니 베고니아 꽃들 사이에 은색 털의 고양이가 쓰러져 있었다.

[정신 좀 차려봐, 응?]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프릭스를 두 손으로 들어올려 달빛에 비쳐보았다. 숨을 쉬는지 보려고 얼굴을 코 가까이로 가져갔다. 그 순간, 푸른 눈을 번쩍 뜬 고양이가 내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야!]
[하하하하하]

그는 그 순간 사람으로 변신했다. 나체도 민망하고, 조금 전의 일도 당혹스러워 나는 등을 돌렸다. 그는 그런 나를 내버려두고 창을 뛰어넘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1분쯤 뒤에 이불로 몸을 둘둘 싸고 창틀 앞에 나타났다.

[거기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이리로 와]
[싫어!]

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귀로 그의 웃음소리가 계속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오니?]
[그냥..바람 좀..답답해서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며 서 있던 스승님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보여, 어제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또한 좀 전의 일을 알고 기분이 나빠진 건 아닌지도 궁금해, 그의 안색을 살피며 거실로 들어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혈액 잔을 건네주었다.

[프릭스...어떻게 할까?]

나는 코를 막은 채 피를 마시다가 놀라서 컥 소리를 냈다. 스승님의 표정은 좀 전과 달라진 건 없지만 팔짱을 낀 채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잔을 가슴까지 내린 후 혀로 입술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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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하고 대장간의 대문마저 닫힌 밤이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 새지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된다. 물론 요괴라 사람보다는 힘이 세지만, 가는 곳마다 새지를 먹고 싶어하는 요괴들 때문에 위험이 가득하다. 혼자 보낼 때는 별 일 없으리라 믿었는데, 아버지의 잠자리를 봐드린 후에도 감감 무소식이니 찾으러 나가야할 것 같다. 

[새지?] 

막 방바닥을 훔친 걸래를 들고 나오는데 검은 개가 터벅터벅 마당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등허리에 몸을 축 늘어트린 새지가 쓰러져 있어 깜짝 놀랐다. 한 걸음에 다가가서 보니 온 몸이 피투성이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공격을 받은 게 틀림없다.  

[도..련..님?]
[좀 어떠니? 괜찮아?]  

몸을 닦여 핏물을 그럭저럭 빼내고 평상에 눞혔다. 검은 개도 행색이 말이 아니어서 흙과 나뭇잎을 털어주었다. 그제야 몸이 개운한 지 기지개를 켜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많이 아파요.흑...근데 여기..엉덩이 까진 거 엄청 빨갛죠?]
[그래. 너 또 어떤 녀석이랑 붙은거야?]
[거대한 요괴요]
[뭐?]
[아주 정확히 본 건아닌데..머리가 산만했어요] 

세상엔 내가 모르는 요괴들이 많으니 새지가 설명하는 게 좀 과장되었다 싶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마시고 나니 좀 살 만해진 새지는 일어나 팔과 다리를 흔들어보며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이리되버렸니? 피가 많이 뭍은 걸 보니 상당히 위험했던 거 같은데..]
[제 피가 아니에요]
[그럼? 그 요괴 피? 니가 이긴거야?]
[설마요..저기~저 녀석꺼에요] 

[누구?] 

새지는 싸리문 밖을 가리켰다. 평상에서 일어나 낮은 싸리담장 밖을 보니 내 어깨정도 올만한 녀석이 안을 슬쩍 슬쩍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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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빙글빙글 돌던 뇌가 겨우 가라앉자 고개를 들었다. 갈색 머리 뱀파이어는 커다란 쇠뚜껑을 들고 있었는데, 그곳에 부딛힌 게 틀림없었다. 그 때쯤에야 겨우 다가온 검은 머리 뱀파이어가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사람이었는데 고양이로 변했습니다]
[프릭스로군..]
[프릭스가 뭡니까?]

그 때야 겨우 도착한 다른 뱀파이어들이 물었다.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뱀파이어는 프릭스를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대답했다.

[변신괴물]
[아...그럼 늑대인간?]
[멍청아! 제가 늑대냐? 고양이지]
[그럼 변신괴물이 뭔데?]
[말 그대로 변신하는 괴물이야. 제는 고양이괴물이지, 뭐]

갈색 머리 뱀파이어를 따라오던 두 뱀파이어는 서로를 치며 중얼거렸다. 프릭스는 그들의 멍청한 대화 때문에 웃음이 나오려고 해 입술을 깨물었다. 갈색 머리 뱀파이어는 프릭스의 몸에 수갑을 채워 철창에 넣었다.

[그 뱀파이어는 트렁크에 감금해놨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이번엔 일을 잘했군]
[감사합니다! 그럼..그거..주시는 겁니까?]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자리를 뗬던 갈색 머리 뱀파이어는 손에 작은 병 두 개를 들고 돌아와 건네주었다. 그들은 뚜껑을 열자마자 벌컥벌컥 마시고는 아쉬운 듯 혀로 유리병을 핥았다.

[그게 뭐였는데?]

나는 어디선가 들려온 늑대의 울음소리에 프릭스의 회상이 멈추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늑대를 찾는 것처럼 시선을 숲 너머로 둔 채 대답했다.

[블러디 다이아몬드]
[정말?]

나는 까무러치게 놀랬다. 블러디 다이어몬드는 1개월 미만의 신생아 피로 만들어진 혈액이다. 뱀파이어정부 법에서는 밀주로 정하고 생산하거나 마시는 자 모두 사형에 처하는 금지 품목 1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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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건너 마을에 사는 친구에요]
[오호..너도 친구가 있었구나] 

하늘은 잠시동안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반짝이며 빛을 뿌려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곧 몰려온 구름이 어두컴컴하게 만들었다. 나는 평상에 누운 채로 별 뜻 없이 중얼거린 말인데, 새지는 자존심이 상한 듯 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물론이죠! 제가 말씀을 안 드려서 그렇지 친구가 엄청 많아요]
[내가 보기엔 다들 널 먹고 싶어하는 눈친데..친구들은 안 그래?]
[아마..먹..고 싶기야 하겠죠] 

새지는 대화가 이쯤 이르자 꼬리를 내렸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무적의 팔색조이지만, 변신의 고통을 못 이겨 반쪽 짜리 삶을 사는 요괴이고, 워낙이 맛이 좋다는 평이 자자해 거의 모든 요괴들이 새지를 먹으려고 안달한다. 실재로 얼마전에 우리는 무시무시한 무리들에게 쫏겨 죽을 뻔 하기도 했다.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머뭇거리던 새지는 머리를 흔들며 벌떡 일어나 평상 위에 두었던 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팔짝 뛰어 검은 색 개 위에 올라타고는 이랴! 이랴!라고 외치며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왠만한 개라면 아픔 때문에 새지를 내팽개칠텐데, 이 개는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나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싸리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갔다. 

[다녀올께요~~~] 

새지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오다가 사그라들었다. 나는 다시 하늘이 무섭게 어두워지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가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장정 두-세명이 누우면 꽉 찰 작은 방이지만 우리에게는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방 안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내일은 내가 대장간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잠들어야 한다. 닭이 울 때 쯤 일어나면 또 늦는다. 머리를 배게 댄 지 얼마 안 되었다 싶은데 벌써 가물가물 정신이 흐트러진다. 문득 새지는 호랑이 고개를 잘 넘었는지 궁금하다. 그곳은 무섭고 큰 동물들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여 밤엔 사람이 얼씬 안하니까. 물론 반쪽 짜리 요괴라 해도 요괴는 요괴니까 호랑이한테 잡혀 먹진 않을 것이라 믿는다. 

                                                                  *

[에헤라~가자~가~자~] 

새지는 서둘러 호랑이 고개를 넘으려고 애마의 엉덩이를 막대기로 몇 번 쳤다. 검은 개는 그 때마다 몸을 움찔하지만 속도를 올릴 의지가 없는지 여전히 느릿느릿이다. 고개에 들어설 때만 해도 달빛 때문에 숲 길이 훤히 보였지만, 중반 쯤 올랐을 때 엄청난 구름 떼에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길 양 편의 검은 숲은 바람이 휘돌아 갈 때면 소름끼치는 소리를 한바탕 내지르며 부르르 떨어 오싹한 느낌이 새지를 강타했다. 종종 뒤를 돌아보며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지만, 목 뒤를 서늘하게 하는 바람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윽...] 

갑자기 돌풍같은 바람이 등 뒤에서 달려왔다. 그와 함께 온 몸을 뒤덮을 양의 나뭇잎이 타원을 그리며 뒤따라와 새지와 검은 개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것들을 털기 위해 개가 심하게 떨자 새지는 바닥에 떨어졌다. 바람에 실려온 고약한 피비린내에 몸을 돌려 뒤를 보자 거대한 머리를 가진 요괴가 바람과 함께 새지를 향해 달려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으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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