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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ㅣ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N22078
"모든 것이 순식간에,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행복하게 지나가서 그 무엇도 머릿속에 기억해둘 수 없었다. 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생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법이다."
일기를 써볼까?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는데 생각만 하다가 포기했다. 일단 글씨를 못쓰기도 하지만 매일 매일의 일을 정리하는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혹시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고, 오랜 시간 후에 과거의 일기를 읽는다면 분명 이불킥 할거란 확신도 이유였다. 그런데 일기 형식으로 쓰여진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을 읽고 나서 일기를 한번 써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낯선 우루과이 작가인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은 49세의 홀아비 "마르띤"이 일기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서간체 소설은 몇번 읽어 봤는데 이처럼 일기 형식의 소설은 처음 읽어봤다. 일기형식 작품은 일단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고, 시점이 1인칭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머리 쓸 필요 없이 그냥 읽으면 된다는게 장점인 것 같다.
그리고 우루과이=남미=환상문학 이라고 처음에 생각했었는데, 환상문학은 아니었고 매우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이야기였다.
현재 나이 49세로 내년이면 퇴직을 앞둔 주인공 "마르띤", 그는 20여년전에 임신중독증으로 아내인 "이사벨"과 사별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세 태어난 세 남매를 홀로 키우는 남자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가 있지만 회사일은 지겹고 단조로울 뿐이며, 자식들과도 살갑게 지내지도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 자식들을 생각하지만 표현은 언제나 서투르다.
[그렇다. 어쩌면 자식이 줄줄이 셋이나 딸린 홀아비로 남겨져 세상 풍파를 잘 헤쳐왔다는 것에 뿌듯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감정은 뿌듯함이 아니라 그저 피곤함이다. 뿌듯함은 이삼십대에나 느끼는 감정이다.] P.13
아무 재미도 없다, 아무 의미도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신은 왜 나에게 이런 무료하고 희망이 없는 삶을 준걸까. "마르띤"은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메마른 삶과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다른 길이 없었기에 나는 그렇게 삶을 헤쳐왔다. 하지만 행복을 느끼기에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언제나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다.] P.13
그러던 그의 앞에 24살의 신입사원인 "아베야네다"가 등장한다. 자신의 딸뻘이기도 하고, 첫인상이 인상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점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마르띤"은 그녀와 잘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다가가기에는 주변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류 더미 앞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일렁였던 것 같다. 호흡이 가빠졌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흔히 울고 있는 여자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여자를 봤을 때 드는 긴장감이 아니었다. 나의 불안감은 나의 것,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나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는 불안, 그 순간 한줄기 빛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난 메마르지 않았어! ] P.64
"마르띤"의 호의를 단순히 직장 상사의 친절로만 생각했던 "아베야네다", 그녀 역시 점점 그의 진실한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결국 어렵게 꺼낸 "마르띤"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치열한 전쟁과도 같았던 "마르띤"의 오랜 고독한 삶이 드디어 휴전이 된것이다. 그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전 부인인 "이사벨"과도 공유하지 못한 늦깎이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나에게 의미 없는 존재였을 때, 내성적이고 단지 호감 가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때, 그녀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의 그녀를 기억할 뿐이다. 나의 넋을 빼앗고, 내 가슴에 분에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나를 정복한 달콤하고 깜찍한 여자.] P.131
그와 그녀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정신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마르띤"은 "아베야네다"와 결혼까지 생각하지만, 많은 나이차이 때문에, 자신의 10년 후와 그녀의 10년 후는 극단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결국 그녀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늙음에 실망할 거라는 걱정 때문에 차마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그저 지금처럼만 살고 싶은 바램을 갖는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그 순간이, 일상의 그 작은 조각이 지고의 축복이자 행복임을 전에는 그 순간만큼 완벽하게 행복했던 적이 결코 없었지만, 다시는 그런 감정을, 적어도 그 정도로 강렬하게는 느끼지 못하리라는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행복의 절정은 무릇 그러하다. 분명 그러하다. 더욱이 그 절정은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더 길게 늘일 권리는 없다. ] P.130
너무나 행복했었기 때문에 운명이 노여워 했던걸까? 거짓말처럼 그 둘의 행복은 갑작스럽게 깨져버린다. "마르띤"의 휴전은 끝나고, 그는 다시 아무 의미도 행복도 없는 불행한 삶으로 돌아간다. "마르띤"은 이제 더이상 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난다.
(스포가 될까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사랑해요...지금껏 당신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어요...하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에요. 이젠 그 이유를 알겠어요."] P.164
"마르띤"은 결혼하자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던 것을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처음 고백했었던 용기를 한번 더 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을 계속 간직하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이 다하기 전에 그의 앞에 다시 한번 휴전이 등장하기를, 그래서 다시 일기를 쓰기를 바래본다. 그런 기대가 없다면 남은 인생이 너무 쓸쓸할 테니까.
Ps. 이 책은 전쟁소설도 아니고 정치소설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