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슌킨 이야기 ㅣ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평점 :
N22083
˝사람은 기억을 잃지 않는 한 꿈을 통해 죽은 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이를 꿈으로만 보았던 사스케는 어떠했을까?˝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그런데 <슌킨 이야기> 처럼 눈이 먼 극단적인 사랑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귀족 집안의 딸인 슌킨은 9살 때 실명된다. 그리고 음악에 매진한다. 그녀의 옆에는 사스케라는 하인이 있고, 그는 그녀의 손이 된다. 하지만 눈이 먼 슌킨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까다로웠으며, 귀족인 그녀는 하인인 사스케를 무시한다.
[이처럼 슌킨은 고집도 세고 제멋대로였지만 다른 고용인들에게는 심술궂게 행동하지 않았다. 유난히 사스케를 대할 때만 그녀의 심술이 심해졌는데 원래 그런 기질이 있는 데다 사스케만이 애써 비위를 맞추려 했기에 그를 가장 편하게 생각해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스케 또한 고달프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필시 그녀의 유난스러운 심술을 응석으로 여기며 일종의 은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P.29
어느날 슌킨은 임신을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사스케와 똑같이 생겨서 사람들은 그의 자식임을 알게 되고, 그녀의 부모는 슌킨의 남편으로 사스케를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귀족인 그녀는 사스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슌킨은 스무살 되던 해에 독립해서 집을 나가게 되고, 이때 사스케도 따라 간다. 남편은 아니지만 그는 그녀를 씻기고, 옷도 입히고, 그녀를 위한 모든 손이 되어 행동한다. 하지만 슌킨은 그를 단지 하인으로만 대하지, 어떠한 정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스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극진히 모실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슌킨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야밤에 침입하여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망가진 것에 대해 절망하고, 옆방에서 뒤늦게 온 사스케는 그녀의 고통을 목격한다. 사스케는 그녀에게 다시는 슌킨의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사스케는 그녀의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기 위해, 그녀의 아름다움을 기억속에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맹인이 된다. 그런데 이를 오히려 기뻐하는 슌킨.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 극단에서 알게된 사랑.
[‘아아! 이것이 진정 스승님이 살고 계신 세상이구나! 이제 비로소 스승님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P.98
[˝기특하게도 그런 결심을 해 주다니 내 마음이 기쁘구나. 대체 누구의 원한을 사서 이 지경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야 내 진심을 털어놓자면 다른 사람에게는 지금의 모습을 보여 줄지라도 네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용하게 잘 헤아려 주었구나.˝] P.101
지금까지 육체적 관계는 있었지만 사제지간이라는 연유로, 신분차이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서로의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로 어우러지며, 함께 흘러가게 된다.
[신께서 다시 앞을 보게 해 주신다고 해도 거절했을 게야. 스승님과 나는 맹인이었기에 앞이 보이는 사람이 모르는 행복을 맛볼 수가 있었단다.] P.109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눈을 멀게하여 얻게 된 사랑도 진정 사랑인걸까? 생각해보면 보이지 않는 사랑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기억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은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자면 사랑.
Ps. 작년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열쇠>를 읽었었는데, 뭐 이런 이상한 작가가 다있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슌킨이야기>를 읽고 생각이 바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추구하는 ‘구조적 아름다움‘이란 이런거구나라고 감탄했다. 그의 다른 작품도 다 읽어봐야겠다. 기다려라 다니자키 준이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