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 작가의 말-“우리들의 바리는·······기성의 질서에 짓눌려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아 찾기의 계기로 역전시키는 존재입니다. 선언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드라운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 오듯이 이 경계를 넘어가지요. 체제 내부에 안주하길 거부하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리는 낯선 세상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을 통해 성장합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버려져야 했던 바리공주가 험난한 여정 끝에 무조신이 되는 과정은 그대로 이 땅에 존재했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바리는 ‘버려진 존재’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자신의 운명과 싸워 스스로를 구해냅니다. 버려진 딸이 바로 문제해결의 주인공이 되는 거지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여 새로운 운명을 자신에게 부여한 전사 바리. 수처작주隨處作主 하는 그녀는 가장 능동적인 의미에서 아모르파티의 구현자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한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현실세계의 부와 권력이 자신의 진짜 행복이 아님을 알아챈 바리의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하게 내재하는 행복의 감각에 예민하게 깨어 있으라고 우리를 자극합니다. 권력자가 주는 보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얻어지는 수동적인 성공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는 바리는 기성 체계가 만든 어떤 제도도 규칙도 여러분을 옭아매게 하지 말라고 전하는 듯합니다.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한 행복을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지, 성공이라고 일괄 제시되는 외부의 가치에 물음표를 던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기성의 질서는 솔직히 말해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바리의 이야기를 청소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현실이 암담할수록 더욱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자고 손 내밀며 우리 내면을 깨우는 바리. 버려진 존재에서 여신이 되는 바리가 온 몸으로 보여주듯이 사랑하는 자, 자신의 행복에 깨어 있는 자, 자신이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충만한지 깨닫고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자, 두려움 없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감행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희망은 자연스럽게 우리 내부에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응원과 사랑을 보냅니다.”(206-209쪽)

 

OECD국가 가운데 청소년 자살률 1위인 나라, 청소년 10명 가운데 6명이 우울정서에 시달리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과목을 가장 많은 수업 시간을 통해 주입식으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나라, 청소년이 삶의 가치 가운데 돈을 1위로 꼽을 만큼 뒤틀린 나라, 이게 대한민국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이들을 ‘통째로 내다버린’ 나라 맞습니다. 아무리 ‘잘나가는’ 아이라도 이 나라에서 바리데기 아닌 아니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지난 지선 무렵 ‘미개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그 아이도 철저히 버림 받은 아이입니다. 심지어 인간다운 삶을 찾아 제도 밖으로 나가서 대안교육을 받는 아이들조차도 부조리한 국가가 아니었다면 구태여 ‘힘든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버림받은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4년 4월 16일, 급기야 국가가 3백 명의 아이들을 세월호라는 유령선에 가두어 수장시키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파란만장한 역사나 복잡한 사회제도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익명적 ‘버림 사건’이 아닙니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한 집단이 기획한 ‘버림 사건’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주장하는바 교통사고는 더더욱 아닙니다. 단박에 3백 명의 바리데기를 생산해낸 정치공작입니다. 바로 지금 이 시각에도 기획·공작은 진행 중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자, <작가의 말> 표제 문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버려지는 존재의 슬픔이 있는 한 오늘도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긍정할 수는 없으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 인간의 역사는 극소수의 권력집단이 절대다수의 바리데기를 만들어온 발자취입니다. 앞으로도 역사는 그렇게 전개될 것입니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영원히 끝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이야기가 던져주는 영원한 과제는 영원의 찰나마다 바리데기들이 스스로 깨치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버려졌으므로 더욱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철저하므로 내 경계를 뚫고 나가 남에게로 번져가는 삶, 그 삶, 그 살림의 따스하고도 탱탱한 감각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더는 버려지지 않는 세상, 물론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니까 꿈꿉니다. 그 꿈으로 우리 바리데기들은 무장승을 만날 때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무장승과 나누는 사랑으로 우리 바리데기들은 치유가족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 치유가족은 언제일지 모르는 세상 끝 날까지 황천강 가에서 함께 삶과 죽음을 보듬어 갈 것입니다. _()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 씻김-“·······버려진 존재라는 고독감이 소녀의 마음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소녀를 괴롭게 한 것이 사실이나 저는 이제 과거의 그 바리가 아닙니다. 버려져서 원한을 품게 되면 재앙신이 되어 스스로를 심화지옥에 가둘 것이로되, 버려졌더라도 끝끝내 사랑을 품으면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먼저 깨달은 자의 소명으로 소녀는 버려져서 아파하는 여리고 어린 목숨들을 보살피는 이가 되고자 하오니 다만 그뿐이로소이다.·······죽음은 삶과 한 쌍이더이다. 죽음이 죽음으로만 방치되면 재앙일 것이로되 사랑을 얻으면 삶이 되더이다.·······버려진 존재라는 덫에 걸려 내가 누구인지 찾지 못한 채 헤매던 저를 약수지킴이 무장승의 사랑이 살렸습니다. 인생에는 매번 죽음의 순간이 닥치나 사랑이 없으면 죽음 앞에 엎어질 것이요 사랑이 존재한다면 삶이 되는 것이 생사의 이침임을 알았나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제가 세상에서 하고픈 일임을 생명수를 구해오는 여정을 통해 깨달았사오니·······”(195-196쪽)

「바리공주」가「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도한 것은 사랑, 이 한 마디입니다. 무엇보다 무장승과 바리가 사랑을 열어가는 과정과 의미의 갈피를 세세히 보살펴서 독자들의 감성을 다독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에게 필연으로 다가드는 상처와 치유, 삶과 죽음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은 ‘목숨 얻은 것들’의 처음과 끝, 앞과 뒤를 꿰뚫고 이어붙이는 무한 선순환의 감각이며 정보이며 지향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삶의 모든 구비에서 중요하거니와 무엇보다 청소년기에 결정적crucial 중요성을 지닙니다. 청소년기는 아이와 어른 사이 변곡점이자 경계선입니다.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보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시점입니다. 공시적synchronic 지평에서 보면 아이와 어른이 마주한 가장자리입니다. 청소년, 이 때, 이 자리에서 결정적 사건이 대부분 발생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치명적인 사건은 인생의 시생대始生代에 일어납니다. 바리가 버려진 바로 그 때입니다. 이때는 버려진 아기에게 거의 모든 지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봉인된 채 세월이 흐릅니다. 그 봉인이 뜯어지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청소년기입니다. 버려진 바리가 부모의 존재를 묻고, 아파하고, 원망하고, 수용하고, 몸부림치며 헤매는 격동의 시간 바로 그 때입니다.

그 때 방치당하면, 그러니까 다시 버려지면 재앙이 되고 죽음이 됩니다. 사랑이 닿으면 축복이 되고 삶이 됩니다. 축복과 삶을 불러오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상처의 인과와 무관한 새로운 인연이 피워내는 사랑입니다. 책임도 의무도 없는 타인입니다. 대가도 보상도 없는 제삼자입니다. 이런 사랑에서만이 창조인 치유, 치유인 창조가 일어납니다. 바리와 무장승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바로 이 진실을 ‘밑줄 긋고’ 전해주기 위해 김선우는 11년의 세월 동안 「바리공주」를 품고 있다가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낳은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바리는 상처를 넘은 치유, 죽음을 건넌 삶의 시공에 도달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열반보다, 예수의 부활승천보다 설레고 짜릿하고 향기롭고 아뜩하고 신나는 세계입니다. 물론 바리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돌아옵니다. 상처와 치유가 만나는 어름으로. 삶과 죽음이 마주하는 가장자리로. 죽은 사람들, 버려진 것들의 혼을 이끌어 쓰다듬고 씻기는 황천강 가로. 실은 바리가 돌아온 여기가 더 설레고 짜릿하고 향기롭고 아뜩하고 신나는 세계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바리는 여자사람으로서 삶과 죽음을 함께 보듬는 신이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신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어미 구원신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사는 이 경이로운 삶에는 늘 그의 가족이 함께 합니다. 다른 어떤 신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가족 구원신입니다.

 

우리 가슴 깊숙한 공간, 우리 내력 기나긴 시간에는 이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자리 잡아 흐르는데 이제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상처와 죽음에 휘감겨 있을까요. 누가 이 백성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히며 죽음을 강요하고 있을까요. 세월호에 아이들을 가두어 죽인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상처를 넘게 하고 죽음을 건너게 하는 바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 바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기다리는 것이 맞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이 질문들 앞에 결곡히 마주서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결기-칼 날 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 휘여, 아프구나-“·······무장승이 이불을 끌어당겨 바리공주에게 덮어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지붕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방 안 가득히 박쥐 떼가 소용돌이치듯 밀려들어·······바리공주를 향해 일제히 덤벼들기 시작했다.

“물러가! 내 손님이라니깐!”

손을 휘저어 박쥐들을 막으며 무장승이 소리쳤으나 약수 변에서와는 달리 박쥐 떼는 더욱 요동쳤다. 눈알이 모두 붉게 변한 박쥐 떼가 찌잇찌잇 그악스럽게 울며 바리공주를 할퀴고 물면서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무장승이 박쥐들을 떨쳐내며 다급히 바리공주를 품에 안았다·······”(146-147쪽)

 

황금 빛 박쥐가 무장승과 바리공주 사이에 두 번째 등장합니다. 첫 번째 등장은 무장승이 손을 내밀게 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등장은 무장승이 바리공주를 품에 안게 한 사건을 일으킵니다. 상상력이 한계에 도달할 때 요즘 통속한 드라마 작가들은 우연한 교통사고를 집어넣어 매듭을 풀지만 김선우는 무장승의 무의식과 현실 세계의 에너지를 새 떼로 이미 연결시켜 놓고 유類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아갑니다.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황금박쥐의 추억과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1년 전 이 장면을 김선우는 이렇게 풀어낸 바 있습니다.

 

·······알 수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이 사람의 정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뒤척이다가, 무장승이 가만히 손을 뻗어 바리공주의 앞섶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섶을 헤치며 가슴 안쪽까지 무장승의 손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여인이다·······.

무장승이 깊은 숨을 들이 쉬었고 순간 바리공주의 손이 무장승의 손을 저지하는가 싶더니 단번에 눈을 뜨며 일어나 앉았다.·······바리공주가·······말문을 열었다.·······목소리는 단호했다.·······

여인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고 무장승은 여인을 범하려다가 들킨 꼴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심사가 당연하였다.”(「바리공주」136-137쪽)

 

이런 풀어내기가 못내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청소년을 독자로 삼고 보니 더욱 민망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장승 편에서나 바리공주 편에서나 께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리공주는 알고 있고 무장승은 모르는 이 어긋남 또는 아이러니를 해결할 수단은 모르고 있는 무장승 쪽에 장치하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미상불 새 떼, 특히 박쥐 떼는 이렇게 탄생하였을 것입니다.

 

정반대의 어긋남 또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하늘이 바리공주를 무장승의 아내로 점지했다는 사실을 무장승은 알고 있고 바리공주는 모르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둘의 해결 방식이 다릅니다. 이 해결에는 새 떼 같은 장치가 없습니다. 사흘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약수藥水를 품은 신목과 묵언 대화함으로써 바리공주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그 답, 그러니까 사랑을 들고 바리공주가 먼저 무장승에게 청혼하였습니다. '여자사람' 바리가 주체적, 능동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에는 한결 성性인지적 관점(여성주의라는 용어가 혹 김선우를 옭아매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용어를 택하였습니다.)이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김선우가 11년 사이에 더 깊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을 독자로 상정했을 때 김선우의 마음결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보다 좀 더 맑은 궁금증과 좀 더 뿌듯한 기대감을 지닐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세월호 참극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듯 이 나라의 어른 사람들, 특히 헤게모니블록에게는 성인지적 관점이나 성 평등에 관한 말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청소년의 말랑말랑한 영혼에 품은 김선우의 설렘이 무한히 번져가기를 삼가 빕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 만남-“.......마음이 놓여 갑자기 웃음이 배어 나오려는 찰나였다.

해거름 어둠 속이 순식간에 날개 퍼덕이는 소리로 가득해지더니 바리공주의 시야가 검은 장막을 친 것처럼 돌연 컴컴해졌다.......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수리들과 박쥐들이 날카롭게 우짖으며 날개를 퍼덕이면서 까마득한 공중까지 원기둥을 쌓아올린 채였다.......새들이.......바리를 노려보았고, 원기둥 높은 쪽에 있던 거대한 독수리가 바리공주의 두 눈을 쪼려고 급강하하는 순간이었다.

“내 손님이다. 돌아가!”

굵직한 무장승의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새들의 장벽이 사라졌다. 심장이 쥐여졌다 놓여나듯 바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천 마리 새들이 자신을 가두고 일제히 노려보는 사태는 지옥만큼이나 섬뜩하다고 생각하며 바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소?”

다시 무장승의 목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구척 거구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리에게 손을 내밀어왔다.......”(138쪽)

 

곡진과 절망이 뒤엉킨 기다림의 결과 치고 무장승과 바리의 만남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밍밍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가 남장을 했기 때문에 무장승이 뜨악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쌍방향 해결을 위해 김선우는 기다림 장면에 등장했던 검은 독수리 떼와 황금 빛 박쥐 떼를 다시 등장시킵니다.

 

한편으로는 무장승의 께름한 마음 상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좀 더 살갑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순의 경계에 피는 꽃 문장 하나.

 

심장이 쥐여졌다 놓여나듯 바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장승이 안부를 묻고 손을 내밀기 위해 조작한 ‘설정’처럼 보이는 나름 극적인 파동波動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신뢰가 형성되어 손을 잡게 되는 극적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치 금시초문이라는 듯 생으로 나서는 말, 그렇지요, 털썩 주저앉았다!

바리의 털썩은 무장승의 털썩과 다른 털썩입니다. 놀라서 맥이 풀린 탓과 긴장이 풀려 안도한 탓이 한 찰나에 겹쳐 있습니다. 기다림의 털썩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털썩에는 손 내밀어주는 이가 없습니다. 만남의 털썩입니다. 만남의 털썩에는 손 내밀어주는 이가 있습니다. 시절인연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 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 테냐 후다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 소문 없이 만난 빈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_이병률의 <인기척> 전문

 

바리가 무장승을 만나 이루는 사랑은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는 그저 그러한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에게는 온전한 치유를 위한 특별한 길입니다. 상처 없앤 사람이 되는 향 맑은 길입니다. 하지만 무장승에게는 하늘사람으로 복귀하는 특별한 길입니다. 허물 없앤 사람이 되는 빛 부신 길입니다. 바리는 털썩 주저앉을 만큼 고된 건넘을, 무장승은 털썩 주저앉을 만큼 안타까운 기다림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얻은 사랑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바리는 공주를 ‘버리고’, 무장승은 하늘사람을 ‘버리고’ 황천강으로 흘러갑니다. 거기서 무얼 할까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사랑으로 거듭나 마침내 자신을 기꺼이 버림으로써 버림받은 상처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무한선순환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힘 가진 무리 0.1%가 자신들만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무한악순환구조를 돌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날뛰는 강도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바리는 오늘의 황천강으로 나아가 저 무리가 해치고 버린 생명을 구해냅니다. 구원받은 바리데기들은 저 무리 잡아갈 저승사자의 길을 닦습니다. 할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 무장승의 기다림-“.......무장승이 약수弱水 바닷가에서 가슴을 쾅쾅 두드리자 발밑이 쿠웅쿠웅 울리며 천지가 진동했다. 계속 수평선을 주시하던 그가 안타까운 듯 한쪽 발을 쿵, 구르자 서편 하늘을 빼곡하게 덮으며 검은 독수리 떼와 황금 빛 박쥐 떼가 몰려와 명령을 기다리듯 그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휘이, 돌아들 가! 오늘 내 심사가 잠시 어지러운 것뿐이다.”

무장승의 말에 독수리 떼와 박쥐 떼가 순식간에 왔던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수평선을 바라보며 무장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장승이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주저앉자 갯가에 사는 생물들이 썰물 빠지듯 황급히 달아났다........

무장승의 깊은 한숨 소리가 약수 변을 괴이한 적막으로 뒤덮고 있었다.”(120-122쪽)

 

무장승은 바리가 가져가야 할 약수藥水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서천서역국에서 바리가 만날 마지막, 아니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이 점지한 바리의 지아비이기도 합니다. 그를 만나 사랑으로 치유를 완성해야 여정이 끝나므로 무장승과 바리의 인연은 가히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청소년을 독자로 삼아 고쳐 쓰면서 김선우는 이 대목에 극적인 분위기가 더 번지도록 공을 들였습니다. 지어미를 기다리는 무장승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그럼에도 부질없음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지, 그 역설의 상황을 절절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문득 이병률의 시 <화분>이 떠오릅니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동안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무장승은 잘못을 저질러 하늘에서 쫓겨 내려왔으니 죄 값을 치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할 존재입니다. 지어미를 만나 아들 셋을 낳으면 삼십년으로 탕감된다, 하니 얼마나 간절한 심정일 것입니까. 그러나 팔만사천 지옥을 건너고 날짐승의 깃털도 가라앉는 약수弱水까지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싶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심정일 것입니까. 더군다나 바리를 만나 자신의 운명이 또 어찌 바뀔지 모르는 상태이므로 미상불 그 무의식은 모순으로 요동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선우는 이 상황을 평범하되 역동적인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무장승이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정곡을 찔러 묘사할 말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움이 극에 달한 기다림의 끄트머리, 털썩.......그렇습니다, 털썩! 

 

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다 이렇게 털썩 주저앉았던가. 돌이켜보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날카롭고도 질긴 순간 하나 있었습니다. 떠나간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던 유년의 어느 날, 그 기억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힙니다. 무장승에게 바리가 그렇듯, 제게 엄마가 그렇듯, 오늘 팽목 앞바다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아이가 그렇게, 털썩 주저앉은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무장승에게 바리는 기어이 올 것입니다. 제게 엄마는 기어이 오지 않았습니다. 팽목 앞바다의 엄마에게 아이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