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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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자본주의>

 

이문재

 

손과 세계 사이에 무언가 있다.

그 무언가가 손과 세계를 배반한다.

손과 세계를 모른 체하게 한다.

 

입과 자연 사이에 또 무엇이 있다.

저, 이, 무엇이 입과 지구를

서로 무관하게 만든다.

 

결국은 눈이다.

일상적으로 일상을 일상화하는 눈

일상적인 눈을 다시 일상화하는 눈

저 눈은, 이 눈을

이 시각은, 저 시선을 노예화한다.

 

저, 이,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 눈을 감는 것이다.

두 눈을 꾹 감고 인위적으로

코와 귀, 손과 입, 피부와 감각을

그리하여 저 옛날을, 이 온몸을

애타게 불러오는 것이다.

 

 

시인은 시인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이 시각독재라는 것을 간파했으니 말입니다. 시각은 남성가부장 문명의 지배력이 전달되는 단일 창구입니다. 다른 네 감각, 심지어 제6감까지 시각으로 제압함으로써 일극집중구조를 만들어 사실상 유체이탈 상태의 인간을 조종하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오직 시각, 특히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는 중심시각을 유일 선으로 여깁니다. 선택-집중-대박으로 삶의 동선을 꾸립니다. 탈락된 사람은 버려집니다. 버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리데기들이 눈을 버리고 더듬더듬 낮은 곳으로 모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후각부터 시작하여 감각을 복원합니다. 몸을 되찾습니다. 마침내 다시 눈을 떠 비-중심시각을 되찾습니다. 자본주의 시각독재를 꿰뚫고 일구어낸 새 문명의 동이 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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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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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이문재

 

그대를 놓친 저녁이

저녁 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대를 빼앗긴 시간이

시간 위로 엎어지고 있었다.

 

그대를 잃어버린 노을이

노을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를 놓친 내가

나를 놓고 있었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부욱-

자기 가슴팍을 긋듯이

 

서쪽 하늘

가늘고 긴 푸른 별똥별 하나.

 

 

 

모든 상실은 시간의 발을 걸어 넘어뜨립니다. 넘어진 시간은 그대로 멈춰 쟁여집니다. 멈춰 쟁여진 시간은 기억의 성채가 됩니다. 기억의 성채는 상실을 가두고 가시덤불에 휘감깁니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들어오는 왕자는 내 삶에 없습니다. 내 삶에는 오직 놓은 나를 놓는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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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7시 20분 쯤. 한의원 문을 닫고 이문재의 「지금 여기가 맨 앞 」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자인 드라마작가 백운철이 <정도전> 후속 작품 <징비록>을 쓰게 됐다며 “영감을 주소서.” 트윗을 날렸기에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누군가 쿵쿵쿵 한의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아 얼른 문을 열었습니다. 가슴 두근거림을 호소하며 두어 차례 침 맞았던 50대 초반 여인이 어둡고 다급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안으로 맞아들인 뒤 침 치료를 위해 잠시 누워 기다리는 동안 고요히 그 옆에 앉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 여인이 “선생님, 저 말해야겠어요.” 하더니 문맥도 없이 대중도 없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폭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들을수록 답답하고 대책 없는 사연들이 도무지 이로가 잡히지 않은 채 제각각 '미친년 널뛰듯' 펄떡거립니다. 어느 순간 여인은 꺽꺽 울음을 토해냅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쥡니다. 가슴을 두드리다 못해 쥐어뜯습니다. 사방팔방 팔을 휘두릅니다. 발버둥을 칩니다. 격심한 몸부림이 쓰디쓴 체취를 낭자하게 흩뿌립니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의 아픈 말을 들었습니다. 눈물을 보았습니다.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말을 하는 동안, 이 여인이 우는 동안, 저는 차마 그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손을 잡으면 “그만 하라.”는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못 박힌 듯 꼼짝 않고 그 광경에 주의·집중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는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저는 칼 날 위에 선 만신이었습니다.

 

드디어 긴 한숨과 함께 날뛰던 언어와 몸짓과 울음이 한 목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여인은 한참을 죽은 듯 숨소리조차 안 내고 있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무어라 달리 할 말을 찾지 못 했습니다. 이해도 공감도 접근도 해결도 절연된 무력한 타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제-여기가 상담자의 시공입니다. 저는 여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말을 듣고 황감해 하는 여인의 젖은 가슴에 딱 한 마디를 꽃처럼 놓아주었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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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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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

이문재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   *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기우제를 그렇게 곡진한 마음으로 지내서 비가 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비는 올 때 돼서 온 것이고 그저 그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 것뿐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가만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생각은 과연 전혀 다른 생각일까요?

이 두 생각은 딱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인간의 처지에서 품을 수 있는 생각과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는 사실.

우리가 세상의 이치와 인연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채 곡진히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삶이 장엄에 미치지 못 하여 비애에 젖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직 못 다한 숭고함이 남아 있으니, 자 이제부터 시작하자." 

 

 

저 또한 비애로 가득찬 삶의 길을 걸어, 아뿔싸, 오십대 끝자락에 섰습니다.

고백하건대, 늦어서 때 맞게 오늘 천명의 말 한 마디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뜻이 제게서 다 이루어질 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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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 *

 

 

 

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를 읽으며 서정시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우리는 그럴 때 ‘서정적으로 올바른(poetically correct)'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시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곳은 ‘그가 누웠던 자리’다.”(「몰락의 에티카」512쪽)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의학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겸허하기는커녕 도리어 오만합니다. 기계 진단만으로 환자를 안다고 말합니다. 환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환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합니다. 현대의학은 스스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지 못 합니다.

 

현대의학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자본주의의 핵심부에 있다는 외부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서구사상의 기저에 깔려 있는 형식논리, 거기에 터 잡은 합리적 인식론이 현대의학 이론과 의료 실천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신형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아도르노의 말이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의사의 매뉴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다.”(앞의 책 508-509쪽)

 

합리적 인식은 왜 그토록 고통과 먼 거리에 있을까요? 고통은 왜 합리적 인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을까요? 고통은 죽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힘과 삶으로 밀어 올리는 힘이 맞부딪는 곳에서 일어나는 아프고 힘들고 불편한 소요騷擾입니다. 고통은 그러므로 역설입니다. 역설이기에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서구의학은 이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 했습니다. 고통을 무조건 없애야 할 무엇으로 판단하여 이론과 실천을 온통 그 쪽으로만 몰아갔습니다. 결국 현대 의사의 매뉴얼에는 고통의 진실이 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시에 고통이 있다고 한 신형철의 말은 과연 옳습니다. 시는 언어의 요체입니다. 언어의 요체는 은유입니다. 은유의 요체는 역설입니다. 역설이 아니면 시가 아닙니다. 시가 아니면 고통을 담을 수 없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아니면 고통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신형철의 정확한 표현 하나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시인은 병 없이 앓는 자다.”(앞의 책 509쪽)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고통의 치료자인 의자醫者는 근본적으로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시인의 언어로, 그러니까 역설로 빚어내는 새로운 의학·의료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결국 여기서도 답은 인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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