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 *
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를 읽으며 서정시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우리는 그럴 때 ‘서정적으로 올바른(poetically correct)'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시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곳은 ‘그가 누웠던 자리’다.”(「몰락의 에티카」512쪽)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의학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겸허하기는커녕 도리어 오만합니다. 기계 진단만으로 환자를 안다고 말합니다. 환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환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합니다. 현대의학은 스스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지 못 합니다.
현대의학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자본주의의 핵심부에 있다는 외부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서구사상의 기저에 깔려 있는 형식논리, 거기에 터 잡은 합리적 인식론이 현대의학 이론과 의료 실천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신형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아도르노의 말이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의사의 매뉴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다.”(앞의 책 508-509쪽)
합리적 인식은 왜 그토록 고통과 먼 거리에 있을까요? 고통은 왜 합리적 인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을까요? 고통은 죽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힘과 삶으로 밀어 올리는 힘이 맞부딪는 곳에서 일어나는 아프고 힘들고 불편한 소요騷擾입니다. 고통은 그러므로 역설입니다. 역설이기에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서구의학은 이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 했습니다. 고통을 무조건 없애야 할 무엇으로 판단하여 이론과 실천을 온통 그 쪽으로만 몰아갔습니다. 결국 현대 의사의 매뉴얼에는 고통의 진실이 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시에 고통이 있다고 한 신형철의 말은 과연 옳습니다. 시는 언어의 요체입니다. 언어의 요체는 은유입니다. 은유의 요체는 역설입니다. 역설이 아니면 시가 아닙니다. 시가 아니면 고통을 담을 수 없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아니면 고통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신형철의 정확한 표현 하나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시인은 병 없이 앓는 자다.”(앞의 책 509쪽)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고통의 치료자인 의자醫者는 근본적으로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시인의 언어로, 그러니까 역설로 빚어내는 새로운 의학·의료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결국 여기서도 답은 인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