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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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자나 지시체 없이 그 자체의 물리적 강렬함만으로 존재하는 언어의 세계, 주체도 대상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어떤 상태(는)·······‘무의미하게’ 아름답다.·······“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우리시대의 증상(이다.)(223-229쪽 *괄호와 그 안의 내용은 인용자 부가임.)

 

스누피를 그린 전설의 만화가 찰스 슐츠는 말했습니다. “내 인생에는 목표도,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합니다.”

 

상담 중에 이 말을 소개했더니 어떤 분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대박 난 인생을 살아가니까 그런 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일리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는지요. “만일 그렇게 대박 난 찰스 슐츠가 커다란 목표, 바른 방향, 숭고한 목적, 깊은 의미까지 그 인생에 담았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일리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 반대의 생각을 해도 일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의제擬制도 가능합니다. 대박 난 인생인가, 아닌가, 는 관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불가피하게 헛것, 그러니까 무상無常한 것이므로, 의미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으로서의 삶을 순간마다 이어가면, ‘무의미하게’ 아름답다, 는 진실이 핵심입니다.

 

꽃이나 짐승이 아닌 인간인 한, 의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오랜 관습임은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의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 하는 데에 거치적거릴 일이 없습니다. 의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면, 이 관습은 미상불 저주였을 것입니다. 의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길은, 삶 자체의 물리적 강렬함, 과정으로서의 삶, 오직 그뿐입니다. 제 몸을 태워 불로 번져가는 장작이 내는 소리의 “점멸”點滅(191쪽), 그 점멸의 과정만이 가장 경건한 우리시대의 증상, 그러니까 “참혹한 아름다움”(5쪽)입니다.

 

 

열여덟, 삶을 채 불태워보지도 못하고 차고 어두운 물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닷새 만에 휴대폰을 움켜쥔 채 주검 되어 엄마한테 돌아온, 이 아이 앞에서 산 자들의 서사는, 의미는, 전언message은 죄다 꽃놀이 패일 따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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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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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을 통해 지시대상 자체를 소멸시키고 사건을 추상화해서 이미지의 구조물로 전환시킨다. 바로 그 순간·······소위 ‘환상’적인 것이 되며·······환상은 대개 ‘과잉’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과잉’으로 치달으면서 자주 드러내는 현상 중의 하나는 공격적인 신체 훼손과 기관 분리 현상이다.·······소위 ‘환상’이란 그러므로 언어화·상징화에 저항하는 현실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현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면서 동시에 의식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욕망’이 아니라 신체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충동’의 운동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살아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를·······면도칼(환상)로 자해하여 흘리는 붉은 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재를 환상으로 착각하지 말라.’(221-222쪽)

 

이른바 초기불전에 따르면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는 해체였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 할 때 그 생각은 우리가 늘 보아온, 그래서 관습적인, 그러니까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히는, 얼굴 전체의 느낌에 터한 것입니다. 눈, 코, 입들을 따로 떼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고, 나아가 더 작은 단위로 잘라 보면, 예쁘다 뭐다 할 것도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릅니다. 이렇듯 우리가 휘둘리는 대부분의 미망이 관습적인 덩어리 식 생각 때문입니다. 덩어리를 해체하면 비로소 진실의 문 입구에 서는 것입니다.

 

관습적인 언어와 상징은 욕망의 체계입니다. 욕망의 체계는 권력입니다. 권력은 정상적 이의 제기로 자신의 견해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치열한 왜곡을 통해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도면밀하게 추상화해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곡과 추상화가 바로 ‘환상’입니다. ‘환상’은 피 흘리는 자해, 그러니까 신체 훼손과 기관 분리를 감행하는 면도칼입니다. 면도칼로 긋는 ‘과잉’이 아니면 실재의 현시, 신체적 충동,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느낌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관습적 서정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환상으로 착각하도록 중독되게 했으니 ‘과잉’ ‘환상’으로 해독하는 것입니다. 이독제독以毒制毒!

 

 

세월호참변으로 희생된 아이의 아버지가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과잉처럼 보입니다. 자세히 봐도 ‘과잉’입니다. 얼핏 보면 환상입니다. 자세히 봐도 ‘환상’입니다. 이 ‘과잉’ ‘환상’ 없으면 진실이 묻히고 말 것입니다. 이 ‘과잉’ ‘환상’이야말로 유일한 ‘엄정’ ‘실재’입니다. 이 땅의 관습적 언어와 상징이 얼마나 깊은 중독 상태에 있는지를 너무나도 잔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중독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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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자아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누군가 말한다(On parle)’의 형식을 취하는 익명의 중얼거림’(들뢰즈)·······화자와 청자가 일정한 형식을 전제하고 준수하는 고백과는 달리·······말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뜻에서 독백이라 부를 수 있을·······‘떠도는 말들은 기왕의 고백이 어떤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증상은 질문이다. 아름다운·······독백들은 종래의 서정적 고백의 형식이 어떤 미학적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216-217)

 

고백은 본디 (숨겼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까지 나아가면 고해告解와 동의어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서정시에 이르러서는 또 하나의 상상적 자아를 창조하면서 진실을 한 번 더 회피하는”(212) 전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모양입니다.

 

시인도 인간이고, 인간인 한, 아프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아픔에게 시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어찌 대하는가에 따라 시를 치유 또는 완화의 도상에 놓을 수도 있고, 방어 또는 악화의 도상에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유하려는 자는 감응(response)하고, 방어하려는 자는 반응(reaction)합니다. 감응은 아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이고, 반응은 쫓아내려는 자세입니다.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엄밀히는 접힌 부분을 활짝 펴서, 그러니까 예술적으로, 정확하게 드러내고, 쫓아내려는 자세는 진실을 일부는 과장하고 일부는 축소해서, 병적 자아 중심으로 접어서 드러냅니다. 펴진 증상은 제대로 질문이 되고, 접힌 증상은 그대로 훈계가 됩니다. 질문은 샘이 되고, 훈계는 늪이 됩니다.

 

고백은 그러면 어떻게 늪이 될까요. 이때의 고백은 설정입니다. 고백자의 매혹을 드러내 듣는 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입니다. 한 패가 되는 것과 함께 치유하는 것은 다릅니다. 패거리는 진실을 엄폐하고 치유연대는 진실을 엄호합니다. 마음치유 현장에서() 종종 패거리가 형성됩니다. 과정상 불가피한 경우가 있을 테지만 종당 패거리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직 진실이 주는 걸림 없는 연대, 자유의 네트워크가 남을 뿐입니다.

 

 

 눈물 흘리며 날린 설정고백이 수많은 사람을 사로잡아 허위와 조작의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목도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패거리가 사회와 역사를 부끄러움으로 몰아가고 있는 이때, 고백 앞에 질문으로, 증상으로 마주서는 독백이란 참으로 대수로운 사소함일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 화두가 하나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입니다.

 

독백에서 쟁백諍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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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아직 설정되지 않아서 주체가 법을 설정해야만 하는 경우가 도착증이다. 그들은 법을 자유롭게 위반하는 자가 아니라 법을 설정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다.(206쪽)

 

‘나는 나’라는 완강한 자기 동일성이 있는 곳에서 주체에 대한 물음은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치명적인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현실이 전반적으로 가상화(virtualization)되면서 실재(the Real)에 대한 열망은 강해졌고 그것은 도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사라져가는 ‘나’를 확인해야 했고 구별되지 않는 ‘나’를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나’를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210-211쪽)

 

 

도착倒錯이란 일반적으로 ‘뒤바뀌어 거꾸로 된 상태’를 뜻합니다. 좀 더 세밀히 사전적 의미를 구성하면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異常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의학적으로는 성性도착을 가리킵니다. 핵심은 ‘정상을 벗어남’ 그것입니다.

 

무엇이 정상일까요? 우리가 대개는 아무 성찰 없이 정상이다, 이상이다, 하지만 사실 그 개념의 대부분은 근거가 없습니다. 심지어 과학이나 의학의 옷을 입고 진리처럼 존중 받고 있는 정상·이상 개념조차도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혈압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수축기 혈압 120mmHg 미만이고 확장기 혈압 80mmHg 미만-정상혈압

수축기 혈압 120~139mmHg이거나 확장기 혈압 80~89mmHg-고혈압 전 단계

수축기 혈압 140~159mmHg이거나 확장기 혈압 90~99mmHg-1기 고혈압

수축기 혈압 160mmHg 이상이거나 확장기 혈압 100mmHg 이상-2기 고혈압

 

이 기준은 대체 누가 무엇에 근거하여 만들었을까요?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종족·연령·남녀·나이와 같은 개인차가 분명히 존재할 터인데 대체 누구를 기준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런 기계적 수치 기준을 근거로 정상·이상을 구별하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요? 이 기준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가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머지않아 수축기 혈압 110mmHg 미만이고 확장기 혈압 70mmHg 미만을 정상혈압이라 할 것입니다.

 

정상 여부는 질병 유무로 직결되고 그것은 다시 생사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런 사안에서부터 ‘이야기’ 수준의 거짓 기준이 군림하기 시작하여 정치경제적·사회역사적 거대 담론으로까지 ‘이야기’의 폐해는 확산됩니다. 한 공동체의 도덕성이 해이 정도와 그 ‘이야기’ 지배 정도는 정비례할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경우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 분명한 ‘이야기’를 헌법기관이 대놓고, 공적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유언비어는 헌법기관이 퍼뜨리는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허위사실 유포라며 잡아들이는 일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진실, 그것도 치명적인 진실이 실종된 자리에서 주물鑄物로 태어나는 ‘정상적인’ 나는 곡절의 여부와 상관없이 도착적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스스로 그 도착적 상태를 벗어나고자 애쓸 때, 이를 도리어 ‘도착적’이라 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 ‘도착적’인 애씀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도착倒錯을 통해서만 도착到着할 수 있는 도저到底함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시방 “도착증을 실연(實演)하면서 도착증과 실연(失戀)하는 것”(211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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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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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자연을 소비하는 것은 서정적 자아가 타자를 타인으로 소화하는 메커니즘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의 (시적) 권력이 완고하게 유지되는 한 타자의 타인화, 자연의 가상화는 연쇄적으로 발생할 것이다.·······자연을 통해 상처를 서정적으로 치유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위적이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의 덧남으로서 존재할 때, 즉 존재의 상처를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외상(外傷)적 기억으로 특수화하는 데 기여할 때 자연은 윤리적일 수 있다.·······자연을·······주체라는 미지의 장소를 환기하고 타자성의 심연을 가시화하는 어떤 영역, 그래서 자아의 자기 동일성과 타인과의 허위적인 소통을 추문으로 만드는 어떤 영역, 진정한 윤리가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상처의 영역으로 남겨두자·······말하자면, “어쩔 수가 없는” 영역으로 말이다.(198-201쪽. 괄호 처리-인용자)

 

여름휴가철이 절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정뜨게 돈푼깨나 있는 사람 중에는 고급 호텔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한 모양이지만, 열에 아홉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납니다. 아니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치유하러 간다고 까지 말합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을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그 생산이 대부분 도시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착각일는지도 모릅니다. 산이 강이 바다가 고된 노동의 현장인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궁벽한 향촌의 가난과 옹색함에 신물 난 사람한테는 도시의 편리함과 쾌적함이 도리어 휴식이고 치유일 것입니다. 산이 강이 바다가 그 자체로 하필 인간에게 휴식과 치유를 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산이다 강이다 바다다 하는 자연을 치유 근거로 삼는 저 통속한 서정은 확실히 자기 기만적이고 허위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정치경제적 사회역사적 소요騷擾에서 도망쳐 자연을 소요逍遙할 때 얻어지는 안온을 치유라고 한다면 이 가능성은 100%입니다. 여태껏 소비되어 온 자연은 이런 의미의 자연입니다.

 

이 자연은 극단화된 자연입니다. 자아가 단일화/동일화한 타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자연이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비화/신성화한 자연입니다. 이 극단은 얼핏 보면 마주보고 있는 대극對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연을 도구로 만들어 자아에게 ‘포갠’ 것이므로 같은 자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완전히 포개지지 않습니다. 실제 대극은 자연을 해체하여 인간과 소외/절연시키는 태도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를 완전히 ‘쪼갠’ 것입니다. 이 또한 허구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완전히 쪼개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자아와 타인의 맺힘에서 주체와 타자의 풀림으로 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조건 또는 장場으로 존재합니다. 조건 또는 장으로서 자연은 당사자도 아니고 기계적 수단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건 또는 장으로서 자연은 당사자 ‘사이’에 서 있습니다. 아니, ‘사이’입니다. ‘틈’입니다. 이 사이/틈이라는 시공에서 천변만화의 사건/운동이 일어납니다. 사건/운동이 없으면 삶은 없습니다. 삶이 있는 한 자연은 자아/주체, 타인/타자의 당사자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이 어쩔 수가 없는 영역인 자연에서 “주체라는 미지의 장소를 환기하고 타자성의 심연을 가시화하는·······그래서 자아의 자기 동일성과 타인과의 허위적인 소통을 추문으로 만드는·······진정한 윤리가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상처”의 사건/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서정입니다.

 

참 서정은 예쁘지 않습니다. 미움을 안고 있습니다. 참 서정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추함을 품고 있습니다. 참 서정은 역설입니다. 역설은 고정된 상태가 아닙니다. 경지가 아닙니다. 늘 움직입니다. 동사입니다. 동사로서 참 서정은 치유(나음) 또는 성장(자람)의 도정道程 자체입니다. 그 도정이 풍기는 냄새며 빛이며 소리며 맛이며 닿음이 참 서정입니다. 냄새며 빛이며 소리며 맛이며 닿음으로서 서정은 상처를 정확히,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참 서정은 진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555명(2014.5.17.안행부 중대본 허위 발표)의 잠수요원을 동원하고도 300명의 국민을 바다에 빠뜨려 죽인 진실 밝히기를 거부한 국가수장이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명량」을 보았다고 합니다. “충성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며 12척의 전함으로 300척 왜군 전함을 격파한 이순신의 언행을 그는 어찌 새겼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며 감격에 겨워했을 것입니다. 팽목 앞바다, 저 자연, 우리에게 과연 윤리적일까요. 이렇게 비극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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