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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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불가피하다.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기 때문이다.·······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13-14쪽)

 

흔히, 문학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할 때, 그 의미가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불량품입니다. 불량품이 불량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불량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같은 말입니다.

 

조금 더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량품으로서 현실은 거의 대부분 접혀 있습니다. 접혀 있으므로 그를 펴는 것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접힌, 그러니까 반쪽인 상태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재현하는 것입니다.

 

접혀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몰락의 에티카」에서는 말의 미끄러짐, 행동의 엇나감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서로 이탈하여 적중하지 못 함으로써 삶이 이치대로, 바라는 대로 활짝 펼쳐지지 못 하고 구겨지거나 비틀리거나 심지어 뒤엉켜 붙어버리는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간단히 접혔다, 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접히면 전체 진실이 부분으로 축소되고 은폐됩니다. 축소되고 은폐되는 진실은 다만 크기 차원이 아닙니다. 전체 진실의 근본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전체 진실의 근본 성격이란 다름 아닌 대칭성입니다. 대칭성을 드러내지 못 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독단, 그러니까 일극(집중)성이 바로 접힌 상태입니다.

 

문학은 대칭성이라는 진실인 현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일극(집중)성이라는 접힌 현실과 용기 있게 대면, 그러니까 대치(對峙)하는 것입니다. 접힌 현실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허구이며 과장됨입니다. 열린 현실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진실이며 정확함입니다. 문학은 뻥튀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다림질입니다. 문학의 표면이 팽창된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 현실의 표면이 쭈글쭈글한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의자醫者의 처지에서 말씀드리자면 이 접힘이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치유는 당연히 펴는 일입니다. 바로 지금-여기서 단도직입의 질문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면 문학과 치유는 같은 층위의 말이며 행동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가 답입니다. 교집합과 차집합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펴지 않으면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펴지 않은 채 하는 치유는 모두 가짜입니다. 예컨대 긍정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펴기만 하면 치유가 될까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입니다. 세계의 진실, 대칭성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기 때문에 펴만 놓아서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미치거나 죽습니다. 견딜 수 있도록 틈을 마련하고, 모순을 가로지르는 이치를 터득하는 동안 보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자醫者의 구실입니다.

 

시인과 소설가는 펴는 일에 능하나 틈 내고 보살피는 일에 어수룩합니다. 의자醫者는 틈 내고 보살피는 일에 능하나 펴는 일에 어수룩합니다. 문학이 불가피한 저 건너편에서 의학 또한 불가피합니다. 바로 여기가 문학과 의학, 그러니까 인문과 치료가 만나는 어름입니다. 오늘날 접힌 현실에서 문학은 문학대로 허접하고 의학은 의학대로 허접한 까닭은 서로 그 대칭성의 한 축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여, 소설가여, 의자醫者를 그대 삶에 초대하시라. 의자醫者여, 그대 삶에 시인과 소설가를 초대하시라. 연대하시라. 말은 착착 달라붙고, 행동은 딱딱 맞물리는 세계를 창조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도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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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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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5쪽)

 

 

“지면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참혹한 아름다움이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 이 문장은 서로 버성긴 말 세 쌍을 겹으로 안고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않음을 넘어 탐탁하지 않습니다. 탐탁하지 않음을 넘어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러움을 넘어 당최 말이 안 됩니다. 지면서 이기다니. 참혹하게 아름답다니. 텅 빈 채로 가득 차다니.

 

세계는 본디 서로 버성긴 진실이 접속사 없이 마주서는 장엄한 대칭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대칭성을 자발적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면서 세계는 영원한 창조 사건을 일으킵니다. 대칭이 깨뜨려지면서 생겨난 어떤 질서를 영속적으로 소유하려는 지향에너지를 과잉진화의 부산물로 지니게 된 인간이 이 세계의 자기창조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인간의 그 잔혹한 지향에너지는 일극집중구조를 지닌 권력·자본·종교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일극집중구조에서는 질문이 불가능합니다. 공포 어린 복종·노예적 추구·조건 없는 숭배로 평정된 부동불변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속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자기들만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 상위 0.1%도 실은 좀비일 따름입니다. 이 세계를 흔들어 바꿀 수 있는 질문은 한순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기꺼이 몰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에게서만 나옵니다. 선택하는 몰락은 불쏘시개처럼 제 몸을 살라서 큰 불을 지핍니다. 그 길 아니면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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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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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야망이 많지 않다. 나는 차라리 압도적인 특수성 혹은 매혹적인 주관성이고 싶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7~8쪽)

 

위 글에서 비평이란 말 대신 시 또는 소설을 넣어 읽는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비평가가 비평을 압도적인 특수성으로, 매혹적인 주관성으로 쓰다니. 아름다움에 대한 절박함으로 아름다운 비평을 쓰다니. 형용모순처럼 들립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고백(!)대로 그의 비평은 절박함으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쓴 아름다운 글이라는 사실입니다. 도처에 시인과 소설가의 체취가 낭자합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비평이 과연 비평으로서는 얼마나 비평다운 것일까요? 평범한 독자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제 깜냥으로는 그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가만가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최 그 자신이 특수성과 주관성의 땅에 선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이상 보편성과 객관성의 견지에서 판단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지 않은가. 이미 알고 자신의 한계, 그러니까 부조리함과 이기적임과 무책임함을 품어 안고 그에 대한 인간적 감응response으로 쓰는 비평에다 대고 완벽성을 전제한 보편성과 객관성의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 허탕 치기 아니냐는 것입니다. 비평가가 아름다운 비평을 쓰는 것이 형용모순이면 불완전한 자가 완전을 전제한 보편과 객관을 말하는 것도 형용모순입니다. 비평 또한 사람의 일입니다. 이 단순한 진실이 답이 줍니다.

 

 

마음치유 또한 사람의 일입니다. 저 또한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므로 상처의 불균형 덕분에 살아갑니다. 저 또한 압도적인 특수성으로 매혹적인 주관성으로 환우 앞에 서고 싶습니다. 아픔에 대한 절박함으로 아프게 1인칭 어법을 주고받으며 환우와 저는 느리디느리게 역설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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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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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이라는 이름은 김선우라는 이름만 제게 넘겨주고 홀연히 사라진 쪽지였습니다. 제법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홀연히 그 이름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누군가 <몰락의 에티카>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첫 문장에 대한 선명한 기억.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5쪽)

 

평론가의 평론집 첫 문장이 '나'로 시작한다! 저는 다음 문장으로 눈을 옮기지 못 하고 한 동안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뭐랄까, 類 가 다른 글, 類가 다른 사람의 냄새를 맡았을 때 느껴지는 어떤 아뜩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는 제 나름의 곡절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치유를 의료실천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변방의 한의사입니다. 제가 한의사로서 마음치유의 험한(!) 길을 걷도록 이끈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서구의학을 배운 양의사들이 마음'치료'를 하면서 1인칭 어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것입니다. 미상불 자신의 의학이 엄밀과학이라는 자부심에 터한 일종의 의학철학이라거나 의료윤리로 믿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여 그 자부심 어린 실천을 '치료'라고 하며 자신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호히 이에 반대합니다. 

 

의사가 1인칭 어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제3자적 객관성이 깨지고 이성과 합리에 터한 의학적 지평이 흔들리기 때문에 금한다고 하는 논리는 저들의 유구한 일극적 이데올로기아의 산물입니다. 의사는 주체이며 환자는 대상입니다. 환자는 인간 아닌 병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환자는 의사의 욕망 서사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현대 서구의학이 아무리 빼어난 미사여구를 들이대도 결국 그것은 수탈체계입니다.  

 

 

저는 '환우'와 상담할 때 1인칭 어법을 씁니다. 이성과 합리가 무너지는 것을 용인합니다. 의사 일극구조가 깨져나가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병보다 큰 전체로서 환우를 인정합니다. 의사지만 저 역시 결핍을 지닌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껴안습니다. 저와 환우 사이에서 양극적 베리타스를 구축하려 애씁니다. 제가 신형철의 첫 문장에서 맡은 냄새의 본령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7백 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이끄는 동안 그의 마음결을 관류하는 지향은 659쪽에 이르러 이렇게 나타납니다.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신형철의 저 첫 문장이 쓰인 뒤 이 땅의 모든 평론은 딱 두 종류로 나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신형철의 평론, 그리고 그 밖의 평론. 이 예감이 호들갑에 터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제 삶과의 어떤 포개짐 때문이니 오롯이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 첫 문장 뒤 모든 문장을 두 시각으로 읽었습니다. 일반 독자의 눈, 그리고 마음치유 하는 사람의 눈. 후자가 느낀 감동은 정녕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느리게 그 이야기를 계속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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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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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자본주의>

 

이문재

 

손과 세계 사이에 무언가 있다.

그 무언가가 손과 세계를 배반한다.

손과 세계를 모른 체하게 한다.

 

입과 자연 사이에 또 무엇이 있다.

저, 이, 무엇이 입과 지구를

서로 무관하게 만든다.

 

결국은 눈이다.

일상적으로 일상을 일상화하는 눈

일상적인 눈을 다시 일상화하는 눈

저 눈은, 이 눈을

이 시각은, 저 시선을 노예화한다.

 

저, 이,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 눈을 감는 것이다.

두 눈을 꾹 감고 인위적으로

코와 귀, 손과 입, 피부와 감각을

그리하여 저 옛날을, 이 온몸을

애타게 불러오는 것이다.

 

 

시인은 시인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이 시각독재라는 것을 간파했으니 말입니다. 시각은 남성가부장 문명의 지배력이 전달되는 단일 창구입니다. 다른 네 감각, 심지어 제6감까지 시각으로 제압함으로써 일극집중구조를 만들어 사실상 유체이탈 상태의 인간을 조종하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오직 시각, 특히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는 중심시각을 유일 선으로 여깁니다. 선택-집중-대박으로 삶의 동선을 꾸립니다. 탈락된 사람은 버려집니다. 버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리데기들이 눈을 버리고 더듬더듬 낮은 곳으로 모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후각부터 시작하여 감각을 복원합니다. 몸을 되찾습니다. 마침내 다시 눈을 떠 비-중심시각을 되찾습니다. 자본주의 시각독재를 꿰뚫고 일구어낸 새 문명의 동이 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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