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형철이라는 이름은 김선우라는 이름만 제게 넘겨주고 홀연히 사라진 쪽지였습니다. 제법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홀연히 그 이름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누군가 <몰락의 에티카>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첫 문장에 대한 선명한 기억.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5쪽)

 

평론가의 평론집 첫 문장이 '나'로 시작한다! 저는 다음 문장으로 눈을 옮기지 못 하고 한 동안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뭐랄까, 類 가 다른 글, 類가 다른 사람의 냄새를 맡았을 때 느껴지는 어떤 아뜩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는 제 나름의 곡절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치유를 의료실천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변방의 한의사입니다. 제가 한의사로서 마음치유의 험한(!) 길을 걷도록 이끈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서구의학을 배운 양의사들이 마음'치료'를 하면서 1인칭 어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것입니다. 미상불 자신의 의학이 엄밀과학이라는 자부심에 터한 일종의 의학철학이라거나 의료윤리로 믿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여 그 자부심 어린 실천을 '치료'라고 하며 자신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호히 이에 반대합니다. 

 

의사가 1인칭 어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제3자적 객관성이 깨지고 이성과 합리에 터한 의학적 지평이 흔들리기 때문에 금한다고 하는 논리는 저들의 유구한 일극적 이데올로기아의 산물입니다. 의사는 주체이며 환자는 대상입니다. 환자는 인간 아닌 병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환자는 의사의 욕망 서사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현대 서구의학이 아무리 빼어난 미사여구를 들이대도 결국 그것은 수탈체계입니다.  

 

 

저는 '환우'와 상담할 때 1인칭 어법을 씁니다. 이성과 합리가 무너지는 것을 용인합니다. 의사 일극구조가 깨져나가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병보다 큰 전체로서 환우를 인정합니다. 의사지만 저 역시 결핍을 지닌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껴안습니다. 저와 환우 사이에서 양극적 베리타스를 구축하려 애씁니다. 제가 신형철의 첫 문장에서 맡은 냄새의 본령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7백 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이끄는 동안 그의 마음결을 관류하는 지향은 659쪽에 이르러 이렇게 나타납니다.

 

"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신형철의 저 첫 문장이 쓰인 뒤 이 땅의 모든 평론은 딱 두 종류로 나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신형철의 평론, 그리고 그 밖의 평론. 이 예감이 호들갑에 터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제 삶과의 어떤 포개짐 때문이니 오롯이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 첫 문장 뒤 모든 문장을 두 시각으로 읽었습니다. 일반 독자의 눈, 그리고 마음치유 하는 사람의 눈. 후자가 느낀 감동은 정녕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느리게 그 이야기를 계속해볼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는 자본주의>

 

이문재

 

손과 세계 사이에 무언가 있다.

그 무언가가 손과 세계를 배반한다.

손과 세계를 모른 체하게 한다.

 

입과 자연 사이에 또 무엇이 있다.

저, 이, 무엇이 입과 지구를

서로 무관하게 만든다.

 

결국은 눈이다.

일상적으로 일상을 일상화하는 눈

일상적인 눈을 다시 일상화하는 눈

저 눈은, 이 눈을

이 시각은, 저 시선을 노예화한다.

 

저, 이,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 눈을 감는 것이다.

두 눈을 꾹 감고 인위적으로

코와 귀, 손과 입, 피부와 감각을

그리하여 저 옛날을, 이 온몸을

애타게 불러오는 것이다.

 

 

시인은 시인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이 시각독재라는 것을 간파했으니 말입니다. 시각은 남성가부장 문명의 지배력이 전달되는 단일 창구입니다. 다른 네 감각, 심지어 제6감까지 시각으로 제압함으로써 일극집중구조를 만들어 사실상 유체이탈 상태의 인간을 조종하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오직 시각, 특히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는 중심시각을 유일 선으로 여깁니다. 선택-집중-대박으로 삶의 동선을 꾸립니다. 탈락된 사람은 버려집니다. 버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리데기들이 눈을 버리고 더듬더듬 낮은 곳으로 모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후각부터 시작하여 감각을 복원합니다. 몸을 되찾습니다. 마침내 다시 눈을 떠 비-중심시각을 되찾습니다. 자본주의 시각독재를 꿰뚫고 일구어낸 새 문명의 동이 틉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똥별>

 

이문재

 

그대를 놓친 저녁이

저녁 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대를 빼앗긴 시간이

시간 위로 엎어지고 있었다.

 

그대를 잃어버린 노을이

노을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를 놓친 내가

나를 놓고 있었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부욱-

자기 가슴팍을 긋듯이

 

서쪽 하늘

가늘고 긴 푸른 별똥별 하나.

 

 

 

모든 상실은 시간의 발을 걸어 넘어뜨립니다. 넘어진 시간은 그대로 멈춰 쟁여집니다. 멈춰 쟁여진 시간은 기억의 성채가 됩니다. 기억의 성채는 상실을 가두고 가시덤불에 휘감깁니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들어오는 왕자는 내 삶에 없습니다. 내 삶에는 오직 놓은 나를 놓는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엊저녁 7시 20분 쯤. 한의원 문을 닫고 이문재의 「지금 여기가 맨 앞 」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자인 드라마작가 백운철이 <정도전> 후속 작품 <징비록>을 쓰게 됐다며 “영감을 주소서.” 트윗을 날렸기에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누군가 쿵쿵쿵 한의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아 얼른 문을 열었습니다. 가슴 두근거림을 호소하며 두어 차례 침 맞았던 50대 초반 여인이 어둡고 다급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안으로 맞아들인 뒤 침 치료를 위해 잠시 누워 기다리는 동안 고요히 그 옆에 앉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 여인이 “선생님, 저 말해야겠어요.” 하더니 문맥도 없이 대중도 없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폭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들을수록 답답하고 대책 없는 사연들이 도무지 이로가 잡히지 않은 채 제각각 '미친년 널뛰듯' 펄떡거립니다. 어느 순간 여인은 꺽꺽 울음을 토해냅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쥡니다. 가슴을 두드리다 못해 쥐어뜯습니다. 사방팔방 팔을 휘두릅니다. 발버둥을 칩니다. 격심한 몸부림이 쓰디쓴 체취를 낭자하게 흩뿌립니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의 아픈 말을 들었습니다. 눈물을 보았습니다.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말을 하는 동안, 이 여인이 우는 동안, 저는 차마 그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손을 잡으면 “그만 하라.”는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못 박힌 듯 꼼짝 않고 그 광경에 주의·집중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는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저는 칼 날 위에 선 만신이었습니다.

 

드디어 긴 한숨과 함께 날뛰던 언어와 몸짓과 울음이 한 목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여인은 한참을 죽은 듯 숨소리조차 안 내고 있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무어라 달리 할 말을 찾지 못 했습니다. 이해도 공감도 접근도 해결도 절연된 무력한 타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제-여기가 상담자의 시공입니다. 저는 여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말을 듣고 황감해 하는 여인의 젖은 가슴에 딱 한 마디를 꽃처럼 놓아주었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 멀었다>

이문재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   *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기우제를 그렇게 곡진한 마음으로 지내서 비가 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비는 올 때 돼서 온 것이고 그저 그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 것뿐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가만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생각은 과연 전혀 다른 생각일까요?

이 두 생각은 딱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인간의 처지에서 품을 수 있는 생각과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는 사실.

우리가 세상의 이치와 인연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채 곡진히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삶이 장엄에 미치지 못 하여 비애에 젖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직 못 다한 숭고함이 남아 있으니, 자 이제부터 시작하자." 

 

 

저 또한 비애로 가득찬 삶의 길을 걸어, 아뿔싸, 오십대 끝자락에 섰습니다.

고백하건대, 늦어서 때 맞게 오늘 천명의 말 한 마디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뜻이 제게서 다 이루어질 그 때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