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김중

 

꼽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김중 시집 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중에서

 

*   

 

그 동안 수많은 부부상담을 하면서 서로를 향한 분노와 절규의 배후에 참으로 끈덕진 사랑이 있는 게 아닐까, 문득 문득 생각하곤 했습니다. 사랑이란 어쩌면 본질부터 그리 달콤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오해함으로써 많은 사랑을 내동댕이 치면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곰곰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내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대의 사랑은 어떠하신지요?

마음 만지는 의사라면서도 늘 마음 놓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삼가 씁니다.

 

*   *

 

위 글은 7년 전 어느 날 쓴 것입니다. 오늘 「몰락의 에티카」어법으로 사랑을 다시 더듬으면 대략 이렇지 싶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굳게 믿으며 해 온 사랑이란 '자아'가 스스로를 배려하고 양육하는 차원에서 '타인'을 동일화하는 행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자아' 스스로 몰락함으로써 세워진 '주체'가 '타인'을 '타자'로 전환해낼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통찰의 방향이 사뭇 다릅니다. 7년 전 제 글은 경험론이고 「몰락의 에티카」는 이치론입니다. 경험이란 많은 경우 이치를 거슬러 올라가는 법입니다. "살아지면서 사라지면서"(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2>에서 변용) 아, 그랬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모르는 것 또한 운명일 테지만요.^^   

 

개인의 일이든 사회의 일이든 진실에 육박하려는 분투 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달콤하고 예쁜 사랑은 없습니다. 공포와 탐욕, 그리고 무지가 모든 것 앞에서 길을 어긋내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가 그 어긋냄을 증폭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는 한, 분투는 영원한 요청일 것입니다. 보선이 끝나고 세상은 또 다시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영령을 욕되게 하는 일은 부동의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의롭되 약한 사람들에게는 일렁임 자체도 가혹합니다. 참혹하게 더운 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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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1 16: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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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2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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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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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것을 사랑해버리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이 사실의 준엄함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타인의 타자성을 승인하는 태도는 ‘나’ 자신의 폭력적 이면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바라보는 타인이 사라지면서 타자가 드러나고, 타자가 드러나면서 내가 바라보는 ‘나’가 해체된다.·······자아의 전횡이 금지된 곳에서 타인의 타자성이 분출하며 그 타자성이 내 안의 타자성을 또한 호출한다.·······‘나’와 타자의 잔혹하고 끔찍한 욕망의 핵심부에 있는 어떤 미지(未知)를·······질문하는·······이것은 서정적이기를 사양하는 세대의 사랑법이다.(194-197쪽)

 

 

주체로 ‘한 꺼풀 벗겨지기’(괴테) 이전의 자아에게, 타자로 ‘한 꺼풀 벗겨지기’ 이전의 타인은 모두 자아의 연장에 있는 환유 대상일 뿐입니다. ‘서로주체’(김상봉)가 아닙니다. 그 타인한테서 자아의 모든 비밀과 치부는 보호됩니다. 타인의 타자성, 그러니까 ‘서로주체성’을 승인함으로써 자아를 해체하고 나면 온갖 무서운 것들과 우스운 것들이 생으로 드러나 자아를 둘러쌌던 신비적·권위적 서정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까발려진 뒤의, 뒤에, 주체끼리 만나서 나누는 사랑은 무엇보다 ‘사랑해버리는 것’ 따위의 짓은 아닐 터입니다. 잔혹으로 삶아지고 골계로 볶아지면서 생겨나는, 설렘과 두려움이 엇갈리며 내다보이는, 그 또한 ‘미지(未知)’의 무엇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장차 올 사랑이 무엇이든 간에 ‘잔혹하고 끔찍한 욕망의 핵심부’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서정에 터한 사랑은, 결코 사랑의 진경이라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달콤하고 황홀하며 환희에 찬 순간으로만 점철된 사랑은 설정 아니면 중독, 적어도 바람처럼 지나가고 말, 또는 지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그 무엇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랑이 아주 끝났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서로 부정되고 뒤엉키며, 심지어 뒤바뀌는 참혹한 폭력을 겪어낸 뒤 비로소 움트는 사랑, 애쟁愛諍이 옵니다. 피투성이 모습을 서로 물끄러미 쳐다볼 때 스멀스멀 기어드는 애롱愛弄이 옵니다. 예쁘지 않아 도저한 사랑입니다.

 

 

우리사회는 시방 이 도저한 사랑을 아프게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사랑을 안다고도, 한다고도 못 하는 수준입니다. 의료보호 대상자가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겠노라, 나서는 이 우세현상이 결정적 증거입니다. 아직, 세월호참변을 교통사고라고 해야 나라 사랑인 세상입니다. 여전히, 세월호참변을 국민트라우마라고 말하는 것이 종북의 선동쯤인 세상입니다. 주류는, 다수는 냉연합니다. 일상으로 복귀한 게 아니라 그들에게 일상이 아니었던 나날은 결코 없었습니다. 민중은 그들의 동일화·단일화 대상이었을 뿐 단 한 번도 타자성이 승인된 적은 없습니다. 민중은 그들을 언제나 용서하였습니다. 심지어 잊어주었습니다. 이 일방적 오지랖이 오천 년을 망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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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31 1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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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31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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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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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스스로 멸망함으로써 자기의 영광을 보존한다. 이 멸망과 영광의 동시다발적 화음·······상상적 자아를 모두 소거하여 남는 텅 빈 장소, 그곳에서 비로소 무의식이 점멸한다.······그 점멸 속에 진실이 있다·······그 점멸만이 ‘주체’·······다.(181-191쪽)

 

자아는 말하자면 권력과 동의어입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의 모든 존재를 자신의 내면과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망의 작동인作動因입니다. 대칭성의 구성·운동인 세계의 진실을 파괴하고 일극집중의 구성·운동을 일으키는 힘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자아입니다. 사회정치적으로는 매판독재세력이 그것입니다. 문학적으로는 미학적 보수에 터한 이른바 서정시에 집착하는 부류가 그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분열스펙트럼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분열스펙트럼 개념은 서구 정신의학의 교과서적 명칭은 아닙니다. 자아의 경계선을 부동의 것으로 설정하고 그 경계 안의 자아 영역을 지키기 위해 경계 밖 존재에 대해 무관심·외면·무시·이용하거나 희생시키는 태도를 취하는 일련의 심리적·실천적 경향을 말합니다. 물론 이 경향이 극단적으로 강화된 최후 결말은 난공불락의 자아요새가 아닙니다. 처참한 자아붕괴입니다. 자아만 지키겠다고 날뛰면 그 자아조차 못 지키게 마련입니다. 경계 밖 존재를 망가뜨리면 자아도 망가지므로 결국 둘 다 망가지는 길이 자아집중의 대로大路입니다.

 

정녕 자아를 보존하고 싶다면 스스로 멸망해야 합니다. 소거해야 합니다. 중심이 텅 비면, 점멸-참으로 놀랍고 멋진 표현입니다!-하는 무의식이 나타납니다. 점멸하는 무의식은 자아의 영토 의식이 사라진 부정不定적uncertain·확률적 존재입니다. 아니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자아를 벗어던진 참된 주체입니다. 스스로 자아를 멸망·소거한 주체가 또 다른 주체와 만나 대등한 소통을 이룰 때 비로소 분열스펙트럼 질환은 치료됩니다.

 

우리사회의 상위 0.1%는 죄다 이 분열스펙트럼 질환을 앓고 있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 아래, 심지어 하위 0.1% 집단에게도 이 질환은 있습니다. 이들이 더 심각합니다. 남의 자아를 지키느라 부화뇌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예술, 특히 문학하는 사람도 분명히 끼어 있습니다. 자각하면서도 하는 것이면 예술인이 아니고 자각 못 하고 한다면 예술이 아닙니다. 이런 평가는 의학, 무엇보다 정신 치료하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정신 치료한다면서 자아에게 긍정주의 영토를 불하해주는 자들은 스스로가 분열스펙트럼 환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물귀신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 정치와 예술과 의학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목표도 하나입니다. 치료, 곧 양육입니다. 모든 존재는 생겨나서 자라고, 그 자람의 끝, 그 끝의 영광으로 죽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모든 과정이 바로 치료이자 양육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 세 힘이 합세하여 치료 아닌 살상을, 양육 아닌 학대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참변 생존자인 단원고 학생 ㄷ양 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특히 단원고 학생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이 반복됐다.”

 

아,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이렇게 죽여 놓고도 사고라 합니다, 이런 상처를 주고도 낄낄대고 사진 찍고 은폐하고 놀러갑니다. 이들을 살상해야 자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의 치밀한 음모는 이 시각에도 더 큰 살상을 준비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여기서, 문학은, 의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점멸하는 주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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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1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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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1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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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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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진리는 착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진리는 언제나 위협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185쪽)

 

진리처럼 존귀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요. 진리처럼 제멋대로고 그래서 허접한 것이 또 있을까요.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물론 요즘 세상은 두 번째 말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제멋대로고 그래서 허접해진 까닭은 그것이 진실 아닌 ‘이야기’에 실려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권력이 만들고 자본이 유포하며 종교가 후견합니다. ‘이야기’를 통해 권력은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자본은 탐욕을 부추기며, 종교는 무지를 부풀립니다. 공포·탐욕·무지가 증폭되면 진실이 참살당합니다. 진실이 참살당하면 진리는 ‘이야기’ 꾼들 입맛대로 뒤틀어집니다. 뒤틀어진 진리가 허접스럽지 않을 도리란 없습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느끼는 참담함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제멋대로고 그래서 허접한 진리에 코 박고, 본디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자아들의 준동이 사회 전체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저 자아들은 왜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위협적이기 때문입니다. ‘착하다’는 칭찬 들으며 '우아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애들 놀러가다 죽었다, 누가 죽으라고 했느냐, 교통사고일 뿐이다.···일부러 죽인 진실 알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가짜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기를 마다하는 저 잔혹한 행태들. 위협적이라는 이유로 진리를 버리고 비인간의 ‘이야기’를 지키는 시대에 화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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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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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울증이란 무엇일까요? 아까 「5시 57분」이 도착하는 바람에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에서 말이 끊겼습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우울증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그러니까 인간 존재의 심연에까지 가라앉는 고통의 침강 운동이자 그 상태입니다. 죽음이 삶에 스며들고 번져가는 것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아야 하는, 지각과 무력이 가장 날카롭게 양립하는, 잔혹의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은 유한한 생명으로서 인간에게 이치를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어긋남, 어긋남이 몰고 오는 상처, 상처가 키워내는 격정emotionalism입니다. 우울증은 자기 존재 자체와 그 가치·의미를 과도하게 ‘접는’, 그러니까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격정입니다. 격정 가운데서도 가장 격하고 어두운 것이 우울증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가장 격하고 어두운 것이 우울증입니다.

 

한 인간 공동체의 본질은 환희에 찬 밝은 중앙이 아닙니다. 고통에 찌든 어두운 변방, 곧 경계입니다. 예술, 특히 문학이 터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 그러니까 우울증의 땅입니다. 여기서 그 실상을, 그러니까 증상을 ‘정확히’, 그러니까 ‘참혹한 아름다움’으로 그려내야 합니다. 이것이 문학의 윤리학입니다.

 

이제 정말 중차대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문학이 윤리학적 소임을 다하면 우울증은 어찌 되는 것일까요? 얼른 생각하면 치료가 답일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원까지도 가능할 테지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문학의 윤리가 치료를 영토 삼는다는 것과 문학 텍스트를 치료의 방편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문학 자체의 윤리는 우울증의 진면모를 잔혹한 서정으로 낱낱이 결결이 드러내는 것을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 고통이 소통을, 소통이 진실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빠근하고 야물딱지게 말해야 합니다. 손쉽게 재빨리 치료로 치달아버려 소통과 진실을 엄폐하는 세상 풍조를 고발해야 합니다.

 

이 세상 풍조를 주도하는 초국적 제약회사는 우울증을 그저 기분/감정의 문제로 가볍게, 그러니까 저들의 말마따나 ‘마음의 감기’ 따위로 여겨 프로작만 먹으면 낫는다고 생각하게 유도합니다. 그렇게 약으로 틀어막아 떼돈도 벌고 조증사회도 유지해가는 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우울증의 본래 진실, 그러니까 고통으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숨겨 광기의 돈 잔치를 영속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는 한 우울증 치료라는 행위 자체가 거대한 음모입니다.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우울증의 진실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가치문제와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고통이 아니라면 세상에 남는 것은 광기뿐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가치문제에서 인간이 받는 고통의 실재the Real를 알 수 있습니다. 우울증 앓는 고통스러운 인간이 아니라면 인류에게 남는 것은 광인, 그러니까 비인간뿐입니다.

 

문학은 우울증을 가차 없이 드러냄으로써 우울증이 다만 고쳐야 할 질병이거나 없애야 할 고통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또렷이 해줍니다. 희망과 가치의 전언이며, 무엇보다 거룩함으로 향하는 자세인 우울증을 알게 합니다. 병이어도 품고, 고통이어도 달래며 우울증과 함께 가는 도정에서 경험하게 될 삶의 광활함spaciousness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막다른 곳에 이르렀습니다. 여태까지 해온 이야기의 대우對偶를 말하면 어떨까, 궁금해집니다. 우울증 이야기가 아니면 문학이 아니다, 쯤 될 텐데요. 과격해 보이시나요? 우울증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느리게 다부지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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