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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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없습니다.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문제작」중에서(강조는 시인-시인은 이민하(재인용자))

 

·······‘지시’는 대상을 전제하고 그것으로 환원되지만, ‘암시’는 무한대의 대상으로 열려 있다. 손가락이 지시하는 것을 찾지 말고 손가락 자체가 암시하는 바를 음미하라는 뜻으로 읽힌다.·······시인의 당부가 이어진다.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그걸 둘러싼 허공을 보세요.”)(372-373쪽)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가르침으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쳐다보느라 정작 가리키는 달은 잊고 있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책입니다. 대승경전 능엄경楞嚴經에 나옵니다. 아마 시인도 저자도 이 가르침에 서려 있는 남성가부장적 일극집중구조를 읽어내어 해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손가락 보지 말고 달 봐라, 도 역시 아니올시다, 란 것이지요. 진실은 손가락을 둘러싼 허공, 그 허공에 펼쳐진 무한한 스펙트럼의 어스름에 있지 휘영청 밝은 빛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여 ‘지시’를 물리치고 ‘암시’를 세운 것입니다.

 

삶의 진실은 빛에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면 삶의 진실이 어둠에는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둠 또한 삶의 소중한 일부, 곧 진실의 한 면입니다. 그 어둠을 직시하지 않으면 진실은 절반 이하로 한정됩니다. 절반 이하로 한정된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이 만나 무량무수 솟아오르는 어스름의 시뮬라크르, 그 점멸하는 사건 속에 진실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밝으면 어둠이 안 보인다.”(302쪽)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떠합니까? 밝은 달은 있고, 그것을 가리키는 스승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리석어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혹 그 달이 가짜는 아니고 스승도 사이비는 아닌 것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겁내는 어둠이 실제로는 가짜 달의 그림자는 아닙니까? 그 어둠 뒤에 숨은 자가 바로 빛의 스승은 아닙니까? 그래서 죽기 살기로 감추려는 것은 아닙니까? 정녕 진실을 알고자 하면 손가락 끝을 둘러싼 허공, 그러니까 빛과 어둠이 맞물리는 특이점을 보아야 합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없습니다.” 우리가 암시받은바 모든 것을 죄다 드러내어 “일치하지 않는 데서 사용”(위 시 8의 일부)함으로써 무한한 스펙트럼의 어스름을 만들어내는 진짜 ‘소통’을 하면 됩니다. 어둠에 쫄지 마세요. 빛에 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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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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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라는 말은 서글프다. 그 말에는 어딘가 ‘포기’의 냄새가 난다.·······누군가를 포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뿐이다. 결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370쪽)

 

흉고심하지결전간의대시계탕(胸苦心下支結癲癎宜大柴桂湯).

 

이렇게 써놓은 글을 제대로 읽고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500명,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의 0.001% 미만일 것입니다. 이는 한의학 고전 「상한론傷寒論」에 의거한 진단과 처방을 현대적으로 응용한 것입니다. 현직 한의사 가운데서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인 까닭은 大柴桂湯대시계탕이라는 처방 이름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문장 전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전간癲癎epilepsy, 그러니까 간질병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상관없이 이 문장을 읽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반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가지고 있어요 댁들처럼 (당신)이라는 가죽주머니를 나도 가지고 있지요

 

가령 위 시는 황병승의 <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앨리스 부인의 증세>의 처음 두 문장입니다. 시 제목, 어떠십니까? 저 두 문장 어떠십니까? 흉고심하지결전간의대시계탕(胸苦心下支結癲癎宜大柴桂湯)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한의학 문장은 일반인이 최선을 다해 읽지 않아도 되므로 책으로 나올 엄두도 못 내지만, 저 시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4쇄를 찍어낸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려 일반인이 최선을 다해 읽는 대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읽는 일반인 가운데는 저도 있습니다. 제가 혹 저 한의학 문장을 담은 책을 내면 황병승 시인이 최선을 다해 읽을까요?

 

이런 비대칭은 비단 저명한 시인 황병승과 무명의 醫者 강용원만의 차이는 아닐 것입니다. 문학과 한의학의 차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가 인간에게 지니는 의미에서 이런 경사가 비롯하는 것일 테지요. 비록 ‘증후’일뿐일지라도 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하고, 심지어 처방까지 붙어 있을지라도 한의학 문장은 극소수의 사람한테만 그 뜻을 드러내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시는 ‘증후’로서 시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어떤 힘이므로 우리는 안간힘을 써서 난해의 난해를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란 아무래도 그런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발표한 ‘난해시’ <세월호-유민이의 꿈> '포기'할 자격 얻으러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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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그녀는 또 어디론가 떠나려나보다. 사실 그녀는 본래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투명인간은 원본 없는 자유이고 중심 없는 생성이다.·······느낌의 세계에서 느낌의 위력으로 우리는 사랑스러워지고 드디어 모호해진다.(367-368쪽) 행위가 전부다. 코기토는 없다.(358쪽)

 

 

느낌의 공동체에서 행위자, 그러니까 코기토는 모호해지고 또 모호해지다가 마침내 투명한 행위로만 존재, 아니 관계합니다. 관계로서 행위는 무한의 특이점인 자유이고 남김없이 가장자리가 되는 생성입니다. 자유로운 생성, 생성되는 자유를 위해 우리는 점멸함으로 '타자'인 사람들 속으로, '타인'인 사람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여 '자아'는 사라집니다. 이윽고 '타인'이 사라집니다. '주체'와 '타자'의 행위인 느낌의 공동체가 점멸할 때 그것은, 그것만이 사랑입니다. 다만 사랑을 남겨두고 우리 모두 지금-여기 떠납시다, 헛것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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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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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고 충실하고 무구한 시, 그러니까 세계라는 사건의 공간을 위와 아래와 뒤의 도움 없이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시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낯선 것이다.(355쪽)·······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다.·······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이다.(367쪽)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말이야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지만 그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충실하게, 무구하게 느낄 수 없도록 이미 조작된 감각기를 지닌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있는 그대로’의 감각이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조작된 우리의 감각이 난해하게, 혼란스럽게 협소하고 진부한 것입니다.

 

협소함-숙명으로 지니는 공포·탐욕·무지(어리석음) 때문에 인간은 광활함spaciousness의 땅으로 나아가지 못 합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움켜쥐고 있는 알량한 안정·재물·이념 따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알량한 토대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비난합니다. 그럴수록 불투명하게, 허술하게, 영악하게 세계를 파악합니다. 그럴수록 세계는 접히고 접혀 ‘있는 그대로’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진부함-협소함을 유지·온존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경계의 공고화입니다. 이는 공시적synchronic 진부함입니다. 자기 경계를 허물지 않으니 자기 밖의 내용이 들어설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원칙의 영속화입니다. 이는 통시적diachronic 진부함입니다. 자기 원칙을 바꾸지 않으니 새로운 내용이 들어설 수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무리 기다려도 ‘있는 그대로’ 경이로움이 들이닥칠 가능성은 없습니다.

 

 

옆으로, 옆으로 광활하게 번져갈 때만이 경이로운 세계, 그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반갑고도 깔끔한 느낌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광화문과 청운동에 그런 세계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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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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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옆을 본다.(353쪽)

 

이렇게 바꿉니다.

 

“견성見性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권세와 부에 기대지 않고 전능한 신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 구원을 보는가.·······이웃에게서 구원을 본다.”

 

나의 구원이 너에게 있습니다. 아니 너 자체입니다.

 

윤동주의 <병원>을 읽습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가 본 “”은 다름 아닌 “그가 누웠던 자리”입니다. 아픈 네가 햇볕을 쪼이던 자리, 그 사소한 희망, 그 하찮은 온기의 자리가 아픈 내가 누워볼 자리입니다. 유민 아빠가 누웠던 바로 그 자리가 우리 모두 함께 누워볼 자리입니다.

 

가뭇없이 정의 사라진 이 땅에서라면 가없이 옆으로 번져가는 생명의 연대만이 깊음 너머이며, 두터움 너머이며, 높음 너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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