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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 산다는 것 ㅣ 낭만픽션 4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마쓰모토 세이초는 <점과 선>, <모래 그릇>, <검은 가죽 수첩> 등 수많은 인기 소설을 남긴 작가로 유명하지만, <일본의 검은 안개>, <쇼와사 발굴>을 비롯한 논픽션 작품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57년에 연재를 시작해 1958년에 출간한 소설집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 형태를 취한다. 이 책은 운케이, 제아미, 센 리큐, 셋슈 등 일본의 옛 예술가 10인의 작품과 알려진 이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생애를 재구성한, 일종의 팩션(faction)이다.
노부나가는 차를 이해했다. 분명히 차의 정수를 직감으로 파악했다.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큐도 노부나가에게 그토록 집착할 수 있었다. 형식은 필요 없었다. 노부나가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늘 충족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달랐다. 물론 그는 풍류에 이상할 만큼 열심이었다. 하지만 뭔가 정도를 벗어나 있었다. 미에 대한 직감이라는 것이 없었다. 예도에 대한 이해도 겉핥기였고 깊이가 없었다. (89쪽)
이 책에 나오는 10인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센 리큐다. '와비'라는 미의식에 입각해 다도의 양식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센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이기도 했다. 소박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센 리큐는 비슷한 미의식을 지닌 오다 노부나가와는 잘 맞았지만, 화려하고 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잘 맞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센 리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벌였고, 결국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신'인 센 리큐에게 자결을 명함으로써 이들의 싸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는 아들 대에서 끝이 났지만, 센 리큐의 미학은 대대로 계승되어 지금까지도 일본의 전통 미학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름은 질투와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가신을 살해한 폭군으로 기억되지만, 센 리큐의 이름은 자신의 미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진정한 예술가의 모범으로 기억된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이고 진정한 패자일까. 아무래도 나는 센 리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렇게 스승 리큐의 완성된 다도에 하나하나 도전해 가는 것이 그에게는 성을 하나하나 함락해 가는 듯한 환희였다. 공략할 때까지는 매우 힘겨웠다. 하지만 성문을 열 때의 만족은 환호작약할 정도였다. 빙벽 같은 날카로운 리큐의 예술 앞에서 오리베는 계속 다음 공격에 나서야 했다. (162쪽)
센 리큐의 뒤를 이어 일본 다도의 필두로 떠오른 후루타 오리베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후루타 오리베는 센 리큐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7인을 일컫는 '리큐칠철(利休七哲)'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실력이 우수했다. 센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자결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이 된 후루타 오리베는 센 리큐가 완성한 다도 양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양식을 선보여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유력한 다이묘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오사카 전투가 벌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쪽과 교류가 있던 후루타 오리베는 첩자라는 오해를 받아 자결을 명받게 된다. 자결 직전, 후루타 오리베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넘어서려고 했던 스승 센 리큐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과연 나는 리큐의 다도를 넘어섰는지 자문한다.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너무나도 사실 같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지중해의 어부들이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다 목숨을 잃듯이, 생전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평생을 바치고도 이르지(至) 못해 급기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 올해로 나온 지 60년이 된 소설집이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