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의 나라 1
이즈미 이치몬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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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이야기>, <아르테>의 뒤를 잇는 치유계 판타지 만화의 등장'이라는 문구를 보고 무조건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만화다. <신부 이야기>도 <아르테>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인데, 읽어보니 역시 좋았다.


만화의 배경이나 설정은 <아르테>보다 <신부 이야기>에 가깝다. 무대는 18세기 티베트. 주인공 '칸 시바'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 의사가 되기 위해 견습으로 일하는 중인 열세 살 소년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어깨너머로 환자를 대하는 자세나 병을 고치는 방법 등을 배워온 칸 시바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의사로서의 실력이 상당한 편이다. 환자의 얼굴만 보고도 병세를 맞히고 혼자 힘으로 약을 제조할 정도인데, 그런 칸 시바를 마을 사람들도 예비 의사로 인정하고 잘 따르고 있다.


어느 날 칸 시바는 이민족 옷을 입은 남자의 등에 어린 신부가 업혀가는 모습을 본다. 집에 도착한 칸 시바는 아까 본 이민족 남자와 어린 신부가 자신의 집에 와 있는 걸 보고 당황하지만, 먼 길을 가는 도중에 잠깐 쉬었다 가는 손님인 줄로만 알고 극진히 대접한다. 이튿날 칸 시바는 신부가 집에 남아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이민족 남자가 실수로 신부를 놓고 간 줄 아는 칸 시바에게 아버지는 괜찮다고 한다. 정말 괜찮느냐는 칸 시바의 물음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한다. "괜찮겠지. 칸 시바, 너와 결혼할 거니까." 알고 보니 신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칸 시바의 신부'였던 것이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옛날 티베트에서는 양가에서 약혼이 성립된 후 신부의 친족 사내가 신부를 신랑 집까지 업어서 데려다주는 혼인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칸 시바와 라티는 아직 결혼한 상태는 아니고 약혼만 한 상태인데, 아직 한참 어린 데다가 의술과 약초밖에 모르는 칸 시바가 앞으로 라티와 어떻게 친해지고 결혼 생활을 해나갈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가상의 만화를 통해 19세기 티베트의 문화와 풍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작가의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만화라서 낯선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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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 문학 세트 - 전5권 (2025년용) - 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 해법 문학 (2025년-2026년)
고창균 외 지음 / 천재교육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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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해법문법으로 모든 종류의 교과서 내용을 숙지하고 1등급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수험생들이 믿고 공부해도 좋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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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1
라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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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평균 별점 만점, 드라마화 확정에 빛나는 인기 웹툰 <내일>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27세 취업 준비생 '최준웅'은 집안이면 집안, 학벌이면 학벌, 스펙이면 스펙, 빠지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신입사원 공채에 인턴에 심지어 알바까지 지원하는 곳마다 매번 불합격 통보를 받아서 속이 타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준웅은 한강 다리 위를 걷다가 노숙자 아저씨와 시비가 붙는다. 밀치고 밀치다가 다리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아저씨를 구한다는 게 그만 준웅 자신이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한참 후 눈을 뜬 준웅은 생전 본 적 없는 두 남녀를 만난다. 자신들을 저승의 독점기업 '주마등'에서 일하는 '저승사자'라고 소개한 '구련'과 '임륭구'는 준웅에게 자신들의 일을 도와주면 예정보다 빠르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한다. 구련과 임륭구가 하는 일이란 쉽게 말해 자살을 택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는 일이다. 이승과 저승에도 정원이라는 게 있다. 최근 들어 자살로 저승에 오는 영혼이 너무 많아져서 저승의 정원이 초과되었으니, 더 이상의 정원 초과를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트리오(!)를 결성하게 된 구련과 임륭구, 준웅은 1권에서는 학교에서 왕따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할 뻔한 여학생을 구하고, 2권에서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준비 중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할 뻔한 남학생을 구한다. 연령도 성격도 취향도 서로 다른 구련과 임륭구, 준웅이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문제 상황을 무사히 처리하는 모습이 코믹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특히 준웅은 친구들은 전부 입시에 성공해 대학 생활을 만끽하는데 자기만 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한다고 좌절하는 남학생 '재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입시에 실패한 거라고 재수를 다그치다, 오래전 자신에게 '네가 준비를 열심히 안 해서 취업에 실패한 거'라고 자신을 야단쳤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준웅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가족들에게 원했던 건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포용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준웅과 재수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까. 이런 점 때문에 이 만화가 수많은 독자들(특히 학생들과 취업 준비생들)의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저승사자가 이승에서 죽은 자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 산 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일을 한다는 설정이 신선하다. 웹툰 <내일>은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절찬리에 연재 중이며 단행본도 계속 발행될 것으로 보인다. 

(웹툰 <내일> 보기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69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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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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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짝사랑의 대명사,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에드몽 로스탕의 소설 <시라노>의 주인공이자 17세기 프랑스에 실존했던 검술가다. 시라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빼어난 검술 실력과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솜씨를 모두 갖춘, 당대에 보기 드문 능력자였다. 그런 시라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록산느다. 시라노는 록산느를 사랑했지만 용기 있게 고백할 순 없었다. 기형적으로 큰 코 때문이었다. 록산느가 자신의 큰 코를 싫어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이라는 젊고 잘생긴 귀족의 이름으로 록산느에게 연애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사람이 시라노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록산느는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지고, 시라노는 그런 두 사람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우린 말이야, 그저 이름만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른 허구의 연인에게 못내 애태우고 있어. 자, 받게. 이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건 자네네." -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중에서


미아키 스가루의 장편소설 <너의 이야기>는 주인공 '야마가이 치히로'가 '근미래판 시라노'인 '나츠나기 도카'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다. 나노로봇을 이용해 인간의 기억을 개조할 수 있게 된 시대. 치히로는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공된 기억, 즉 '의억'으로 결락된 기억을 채우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다. 다시 말해 치히로의 부모는 애인을 사귈 바에는 애인을 사귀는 의억을 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바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 의억을 사는 분들이다. 치히로의 부모는 정작 실제 자식인 치히로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자라날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원하는 기억이 있으면 나중에 커서 네 돈으로 의억을 사서 채우라는 것이 부모의 가르침이다. 이윽고 어른이 된 치히로는 부모의 가르침대로 하루빨리 돈을 벌어 의억을 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얼마 후 치히로는 넉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생애 첫 의억을 산다. 치히로가 산 의억은, 듬성듬성한 기억의 결락 부분을 채우는 의억이 아니라, 듬성듬성한 채로 남아 있는 기억조차 깡그리 지워버리는 의억. 전문용어로 '레테'다.


얼마 후 치히로는 분명 듬성듬성한 상태였던 기억 사이사이에 이질적인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들이킨 나노로봇이 레테가 아니라 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하는 나노로봇, 즉 '그린그린'임을 확인한다. 얄궂게도 가공의 청춘 시절 속 여자친구 도카는 치히로의 이상형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찰랑찰랑한 긴 머리, 멀리서도 눈에 띄는 새하얀 피부, 오묘하면서도 달콤한 웃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치히로는 내가 산 의억은 이게 아니라고, 내가 원한 결과는 이런 게 아니라고 항의하지만 항의할 대상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머릿속에 한 번 자리 잡은 의억은 밀어낼수록 밀려들고, 점점 더 강렬해지고 분명해진다. 치히로가 다시 한 번 레테를 복용하기로 결심하자, 이번에는 도카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치히로 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기억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이 여자는 나를 속이려고 나타난 사기꾼일까. 아니면 도카라는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내가 잊어버린 걸까. 사기꾼에게 현혹되면 안 된다는 이성과 모든 걸 다 잊고 현혹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치히로는 마침내 가슴 아픈 '진실'을 알게 된다.


"치히로는 날 어두운 곳에서 데리고 나가줬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친구가 없던 내 곁에 항상 함께 있어줬고, 내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몇 번이나 구해줬어. 치히로가 없었으면 나, 오래전에 절망에 빠져 죽었을지도 몰라." 오버하지 마, 나는 웃었다. 진짜라니까, 그녀도 웃었다. "그러니까 있잖아, 언젠가 치히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내가 치히로의 히어로가 되어줄게." (201쪽)


치히로가 알게 되는 진실이란, 도카가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공된 기억을 만드는 '의억기공사'라는 것이다. 의억가공사는 쉽게 말해 '한 사람을 위한 소설가'다. 소설가가 수천수만 명의 독자를 상정하고 소설을 쓴다면, 의억가공사는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의억가공사는 의뢰인의 최면 상태에서 추출한 '이력서'를 살핀 다음 의뢰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공의 과거를 작성한다. 의뢰인이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 의억을, 연애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면 좋아하는 사람과 뜨겁게 사랑한 의억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도카도 치히로처럼 지독히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니, 도카가 치히로보다 더 힘들었다. 치히로가 교실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찾고 도서실에 처박혔다면, 도카는 도서실에서도 자기 자리를 못 찾고 양호실로 밀려났다. 어려서부터 앓은 천식은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로 인해 점점 심해졌고, 전교생 중에 1, 2등을 다툴 정도로 작은 체구와 병약한 몸은 도카를 학교 내 카스트 제도 최하위 계급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카의 눈에 의억기공사라는 직업이 들어왔다. 의억가공사는 대단한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도 필요한 재주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직장에 출퇴근하거나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약하고 사회 경험이 부족한 도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음 해 여름, 도카는 최연소 의억기공사로 나름 지명도 높은 클리닉에 취직했고, 학생인데도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다. 스스로 번 돈으로 방을 빌려 독립했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천식도 치료했다. 도카는 이제부터 진짜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카의 몸에서 '새로운 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카는 생존율이 낮지 않은 기존 알츠하이머병과 달리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달하는 신형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혼자인 몸.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잊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잊고 싶지 않은 장소가 하나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삶의 마지막 나날에도 혼자일 거라고, 마지막 눈 감을 때조차 철저히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니 태어난 게 한스러웠다.


도카는 직업적 재능을 발휘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완벽한 '그'를 직접 만들어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남자를 찾아서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구실을 만들어낸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맞춰 머리 스타일과 패션, 메이크업도 전부 개조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역할을 해줄 의뢰인이 나타난다. 그가 바로 도카의 운명의 상대, 치히로다. 도카는 치히로가 만족할 만한 '보이 미츠 걸' 이야기를 가공해 치히로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도카의 예상대로, 치히로는 도카가 만들어낸 의억 속 도카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면 눈앞에 나타난 도카와도 사랑에 빠질까. 그것은 도카에게도 모험이었다. 평생 한 번뿐인, 생애 최후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상관없으니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토닥임을 받고 싶었다. 동정받고 싶었다. 어린아이 대하듯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포옹받고 싶었다. 내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해줄 100퍼센트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비통해하며 그 죽음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마음에 각인됐으면 싶었다. (262쪽)


소설 <시라노>의 답답한 전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너의 이야기>의 시원시원한 전개가 마음에 들 것이다. '근미래판 시라노'인 도카는 록산느를 짝사랑하는 시라노인 동시에 록산느의 사랑을 쟁취하는 크리스티앙이다.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시라노와 달리, 도카는 자신의 외모를 상대의 취향에 맞게 바꾸는 노력을 불사하며 당당히 앞에 나선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 속마음을 깊이 감췄던 시라노와 달리, 도카는 자신이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이끈다. 너는 가짜라고, 너의 사랑은 환상이고 거짓이라고 따지고 화내고 거부하는 치히로에게, 도카는 "왜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거야?"라고 항변한다.


다행히 치히로는 <시라노>의 히로인 록산느와 다르게 너무 늦지 않게 도카의 진심을 받아준다. 방법이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사랑을 품은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것은 '일반적인' 연애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꿈이든 의억이든 환상이든 착각이든 상관없으니 언제까지나 이 달콤한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자유자재인 허구와 달리 현실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던 치히로는 도카와 보냈던 생애 최고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다. 생애 마지막 사랑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도카는 치히로만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신세가 야속하다. 점점 바스러지는 기억을 붙들며 헤어짐을 기다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랑은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이별은 하고 싶지 않아서. 


"전부, 진짜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이 이야기는 거짓이었기에 진짜보다 훨씬 다정한 거야." "...... 그렇구나." 그녀가 뭔가 거머쥐듯이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며 수긍했다. "거짓말이니까 다정한 거구나." (354쪽)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첫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감정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치히로가 기억을 헤집으며 도카의 정체를 알아나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소설 같았고, 마침내 정체를 밝힌 도카와 도카를 받아들인 치히로가 한 여름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달콤한 로맨스 소설 같았고,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 젊은 연인이 너무 빨리 찾아온 이별에 괴로워하는 대목은 슬픔이 넘쳐 고통스럽기까지 한 비애 소설 같았다.


인생은 사랑을 기다리고 사랑에 환호하고 사랑을 떠나보내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럴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도카가 안타깝고, 도카로부터 사랑할 용기를 전달받고 의억기공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치히로가 눈부셨다. 그 어떤 사랑도 처음에는 짝사랑이다. 짝을 발견한 순간 짝사랑이 시작된다면, 짝이 되는 순간 짝사랑은 사랑이 된다. 부디 어느 누구도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지만은 않기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기회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카처럼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치히로처럼 눈앞의 사랑을 꼭 붙들기를 바란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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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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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발끈할 일을 어릴 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몇백 명이 넘는 전교생이 일렬로 줄을 맞춰 서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던 조회 시간이라든가,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잘못한 일을 두고 반 전체가 똑같은 벌을 받아야 했던 단체 기합이라든가, 머리카락 길이가 귀밑 3센티미터를 넘었느니, 색깔 있는 양말을 신었느니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전교생 앞에서 벌을 받아야 했던 복장 검사 같은 일들. 몸이 좀 큰 후에는 수염이 성성한 남자 선생님들이 복장 검사를 한다며 여학생들의 블라우스나 치마 속을 들추는 일이라든가, 친하게 군답시고 여학생들의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팔뚝을 주무르거나 목덜미를 만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요즘 학생들이라면 부당하고 불쾌한 일을 당했다고 SNS에 알렸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SNS는커녕 스마트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당했다고 부모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에게 알린다 한들 내가 바라는 대로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네가 예민하게 구는 거라고, 네가 빌미를 제공한 거라고 더 혼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으레 그런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어린 나에게 으레 그런 게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의 주인공 '아일린'에게도 그런 어른이 필요했다. 1964년 미국 북동부 대서양 연안의 뉴잉글랜드 지역 어딘가에 스물네 살 여성 아일린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언니 조우니는 자기 삶을 살겠다고 집을 나간 지 오래다. 은퇴한 경찰인 아버지는 하루 종일 집에서 술을 퍼마시다가 아일린이 보이면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 일과다. 마을에는 아일린의 집보다 부유하고 가족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집도 많지만, 아일린의 집보다 가난하고 가족들끼리 원수처럼 지내는 집도 많다. 아일린이 그 사정을 잘 아는 건, 아일린 자신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소년 교도소 '무어헤드'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린은 자신보다 기껏해야 서너 살 어리거나 그보다 한참 어린 소년들이 아버지를 찔러 죽이거나 동생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명목으로 교도소에 끌려오는 모습을 매일같이 본다. 찰나의 충동으로 박살 나버린 소년들의 인생에 비하면 자신의 인생은 한참 낫다고 아일린은 짐짓 안도한다.


시내에서 본 기억이 있는 신입 경찰 -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장애가 있었던 게 생각난다 - 이 간이 테이블에서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기회를 잡아 그 청년에게 농담을 했다. 조우니와 내가 '감옥 미끼(성관계를 하면 본인 등의 여부와 관계없이 강간죄가 성립되는 미성년자를 이르는 속어)'라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몇 년 동안이나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며 지금도 원망스럽다. (98-99쪽)


아버지는 내 허벅지 위로 손을 뻗어 다리를 쓰다듬더니 무릎 사이에 아무렇게나 팔꿈치를 넣어 지탱하며 창문을 올려 닫았다. 나는 그냥 침착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 편안함이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발육이 막 시작되었을 때, 아버지는 밤에 어머니와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다 이따금 나를 불러 얼마나 자랐는지 본다며 꼬집고 재고 했다. (266-267쪽)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 비록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형기라도 있는 소년들의 처지가, 아버지의 집에 매여 형기도 없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보다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일린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계기는 대체로 아버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딸에게 다시 밖에 나가서 술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 자동차 창문을 닫는다는 핑계로 다 큰 딸자식의 허벅지를 만지는 아버지. 성인인 딸이 평소보다 좀 늦게 귀가했다는 이유로 목을 조르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아버지. 아일린이 집 밖에서 아버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만났다면 언니처럼 집을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아일린의 주변에는 아버지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교도소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멍청하고 게을렀고, 이웃들은 아일린의 처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체할 만큼 인정머리가 없었다. 잠시 동거했던 남자는 아일린이 '작은 젖통' 때문에 아버지를 실망시켜 내 기분이 나쁜 거라고 했다. "여자애들은 모두 아빠가 찌찌를 만져주길 바라지." (267쪽) 지금은 그 남자가 구제할 길 없는 '멍청한 새끼'란 걸 알지만, 그때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현실 감각과 판단력이 부족했다. 아버지 그리고 여러 남자들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너는 못났어, 너는 멍청해, 너는 평생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 같은 말들이 아일린의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린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는 못나지 않았다고, 멍청하지 않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틈날 때마다 상기한다. 그 누구도 아일린에게 학력을 물은 적 없지만, 아일린은 자신이 한때는 대학에 다녔고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할 수 없이 자퇴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공립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우편 구독하고, 자신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교도소 직원들과 웬만해선 말을 섞지 않는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애인이 없는 외로움은 교도소 직원 랜디와 연애하는 망상으로 해소하고, 친구가 없는 고독함은 혼자서 영화 보러 가는 걸로 채운다. 때로는 그걸로도 외로움과 고독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이대로 죽고 싶다,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너희와 달라, 나는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야 같은 생각이 아일린을 붙든다. 영영 타락하지 않도록. 영영 스러지지 않도록.


"고마워요, 아일린." 그녀가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있죠, 자길 보면 어떤 네덜란드 그림이 생각나요." 그러면서 내 눈을 응시했다. "참 이상한 얼굴이야. 흔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매혹적이고. 안에 아름다운 난기류가 숨겨져 있어. 정말 좋아요. 분명히 눈부신 꿈이 있겠죠. 분명히 다른 세상을 꿈꿀 거야." ... (중략) ... 나는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밤은 덜 여물었고,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219-220쪽)


마침내 아일린은 리베카를 만난다. 리베카가 교도소장의 뒤를 따라 처음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일린은 리베카에게 일말의 호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동안 살면서 만난 인간들이 죄다 실망스러웠던 까닭이다. 리베카 또한 며칠 전에 본 영화 속 여배우처럼 멍청하고 내면도 텅 빈, 아일린 자신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교류도 없을 인간이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리베카가 하버드 대학원을 나왔고, 앞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할 예정이며, 보면 볼수록 뛰어난 미모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갖추었다는 걸 알고 점점 태도를 바꾼다. 이윽고 리베카에게 푹 빠진 아일린은 리베카가 관심을 보이는 모든 것을 시기하고 리베카의 관심을 독점하려 애쓴다. 아일린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교도소에 들어온 레너드 포크라는 소년에게 리베카가 주의를 기울이자 자신도 레너드를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일린 자신도 레너드 포크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리베카의 관심을 받겠다고 이때부터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리고 멍청한 레너드 포크는 교도소에 갇혀 꼼짝없이 벌을 받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환상을 이때부터 품었는지 모른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여자애였다. 고분고분한 딸이었고, 성실한 직원이었으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웃이었다. 하지만 레너드 포크가 부모에게 당한 일을 알게 된 순간, 미시즈 포크가 아들이 당하는 일을 뻔히 알면서도 부모 자식 간이란 으레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며 변명하는 것을 본 순간, 아일린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장이라도 떠나기로 결심한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자신도 레너드와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미시즈 포크처럼 자기 편하게 살겠다고 아들이야 어떻게 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괴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자신이 으레 그런 것인 줄 알았던 일들이 실은 규칙이니 관습이니 전통이니 하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모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행히 아일린의 작은 핸드백 안에는 평생 모은 예금과 아버지가 넘겨준 총이 들어 있다.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아일린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영 그 끔찍한 마을에 눌러 살았을까. 아니면 또 늦게 왔다고 아버지가 아일린의 목을 졸라 죽였을까.


당신은 맘대로 생각해도 된다. 내가 악랄하고 간교하다고. 이기적이고 망상이 심한 데다 너무 꼬이고 편집광적이어서, 죽음과 파괴에서만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범죄자적 정신을 지녔다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만 쾌락을 느낀다고, 어떻게 말해도 좋다. ... (중략) ... 그래, 당연히 나는 도망치고 싶었고, 리베카가 나와 함께 가준다면 더욱 그러고 싶었다. (346-347쪽)


여자라는 걸 제외하면 아일린과 나 사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출생연도도 다르고, 가정 환경도 다르고, 직업도 관심 분야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린>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예전에 쓰다만 일기장을 오랜만에 꺼내 읽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렸던 말들. 내 몸에서 가슴이 튀어나오고 엉덩이의 곡선이 드러나자 나를 탐하고 욕망하던 눈길들. 나를 함부로 만지고 상처 입히고도 미안해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던 손길들. 그들은 나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그들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정도 없고 욕망도 없는 투명인간 행세를 했다. 때로는 미친 듯이 악을 쓰고 싶다가도 여기를 벗어나면 밖은 더 끔찍한 지옥이라는 생각을 하며 분노를 억눌렀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은 채로, 그저 시간이 흘러 자연히 죽게 되기만을 기다렸다.


<아일린>을 읽는 내내 아일린이 이대로 죽지 않기를, 이 지긋지긋한 동네로부터 멀리멀리 떠나서 지금까지의 삶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아일린>의 결말을 아는 지금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리나>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고 싶다. 고향을 떠난 아일린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을 리나라고 소개한다. 아일린은 리나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면서 하느님에게 이렇게 맹세한다. 이제 변하겠다고. 날마다 일기를 쓰고, 교회도 가고, 기도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남자들과 진지하게 만나겠다고 약속한다. 과연 그 맹세는 잘 지켜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착한 여자는 더 나빠질 뿐이다. 남들에게 나쁘거나, 아니면 그 자신에게 나쁘거나, 그 둘뿐이다. 나는 리나가 '착함'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더는 굴종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를 바란다. 누가 뭘 시켰는데 내키지 않으면 단호히 거절했기를 바란다. 여자가 살림도 제대로 안 하고 예쁘게 꾸미지도 않는다고 타박하면 뭐라도 보태준 것 있느냐고 따졌기를 바란다. 남자가 허벅지를 만지면 손목을 꺾어버리고 가슴을 더듬으면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기를 바란다.


나는 리나가 누가 으레 그런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훈계하면 으레 그런 일이란 없다고, 다들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기를 바란다. 끝까지 누구의 착한 딸도, 착한 아내도 되지 않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기를 바란다. 참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믿는 어린 '아일린'들에게 참지 않아도 괜찮다고, 너 자신을 죽일 만큼 착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기를 바란다. 그런 리나의 이야기가 나는 더 궁금하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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