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들
보후밀 흐라발 지음, 송순섭 외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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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체코. 십 대 소년 밀로시 흐르마는 작은 기차역에서 일하는 철도 공무원이다. 밖에선 전쟁이 한창이라는데 밀로시가 사는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에서 폭탄이 터지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는 현실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경험한 적 없는 사람에게는 끔찍한 상황이겠지만,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나면 그 틈을 타 욕을 하고, 비행기가 떨어지면 잔해를 주우러 갈 뿐이다. 밀로시 역시 삼 개 월 전 자해를 시도했지만, 그런 그를 걱정하는 이는 별로 없다. 다들 죽고 싶기 때문이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이야기꾼들>은 여섯 편의 소설을 엮은 단편집이다. 맨 처음에 실린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가 특히 강렬했다. 1945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체코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전쟁이 일상인 밀로시의 삶이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진 건, 한국도 정전 상태일 뿐이지 전쟁이 종료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밀로시가 사는 마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이 터지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을 터. 그렇다고 항상 전쟁에 대비하고 죽음을 걱정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더 물질적 향락이나 육체적 쾌락에 몰두하는 모습이 너무나 한국인들 같다고 느꼈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만 길이가 긴 편이고 나머지 다섯 편은 길이가 짧다. 다섯 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다이아몬드 눈>이다. 기차에 오르던 한 남자가 낯선 남자의 부탁을 받고 그 남자의 딸과 동행을 하게 된다. 벤둘카라는 이름의 소녀는 소란스러운 객실 안에서도 유난히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소녀의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나중에야 소녀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현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면 눈이 보여도 현실의 아름다움을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 걸까. 짧은데 자꾸만 곱씹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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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의 비극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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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다 먼저 지방 소멸 현상이 시작된 일본. 난하카마시의 작은 마을 '미노이시'는 고령이었던 주민들이 줄줄이 죽거나 요양병원으로 떠나면서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난하카마시에 새로 취임한 시장은 타지역 사람들을 미노이시에 살게 하는 'I턴(도시 사람이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이주하는 것)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이를 담당할 주무 부서로 '소생과'를 신설한다. 매사에 시니컬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꼼꼼하고 성실한 공무원 만간지 쿠니카즈는 과장인 니시노와 후배인 간잔 유카와 함께 어떻게든 소생과 일을 잘해 보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 때문에 한시도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I의 비극>은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장르 구분이 너무나 적확한 작품이다. 소설은 서장과 본문 6장, 종장, 총 8장에 걸쳐서 I턴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그린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서류 전형과 면접을 통해 선발된 12가구가 미노이시로 이주하는데, 이주 초기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주인공 만간지는 담당 공무원으로서 민원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토로하는 문제의 진상을 파헤치고 해결책을 찾는데 이 모습이 마치 추리 소설의 탐정 같다. 평범한 인물이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해결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의에 이보다 더 부합하는 작품이 있을까.


범죄에 이용된 트릭뿐 아니라 범죄의 동기와 그 영향을 중시한다는 점 역시 사회파 미스터리답다. 지방자치단체가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을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조차 그곳을 떠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연고도 없고 해당 지역이나 농촌 생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도시 사람들이 가서 살면 문제가 발생하는 건 당연지사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애초에 성공하기 힘든 정책에 예산과 인력을 쏟아붓는 당국의 어리석음과 그 정책을 실제로 수행하는 공무원들의 고충까지 보여줌으로써 보통의 추리 소설이 주는 재미 이상의 교훈을 준다. 이래서 요네자와 호노부를 계속 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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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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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의 얼어붙은 바다에서 한 남자가 나온다. '호크(hawk)'라고 불리는 이 사내는 몸집이 곰처럼 커다랗고 말수는 침묵만큼 적다. 뱃사람들로부터 호크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을 주워 듣던 소년이 그날 밤 호크에게 다가가 그 모든 이야기가 진짜냐고 묻는다. 그렇게 시작된 호크의 이야기... 스웨덴 출신인 그의 진짜 이름은 호칸 쇠데르스트룀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호칸은 형 리누스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하지만 배를 갈아타는 과정에서 형을 놓쳐버렸고, 겨우 잡아탄 미국행 배는 그를 뉴욕이 아닌 샌프란시스코로 데려간다.


일단 형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호칸은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향하는 대여정을 시작한다. 마음은 절박하지만 돈도 없고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지리도 모르는 그는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그렇게 걷다가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기도 하고, 오해를 사서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은인을 만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사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렵게 손에 넣은 것을 잃거나 빼앗기는 일을 반복하면서 그는 결코 뉴욕에 도착해 형을 만나는 기적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얼마 후 그와 언어도 통하고 그를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수 있는 재력과 수단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먼 곳에서>는 2023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트러스트>의 작가 에르난 디아즈의 데뷔작이다. <트러스트>도 좋았지만 <먼 곳에서>가 훨씬 더 좋았는데, 호칸이 느끼는 물리적 고립감이나 정신적 고독감이 점차 해소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점점 심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 소년 정도였던 호칸은 이후 점점 몸이 자라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누명까지 쓰면서 사람들을 피하고 스스로를 격리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이토록 어두운 호칸의 삶에도 잠깐이나마 빛을 드리우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빛의 파장이 유난히 길고 아름다워서 이 거칠고 고단한 이야기를 계속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다. 모든 살아 있는 것 사이에 연대가 있다는 걸 아는 것 말이야. 이것을 이해하면 애도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유지할 수 없다 한들, 잃어버리는 것도 없으니까. 상상이 되니? 그 안도감이, 그 자유가." (125쪽) 호칸에게 의술을 가르쳐준 의사의 말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 사이에는 연대가 있으며 연대에 속하지 않은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하다 못해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과 마시는 물조차 생명임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매순간 생명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생명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러니 철저히 고립되어 있고 고독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실제로 그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호칸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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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4
서이레 지음, 나몬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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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쫓겨났던 정년이 국극단에 돌아온다. 벌로 설거지를 도맡게 된 정년은 <자명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단원들을 부러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정년은 호동왕자도 고미걸도 아닌 군졸1 역할을 맡게 된다. 방자에 이어 생애 두 번째 배역을 받은 정년은 군졸을 연기하기 위해 군인을 만나기로 마음 먹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국군들을 위로하는 잔치에 간다. 드라마에선 정년이 남성 군인에게 사연을 듣는데 만화에선 정년이 여성 군인들에게 사연을 듣는다. 정년은 그들의 사연을 하나 하나 들으며 자신만의 군인 캐릭터를 만들어 간다.


한편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자명고> 오디션에서 아무런 배역도 받지 못한 도앵은 머릿속이 복잡하다. 양반 출신인 도앵의 아버지는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도앵이 어려서부터 영특해 교사가 될 줄 알았더니 어머니 따라 기생이 되었다며(배우를 기생으로 낮잡아 보는 시절이었다) 도앵을 타박한다. 그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극단에 들어온 도앵은 남성 배역에만 특화된 자신과 달리 남성과 여성 배역 모두를 잘해내는 옥경을 보면서 동경 혹은 질투의 감정을 느껴왔다. 이제는 자신도 옥경을 의식하는 것을 넘어 자기만의 연기를 찾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년이>의 구성상 특징 중 하나는 극중 인물들의 상황과 인물들이 연기해야 하는 '극중극' 인물들의 상황이 절묘하게 겹친다는 것이다. <춘향전>이 그랬고 <자명고>도 그러하며 나중에 나오는 <바보와 공주>, <쌍탑전설>도 그렇다. 만화에서 옥경과 도앵의 관계는 <왕자와 왕자>라는 극을 통해 표현되는데 드라마에는 안 나와서 아쉽다. 4권 후반부는 정년과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국극단 내부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본격적으로 비리를 캐기 시작한다. 이 부분도 드라마에 안 나와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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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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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봤을 때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주정을 부릴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람과는 웬만해선 상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녕 주정뱅이>라니. 주정뱅이 앞에 안녕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집. 거짓말 안 보태고 이제까지 네다섯 번은 족히 읽은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서 처음 읽는 기분이 드는데 읽어 보면 당연히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시원하게 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봄밤>은 무슨 내용이야? 음, 그러니까 알코올 중독인 여자와 류머티즘 환자인 남자가 마흔 넘어 사랑에 빠지는데...


최근에 다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는 맨 마지막에 실린 <층>이 유난히 좋았다.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해온 남자와 박사 수료생인 여자가 연애를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좋아했지만 각자 다른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오해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 오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에 빚어졌다는 사실을 (아마도) 영원히 모른 채 살 것이다. 독자라는 먼 입장에서 보면 지독한 농담 같은 상황인데, 영문을 알 길이 없는 두 사람에게는 곱씹기도 찝찝한 추억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비단 소설 속에만 있을까.


지독한 농담 같은 불행이라는 모티프는 <카메라>라는 단편에도 등장한다. 문정은 직장 동료 관희의 남동생 관주와 몰래 사귀다 헤어졌다. 이별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으므로 그의 현재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관주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애인이었던 문정이 관주의 불행을 의도했을 리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게 사실이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문주로서는 죄책감을 피할 길이 없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다면 나았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그의 사랑을 알아서 다행인 걸까. 완전한 불행도 다행도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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