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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별 -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526/pimg_7796361641916040.jpg)
초등학교 시절. 아무도 없는 학교에 혼자 남은 적이 있다. 도시락 가방을 자리에 두고 온 걸 집에 도착한 다음에야 알아챈 나는 엄마의 꾸지람을 뒤로하며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갔다.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 학교 운동장도 복도도 교실도 텅 빈 상태. 평소와 달리 사람 그림자 한 점 보이지 않는 학교가 그저 낯설고 무서웠던 나는, 교실 한구석에 가만히 놓여 있는 도시락 가방을 보자마자 낚아채듯 집어 들고 정신없이 달려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수위 아저씨나 당직 선생님 한두 분쯤은 학교에 계셨을 텐데, 그 시절의 나는 한낮의 소란을 집어삼킨 학교가 무슨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성이라도 되는 양, 행여 다리라도 삐끗하거나 고개라도 잘못 돌렸다가는 평생 그곳에서 존재를 잊힌 채 살게 될지도 모르는 양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인 강태식의 <리의 별>은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 '플랜 A'에 혼자 남은 지구인 남자 '리'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플랜 A는 한때 모든 지구인들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51세기 초, 인간들은 고물이 되다시피 한 지구를 버리고 플랜 A에서 살아가는 미래를 상상했다. 플랜 A는 인류가 발견한 행성 중 생명유지 장치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최초의 행성이었다. 지구인들이 모두 플랜 A로 이주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했고 현실적으로도 이루어질 법 했지만, 이제나저제나 가성비를 따지는 인간들은 플랜 A라는 신도시, 아니 신행성으로 이주하기보다 지구를 재건축 또는 리모델링 하는 게 더욱 저렴한 비용으로 만족스러운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선택지라고 여겼다. 결국 플랜 A는 관광지로 개발되어 반짝 인기를 끌다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무인 행성으로 변했다. 엄연히 말하면 '리'가 그곳에 남아 있었으니 '무인(無人)' 행성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리'는 점점 폐허로 변해가는 행성에서 녹슬어가는 놀이기구, 통제가 되지 않는 로봇들과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런 '리'의 삶이 대체 어떤 것인지 작가는 리의 입이 아닌 다른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들려준다. 한때는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이제는 아내도 죽고 찾는 사람 하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 기무라 다로. 열네 살 때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후로 폭식을 거듭해 비만이 되어버린 텔레마케터 도리스 브라운. 형기를 마치고 하나뿐인 아들 마리오를 만나러 플랜 A로 떠나는 호세 로드리게스. 플랜 A를 멸망시킨 바이러스를 조사하기 위해 플랜 A로 떠난 행성심사대. 그리고 얼마 전 이혼한 아내 프레데리카와 아들 율리안을 길에서 발견하고 술독에 빠진 양 웬리.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리'와 통화하고 '리'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더불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리'에게 전한다. 각자의 이야기가 '리'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엮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아무도 없는 행성에 혼자 남은 '리'가 느낀 외로움과 절망감이 어느 정도일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도리스 브라운처럼 하루에도 몇 명씩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통화하고, 양 웬리처럼 곁에 두고 싶고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보고도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일이 여러 번 있으니까. '리'처럼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은 경험을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다만 '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줄만 알지,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만약 기무라 다로가 쓸쓸하게 눈을 감기 전에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면, 호세 로드리게스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혹은 들어간 후에라도) 아들 마리오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넨 적이 있다면, 양 웬리가 프레데리카와 율리안을 보는 순간 그들을 붙잡고 지금이라도 돌아와달라고 애걸했다면 이들은 조금이라도 덜 외롭고 덜 괴롭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하나의 별인 걸 모르고, 이 별에서 저 별로 가기 위해선 전화를 걸든 우주선을 타든 뭐라도 시도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집어삼켜질지도 모른다는 환상(幻想)에 빠져 있지 않나 싶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나를 그리워하고 나를 찾도록 만들기 위해선 내가 먼저 말을 걸고 다정함이라는 선물을 내밀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지 않나 싶다. <리의 별>은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지고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보러 가고 싶게 만드는, 따뜻하고도 강력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