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 장소, 환대 ㅣ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612/pimg_7796361641928413.jpg)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학자 김현경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 따르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자격이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리/장소가 필요하고, 사람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즉 환대가 필요하다. 저자는 이러한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서 마땅히 제공되어야 할 자리/장소를 제공받지 못한 존재들을 하나씩 거명한다.
그중에는 여성도 있다. 가부장제가 여전히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 내에서 여성은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자리/장소를 가지지 못하며, 오로지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한다. 여성이 자기만의 자리/장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억압, 남편의 통제, 아들의 부양에서 벗어난 여성은 제아무리 자기 힘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노는 여자, 난잡한 여자, 불쌍한 여자 취급을 받는다.
"가부장 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78쪽)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에 굴복해 노예가 되거나,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난 아웃카스트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주인의 소유물(物)이 된다는 것이다. 노예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못한다. 호주제가 철폐된 지금도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는 자식이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는 자식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 또는 (<82년생 김지영>이 지적한 것처럼) 갓 태어난 아이의 성씨를 정할 때 어머니의 성씨를 택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버지의 성씨를 택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부부 사이에서, 가정 내에서, 사회 내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길들여진 노예가 되느니 남성에게 저항하고 자기만의 살 길을 찾는 아웃카스트가 되는 편을 택한다. 이런 여성들에게 남성(및 페미니스트가 아닌 일부 여성)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더럽다'는 수식어 또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지배 계급에게 있어 더럽다는 것은 깨끗하지 않다, 정결하지 않다, 신성하지 않다는 뜻이다. 지배 계급은 자신들을 더럽지 않은, 정결하고 신성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거나 벗어나려고 하는 이들을 더럽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비난을 명예 또는 훈장처럼 여긴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여전히 조건적이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시민이다. 흑인 변호사나 흑인 교수 심지어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전체 흑인의 지위를 판단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듯이, 몇몇 성공한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 - 환대 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 -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어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294쪽)
부모들은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대신에, 자녀의 몸에 그것을 투자하고 그 몸을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투자 대상, 즉 재산 자체가 된다. (중략) 상속이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양육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187쪽)
그렇다면 적(敵)을 환대하는 것은 가능할까. 저자에 따르면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된다. 어떤 사람은 환대 받고 어떤 사람은 환대 받지 못하는 기준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환대를 제공할 지위 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오용 또는 남용하고 있을 뿐이다. 가족 내에 권력의 차등이 존재하지 않고, 국가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라면, 가장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보다 우위에 있고 국가가 국민과 외국인을 차별하는(또는 국민이 외국인을 차별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환대하거나 또는 환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곧 권력이라는 사실은 일부 정치인 또는 연예인이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 동료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돈이나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웬만해선 가까이 다가가 끌어안지 않고, 몸을 씻겨주지도 않는다. 봉사를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봉사를 하지 않아도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지만, 봉사 받을 입장에 있는 사람이 봉사 받을 것을 거부할 경우 무례하거나 주제넘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페미니즘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해도 별다른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지만, 여성은 페미니즘을 연상시키는 사진을 찍거나 SNS 글을 리트윗하기만 해도 악플 세례를 받거나 직장에서 해고된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장소와 환대라면, 한국 사회는 장소도 환대도 제공하지 않은 채 여성이 사람 되길 바라는(혹은 바라지 않는) 무정하고 부당한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 버티고 있는 모든 약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