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상상력 - 어느 민주공화국의 역사
심용환 지음 / 사계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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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민들이 간절히 원했던 대통령 탄핵이 지난 금요일에 이뤄졌다. 그날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판결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보면서, 판결에 의해 대통령이 파면을 선고받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헌법이 왜 법 중의 법이고 법위의 법이라고 일컬어지는지 여실히 느꼈다. 입법부와 사법부, 언론과 기업도 꼼짝 못한 대통령이 헌법에 의해 파면된 것은 헌법의 제정권자가 국민이며, 헌법을 어기면 대통령도 단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상황인 데다가 전 대통령은 갖은 방법을 사용해서 수사를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개헌에 관한 논쟁도 치열하다. 헌법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현행 헌법의 무엇이 문제인지, 개헌이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 마침 시국에 발맞추어 헌법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듯 나왔고 그중에 몇 권을 읽어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지식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책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만난 책이 <헌법의 상상력>인데 이 책은 제법 괜찮다. 


저자 심용환은 역사교육 전공자이며 역사 대중서 <역사전쟁>, <단박에 한국사> 등을 쓴 작가다.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 CBS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tvN <어쩌다 어른>, JTBC <말하는 대로> 등에 출연해 올바른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 일도 해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제헌헌법부터 제1공화국 헌법, 제2공화국 헌법, 제3공화국 헌법, 유신헌법, 오늘날의 헌법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맞추어 헌법에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변화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꼼꼼히 분석한다. 


"세상의 모든 헌법은 역사입니다. 모든 제도가 형성된 배경에는 그 나라의 고유한 역사적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187쪽)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헌법 제1호(제헌헌법)가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일부 또는 전부 개정되었다. 한국 현대사가 요동칠 때마다 헌법 개정이 이뤄지고, 헌법 개정이 이뤄졌을 때가 곧 한국 현대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 중임 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만 적용되지 않도록 개헌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 헌법을 만든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개헌은 주로 정부 구조를 바꾸기 위해 이루어졌지만, 국민의 기본권, 사회권, 인권, 생존권 등의 조항도 권력자의 목적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그 때마다 사회 문화는 물론 국민들의 일상도 달라졌다.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헌법의 경제조항은 물론 사회복지나 근로의 권리 같은 구체적인 조항도 주권자 중심으로 서술되어야 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19쪽) 


저자는 만약 현행 헌법을 개정하게 된다면 국가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을 중심으로 헌법 조항을 서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행 헌법을 보면 대부분의 조항의 주어가 국가로 되어있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 현행 헌법 1조 2항의 정신과 배치된다. 


저자는 헌법을 한국의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헌법을 한국 현대사 안에서만 놓고 보면 자칫 보수와 진보, 정당과 정당 간의 갈등 소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을 미국 헌법, 독일 헌법, 프랑스 헌법, 일본 헌법 등과 함께 놓고 비교하면 대한민국 헌법의 장단점이 무엇이며,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고쳐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점이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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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출신입니다만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인호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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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사회를 좋아하고 수학과 과학을 싫어하는 전형적인 문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서 당연하게 문과를 택했고 자연스럽게 사회과학 계열에 진학했다. '문과는 취업이 안 된다', '이공계가 취업이 잘 된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고 실제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사회과학 계열에서 그나마 이과에 가까운 경제학을 복수전공했으나 큰 덕은 못 봤고, 덕질 하다 익힌 외국어와 좋아서 시작한 글쓰기와 전공인 사회과학으로 그럭저럭 먹고 사니 '문송할(문과라서 죄송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수학과 과학만 보면 얼어붙는 '이과 콤플렉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문과 출신입니다만>을 쓴 가와무라 겐키도 그렇다. 저자는 조치대학 문학부 신문학과를 졸업 후 도호 영화사에서 <전차남>, <고백>, <악인>, <모테키>, <늑대아이>, <기생수>, <괴물의 아이>, <바쿠만> 등의 영화를 제작했고 2012년에는 첫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발표해 서점 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둔 '성공한 문과 남자'다. 그런 저자에게도 이과만 보면 얼어붙는 '이과 콤플렉스'가 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 지금 세계를 바꾸고 있는 이들은 전부 이과 출신이라는 것도 저자에게는 강력한 스트레스 요인이다(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과 자신을 비교하는 호연지기!). 


"진실을 알고 싶었다.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만약 내가 그러기를 바란다면 '이과로부터 배우는' 일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일본을 대표하는 '성공한 이과 남자' 15인을 만났다. 15인의 면면이 화려하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해부학자, 곤충연구가인 요로 다케시, 카도카와 대표이사 가와카미 노부오, 도쿄예술대 교수 사토 마사히코, 닌텐도 전무이사 미야모토 시게루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온다. 이름은 낯설어도 그들이 만든 상품은 익숙할 것이다. 동키콩, 슈퍼 마리오, 피크민, 니코니코 동화, 당고 3형제, 걸그룹 퍼퓸, 유글레나 등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품도 적지 않다.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일 중 약 20퍼센트 정도는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해부학자 요로 다케시의 말이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여태까지 알고 있던 상식은 대체 뭘까'라고 생각했다. 그전까지 주변 어른들은 물론이고 라디오와 신문에서도 일본은 무적이라서 절대 질 리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믿을 수 있는 대상을 찾았고 마침내 그 대상을 찾았다. 그건 바로 벌레였다. 정치와 언론, 말과 글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 없고 글을 쓸 줄 모르는 벌레에게 애정을 느꼈다는 그의 말이 애달프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제작 방식'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 표현하면 저런 내용을 전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새로운 전달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한다." 도쿄예술대 대학원 영상예술과 교수 사토 마사히코의 말이다. 한때 수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그는 졸업 후 일본의 대표적인 광고 회사인 덴쓰에 입사해 광고 기획자가 되었다. 그는 광고도 수학처럼 제작 공식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인기 광고들을 바탕으로 공식을 만들어 '당고 3형제' 등 인기 광고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무엇을 보든 요소를 분석하고 공식을 추출하고 구조를 파악하는 자세가 이과 출신답다. 도쿄대 대학원 준교수이자 인공지능 연구 선구자인 마쓰오 유타카는 이렇게 말한다. 


"인공지능이 많이 활용될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운 직업에 특화될 수 있고, 그 덕에 다양성이 있는 수준 높은 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어와 프로그래밍은 이제 됐으니 인간다움을 길러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딥러닝이 개발되면 문과 이과 할 것 없이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대 인공지능'의 대결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다움'을 더 연구하라는 조언은 "이과와 문과는 똑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오르고 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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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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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서경식 선생이 쓴 <언어의 감옥에서>를 읽다가 가슴 아픈 구절을 발견했다. 선생은 젊은 시절 60세가 되어서도 살아 있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60세가 되어서도 재일조선인이니 디아스포라니 일본의 우경화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머지않아 내 발언 따위는 쓸모 없어질 거라고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었'고 '그렇게 되면 이런 글쓰기는 접고 단 한 편이라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장편소설을 쓰고 싶었다'. 선생의 생각은 틀렸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도 경제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울부짖으며 <자기만의 방>을 썼던 때나,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여성의 참정권 쟁취를 위해 돌 던지고 주먹으로 때리는 남자들 속으로 걸어들어간 때에 비하면 지금은 나아진 듯 보인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묻지 마 살인'의 대상이 되고, 온 오프라인에서 여성에 대한 온갖 비하와 조롱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리하여 서경식 선생처럼 60세가 되어서도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니즘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고, 선생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 - 선생처럼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 -를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착잡하다.


스웨덴의 저널리스트 출신인 카트리네 마르살이 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으며 처음에 든 생각은 '아니, 스웨덴에도 남녀 차별이 있어?' 였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양성평등 문제에 있어서 한국을 월등히 앞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선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스웨덴의 여성 저널리스트가 양성평등을 논하다니. 그것도 노동에 있어서. 스웨덴도 완전한 양성평등을 이루지 못했는데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대체 얼마나 먼 걸까 싶었다. 


저자는 애초에 현대 자본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주류 경제학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지적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남긴 유명한 말을 보자.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평생 독신이었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저녁을 차려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외식을 했다면 식당의 주인 또는 요리사, 종업원에게 음식을 요리하고 식탁 위에 차려주는 비용 등을 치렀을 터. 하지만 그는 가정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저녁 식사를 먹기만 하고 그 돈을 아꼈다(아낀 돈으로는 뭘 했을까?). 그렇다면 어머니가 생산한 '부가가치'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주류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의 온갖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여성의 노동은 무시하고 간과하고 배제하고 지워버리는 일 말이다.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변한 것이 있다면 여성들이 일터를 바꾼 것이다." "남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학에서도 그랬고 성 문제에서도 그랬다. 여성에게 이 자유는 금기 사항이었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남성이 노동한 결과는 측정할 수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여성이 노동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털어낸 먼지는 어느새 다시 쌓인다. 밥을 해먹여도 금방 배고파 한다." "여성의 보수가 낮은 것은 집안일을 더 많이 해서고,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보수가 낮기 때문이다." "남성이 육체적으로 해방되기 위해 여성은 점점 더 육체적 현실에 얽매여 갔다." 


여성만이 아니다. 위의 몇몇 문장에서 여성을 지우고 장애인, 외국인, 아동, 청소년, 노인, 비정규직 등을 넣어도 대체로 의미가 통한다. 이는 남성, 비장애인, 내국인, 정규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배제하고 그들이 한 노동 또한 평가절하하고 심지어는 노동의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 시대부터 경제적 인간에 관한 이론은 늘 그가 돌보고 그가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경제적 인간이 이성과 자유를 대변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 반대 역할을 담당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65쪽) 


한국이 오늘날의 성장과 번영을 맞이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덕분이다. 그중에는 나라 밖에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 어느 나라도 그들의 인권과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지 않는 디아스포라로 살아간 사람들의 희생도 있다.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가 유일하게 '경제적 인간'으로 인정한 남성들이 이 때까지 정치가로, 기업가로, 사회 명사로 활약하고 부를 쌓고 자아 실현을 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덤 스미스라는 이름은 알지만, 애덤 스미스에게 밥을 먹이고 그가 공부를 하도록 지원해준 어머니의 이름은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마거릿 더글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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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일 수 없는 역사 - 르몽드 역사 교과서 비평
고광식 외 옮김, 김육훈 해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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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뒤늦게'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 역사를 전혀 모르기 때문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 문과였고, 수능시험 볼 때 사회탐구 과목으로 국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택했고,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최고 등급인 고급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 시국을 보고 있자니 내가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배운 역사는 정부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였고, 내가 아는 역사는 승자 위주의 역사가 아닌가 싶다. 정부가 가리고 싶어 하는 역사, 승자들의 기록에서 제외된 역사는 잘 모른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온전한 역사 공부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요즘 내가 공부하는 역사가 한국사에 한정된 것이라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이자 국제관계 전문 시사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만든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세계사를 대상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고 양차 세계 대전과 동서 냉전이 일어난 1830년부터 현재까지가 대상이다. 




이 책은 183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국제관계상의 주요 이슈들을 시간 순서대로 소개함과 동시에 세계 각국의 역사 교과서의 발췌문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발췌문은 동일한 주제, 동일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동일한 입장, 동일한 목소리를 싣고 있지 않다. 각 나라, 각 정부의 입장에 맞는 목소리만이 실려 있다. 당연한 일이다. "전 세계 모든 주민이 한목소리로 읽을 수 있는 보편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인들에게는 근대화의 주역이고, 한국인들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들에게는 테러리스트로 기억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나는 나대로 옳고 너는 너대로 옳다'라는 역사적 상대주의가 답은 아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이면을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진실에 가까워지게끔 한다. 가령 19세기는 주류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자유주의의 산물이기만 할까? 19세기와 자유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갈등과 모순을 은폐할 뿐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온 정치적 계획과 시도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지속적인 자본 축적이 가져온 축복일까? 산업혁명의 '진정한' 동력은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 환경과 불합리한 임금이었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를 당시 대통령의 공으로만 돌리고, 전국 각자의 공장에서, 고속도로에서, 탄광에서 일한 국민들의 피와 땀을 무시하는 태도와 멀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정말로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됐던 것일까? 제1차 세계대전은 그전부터 확산되고 있던 제국주의적 경쟁관계가 폭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사라예보 사건 같은 극적인 사건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비약하는 폐해가 있다.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1920년대 프랑스 교과서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독일에, 독일 교과서를 보면 프랑스에 책임이 있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상대국에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가 제1차 세계대전을 허술하게 종결짓게 만들고 몇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진실이 하나일 수 없듯이 역사적 진실을 해석하고 서술하는 관점 또한 하나일 수 없다. 이 책이 작성된 목적 역시 세계 각국의 역사 교과서 서술을 살핌으로써 다양한 역사 인식을 알자는 것이지, 하나의 역사관만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가 시도하는 국정 역사 교과서는 시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국정 교과서는 국가의 역사 해석을 유일하게 옳은 것으로 간주하여 학생들에게 주입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교과서이다." 책에 따르면 현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뿐 아니라 한국사와 세계사가 통합된 중학교 역사 교과서도 국정화함으로써 세계사도 왜곡하려 했다. 누가, 왜, 무엇이 두려워서 역사를 바꾸려고 한 것일까? 끝까지 물어서 책임을 지게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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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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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아시지요, 한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상과 자극이 들어가 자리를 잡는지를 말입니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미술을 통해 20세기 미국인의 삶의 단면을 포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가는 것>으로 한국에서도 이름을 알린 독일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철학자인 빌헬름 슈미트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중에서도 1959년작 <철학으로의 소풍>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랑 이후의 순간, 성찰이 작동하는 순간, 타자와 고통스러운 거리를 둔 삶, 꺼져버린 욕망이라는 공허함 가운데에서의 사유, 그 원인에 대한 냉혹한 질문을 표현하는 듯하다." 요약하면 철학의 순간 그 자체다. 


에드워드 호퍼 <철학으로의 소풍> 이 책은 니체의 <삶의 기술 철학>을 따라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근거로 삼아 '철학으로의 소풍'을 시도한다. 시간, 습관, 쾌락, 고통, 죽음, 분노, 모순 등 일상에 자리하고 삶을 관통하는 주제들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삶은 모순적이다. 충만한 삶을 추구할수록 쾌락과 고통이 동반해서 커지고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고, 죽음이 없으면 삶이 무가치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삶에서 쾌락을 많이 누리고 싶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면 죽음을 인식해야 한다. 


쾌락을 누리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방법 중 하나가 습관이다. 습관에는 권력관계 또는 지배관계로부터 별다른 성찰 없이 수용하는 타율적 습관과 주체적인 의지로 습득하는 자율적 습관이 있다. 타율적 습관과 자율적 습관을 각각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느냐, 어떠한 자율적 습관을 채택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과 방향은 크게 달라진다. 주어진 삶에 의심이 생길 때에는 자기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도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다.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글쓰기는 그 자체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실험이며 변화의 계기다. 글쓰기는 또한 삶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건과 원치 않은 우연들을 스스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힘을 길러주는 효과가 있다. 생명의 정원 가꾸기, 가상공간에서의 생활, 건강 관리 등도 삶의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주요 분야다. 무분별하고 경쟁적인 소비가 현대인들의 삶을 갉아먹고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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