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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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거주 중인 배수아 작가가 200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제목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서 에세이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표지에도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 위주로 내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소설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처럼 읽히는 것이 사실이다. 배수아 작가가 2023년에 발표한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과 겹쳐 보이는 대목들도 많았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주인공 '나'의 20년 후 모습이 <작별들 순간들>의 저자 같달까.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나'는 한때 M과 가깝게 지냈지만 현재는 요하임과 함께 지낸다. '나'는 평소에 요하임과 함께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명절이 되면 요하임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등 온화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선 자주 M과의 기억이 재생된다. 과거의 '나'는 모난 존재로 취급받기 싫어서 자신의 진짜 취향을 숨기고 대중의 취향을 방패 삼아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답답해 독일에 왔을 때 만난 M은 자신의 관점과 취향이 분명할 뿐 아니라 그것을 타인에게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M에게 빠른 속도로 빠져들었고, M과 만나지 못하는 지금도 여전히 M을 그리워한다.


앞에 썼듯이 이 책은 특별한 사건 없이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 위주로 내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어떤 소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과 달리, 우리네 일상은 대체로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고, 나는 오로지 나의 감정이나 생각만을 알 수 있(고 때로는 그조차도 알 수 없)다. 언어의 부재나 생각의 미성숙으로 인해 당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일을 나중에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 줄 알았던 사람이 의외로 길게 영향을 남기기도 한다.


언어와 문학, 음악과 예술에 대한 생각들을 적은 대목들이 많다는 점 때문에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작가 또한 외국 생활 혹은 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썼다. 낯선 것에 대한 동경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감, 소통에 대한 갈망 등이 두 작가 모두의 글에서 눈에 띈다. 저자 자신은 책에서 페터 한트케와 베른하르트 슐링크 같은 작가들을 언급한다. 이 작가들의 책도 조만간 찾아 읽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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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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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것을 아는 사람,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승우 작가가 2017년에 발표한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 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영향을 준 첫 번째 단편 <모르는 사람>의 주인공 '나'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했다. 건설회사 중역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던 아버지가 십일 년 전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기는 한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알 길이 없으므로 알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와 달리,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실종 혹은 부재에 관해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는 어머니의 상상을 망상으로 치부하지만, '나'보다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어머니의 말이라서 그저 무시할 수만도 없다.


두 번째 단편 <복숭아 향기>의 주인공 '나' 역시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했다. 대기업 인턴 사원인 '나'는 정규직 전환 후 첫 근무지로 M시를 택한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언젠가 일어날 줄 알았던 일이 결국 일어났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M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M시로 간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외삼촌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첫 만남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간하기 힘든 내용인데...


말레이시아 여행 중에 만난 현지인 가이드와의 인연을 그린 <찰스>라는 단편도 흥미롭다. 주인공 김철수는 자신과 한국 이름이 같은 가이드 찰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잘해주는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인해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게 된다. 이어지는 단편 <넘어가지 않습니다> 역시 한국인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 간의 오해로 인해 빚어진 갈등을 그린다. 타인의 역사를, 언어를, 입장을, 감정을 모른다는 것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담담한 문체로 섬세하게 그려낸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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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포옹
박연준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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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의 산문을 좋아한다. 큰 사건이 없어도 작은 발견으로 공감과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걸 박연준 시인의 산문을 읽을 때마다 배운다. 박연준 시인의 여섯 번째 산문집 <고요한 포옹>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책은 저자의 반려묘 '당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편인 장석주 시인과 단둘이 사는 저자는 전부터 고양이를 집에 들이고 싶었지만 남편의 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상의 없이 고양이를 집에 데려왔는데, 걱정한 대로 불같이 화를 냈던 남편이 지금은 저자보다 더한 고양이 사랑꾼이 되었다고 ㅎㅎ


마흔 넘어서 처음으로 운전에 도전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주차하다 기둥을 들이받고 단골 카페의 유리창을 깨는 사고를 내자 남편은 제발 운전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러든 말든 여전히 즐겁게 운전을 하고 있다니 씩씩하고 멋지다. 몇 년 전 배우기 시작한 발레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 해보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것은 '되기 쉬운 나'를 버리고 '되고 싶은 나'를 택하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의 간극보다는 작다. "행복은 체험이다. 많이 겪어본 사람이 더 자주, 쉽게 겪을 수 있다." (61쪽)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든 실행하는 성격은 글을 쓰고 책을 내면서 길러진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첫 번째 산문집 <소란>을 출간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몰랐고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시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를 알아볼 것' 그리고 '모르는 채 태어날 것'. 오랫동안 괴롭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저자가 이제는 행복을 이야기하고 성취의 기쁨을 알려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도 저자의 나이쯤 되었을 때 이렇게 산뜻하고 유쾌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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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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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는다는 것. 어려서부터 시력이 안 좋았고 지금도 안 좋은 나에게는 가까운 미래에라도 일어날 법한 일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 자체에 대해서나 시각장애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일단은 앞이 보이니까, 아직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니까, 라는 경솔하고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2023년 샘터 문예공모전 생활수필 부문 대상을 받은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조승리의 첫 산문집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으며 장애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자의 경우 열다섯 살 때부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병원에 갔더니 앞으로 10년 정도 계속 시력이 떨어져서 완전히 실명하게 될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의사의 진단을 믿을 수 없다며 다른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고 민간 요법을 찾기도 했지만, 당사자인 저자는 담담히 장애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준비했다. 시각장애인 고등학교에 진학해 안마 기술을 배우고, 줄어드는 시력에 의지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지금은 마사지사이자 작가로, 때로는 여행을 다니고 탱고를 배우며 즐거운 삼십 대를 보내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저자의 첫 타이완 여행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는 여행 팟캐스트 방송을 듣고 여행 블로그를 읽으며 공부한 끝에 시각장애인 친구 둘과 타이완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비장애인 동행 없이 불가능할 거라고 모두가 말렸지만, 철저한 준비와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한 귀인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어떤 한국인 여행자들은 "앞도 못 보면서 여길 힘들게 뭐 하러 왔누!"라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지만, 여행을 하는 방법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다. 타이베이 시내의 거리에서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듣는 기쁨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


나는 어둠을 훑어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수백 송이의 불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다. (15쪽)


책에는 도시화가 시작된 농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 딸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십 대 시절,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손님들의 몸의 피로를 풀어주고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던 이야기를 듣는 요즘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 담겨 있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라는 저자의 결심이 오래오래 이어져 좋은 글과 책들로 결실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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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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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럽 드라마를 보면 식이장애가 소재로 빈번하게 나온다. 식이장애 트리거를 경고하는 문구나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본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아직 식이장애에 대한 경각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아직도 여성 연예인들의 마른 몸을 칭송하며 의사들이 나서서 다이어트 약 광고를 한다. 대체 왜 여자들은 마른 몸을 원할까. 남자들은 왜 마른 몸의 여자를 원할까. ​

영국의 소설가 제시카 앤드루스의 신작 장편 소설 <젖니를 뽑다>의 주인공인 런던에 사는 28세 여성 '나'는 오래전부터 식이장애를 앓고 있다. 음식물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극도의 허기를 느낄 때조차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자신을 심하게 책망하며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노려보거나 살을 꼬집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

소설은 '나'의 생일날 '나'가 처음으로 ('당신'으로 지칭되는)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날 이후 '나'와 남자친구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만, 대학원생인 남자친구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대학의 연구원으로 채용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남자친구는 '나'가 자신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가기를 원하지만, 변변한 학위도 직업도 없는 '나'로서는 무리한 부탁으로 느껴진다.

​현재의 고민은 '나'를 자꾸만 과거로 밀어낸다. '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정신이 불안정했던 아버지와 그런 남편에게 경제력을 의존해야 했던 어머니, 두 사람의 불화와 이혼이라는 불우한 추억과 만난다. 제2차 성징을 겪으며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자연스럽게 남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를 느꼈지만, 자신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고 때로는 희롱과 추행을 일삼는 남성들 때문에 스스로의 욕구를 검열하고 억제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우리가 동경하는 여성들은 깡마르고 아름답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섹스와 마약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과시했고, 너무 많이 먹지만 않는다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놀기 좋아하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움과 현란한 클럽 조명을 위해 맛과 포만감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쾌락에 이르고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잡을 수 있도록 우리의 욕구를 참는 법을 배웠다. (91쪽)

종종 내가 젊은 여성이 아니라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인생 항로가 달랐을지, 또는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을지, 또는 더 많은 힘을 가졌을지 궁금해지곤 했다. 덜 의식하고,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내 일부일 뿐인 육체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려 노력했다. (156쪽)


소설 초반에 '나'는 남자친구가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정확히 알고 있고 그에 맞춰 진로를 착착 진행하는 것에 대해 부러움을 넘어 질투를 느낀다. 그가 함께 바르셀로나에 가서 살자고 말했을 때에도 호의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는 신호라고 느낀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못한 처지였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원하는 삶을 이뤄낸 걸 보면서 '나'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역시 사람은 일을 하고 여행을 해야 한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밝은 결말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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