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낙서 수집광
윤성근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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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책보다 새 책을 선호해 헌책방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찾는 책이 절판되어 불가피하게 중고책을 사야 하는 경우에는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직접 보고 가장 새 책에 가까워 보이는 헌책만 구입한다. 이런 나와 달리, 세상에는 새 책보다 헌책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래될수록, 종이 색이 누렇게 바래 있을수록, 먼저 읽은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오히려 좋아'한다는 이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헌책 낙서 수집광>이다. 


이 책을 쓴 윤성근 작가는 2007년부터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 중인 헌책방 주인이기도 하다. 헌책방 주인의 업무 중 하나는 헌책 매입이다. 매입을 위해 헌책을 살펴보다 보면 별의별 물건과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프랜차이즈 중고서점에서는 뭔가가 끼워져 있거나 흔적이 있는 책을 꺼리지만, 저자의 헌책방에서는 환영한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 귀퉁이에 적힌 낙서, 속지에 끼적여진 일기 등을 보면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15년 넘게 헌책방 직원과 주인으로 일하며 수집한, 누군가의 손글씨가 남아있는 책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가 모은 손글씨 중에는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도대체 주문을 언제 했는데... 이제 오다니" 같은 일상적인 푸념에 가까운 낙서도 있고, "김 OO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처럼 무시무시한 저주도 있다. 80년대에 대학생들이 주고받은 러브레터, 엄마가 자녀에게 말로는 다 못해서 시의 힘을 빌려 적은 인생 이야기도 있다. 


"나는 책이 가장 책다워질 때가 언제냐고 하는 질문을 받으면 읽은 사람의 이야기가 책에 남는 그 순간부터라고 말한다. 헌책에서 찾은 흔적엔 비록 유명인은 아닐지라도 평범해서 더 값진 우리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10쪽) 


이 책을 읽은 후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새 책을 선호하고, (평생 소장할 책이 아닌 이상)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새 책에는 없는 헌책만이 가진 매력을 알게 되었고, 새 책보다 헌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먼 미래에는 저자처럼 책에서 낙서나 손글씨를 발견했을 때 얼굴을 찌푸리기보다는 책에 얽힌 사연을 이리저리 유추해 보는 책탐정도 될 수 있을까. 그 삶도 꽤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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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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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을 보고 미국 현대사에 관심이 생겼다. 뒤이어 로런 그로프의 소설 <아르카디아>를 읽고 구체적으로 미국의 1970년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알게 된 이 책의 배경이 1970년대라고 해서 바로 구입했다. 책이 도착하고 나서야 이 책이 무려 872쪽에 달하고 조너슨 프랜즌이 원래 벽돌책으로 유명한 작가라는 걸 알았는데, 하루에 100쪽씩, 총 9일 동안 읽기로 결심했으나 이틀 줄여서 일주일 만에 읽은 건 내용이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어떻게 보면 막장 가족 드라마에 가깝다. 1971년 성탄절을 앞둔 미국 중서부 시카고 교외의 한 마을.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 중인 러스와 그의 아내 매리언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독실하고 화목한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지만, 이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있다. 


러스는 최근 남편을 잃고 교회에 새로 가입한 프랜시스라는 젊은 여자 신도 프랜시스에게 홀딱 반한 상태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챈 매리언은 정신 상담을 받으러 다니다가 결혼 전 사귀었던 유부남과의 재회를 상상한다. 장남 클렘은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의 영향으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한다. 장녀 베키는 이모에게 상속 받은 거액의 유산으로 대학 진학 전 남자친구와 유럽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차남 페리는 아버지가 재직 중인 교회의 청소년부인 '크로스로드' 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험한 일탈을 꿈꾼다. 


이 소설은 붕괴 직전의 가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미국 문화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러스는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메노파 신자였는데, 메노파란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의 일파로, 퀘이커 교도만큼이나 엄격하고 배타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매리언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남편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자가 된 후에도 천국을 믿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는 등 자기 본위의 신앙 생활을 한다. 클렘은 무신론자에 가깝고, 베키는 사귀는 남자에 따라 교회에 다니거나 말거나 한다. 


그런 이들이 종국에는 (클렘 빼고) 독실한 신자로 복귀하는데, 표면적으로는 페리의 사고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각자가 경험한 일탈과 실패가 있고, 더 자세히는 실패로 말미암아 깨달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눈 앞의 상황을 운명이라고 믿고 신에게 의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에 러스가 "가난할 때는 이런저런 일이 그냥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죠. 완전히 주님의 자비에 몸을 내맡기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주님과 가까워지니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시 보니 소설의 결말을 예고한 듯하다.) 


이 소설에는 미국 가정의 붕괴와 신앙 공동체의 파멸 외에도 킹 목사 사망과 닉슨 정권의 등장, 히피 문화의 유행, 반전 시위, 페미니즘 물결 등 1970년대 초반을 수놓은 미국의 사회 문제들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 남자한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식으로 반응하고 폭식으로 해소(처벌?)하는 매리언, "스무 살 때 베티 프리단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읽었다면 내 인생 전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한 프랜시스, 다양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베키, 로라, 섀런 등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도 여럿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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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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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타계한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트레버가 말년에 발표한 단편 열 편을 묶어서 펴낸 소설집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로는 소설집 <밀회>와 장편 소설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었는데, 단편이 장편보다 훨씬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윌레엄 트레버는 단편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열 편 중에 열 편 모두 좋을 수가.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직전에 읽은 단편보다 더 좋을 리가 없다고 일부러 흥분을 절제하면서 읽었는데도 매번 감동했다. 


윌리엄 트레버의 이름으로 출간된 마지막 책이라서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윌리엄 트레버의 작가 소개와 연혁에 유독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윌리엄 트레버는 1928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학교를 열세 군데나 옮겨 다녔고,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졸업 후 영국으로 이주해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두 번째 소설 <동창생들>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고, 영국 남서부 데번으로 이주해 평생 그곳에 살았다.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도, 다수의 전학 경험,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이라는 '아웃사이더'적인 정체성 때문일까. 그의 소설에는 가족, 직장, 이웃 등의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동체로부터 소외, 배척당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책에도 장애인, 고아, 집시, 과부, 노숙인, 가사도우미 등의 '외부인'이 나온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주류가 아니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선 어느 영화 못지 않은 드라마틱한 상황 속 주인공이다.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실린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의 주인공 미스 나이팅게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같이 사는 사람도 없고, 피아노를 배우러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들 외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는 비혼 여성이다. 남들은 그가 단조롭고 외로운 일상을 보내리라고 짐작하지만, 사실 그는 천재가 아닐까 싶은 한 제자 때문에 흥분되고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남들이 알아차리기 힘들고 본인도 인식하기 어려운 섬세하고도 복잡한 감정의 결을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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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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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마부키 사토시 주연 영화 <한 남자>가 곧 개봉할 예정인데, 원작이 2020년에 출간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뒤늦게 구입해 읽었다. 원작을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영화 줄거리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도 주인공 '기도'가 재일 교포 3세인 것으로 굳이 설정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일본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 되는 유명 작가가 재일 교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전례가 있던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 되는 작가는 재일 교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등등이 궁금해서 읽었고,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1975년생 재일 교포 3세 변호사인 기도 아키라는 몇 년 전 이혼 소송을 담당했던 옛 의뢰인 리에로부터 또 다른 의뢰를 받는다. 리에는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만난 다이스케라는 남자와 재혼하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고로 남편이 죽고 신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가짜 이름, 가짜 신분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가짜 이름, 가짜 신분으로 살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진짜 이름, 진짜 신분은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는 리에의 부탁에 기도는 변호사로서의 의무 이상의 흥미를 느끼고 파고들기 시작한다. 


기도가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는 개인적인 동기는 재일 교포 3세인 자신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기도는 스스로를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로를 결정하거나 결혼 승낙을 받는 과정 등에서 자신이 재일 교포임을 강하게 의식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TV 방송을 통해 간토(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려 조선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불안감이 훨씬 커졌다. 일본인 아내와의 갈등, 아직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 아들에 대한 죄책감도 심해졌다. 


리에의 남편의 진짜 이름과 진짜 신분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기도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타인의 것과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의 행위는 법적으로 사기에 해당하지만, 각자 범죄자의 자식이라거나 가족으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받는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나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어쩌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변신' 또는 '변화'에 대한 욕망은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사랑받기 힘든 현실의 결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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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후 너는 죽는다 밀리언셀러 클럽 9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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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은 <13계단>, <제노사이드>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2009년에 발표한 소설집을 이제야 읽은 건, 나의 최애 NCT 재현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이 원작인 영화의 주연 배우로 캐스팅 되었기 때문이다. 다카노 가즈아키 하면 선 굵은 정통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라는 인상이 있는 데다가, 책을 구입하기 전에 먼저 접한 카드 뉴스(https://naver.me/5LoR18Q1) 줄거리가 하도 섬뜩해 책을 읽기 전부터 잔뜩 겁을 먹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예상한 것보다는 내용이 훨씬 가볍고 분위기가 밝았다.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의 등장 인물인 야마하 케이시가 다른 단편들에도 등장하고, 첫 번째 단편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와 여섯 번째 단편인 <3시간 후 나는 죽는다>의 내용이 연결되기 때문에 연작 소설로 볼 수도 있겠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는 스물다섯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미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번화가를 걷던 미오는 한 잘생긴 남자로부터 "6시간 뒤, 당신 죽어."라는 말을 듣는다. 작업 멘트 치고는 내용이 무섭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는데, 얼마 후 남자가 했던 또 다른 예언이 실현된 것을 보고 미오는 남자의 예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죽는다면 사고일까, 아니면 급하게 발생한 병? 예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미오에게, 남자는 밤 12시 정각에 어떤 남자가 미오를 칼로 찔러서 살해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각 단편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미'로 시작하는) 평범한 20대 여성인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야마하 케이시라는 남자와 만나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일상 미스터리에 가깝고, 다양한 욕망을 가진 여성들이 예언이라는 초월적인 영역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따져 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특한 설정을 가미한 성장 소설 내지는 청춘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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