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형사 형사 벡스트룀 시리즈
레이프 페르손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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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스 마르틴 요한손은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의 국장이었고 전설적인 형사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다. 요한손은 입원해 있을 때 주치의로부터 25년 전에 일어난 여아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동해 개인적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거동이 불편한 요한손을 대신해 그의 요양보호사와 기사는 물론이고 전직 동료와 부하들까지 나서고, 덕분에 오래전 미제로 남은 사건의 범인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문제는 그가 '죽어가는' '전직' 형사라는 것. 과연 현직도 아니고 몸도 성치 않은 형사의 수사 결과를 스웨덴 당국은 받아들일까. 


주인공 형사가 평범한 형사가 아니라 병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말 그대로 '죽어가는') 형사인 점이 신선했다. 뇌졸중 후유증 때문에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앉은 자리에서 범인을 찾은 것과 다름 없는 추리를 선보이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 소설이 재미있어서 벡스트룀 시리즈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려고 알아봤는데, 이 소설은 본편이 아니라 스핀오프작이고, 벡스트룀 형사가 주인공인 본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평이 많아서 읽을지 말지 고민이다. 불의를 못 참는 전형적인 형사 캐릭터에 부합하는 요한손과 달리, 벡스트룀은 불의를 잘 참고 어떻게 보면 불의 그 자체라고. 


그러고 보니 문제의 여아 살인 사건을 허술하게 수사해 범인을 놓친 인물이 벡스트룀이라고 언급되는 대목이 있었다. 대체 작가는 (요한손처럼 신뢰할 수 있는 형사 캐릭터가 주인공인 정통 경찰 소설을 쓸 수 있으면서) 왜 벡스트룀 같은 인물을 전체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정했을까. (안티히어로가 주인공인) 벡스트룀 시리즈 본편에서 요한손은 과연 어떻게 묘사될까. 궁금해서 얼른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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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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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을까. 백온유의 소설 <유원>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그린다. 고등학생인 유원은 아기 때 언니와 집에서 자고 있는데 윗집 할아버지가 베란다 밖으로 버린 담배꽁초가 집으로 들어와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집 전체가 타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유원의 언니 예정은 유원을 젖은 이불로 감싸서 11층 아파트 아래로 던지고 숨졌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남자가 이불에 싸인 채 떨어지는 유원을 받았고 그 충격으로 다리뼈가 으스러졌다. 


은정동 화재사건으로 명명된 이 일로 인해 유원을 구해준 아저씨는 '의인'이 되었고, 유원은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이불 아기'로 불리게 되었다. 유원을 구한 언니 예정도 동생을 구하고 죽은 천사 같은 아이로 기억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유원은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언니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 "어렵게 살아 남았으니 바르게 자라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 부담스럽고 힘들다.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가 그 대가로 자신의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은인들을 증오하는 상황이 죄스럽고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점점 더 굳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런 유원에게 어느 날 수현이라는 아이가 나타난다. 학교 옥상을 좋아하는 유원은 마스터 키를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 옥상, 아파트 옥상 가리지 않고 드나드는 수현이 마음에 들어서 수현을 따라 다니면서 수현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수현의 '비밀'을 알게 되고, 유원이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미워하면서 증오와 죄책감, 자기혐오가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수현 또한 자신을 낳았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원은 수현이 중대한 사실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수현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친근감을 느끼고, 어쩌면 수현이 자신보다 더 오래, 더 깊이 고통받았을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한다. 나의 상처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남의 상처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성장이라면, 유원은 수현과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정신적인 성장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런 만남, 이런 성장이 있었나, 있었다면 언제였고 무엇이었나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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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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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뭘까. 비비언 고닉의 산문집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사는 일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 결국에는 상처받고 멀어질 걸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가 기꺼이 마음을 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는 각각의 글에서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사는 일, 기자로 일할 때 우연히 페미니즘을 접하고 페미니스트 공동체와 깊이 교류했던 일, 대학 시절 방학마다 지방의 호텔에서 합숙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 흠모하는 여성 작가와 친해져서 한동안 그와 함께 생활했던 일 등에 관해 서술한다. 각각의 글은 다른 시기, 다른 경험을 다루지만, 경이로운 만남과 잇따른 권태, 허무한 파국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읽힌다.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면서,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 관계에나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에, 사람은 언제든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평생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외로움을 없애줄 누군가를 갈구하느라 몸과 마음이 고생하고, 알면 외로움을 없애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 고립되기 쉽다. 남을 탐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가까이 두는 상태를 찾으면 좋겠지만 쉬울 리 없다. 


마지막 글에서 저자는 편지의 가치를 옹호하는데, 나는 편지를 포함한 글쓰기가 '남을 탐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가까이 두는 상태'에 다다르는 데 있어 좋은 도구이자 수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역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많은 일을 해보고 많은 공부를 해봤지만, 결국 글쓰기가 - 정확히는 매일 꾸준히 글 쓰는 노력이 - 자기 자신을 덜 외롭게 만들고 세상과 더욱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고 설명한다. 오래 꾸준히 글 써온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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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23-03-2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계의 생로병사...멋있고 적확한 말 같아요
 
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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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는 연세대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학위를,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동유럽 지역의 문학에 정통한 작가라서 그런가. 정보라 작가의 소설은 동세대 한국 작가들보다 프란츠 카프카나 안톤 체호프 같은 러시아, 동유럽 지역의 작가들의 소설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미신이나 마법 같은 사건이 일상에 틈입해 균열을 낼 때의 긴장과 공포를 섬뜩하게 그린 점이 그렇다. 


표제작 <저주토끼>도 그렇다. 대를 이어 저주 용품을 만드는 집안의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오래 전 할아버지에게는 술을 만드는 집안에서 자란 친구가 있었다. 친구네 집안은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전통주를 만들 뿐, 허튼 일에 한눈 팔지 않았다. 그런 친구네 집안을 고깝게 본 경쟁사가 거짓 소문을 퍼트려 친구네 집안을 망하게 했고, 나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망하는 현실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저주토끼를 만들어 복수에 나선다. 


<머리>도 인상적이었다. 인간은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종이나 비닐, 플라스틱, 캔 같은 쓰레기만이 아니라 대변과 소변, 머리카락, 깎아낸 손톱, 발톱, 각질, 비듬 등의 오물도 포함해서 그렇다. 만약 이 오물들이 모여서 '또 하나의 나'를 생성한다면 어떨까. 그 '또 하나의 나'가 원래의 나와 구분되지 않고, 원래의 나보다 훨씬 더 나 같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기괴하고 정신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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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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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기 전에는 정지아 작가를 몰랐고, 정지아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나서 정지아 작가에 대해 알아보니 1990년 <빨치산의 딸>로 데뷔해 올해로 작가 활동을 한 지 33년이 되었고, 그동안 소설집 <행복>, <봄빛>, <자본주의의 적> 등 다수의 책을 발표하셨다고 한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부지런히 따라 읽어볼 생각이다. 

이 소설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후 하나뿐인 딸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 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딸은 젊은 시절 빨치산이었고 늙어서도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아버지를 평생 미워했다. 사상이나 이념보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거니와,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는 동네와 학교에서, 커서는 직업 선택과 결혼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한 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그들의 사연을 찬찬히 되짚어 보면서, 딸은 아버지가 그저 이념에 눈이 멀어 가족과 생계는 뒷전으로 여겼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라, 평등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으며 혈연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헌신하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버지도 그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보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끝내 실패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것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주가 된 딸이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더 관심이 갔다. 조부모상을 치르면서 장례가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언젠가 내가 상주가 되면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소설 속 딸은 아버지의 장례를 통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신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지만, 과연 나도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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