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꿈 꾸세요
김멜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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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멜라의 소설 하면 점집에 갔다가 점쟁이와 사랑에 빠지는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그린 <물질계>와 딜도의 시선으로 레즈비언 커플을 관찰한 이야기를 그린 <저녁놀>이 떠오른다. 둘 다 레즈비언이 나오는 유쾌한 분위기의 소설이라서 내 멋대로 김멜라 작가는 주로 그런 소설을 쓴다는 인상이 가졌었는데, 김멜라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제 꿈 꾸세요>를 읽고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 레즈비언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지만 레즈비언 이슈만 다루는 작가는 아니라는 쪽으로.


<링고링>과 <저녁놀>, <논리>는 주요 등장 인물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작품이다. <나뭇잎이 마르고>의 인물들도 레즈비언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앙헬을 좋아하는 대학 선배 '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보다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부각된다. <설탕, 더블 더블>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성애자 남성이 자신처럼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노년의 이성애자 여성과 어떤 공모를 하는 과정을 그린다.


팬데믹 시기에 대중목욕탕에서 벌어졌을 법한 일을 그린 <물오리>, 여자 화장실을 둘러싼 문제를 그린 <코끼리코>는 현실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회 소설에 가깝다. 표제작 <제 꿈 꾸세요>는 (문장 자체가 풍기는 로맨틱한 분위기와 다르게) 사고로 죽은 30대 여성이 사후 세계를 경험하는 일을 그린다. 죽음의 이미지는 <논리>에도 등장하는데, 두 작품 모두 죽음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죽음의 여파를 그린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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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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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에 남겨진 로봇은 인간을 그리워할까. 천선란의 소설 <랑과 나의 사막>의 로봇 '고고'는 자신의 주인인 '랑'을 그리워한다. 이들이 사는 곳은 '전쟁의 시대' 이후 사막화된 지 오래인 지구상의 어딘가이다. 전쟁의 시대에 만들어졌다가 버려진 로봇 고고를 인간인 랑이 발견해 집으로 데려왔고, 그 때부터 고고와 랑, 랑의 어머니 조는 한동안 한 집에서 살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다 조가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랑까지 세상을 떠나자, 혼자 남은 고고는 랑이 조를 묻었던 것처럼 랑을 땅에 묻고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고고를 지켜보던 랑의 친구 지카는 고고에게 함께 바다로 가자고 한다. 하지만 고고는 사막에선 보기 힘든 방대한 양의 물이 있는 바다보다, 랑이 살아 있을 때 그토록 자주 이야기했던 과거로 가는 땅을 찾고 싶다. 그래서 고고는 랑을 생각하며 사막의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간다.


이 과정에서 고고는 인간과 로봇, 외계 생명체를 만나기도 하고 동행을 제안받기도 한다. 하지만 고고의 마음속엔 오로지 랑뿐이다. 모든 것은 랑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입력),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도 고고는 항상 랑을 떠올리고, 랑을 생각한다(출력). 입력된 것을 출력하는 것은 로봇에게 당연한 반응인데, 그 결과가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여겨지는 '감정'과 유사해 보인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렇다면 그리움을 느끼는 로봇의 출현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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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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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으로 2018년 부커상을 수상한 애나 번스의 첫 장편 소설이다. <밀크맨>도 좋았지만 <노 본스>가 훨씬 더 좋았는데, 이는 아마도 내가 북아일랜드 분쟁에 대해 잘 모르는데 <밀크맨>에 비해 <노 본스>가 북아일랜드 분쟁을 훨씬 더 자세히, 알기 쉽게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 본스>를 먼저 읽고 <밀크맨>을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1969년 북아일랜드에서 발발한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을 맺으며 일단락될 때까지 1~3년 간격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 소설 같은 느낌은 아닌데, 이는 작가가 분쟁 자체를 다루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인 '아도인'이라는 마을은 작가 애나 번스의 실제 고향이기도 하다. 


어밀리아는 일곱 살 때인 1969년 어느 날 저녁 처음으로 분쟁을 경험한다. 이 때만 해도 분쟁은 어밀리아가 마음대로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면 안 되는 정도의 'trouble'에 그친다. 그러나 점차 분쟁이 본격화되고 심각해지면서 사람들이 싸우다 다치거나 죽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고, 사람들은 폭력을 일상으로, 평화를 비일상으로 여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평범한 여자 아이였던 어밀리아는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을 앓게 되고 끝내는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정신병을 얻는다. (가족과 친구, 이웃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자신 또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환경에서 그토록 오래 산다면 정신이 멀쩡한 게 이상하다)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평화협정 체결 후 어밀리아가 처음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동네 밖으로 나가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어밀리아의 친구들은 동네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사람들이 총부리를 들이대는 줄 안다. 하지만 (당연히) 막상 나가보니 그렇지 않았고, 그들의 동네 밖에 사는 사람들도 그들처럼 생각하는(동네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큰일 나는 줄 아는) 걸 알고 어안이 벙벙해진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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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 지음, 이수영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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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님이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소개하셔서 읽게 된 책이다. 제목 그대로 콜카타에 사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평범한 이십 대 여자인 지반은 인근 기차역에서 일어난 기차 테러 사건에 대해 SNS에 뭐라고 썼다가 테러리스트로 지목된다. 지반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영어 교육 봉사를 해준 성 소수자 러블리를 증인으로 부른다. 한편 지반의 고등학교 시절, 그를 가르쳤던 체육 교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계에 발을 들인다. 


지반이 테러리스트로 지목되기 전까지 러블리는 지반에 비해 사회적 약자였고 체육 교사는 지반의 기억에 있지도 않았다. 지반이 테러리스트가 되면서 러블리는 증인으로서 일약 주목을 받고 타고난 끼를 활용해 스타덤에 오른다. 체육 교사는 지반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공적 분노로 연결해 지반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은 정계에서 승승장구, 결국에는 장관의 자리까지 차지한다. 타인의 불행을 이용해야 좀처럼 드문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불행의 크기가 클수록 성공의 크기도 커지는 잔혹한 사회 구조인 것이다. 


황정은 작가님이 팟캐스트에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누명을 쓴 사람이 벗어나는 일(지반), 천대받던 사람이 스타가 되는 일(러블리), 평범한 사람이 장관이 되는 일(체육 교사) 중에 무엇이 가장 불가능해 보이느냐고 물었는데, 스튜디오에 있던 다른 두 분이 첫 번째라고 답했다. 내 생각도 같고 소설의 결말도 같은데, 한국이나 인도나 대체 어떤 사회이기에 이런 비관적인 대답과 결말이 나왔을까. 생각할수록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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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 3 - 사대문 안동네 : 내 고향 서울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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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선생님의 모든 저작을 좋아하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 중에서는 서울편을 가장 좋아한다. 아무래도 내가 태어난 도시이자 이제까지 가장 오래 산 지역이기 때문에 편애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서울편은 조선왕조의 궁궐과 한양도성을 소개하는 1,2편도 좋았지만, 3,4편은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서울의 외곽 지역을 소개해 줘서 특히 좋았다. 


서울편 3권에 해당하는 11권은 서촌, 북촌, 인사동 등 서울 사대문 안의 오래된 동네와 북한산의 문화유산을 답사한다. 서촌은 가족, 친구들과 종종 놀러 가는 곳이고, 북촌은 옛 직장이 있었던 동네라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전혀 아니었다. 인사동은 그렇게 많이 가봤는데도 그곳의 진정한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에 한 번도 안 가봤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다음에 가면 화랑도 구경하고 유서 깊은 찻집도 가보고 싶다. 


저자 자신도 이 동네가 자신의 고향인 만큼 고향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과 나눌 수 있는 애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유년 시절 어느 골목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놀았고, 학창 시절 어느 고서점과 골동품점을 드나들며 미술사학자가 될 꿈을 키웠는지 등등 유홍준 선생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와서 흥미로웠다. 이 시리즈가 부디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조만간 완결이 날 것 같아서 벌써부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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