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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캘리 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충격적이다. 첫째는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나라 꼴이 얼마나 엉망일 수 있고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고, 둘째는 소설의 배경이 197,80년대가 아니라 불과 몇 년 전이라는 점이고, 셋째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겪은 거의 자전적인 내용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삼십 대 후반의 베네수엘라 여성 아델라이다 팔콘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고아가 된 아델라이다는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가 혁명군의 권력을 등에 업고 시민들을 괴롭히는 '보안관' 일당에게 점거당한 것이다. 주인이 있는 집을 생판 남이 무력으로 차지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이 나라에선 충분히 말이 된다.
이 나라는 유가 폭락으로 인해 오랫동안 경제 공황을 겪고 있고,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에서 이전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혁명군이 제멋대로 통치를 하는 상황이다. 간단한 생필품조차 거액의 웃돈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고, 그마저도 이 나라의 화폐는 안 통해서 달러화를 구해야 하는 상태. 혁명군이 시민을 폭행하거나 살해해도 처벌할 상위 권력이 없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집을 빼앗겼다고 하소연하는 건 목숨까지 가져가라는 것이다.
아델라이다는 할 수 없이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고 불리는 이웃집 여자의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집 문은 열려 있고 이웃집 여자는 죽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스페인 국적의 여권이 있다. 주인이 없어진 여권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다고 생각한 아델라이다는 곧바로 시체를 처리하고 이웃집 여자로 위장해 스페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살고 싶지만 살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 그러나 다른 사람이 된들 생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막막한 - 아델라이드의 처지가 안타깝다.
이제까지 여러 이유로 신분을 위장하거나, 은둔하거나 탈출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를 많이 봐왔지만, 이 소설처럼 오직 생존을 위해 모든 불안과 위험을 감당하는 이야기는 처음 본 것 같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건데, 실제로도 최근 3년 간 베네수엘라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나라를 떠났고, 그 수가 720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들 각자는 대체 어떤 지옥을 목격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