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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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오래 전에 즐겨들었던(현재는 종영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소개되었을 때 한 번 읽고,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선정되어(결과는 수상 실패)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마치 전기수가 관중들에게 전설이나 민담을 들려주는 듯한 서술 방식과 남미 소설처럼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내용이 기발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작품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소설은 금복과 춘희 모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가난한 산골 마을 소녀인 금복은 자신을 겁탈하려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생선 장수를 따라가 낯선 어촌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젊고 예쁜 금복을 탐내는 남자들이 워낙 많아서 금복은 그 남자들이 가져다 주는 돈으로 살 수도 있었지만, 야망이 크고 이를 실현할 두뇌와 끈기도 갖춘 금복은 손대는 장사마다 성공하며 결국 큰 부를 거머쥐게 된다. 


문제는 금복이 여자로서 매력적이고 사업가로서도 뛰어나지만, 어머니로서는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금복에게는 정신박약아인 딸 춘희가 있는데, 금복은 춘희를 사랑하지도 않고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다. 다행히 춘희에게는 금복을 대신해 돌봐주는 사람(때로는 동물)이 늘 있어서, 종내는 내로라하는 벽돌 장인이 된다. 금복이 너무 뜨거워서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태양 같은 사람이라면, 춘희는 조용히 있으면서 은은히 주위를 밝히는 달 같은 사람이랄까. 


전개가 막장 드라마 같은 면이 없지 않고, 여성 혐오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이나 장면도 적지 않지만, 2004년에 남성 작가가 (아버지-아들이 아닌) 어머니-딸을 중심으로 하고, 이들 외에도 수많은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선보였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스포 주의!!)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남자들에게 강간 또는 강간 위협을 받았던 금복이 말년에 여성으로 살기를 그만두고 남성화된다는 결말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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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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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27번째 책이다. 주인공이 휴가를 떠나는 내용이라서 휴가나 여행 중에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과외 교사인 경진은 사흘 간의 휴가 직전 과외 학생인 해미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걱정은 되지만 부모도 아니고 담임 선생님도 아닌 자신이 개입할 일은 아니라고 여겨서 일단 계획한 대로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휴가 기간 동안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경진에게 말을 건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마치 친한 사이처럼 경진에게 말을 걸고, 심지어 친하게 지내도 속마음까지는 말 안 했던 절친,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엄마, 우연히 만난 동창까지 경진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진이 지금 가장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혜미인데...


처음에는 다들 나한테 왜 이러나 의아해 했던 경진이 점점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자기가 먼저 상대에게 할 말 있으면 하라고 청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때로는 내가 먼저 말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해도 문제의 원인이 파악되고 해결 방법이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산책과 여행, 만남과 방문을 통해 좁았던 세계가 넓어지고 관계의 물꼬가 트이는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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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오피스 오늘의 젊은 작가 34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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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34권이다. 이 책은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그냥 님이 추천하셔서 읽게 되었다. 각각 다른 업계에서 일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작가 자신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나 다른 업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반영했다는 점이 신뢰도를 높였다. 내용이 생생하고 전개 속도가 빨라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퀸스턴 호텔의 백오피스 지배인 혜원은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한 지 4년이 지났는데도 승진을 못해서 불안한 상태다. 그러다 우연히 대기업인 태형 그룹에서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혜원은 이 건을 반드시 따내서 성공시키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행사에 앞으로의 커리어가 달린 사람은 혜원뿐만이 아니다. 이 행사를 기획한 태형그룹 기획실 직원 지영과 행사 준비를 담당하게 될 이벤트 업체 직원 강이도 이 건을 성공시켜야 할 개인적인 이유가 있고, 그런 만큼 절실하게 이 건에 임한다. 


혜원과 지영, 강이는 사생활을 포기하면서 일에 매달리지만, 이들의 노력은 시도 때도 없이 암초를 만난다. 회사의 부패, 상사의 부정, 주변 동료들의 무능, 여자라는 이유로 갇혀버린 유리천장... 세상이, 사람들이 왜 이 따위냐고 비난을 퍼붓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그러는 대신 당장 눈 앞에 있는 일을 나부터 제대로 해내기로 하고 꿋꿋하게 일에 몰두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멋있었다. 특히 혜원이 눈앞에서 개소리를 시전하는 남자한테 찡그린 표정 한 번 안 짓고 자기 몫만 쏙 챙기는 모습이 멋있었다(이것이 호텔리어의 내공인가!). 


지영과 알렉스의 러브라인이 생뚱맞다는 의견이 있던데, 여자가 큰일 하다 보면 일터에서 만난 남자랑 눈 맞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오히려 워킹맘인 혜원이 전업맘처럼 육아와 살림에 힘쓰지 않는다고 남편한테 비난받고 자기 자신도 괴로워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워킹대디들도 그러냐고요... 일하는 여자, 여자의 일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부족하고 질리지 않는다. 부디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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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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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을 읽고 나서 바로 이 책을 읽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이 좋았지만 특히 <단영>이 좋았는데, 절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신성성과 영원성이 그 절에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속성과 유한성과 대비되는 점이 재미있었다. 절을 운영하기 위해선 장사를 하고 꽃을 죽여야 하는 비구니. 절에 살지만 햄버거가 먹고 싶은 아이. 남들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이 충돌할 때, 욕망을 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단영>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간호사의 길을 포기했다고 말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 예술에 뜻을 품고 예술대에 들어갔지만 앞날이 막막해 도망치고 싶은 사람. 내가 계속 이 집에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하자가 있는 집을 속여서 팔기로 한 사람. 손가락질 하기는 쉽지만, 막상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선택을 할 거라고 자신하기 힘들다. 


젊은작가상 수상작 <초파리 기르기>의 지유도 자신의 병이 산업재해일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실험실에서 일했던 경험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엄마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편을 택한다. 돌이켜보면 <최선의 삶>도 어느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겨우 소통이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종국에는 입을 닫고 귀를 열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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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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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캘리 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충격적이다. 첫째는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나라 꼴이 얼마나 엉망일 수 있고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고, 둘째는 소설의 배경이 197,80년대가 아니라 불과 몇 년 전이라는 점이고, 셋째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겪은 거의 자전적인 내용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삼십 대 후반의 베네수엘라 여성 아델라이다 팔콘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고아가 된 아델라이다는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가 혁명군의 권력을 등에 업고 시민들을 괴롭히는 '보안관' 일당에게 점거당한 것이다. 주인이 있는 집을 생판 남이 무력으로 차지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이 나라에선 충분히 말이 된다. 


이 나라는 유가 폭락으로 인해 오랫동안 경제 공황을 겪고 있고,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에서 이전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혁명군이 제멋대로 통치를 하는 상황이다. 간단한 생필품조차 거액의 웃돈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고, 그마저도 이 나라의 화폐는 안 통해서 달러화를 구해야 하는 상태. 혁명군이 시민을 폭행하거나 살해해도 처벌할 상위 권력이 없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집을 빼앗겼다고 하소연하는 건 목숨까지 가져가라는 것이다. 


아델라이다는 할 수 없이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고 불리는 이웃집 여자의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집 문은 열려 있고 이웃집 여자는 죽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스페인 국적의 여권이 있다. 주인이 없어진 여권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다고 생각한 아델라이다는 곧바로 시체를 처리하고 이웃집 여자로 위장해 스페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살고 싶지만 살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 그러나 다른 사람이 된들 생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막막한 - 아델라이드의 처지가 안타깝다.


이제까지 여러 이유로 신분을 위장하거나, 은둔하거나 탈출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를 많이 봐왔지만, 이 소설처럼 오직 생존을 위해 모든 불안과 위험을 감당하는 이야기는 처음 본 것 같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건데, 실제로도 최근 3년 간 베네수엘라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나라를 떠났고, 그 수가 720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들 각자는 대체 어떤 지옥을 목격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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