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秋雨蕭蕭送薄涼 추우소소송박량
小窓危坐味深長 소창위좌미심장
宦情羈思都忘了 환정기사도망료
一椀新茶一炷香 일완신다일주향

가을비가 소소히 내리며 서늘함을 보내오니
작은 창 아래 단정히 앉아 있는 그 맛이 깊고 깊도다
벼슬살이 시름 나그네 근심 모두 잊어버리고서
향불 한 심지 피워 놓고 햇차 한 잔 마신다네

*고려사람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다.

많은 이들이 가을 단풍에 주목한다지만 가을의 또다른 정취를 전해주는 것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만한 것이 있을까. 올가을 귀한 비로 목마른 것은 식물만이 아니다. 다소 시끄러운 속내를 달래줄 비를 기다리며 옛사람의 마음 한구석에 의지해 본다.

남쪽의 가을은 앞산 무릎에 올라서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山行 산행
閒花自落好禽啼 한화자락호금제
一徑淸陰轉碧溪 일경청음전벽계
坐睡行吟時得句 좌수행음시득구
山中無筆不須題 산중무필불수제

산길을 가다
조용한 꽃 절로 지니 고운 새 우짖고
외길 맑은 그늘 푸른 계곡 따라 도네
앉아 졸고 가며 읊어 가끔 시 되어도
산에 붓 없으니 적으려 할 것도 없네

*조선사람 김시진(金始振, 1618~1667)의 시다.

숲에 들어 한가로운 걸음으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헐거워진 숲에는 까실한 볕이 들어올 틈이 넓어졌다. 누운 나무 둥치에 깃들어 사는 이끼들에게도 볕이 찾아 들었다.

겨울을 건너기 위해서 볕의 온기가 필요한 것은 이끼뿐 만이 아니다. 숨을 쉬는 모든 생명들에게 틈을 열어 온기를 품도록 허락하는 가을숲의 여유로움이 고맙다.

없는 붓을 핑개로 수줍은 감정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는 가을숲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때 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부터 준비물을 마련토록 하여, 차례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까지 한 바퀴 돌아가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돌아가게 한다."

*정약용의 '죽난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에 나오는 문장의 일부다. 죽난시사는 정약용 선생이 시詩 짓는 사람들과 만든 차茶 모임이라고 한다. 나이가 4년 많은 사람으로부터 4년 적은 사람까지 모이니 15명이었다. 이들이 모여 약속한 것이 이 내용이다.

누구는 운치와 풍류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벗의 사귐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전원생활을 이야기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모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가 바뀌어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지면 섬진강 매화 필때 한번, 변산바람꽃과 노루귀 필때 한번, 깽깽이풀 필때 한번, 병아리난초 필때 한번, 솔나리 필때 한번, 바위솔 필때 한번, 상사화 필때 한번, 물매화 필때 한번, 금목서 필때 한번, 대나무에 눈꽃 필때 한번 만나 서로 꽃보며 가슴에 품었던 향기를 꺼내놓고 꽃같은 마음을 나눈다.

챙길 준비물은 따로 있을 까닭이 없다. 꽃 담을 폰이든 카메라든 이미 있고, 그것이 없어도 꽃보며 행복했던 눈과 코, 마음이 있기에 빈손으로도 충분하다. 꽃이 시들해지는 때가 가까워오니 꽃보며 만난 사람들이 더 그리워지는 이유다.

물매화 지고 좀딱취 피었다는데 벗들은 언제 보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확실히 달라진 질감으로 얼굴에 닿는 볕이 아깝지만 붙잡을 도리가 없다. 볕 날 때 그 볕에 들어 볕의 온기를 가슴에 품어두는 수밖에.

향기 또한 다르지 않다. 가을볕의 질감으로 안겨드는 향기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가을볕 만큼이나 짧은 향기가 아까워 한 줌 덜어다 그릇에 옮겨두었다.

하늘의 볕을 고스란히 품었으니 볕의 질감을 그대로 닮았다. 색감에서 뚝뚝 떨어지듯 뭉텅이로 덤벼지는 향기에 그만 넋을 잃어 가을날의 한때를 이렇게 품는다. 다소 넘치는 듯하나 치이지 않을만큼이니 충분히 누려도 좋을 가을의 선물이다.

아는 이는 반가움에 가슴이 먼저 부풀고, 처음 본 이는 눈이 먼저 부풀어 이내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이 향기다. 하늘색 종이 봉투에 한 줌 담아서 그리운 이의 가슴에 안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題三十二花帖 제삼십이화첩
 
초목의 꽃, 공작새의 깃, 저녁 하늘의 노을, 아름다운 여인
 
이 네가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인데, 그 중에서도 꽃이 색깔로는 제일 다양하다. 미인을 그리는 경우 입술은 붉게, 눈동자는 검게, 두 볼은 발그레하게 그리고나면 그만이고, 저녁 노을을 그릴 때는 붉지도 푸르지도 않게 어둑어둑한 색을 엷게 칠하면 그만이며, 공작새의 깃을 그리는 것도 빛나는 금빛에다 초록색을 군데군데 찍어 놓으면 그뿐이다.
 
꽃을 그릴 적에는 몇가지 색을 써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김군金君이 그린 서른 두 폭의 꽃 그림은 초목의 꽃을 다 헤아린다면 천이나 백 가운데 한 둘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색五色도 다 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작새의 깃ᆞ저녁노을ᆞ아름다운 여인의 빛깔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아하! 한 채 훌륭한 정자를 지어 미인을 들여앉히고 병에는 공작새 깃을 꽂고 정원에는 화초를 심어두고서, 난간에 기대어 저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꼬? 하나 미인은 쉬이 늙고 노을은 쉽게 사그라지니, 나는 김군에게서 이 화첩花帖을 빌려 근심을 잊으련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글이다.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 초대 검서관 중의 한 사람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군金君은 박제가의 '꽃에 미친 김군'에 나오는 김군과 동일인인 김덕형으로 본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물매화가 피었다. 봄을 대표하는 매화에 견주어 가을을 대표한 꽃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귀한 모습이다. 더욱 봄의 매화는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이 물매화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 꽃을 만나면서부터 매년 때를 기다려 눈맞춤하고자 애를 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하는 꽃의 표정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만 간다. 급기야는 뜰에 들여놓고 말았다.
 
외출하기 전 눈맞춤은 당연하고 돌아와 곁을 떠났던 짧은 시간 동안 변한 모습까지 놓치고 싶지않은 마음이다. 나이들어 무엇을 대하며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꽃은 늘 깨어 있는 마음을 불어온다. 애써 찾아 꽃을 보는 이유 중 하나다.
 
꽃을 그린 김군이나 그 그림을 보고 심회를 글로 옮긴 유득공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오늘도 저물어가는 시간 이 꽃을 보러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