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크릿>이후 봇물처럼 흘러나온 자기계발서는 이제 서점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옛모습은 간 데 없고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인기 코너가 되었다.

자기계발서가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책이 선을 보이는 작금의 상황에서 나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선택한 책에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도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의 여가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을 때에는 투자한 시간만큼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계발서를 두루 섭렵했다 자신할 수 없는 내가 '자기계발서는 왜 읽는가', '자기계발서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하여 짧은 메모라도 남기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이런 문제로 고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지나친 오지랖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는 저자의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그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 계획과 방법, 개인의 능력과 한계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개선하는데 주력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 불안감, 자아상실 등 내면의 문제를 다루는 책들도 있다.  최근에는 둘을 적절히 통합한 책들도 있지만 그 내용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렇게 더욱 다양한 종류의 자기계발서들이 출판되고 현란한 광고로 독자들을 유혹할수록 독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다.

사실 자기계발서는 그다지 재미도 없고, 커다란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며, 문학서적에 비해 가독력도 떨어지는데 우리는 왜 자기계발서에 열광하는가?

그 이유는 현대인의 지나친 경쟁의식에 있다.  나의 능력을 향상시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은 욕망,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듯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바람은 현대인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불치병이다.  이러한 공통심리를 교묘히 파고든 책이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시험을 앞둔 학생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이나, 신입사원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것을 볼 때 그들을 머리가 나쁘다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아니면 게으르다고 평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일의 우선순위를 모를 뿐이다. 

이렇듯 어떤 일에 있어 우선순위는 성적이나 기업의 손익, 개인의 물질적 풍요와 빈곤 등 그 결과가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 기간을 잘라서 바라본 결과일 뿐 능력이나 태도의 차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을 인지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분명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항상 정해진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무엇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100'이 될 수도 '0'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행히도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함에 있어 우리는 그 결과에만 집착할 뿐 그 시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잘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경험에 의존하는데 단 한 번의 인생을 사는 우리로서는 당연하게도 어떤 일에 허둥대거나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도 하찮은 일에 몰두하게 된다.  우리는 분명 인생이라는 기간 내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또는 자신이 정한 앞으로의 기간 안에 무엇을 먼저 처리하고, 원하는 결과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와 같은 우선순위와 방법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한다.  분명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계발서'가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은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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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읽고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니 조금 버거운 것도 있지만. 내용을 음미하며 읽고자 하는 욕심 때문인지 속도는 아주 느리다.

다 읽지 못하였으니 리뷰는 쓸 수 없겠고, 1911년에 그가 써놓은 좌우명을 올린다.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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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종종 샛길로 새는 경향이 있다.

말을 할 때에도 예를 들어 설명하노라면 어느새 논지에서 벗어나 엉뚱한 길을 헤맨다.

아내에게 자주 지적을 받곤 하는데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따지고보면 밋밋한 큰길보다는 아기자기한 샛길에 볼거리가 더 많다.

학창시절 교문으로 등교하는 것보다 학교 담장이나 울타리에 뚫린, 소위 '개구멍'이라 불리는 샛길을 이용하는 것이 스릴있고 재밌다.

어릴 적 읽었던 '비밀의 화원'이나, 얼마 전 아들과 함께 읽었던 '코랄린'이라는 책에서도 주인공이 샛문으로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들녀석도 나를 의식하지 않고 노는 모습을 몰래 엿보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

옛 선비들이 이르기를 "군자 대로행"이라 했는데 나는 왜 샛길로만 향하는 걸까?

오늘도 나는 몇 번이나 샛길로 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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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면 필수적으로 비용이 따라붙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이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다.

 

1.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돌볼 심적,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찾지 못하여 과다한 의료비 지출을 한다.(과다하다는 것은 소득에 비해 그러함을 의미한다)

 

2. 부자에 비해 외식비 또는 배달시키는 음식에 대한 지출이 심하다.(보통은 '내가 이것 아낀다고 부자되겠냐?'는 식의 자포자기 성향이 강하다)

 

3. 부채로 인한 이자비용이 소득을 초과하는 경우가 많다.

 

4. 토지 또는 자본을 이용하여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계획하고,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계산할 수 없을 정도의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5.비용이 비용으로 그칠 뿐이고 비용이 생산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부자들은 많은 비용을 지출하지만 대부분 그 비용을 상쇄시키고도 남을만한 생산을 유발함으로써 재투자의 의미가 강하다)

 

6. 의외로 부자보다 씀씀이가 크다.(수도물을 아끼지 않는 것, 불필요한 전기를 낭비하는 것, 친지 방문시 큰 돈을 용돈으로 주는 것 등 스스로 관리를 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생각나는 몇 가지만 적어본 것이지만, 가난비용을 최대한 줄여서 부자가 되든 부자로 살면서 가난 비용을 제거하든 선택할 일이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자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모두 부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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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는 시를 읽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시인들은 뉘라 지목할 것도 없이 안 팔리는 시집보다는 여행서나 수필집을 낸다.

그렇다고 시집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간에 잘 알려진 류시화, 안도현, 신경림 등 몇몇 시인들만이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신통치 않은지 앞다퉈 책의 정가를 낮추고 있다.

그외에 시집이라고 눈에 띄는 목록은  수험생들을 위한, 시험 대비용으로 출판된 명시 모음집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시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시인의 속내를 낱낱이 알지 못하더라도, 시가 전하는 그 울림만으로 설레이던 시대가 있었다.

맘에 쏙 드는 시구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며, 제가 쓴 것인 양 얼굴을 붉히던 그리움이 있었다. 

술동무를 옆에 두고, 노래 삼아 시를 읊조리던 젊음이 있었다.

우리는 시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속에 숨겨진 설레임, 그리움, 그리고 젊음의 낭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를 모르고 어찌 문학을 논하랴.

시를 모른 채 어찌 사랑을 노래할 것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시를 제쳐 두고 주옥같은 언어의 향연을 어찌 즐길 수 있으랴.

시는 문학의 태동이자, 끊이지 않는 북소리이다.

시는 언어가 아닌 몸짓이며,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시는 논리를 따라 흐르는 나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흐르는 작은 흔들림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

그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는 무엇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그 통로를 무엇에 의지하여 찾을 것인지....

시를 쓰지 못하는 문학가는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며,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영혼을 잃은 로봇에 불과하다. 

사랑은,설레임은, 그리움은,낭만은 언어가 아닌 시에 숨겨진 떨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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