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폭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
이렇게 가끔 자연은 우리들 앞에 예기치 않은 상황을 펼쳐보임으로써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갑작스러움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점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의 전반을 차지했던 것은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한 혼란과 자신들이 겪었던 불편함과 의미없는 불평이었다.
내가 "아름답지 않아?  3월에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라고 말했을 때 같이 대화를 나누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졸지에 나는 원치 않았던 이상한 놈이 되고 만 것이다.
"아직도 그런 낭만을 간직하고 있으니 좋겠군."하며 어깨를 치는 사람의 표정에서는 신기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의 표정에서도 그와 똑같은 표정을 읽었을 때 나는 새삼 놀랐다.

우리 사회에서(물론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이런 1차원적인 집단적 사고가 관습처럼 굳어 있음을 흔히 보게 된다.
안락과 행복이 최상의 선이며 그외의 것은 악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 또는 집단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갈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러한 순응적 사고는 지금 겪고 있는 '소통의 부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사람들은 생각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의심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비열한 속임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M.스캇 펙 박사가 그의 저서에서 썼던 말이 떠올랐다.
부모나 고용주 또는 정부처럼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위협적인 것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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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마다 실패하였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필요하다면 전국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만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태도에서 확실히 변했다고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나는 본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한마디로 제 의지가 부족한 탓이겠죠."라고 말하며 체념한듯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사고를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 일반인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 부조화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의 사고와 행동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 즉 나의 사고와 행동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의 빈약한 의지력을  탓해야 할까?
오래 전부터 내가 생각했던 인지 부조화 현상은 일종의 '문명병'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과거의 원시사회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미래'라는 단어가 현대인에게는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나 행동 변화에 있어 미래형의 언급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마련이다.  '나는 달라지겠다' 또는 '나는 달라질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켜질 것이라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미래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에는 아무리 그 간극이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상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시간의 벌어짐에서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약간의 유예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자신의 '의지 부족 '이라 인식하게 되고 한없이 자책하게 되는 빌미로도 작용한다.
종국에 나는 하나의 결심마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바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어쩌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관건은 나의 결심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상의 간극을 없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한 시간 전의 '나' 또는 방금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느끼지 못했어도 분명 달라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는 것, 현재의 나는 달라져 있음을 인식하는 자체가 변화의 출발이다.  우리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순간 나의 결심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나 부조화는 소멸되고 만다.
인식의 틀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맞추는 행위는 의지가 아니라 각성의 문제이다.

나의 생각을 그에게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에도 그는 변해 있었다.
매순간 변화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변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별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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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옛사람의 생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생각의 방향이나 영역 면에서 일정한 틀을 유지하는 것은 굳어진 화석처럼 반복되는 관습 속에는 행동과 더불어 생각도 대물림되고 있음이다.

책에 비유하자면 초판에서 내용만 살짝 바뀐 개정증보판 정도라고나 할까?

이런 까닭에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 비해 인문학의 수준이 늘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이라고 믿어온  생각들은  여전히 진실이라 믿고 따르게 되고,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인 양 수용하는 데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행위, 즉 '의심'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은 잊혀진 지 오래다.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3이 무리수임을 증명하기 어렵듯이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은 오히려 설명하기 어렵다.  간혹 우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잘못된 내 생각의 몇몇을 바로잡아 본다.

 

1. '기적'과 '절망'의 거리는 우리의 생각처럼 멀지 않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생각보다 일찍 오면 '기적'이 되고,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절망이 된다. 

    우리는 그 거리를 알지 못한다.

2. 시간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우리는 가끔 게으름으로 뻗대면 시간이 천천히 흐를 것이라 믿는다.

3. 중독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중독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끌리는 현상이라 이해한다.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4. 사랑을 지속하기 어려운 것은 일상에서 비이성적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정은 늘 균형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5. 우리는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넘어선 탐욕을 미워하는 것이다.

6.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분산된 가능성이 한곳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은 추락할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바닥을 딛지 못하는 허공에서 우리는 희망을 말하곤 한다.

7. 사랑에 욕심이 개입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강요한다. 

   일말의 욕심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경우는 '신의 사랑'이 유일하다.

8. 버릇없는 행동은 예절을 지켜야 하는 까닭을 납득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의 무례함만을 보고 있다.

9. 우리는 웃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웃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부러워 하는 것이다.

   웃음에는 항상 노력이 따른다.

10. 삶이 두려울 때는 현실이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 둘 다에 해당한다.

    우리는 현실이 어려울 때만 삶이 두렵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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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이 많으신 할머니께서는 홀로 성당에 가셨고, 늦은 아침을 먹는 내내, 한없이 가라앉는 나를 느꼈었단다.

그래서일까?

너는 조용히 일어나 베란다로 향하더구나.

유리창에 길게 이어지는 빗줄기 너머, 네 시선은 도망치듯 아주 멀리 달아났었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서, 오전내 너는 책만 읽더구나.

물끄러미 네 얼굴만 한참을 바라보았단다.

'아! 네 얼굴에 투영되는 그 고운 마음결이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감탄했단다.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표정에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지.

나는 화장실로 향했단다.

화장실 거울에는 잔뜩 굳은 내 얼굴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단다.

 

아들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몸만 굳어가는 것이 아니란다.

마음 결결이 피어나던 그 많은 표정을 함께 잃는 것이란다.

마음을 숨기며 어색하게 굳어지는 나.

나는 그렇게 교육받았단다.  그렇게 나의 몸은 마음과 차츰 멀어졌단다.

몸은 자라는데 마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음을 나는 미처 몰랐었구나.

 

 

아들아

 

네 마음이 맘껏 즐길 수 있는 곳은 너의 얼굴이란다.

네가 너른 들에서 네 몸을 키우듯이, 마음이 자라는 네 얼굴을 고이 간직하렴.

마음이 숨쉬는 그 공간을 결코 잃어서는 안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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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이 넓으면서도 참 좁구나'라고 생각하는 하루였다.

오후에 알지 못하는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 즉 멀리 군산에서 올라왔다며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만나 뵙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노라며 완강히 버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섰다.

잘 차려입은 30대의 여인.

남편 몰래 여유자금 2000만원으로 시작한 주식투자는 곧 바닥을 보였고, 지인들로부터 빌린 돈으로 원금을 회복하려는 욕심에(어쩌면 원금보다 더 큰 이익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여러 경로로 알게 된 주식 전문가(소위 '고수'라 불리는)의 정보를 받아 다시 시작한 주식거래, 잠시 원금을 회복하고 남을 정도의 돈도 벌어 보았지만, 조금만 더하고 그만두자 했던 것이 빌린 돈마저 잃고 말았단다.

그러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니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2억대에 육박했더란다.  자신은 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고, 학원도 운영했었으며, 남편은 선생님으로 재직중이라 했다.  돈을 갚을 여력도, 남편 볼 면목도 없어 유서를 쓰고 나왔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다시 집에 들어가니 시댁에서 빚을 얻어 자신이 빌린 돈을 갚았더란다.  지금은 자신의 친정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 했다.  주식투자로 원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 했다.  그리고 자신이 거래하던 증권사의 직원을 통해 나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전화를 했노라고.

방법 좀 일러 달라며 매달렸다.

나는 들려줄 말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은 일견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리고 오죽했으면 그 먼 곳에서 예까지 찾아왔을까 동정심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진실로 그녀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나라고 처음부터 수익만 발생했겠는가.  단지 여유자금이 많지 않았던 나는 그리 많지 않은 돈을 잃은 후, 주식 관련 서적과 챠트의 분석에 매달렸다.

주변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을 소개할테니 만나서 배우면 어떻겠느냐 권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남의 옷은 나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내게 맞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당시 시중에 출판된 주식 관련서적의 대부분을 읽었고, 새벽까지 챠트 분석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발 그만 자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전업투자자가 되었다.

나이 들어 육체적으로 약해졌을 때 소일거리는 되겠다 싶어 시작한 주식투자가 직업으로 변한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곳에서 고액의 수강료를 지불하고 주식을 배웠지만 많은 금액의 손실을 보았다며, 자신을 가르쳤던 사람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자연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절대적 법칙을 찾기 어렵다.

주식시장은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스캘퍼,데이 트레이더, 스윙 트레이더,포지션 트레이더가 되기도 하고, 자금 규모에 따라 시장 주도자 또는 이른바 개미 투자자가 되기도 한다.  주식 투자자의 지식 정도에 따라 가치 투자자 또는 묻지마 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많다.  이렇듯 다양한 변수를 지닌 투자자 개개인에게 어떤 강사가 만족스런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강사의 경험과 지식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다면 모를까.

주식시장은 확률적 법칙이 작용할 뿐이다. 확률을 아무리 높여도 100%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패턴을 연구할 뿐이다.또한 주식시장이 머니게임임을 인정한다면 시장 주도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그들에게 편승하면 된다(개인적으로 소위 '작전'이라 불리는 주가조작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  절대로 대항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성격,자금 규모, 지식의 정도, 거래 환경 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최근에 오프 라인의 삶을 지향하며 10여 년을 몸담았던 주식시장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방법만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그녀와 헤어진 지금, 나는 내가 걸어갈 새로운 사업의 방향과 그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

그녀의 축쳐진 어깨가 나를 몹시도 아프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선녀의 장옷이라도 훔쳐서 그녀에게 입혀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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