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하다가도, 박정희의 일본 전쟁범죄 면죄 사건을 대하면서도, 2015년 말 한일 양국 정부의 패륜적인 위안합 합의에 분노하다가도, 국내 수구기득권 세력의 ‘뼛속 깊은 친일 유전자’에 분개하면서도, 늘 느꼈던 것이 ‘일제 침략 및 학살사’에 대해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분히 시간 나는대로, 관련 서적을 통해 ‘일제 침략 과거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찾아본 책이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다.

 

이 책은 재일사학자 강덕상이 2003년에 출간한 <관동대진재 關東大震災. 학살의 기억>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저자가 초판을 발행한 1975년으로부터 24년이 지난 1999년, 역자 김동수가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 객원연구원으로 있을 때 처음 발견했다.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불안과 지배 심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관동대지진의 재앙, 재일 조선인 6천여 명 이상을 대량 학살한 그 참혹한 기억을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났던 재일 조선인 대량학살(최소 6천명)의 진상을 방대한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파헤친다.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는 사진과 도표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일본 내 각종 자료와 문서, 증언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참혹한 기억의 현장에 다가간다. 

 

수많은 증언과 기억들을 통해 되살아나는 학살의 기록들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와 군사기록을 비롯하여 정부 고위관료의 수기, 당시의 신문 기사, 일반 시민.말단 경찰.군인의 증언 등이 현장감 있게 전개된다. 

또한 당시 경찰과 군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엄령과 학살을 진행해갔는지 정확하게 읽어내며,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움직였던 제국주의의 지배심리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그리고 당시의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시켜 기록했던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계엄령의 발포 시점과 조선인 관련 정책, 희생자 조사 등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도 일본당국이 지닌 식민지 전쟁의식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권력의 중추에 있는 관료와 군인은 1918~1920년 사이의 식민지 전쟁(기미독립항쟁, 국내에서 ‘3.1운동’으로 명명되는…)을 수행할 때 제일선에 있었던 자가 의외로 많다. 그 현장에서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었을 때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본에 적대 의식을 가진 세인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권력의 와해를 틈타 혹시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예단으로 선제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엄령의 발동이었다. 최강의 권력으로 변한 계엄권력 아래에서 관민(官民) 일체의 대학살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이런 추론을 반증해 준다. 적대시하는 시각이 엾었다면 계엄령도, 학살도 없었을 것이다.”(9쪽)

 

한편 저자는 식민지 지배시기부터 현재까지 일본 민중과 정부 모두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재일 조선인 차별의식의 깊은 뿌리에 접근해간다. 당시 관헌의 업무지침으로 상세하게 하달된 조선인 식별자료, 조선인 감시 명부, 감시 상황, 조선인 유학생 관리 명부 등을 상세히 소개하며, 식민지 지배사상에 오염된 일본인들의 조선인 차별관은 어느 정도였는지, 관헌의 편견과 조선인 적대정책은 어떻게 현실화되었는지 상세히 소개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이 또다시 참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대다수 정상적인 국가들은 자국 내 주권자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한국인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 묶여 있는 조선인들은 조국으로부터 다른 대접을 받아왔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내에서 살아갈 수 없거나 일제의 사기행각에 속아 일본으로 넘어간 후, 일본에 체류하다가 일제에 의해 학살, 징용, 징병당한 것에 대해 역대 한국정부가 무관심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한국정부와 정치권은 해방 이후에도 재일동포에 대해 아무런 조사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물론 현재도 그런 상태는 이어지고 있다. 역대 정부뿐 아니라 대다수의 야당, 지식인, 진보단체, 시민사회종교단체 역시 재일동포의 수난사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정부에게 관심을 제대로 촉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재일동포 사학자나 연구자들이 재일조선인과 재일동포의 수난사를 조사하고 기록하고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일부 헌신적인 연구자와 활동가들도 이에 해당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정부가 아닌 민간분야에서 조금씩 일제의 잔혹사를 연구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관동대학살 유족 "日, 6천명 죽이고 93년 외면…유골이라도" http://cbs.kr/FJ8uec

˝사실을 잊은 민족과 기억하는 민족은 앞날이 달라˝ http://chosun.com/tw/?id=premium*2016090600702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일본 정부 관여로 시작" #강효숙 #김성수 #조선인학살 #관동대지진 김성수 기자 http://omn.kr/9ykp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뿌리가 친일매국노였다는 과거가 여전히 현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과거’일 뿐 아니라 그들이 ‘현재의 권력’이라는 데 있다. 친일은 배신과 탐욕과 부정과 폭력과 굴종의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박근혜와 그들과 함께한 집권여당으로 이어지는 정치권력의 역사가 현존하고 있으며, 삼성과 두산 등 일제와 친일권력에 빌붙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해온 재벌들의 경제권력, 그리고 법조계와 문화계, 학계와 종교계까지 친일의 뿌리가 줄기가 되고 가지가 되고 심지어 잎사귀까지 되어 한국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도시라고 있다. 현재의 한일관계와 기득권층의 태도가 그런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숫자는 전체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잡고 있던 권력과 부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동일한 정치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영향을 끼쳐왔고, 상당 부분 구조적 체계적으로 얽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뿌리를 뽑아내기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세대가 꾸준히 태어났고, 대다수 한민족과 한국인들이 단 하루도 굴함 없이 친일세력과 부정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온 항일투쟁과 저항의 역사 또한 이어져 왔으니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내리라 믿어 본다.

 

[ 2016년 10월 26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격의 탄생 - 뇌과학,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성격의 모든 것
대니얼 네틀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대니엘 네틀, 김상우 역 <성격의 탄생 Personality : What makes you the way you are was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in 2007> 2009 와이즈북


이 책은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된 성격심리학 소개서이다. 성격심리학은 서구식 일반심리학에 진화론, 진화심리학, 유전학, 뇌과학 등을 적용한 후 개인의 성격을 중심으로 심리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문제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행동한다. 이런 차이는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 성격 여하에 따라 인생사는 확연히 달라진다. 나의 세계관, 직업, 인간관계 모두 성격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 책은 이런 차이의 근원인 성격의 문제를 규명하고 있다.”

필자는 사람들이 눈 앞에 닥친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상당히 많고 그 개별 이유들 역시 서로 복합적이고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성격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서구에서 태어난 사람은 서구라는 지역, 사회, 문화, 교육, 역사, 언론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지식과 성격이 구성되고 그에 근거하여 어떤 문제나 상황에 대해 자신의 가치판단을 하고 행동에 옮기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저자가 처음 설정하는 연구 주제 또는 명제가 기존 지식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경우에 이런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우선, 저자는 모든 사람에게 성격수치를 부여할 수 있는 ‘5대 성격특성’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을 인간 성격에 관한 흥미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5대 성격특성은 ‘외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이다. 이 5대 성격특성을 기본 틀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토리와 과학적 연구를 토대로 성격의 특징과 장단점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그런데 영국인 545명과 여러 국가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각국에 몇명~몇십명에 불과한 사람들의 성격을 통해 전체 인류의 성격을 유형화시키고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과학적 성과’나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그냥 ‘통계’ 수준이 적당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최근 심리학계에서는 성격이 이 5가지 성격특성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 5가지로 모든 사람의 성격점수를 낼 수 있고, 이 성격점수를 알면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인생사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2013년 현재 71억 명에 달하는 전세계 인구의 성격을 5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데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마치 전세계 인류를 인종별로 나누어 사람의 성격을 규정지으려는 ‘인종주의’ 비슷한 게 느껴진다. 심리학계가 ‘5가지 성격특성을 합의’한 것이 5대 성격특성이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다수가 합의한 것은 ‘권력’이 될 수는 있어도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성격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저자는 유전학과 뇌과학 분야의 최신 연구결과들을 소개하고, 성격이 서로 다른 진화론적 이유를 살펴본다. 독자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진단할 수 있도록 앞부분에 ‘성격진단표’를 첨부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특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가 아닌 집단과 사회를 구성하고 대화와 토론을 하여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고 서로에게 조언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진단표’ 메뉴의 수십 가지 항목을 체크하여 자신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규정을 자신의 성격으로 인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혼자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터무니 없는 자신감 내지 자만심을 부추기는 주장이나 이론이 사회 전체적으로 서구식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남발을 가져오는 원인 중 한 가지가 아닌가 걱정될 정도이다.


저자는 성격의 약 50퍼센트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며,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이유는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성격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해설과 동물 진화와 관련된 사례들로 '만들어진 성격'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렇다면 성격의 나머지 50 퍼센트는 환경의 영향일까? 이 책은 양육환경, 가족환경 등이 성격 형성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전개한다.


저자는 일란성 쌍둥이 연구 등 권위 있는 연구결과들을 소개하면서, 성격의 약 50퍼센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며,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이유는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격이 유전된다는 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이유를 설명하는 저자의 논지는 매우 새롭다. 

사람마다 성격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방황선택’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좇는 진화과정에서 어떤 환경에서는 A라는 성격이, 또 다른 환경에서는 B라는 성격이 자연선택되는 진화 모델이 환경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되풀이되면서 다양한 유전적 차이를 낳았고, 이것이 65억 인구만큼 다양한 성격을 낳았다는 주장이다. 인간 성격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해설과 동물 진화와 관련된 광범위한 사례들이 교차되면서 ‘만들어진 성격’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사람은 생존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좇기도 하지만 집단을 이루어 생존에 유리하도록 외부적인 조건과 환경을 의식적으로 바꾸기도 한다는 것은 이제 인류 전체에는 상식에 속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화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장구한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가 탄생하고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정도까지 성장하기까지는 인류가 ‘적응’과 ‘선택’이라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집단적인 ‘개조’와 ‘창조’라는 적극적인 태도로 변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가족환경은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즉 양육환경, 가족환경, 어머니와의 애착관계, 형제서열, 태아환경, 키/몸매/매력/지능 등의 육체적 특징이 성격 형성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가장 쇼킹한 주장은 가족환경이나 가족관계가 성격 형성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로, 우울증과 이혼을 겪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똑같이 우울증과 이혼을 겪기 쉬운데, 그것은 자녀들이 부모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애당초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형제서열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데, 이는 부모의 자원을 놓고 벌이는 형제 경쟁이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프랭크 설로웨이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다. 저자는 설로웨이가 모범적인 성격 데이터가 아니라 역사적, 생물학적 정보만을 기초로 했다는 학계의 문제제기를 언급하고 있다. 수많은 가족 사례 연구와 일란성/이란성 쌍둥이 연구를 통해 저자는 성격과 환경의 연관성을 과학적,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우울증이나 이혼에 대한 ‘유전자 이론’은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의 우울증과 이혼이 환경이 아니라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면, 부모의 우울증과 이혼 유전자 역시 그들의 부모에게 물려받았다는 주장이 성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부모의 부모로 거슬러 올라가 자식의 수십, 수천대 조상은 이혼을 하는 유전자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 논리라면 인류 탄생 순간부터 우울증이나 이혼이 존재하게 되고, 대를 이어 우울증과 이혼 유전자가 증가하여 21세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인류에게 우울증과 이혼 유전자가 존재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이런 주장이나 이론은 사람의 성격이나 가치관, 행동들이 부모 및 조상의 유전자에 기인한다는 ‘조상탓’ 이론에 불과해버리게 된다. 결국 저자의 ‘성격심리학’은 사회와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사람과 인류의 의지와 노력을 폄하해버리는 거의 중세기적 사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인간 성격을 규명하는 다양한 심리 실험과 뇌과학 이야기도 펼쳐진다. 걱정, 불안, 슬픔, 기쁨, 행복감 등의 감정과 관련된 뇌 메커니즘을 밝히면서 성격이 뇌신경과 유전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많은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한다. 마약, 도박, 알코올에 빠지는 사람들, 우울증과 신경과민인 사람들, 외향적인 사람들의 뇌 구조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격이 단지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뇌과학으로 풀어야 할 숙제임을 지적한다. 인간의 성격특성(외향성, 친화성, 성실성)을 밝혀내기 위해 행해진 다양한 심리 실험과 추적조사(아이오와 도박과제, 침팬지 실험, 독재자 게임, 터먼의 아이들 사례 연구 등)는 인간 성격의 파노라마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복잡한 성격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한 뇌과학 이야기는 ‘5대 성격특성’을 소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뇌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라는 문장만으로 근거를 찾았다고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근본적인 성격은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의 성격을 표현하는 행동과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행동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성격이 가진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할 수 있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순방향 행동을 택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단점을 최소화하는 역방향 행동은 자신의 성격에 역행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자신의 뇌를 억지로 써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통해 성격으로 초래되는 문제를 줄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면 노력할 가치가 있다. 삶을 보는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예컨대, 가난한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대신 ‘무소유’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특히 삶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강한 신경성이 높은 사람들은 인지행동요법 등을 통해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 책을 심하게 평가하면 “운명에 순응하라” “조상탓을 하라” “자신과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 마라”는 주장을 ‘성격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풀어쓴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성격에 따라(부모의 유전자에 따라) 세계관과 인간관계가 결정되고, 직업이 결정되고, 소득이 결정되고,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헬조선’이 사회경제적인 구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노오력’이 부족하고 ‘성격이 별로’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 2016년 9월 4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서평]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살해당하고 있다 <게 가공선>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저, 서은혜 역 <게 가공선 蟹工船>을 읽고 / 2012.10, 214쪽, 창비


<게 가공선>은 먼 바다 위를 떠도는 노예선 같은 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29년 일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돼지우리와 같은 환경과 폭력이 난무하는 비참한 노동현장에서 벌어진 투쟁과 반란을 담았다.

이 작품은 먼 바다를 떠도는 거대한 배를 무대로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드러내고 노동자의 자각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그려내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읽힌 대표작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준을 사상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일본 근대문학에도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코다테 항구에 광부, 농민, 빈민굴 소년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배를 타고 넉 달 동안 캄차카 바다에서 게를 잡는다. 그 배의 상황은 끔찍하다. 숙소는 악취가 들끓어서 똥통이라 불렸고 이가 들끓었다. 작업을 게을리하는 자는 “쇠막대기를 시뻘겋게 달구어서 몸에 갖다 대겠다는 협박”을 들어야 했다. 폭풍이 몰아쳐도 게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야 했다. 

어선은 부정부패에 힘입어 ‘항해선’이 아니라 ‘공장선’이 되어 항해법을 적용받지 않는다. 선장과 선박회사는 공무원과 해군을 극진히 대접한다. 일하다 병들어 죽은 사람은 바다에 던져졌다. 그곳에 모인 거의 모든 이들은 평생 늘 뭔가 해 왔다. 국토 개척, 관개 공사, 철도 부설 등이었다. 그런데도 극도로 가난했다. 홋카이도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다코’(문어)라고 불렀다. 정부도 군대도 그들이 편은 아니었다.

어부들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문어는 살기 위해선 자기 팔다리까지 먹어치운다지, 이것이야말로 우리와 닮지 않았나, 어쨌든 죽고 싶지 않아. 캄차카에서 죽고 싶지 않아…아니 이미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게 가공선>을 발표했을 당시, 작가는 일본공산당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면서 지하조직으로 옮겨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집필과 헌신적 활동을 계속하다 1933년 2월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한다. 경찰 당국은 사인을 정확히 규명하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그의 작품들을 금서 취급하는 등 사후에도 철저하게 박해받았다.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노동 현실이 척박해지면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게 가공선>이 다시 인기를 끌며 새로이 주목받았다.


<게 가공선>은 발표된 지 80여년이 지난 후, 장기불황과 금융위기로 고통을 겪던 일본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으며 30만권이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일본공산당에 1만여명이 새로 입당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공산당 입당이 증가한 것은,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융합해 내달리던 시대에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착취 속에 신음하던 노동자들을 향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살해당하고 있다”고 외치다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라 한다.


2012년 창비가 처음 작품을 번역해 출판했을 때, 경향신문은 "지금 일본 사회에선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인 근로자들이 '게 가공선이네'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요절한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대표작 <게 가공선>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했다.


‘게 가공선’의 이미지는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의 젊은세대들이 자조적으로 내뱉는 '헬조선'과 비슷한 느낌이다. 세월호 참사와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스펙 경쟁에 치이는 젊은이의 처지는 <게 가공선>이 그린 지옥 같은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고공농성장과 시멘트바닥, 광화문 세월호 천막과 병상에 누워계신 백남기 농민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 2016년 8월 2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역사와 책임>

한홍구 교수 저 <역사와 책임>을 읽고/  2015. 4., 271쪽, 한겨레출판


지진이나 기상이변과 같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어떤 대비책을 세우더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아직 속수무책이다. 미리 예측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자연은 인간의 예측을 쉽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재(人災)는 다르다. 인재는 인간의 오만과 무책임과 탐욕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시스템과 구조나 문화, 정치와 제도가 왜곡되어 있으면 인재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2014년 세월호 참사도 인재에 해당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세월호 참사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했고, 참사 이후의 과정 역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해경과 해양수산부의 무능함과 무책임은 ‘해피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청와대와 행정부 그리고 여당은 대형 참사에 대응할 능력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과오와 치부를 감추는 데 급급했다. 언론과 방송은 정부와 공안기관이 불러주는 데로 받아쓰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오히려 정부와 함께 피해자와 선의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진실을 규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겁박한다. 야당은 쓸모가 없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면서 300명 넘는 승객들에게 버려두고 속옷 바람으로 도망가는 선장(이준석)과 선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결사항전”이라며 라디오에 녹음기를 틀어놓은 후 한강다리를 끊고 먼저 도망친 이승만과 국방장관, 관료, 정치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승만이 다시 환생한 것처럼, 대통령 박근혜는 국내에서 대형 정치사회적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늘 해외로 줄행랑을 친다. 귀국하면 늘 “가만히 있으라” “색출, 엄단”이라며 국민들을 협박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 전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행정부와 정치권과 언론의 모습에서 한국현대사의 숱한 기억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저자 한홍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은 역사학자인 저자가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세월호 참사’와 똑같은 장면을, 아니 21세기에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사를 돌아보았다.


저자는 현재 집권세력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과 집권세력의 모습에서 찾기 시작한다. 당시 이승만과 집권세력은 ‘북진통일’이라는 호언장담만 일삼다가 정작 전쟁이 발생하자 서울시민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 그리고 미군을 따라 서울에 돌아온 후, 그들은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을 사수하고 지킨 서울시민 수백 만명을 재판도 없이 즉석에서 학살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연좌제로 묶어버렸다. 당시 ‘처리’된 부역자는 약 56만 명이었다.

또한 이승만과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한강다리를 폭파한 일선 장교와 육군참모총장은 폭파의 책임을 뒤집어 씌고 처형되고 살해되었고..


1960년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 고등학생의 죽음은 이승만과 집권세력의 실탄 발사를 통한 강경진압 때문이었다. 당시 김주열 등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직발사하도록 지시하고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한 자는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경위 박종표였다. 

박종표라는 자는 1949년 4월에 반민특위에서 ‘아라이 겐기치’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악질 헌병 보조원으로 활동했던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친일 경찰들의 습격으로 무력화된 반민특위는 그해 8월 박종표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박종표는 4월 혁명 후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에 갇혔으나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군사정권은 5.16 쿠테타 이후인 1968년 그를 풀어주었다.)

반민특위 해체 이후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 노덕술이 헌병으로 업종을 바꿔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몰아 학살했고, 박종표는 반민특위 이후 헌병보조원에서 경찰로 업종을 바꿔 이승만의 충견이 되어 김주열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던 것이다.


해방 후 분단과 전쟁을 거쳐 악질 친일파들이 독립세력과 양심세력을 대거 학살하면서 대한민국의 권력을 거머쥔 것이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공안 권력의 비밀인 셈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공안권력은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중추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수많은 마피아 집단들은 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해피아’뿐 아니라 재정경제부 출신의 ‘모피아’, 국토건설부 출신의 ‘건피아’, 교육부 출신의 ‘교피아’ 등등 정부 부처 개수만큼이나 많은 관료 출신 마피아를 하나하나 따질 수 없어 ‘관피아’라 부른다.

공안 권력의 형님, 아우, 삼촌, 조카, 언니, 오빠, 누나, 동생들이 각계각층의 마피아가 되어 빨대 하나씩 꽂고 설계 변경하고 노후수명 연장하고 규제 완화하고 서로 전관예유 전통 물려주고 밀어주고 당겨주며 오순도순 사이좋게 대한민국을 운영해왔다. 다 밟아버린 줄 알았던 빨갱이들이 되살아나기 전까지.”(40쪽)


이 책의 2~3부에서는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공안권력을 이용해 양심적인 인사들과 애꿎은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례와 진정한 ‘국기문란 반역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통합진보당, 그리고 애국민주인사들을 간첩으로, 내란으로 조작하여 학살하고 탄압한 사례를 보여준다.

4부에서는 ‘한국 사법 엘리트가 살아가는 법’을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보여준다.

5부에서는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 ‘영구적으로’ 미군에게 넘겨준 대한민국의 군사작전권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그리고 ‘전통야당’과 ‘정권교체’를 부르짖는 현재의 야당들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보여준다. 현재의 보수 야당이 왜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최악의 현대사를 보내온 대한민국이 그나마 어느 정도의 공동체와 양심과 자유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에게 희망이나 가능성이 있는가. 저자의 대답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해방 후의 역사만 보더라도 세월호보다 더 끔찍하고 광범위한 참사를 당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한강다리 끊고 도망가고 선장이라는 자가 혼자서 속옷 바람으로 도망쳐도, 기관장, 항해사, 갑판장 등속이 다 무책임하게 도망쳐도 대한민국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시민 대중들이 간직한 복원력 때문이다. 믿을 것은 우리 자신밖에,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온 역사밖에 없다. 호흡을 길게 가져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아마 백 번도 훨씬 넘게 강연을 다니면서 세월호 사건의 역사적 뿌리에 대해, 세월호 사건을 통해 본 한국 현대사에 대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던 말로 머리말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11쪽)


"바로 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인상 깊은 문장-


“한국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장군의 스물여섯 살 새신랑이었던 아들은 아버지의 예순 살 생일을 축하해주고 얼마 후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미군 장성의 아들 중에 아버지와 함께 한국 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145명이고, 이 중 35명이나 전사하였다고 앞에 인용한 페런바흐는 쓰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성의 아들 중에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경우가 있는가? 과문이지만 들어본 적이 없다.”(43쪽)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은 사무장 양대홍은 부인의 애타는 전화에는 응답하지 않고 끝내 퇴선 지시를 내리지 않은 무전기를 꼭 쥔 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구명조끼 가모자라자 "내 거 입어” 하고 선뜻 벗어준 학생, 그와중에 아기부터 탈출시키던 아이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끼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아이들 곁에서 선생 노릇 하고 싶어 했던 교감 선생님, 아이들과 함께 가라앉은 선생님들, 그리고 겨우 매점에서 물건 파는 어린 알바생이면서 "선원은 맨 마지막에 나가는 거야.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 거야"라며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호의 악마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책임 감을 보인 박지영....... 


이들이야말로 구조변경에 노후수명 연장에 과적에 규제 완화에 온갖 비리와 뇌물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대한민국호가 여태껏 가라앉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숨은 복원력이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51쪽)


[ 2016년 8월 21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하는 사람의 철학 이야기 2 일하는 사람의 철학 이야기 2
김세준 지음, 소희 그림 / 615(육일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서평]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이 희망이다 <일하는 사람의 철학이야기 2>

김세준 저 <일하는 사람의 철학이야기 2>를 읽고 / 2013. 12., 237쪽, 615출판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를 어려워하는 학생 등 초보자를 위한 철학이야기...

저자는 대한민국을 ‘자살공화국’으로 만든 중요한 원인 하나를 '철학적 빈곤’이라 주장한다. 만일 자살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올바른 세계관과 가치관,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래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자살이 아니라 보다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빈곤이라는 사회적 폭력과 맞섰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 권위를 획득한 유일한 종교적, 철학적 사조는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전환되는 화폐지배체제에서 철학의 빈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빈곤이 한국 사회를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만큼 올바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주는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바로 철학입니다. 우리에게 철학이라는 무기가 있는 한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심지어 강제수용소에서조차, 우리는 삶의 전투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철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출간하고 있는 저서가 바로 <일하는 사람의 철학이야기> 시리즈다. <일하는 사람의 철학이야기> 시리즈 1권은 2011년 말에 출간되었고, 이어 2년 만에 2권이 출간되었다. 우연하게도 필자는 2014년 1월에 1권을 읽은 데 이어 2년 만인 지난 6월에 2권을 읽었다. 
1권에서 저자는 철학의 기원과 개념, 철학의 탄생과 변천, 철학이 다루는 문제, 철학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독자가 가져야 하는 관점, 기존 철학이 해결한 문제와 남긴 문제, 개인의 판단과 행위에서 철학이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20~30대 젊은이에게는 설득력 있는 호소력과 진지한 내용으로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철학하기의 목적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하기 위한 것”이라는 문장이 철학에 대한 저자의 요지다. 230년전 칼 맑스가 선언하던 근본적인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하는 사람의 철학이야기> 시리즈 1권이 ‘철학과 세계’에 대한 철학이야기라면, 2권은 ‘사람과 세계’에 대한 철학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저자는 2권의 큰 목차 제목을 “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정리했다.

저자는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200년을 주도했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맑스가 "물질 중심의 근본원리에 철저히 근거해 사람과 사회, 역사의 모든 원리들을 이론적으로 전개하면서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사람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사람을 소외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가 맑스의 ‘역사발전의 합법칙성’과는 다르게 후발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사회주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다. 
"물질 중심의 철학원리는 사람을 둘러싼 주위세계에 대한 객관적 과학적 해답을 줄 수 있지만, 사람의 본질과 사람과 주위세계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주기 어렵다. 사람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25쪽)

이에 따라 저자는 ‘사람은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주인’이며,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사람과 세계에 대한 철학원리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람은 세계와 자연에게 영향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세계의 운동과 변화 발전에 작용하는 여러가지 요인들 중에서 사람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31쪽)이라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세계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셈이다.
“인류의 철학적 사유는 사람 중심의 근본원리에서 출발할 때 사람의 운명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에 마침내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운명의 길찾기는 사람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지위)를 정확히 알 때 비로소 시작되며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야 당당하게 운명과 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32쪽)

사람이 동식물과는 달리 자연 등 외부세계로부터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취지로서 ‘사람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 능동성을 뛰어넘어 자연과 세계를 ‘인간의 소유’라는 의미로 확대되거나 ‘인간의 마음대로 개조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공감할 수 없다. 자연과 세계 그리고 지구와 우주는 '인간만의 소유물’도 아니고 ‘인간의 창조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세계 그리고 지구와 우주가 없이 인류는 탄생할 수조차 없었으며, 단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실제 인류가 신과 자연과 세계의 지배에서 벗어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류는 ‘자연과 세계의 주인’이라는 오만방자함이 극에 달하여 자연과 세계에 대한 너무도 많은 피해를 주고 엄청나게 훼손시켰다. 근현대사는 소위 선진 자본주의 국가 등 일부 인류의 범죄적 행위로 인해 자연뿐 아니라 대다수 인류에게도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음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또한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사회적 관계의 영향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를 주도하고 사회를 개조, 변혁시키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에 의존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지배합니다.”(115쪽) 즉 저자는 리차드 도킨스 등 진화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이기적 유전자’가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며, 진화나 유전에 의해 ‘사이코패스적 유전자’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기적 유전자도 사이코패스 유전자도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같은 사회적 관계와 사회경제체제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본성은 ‘남에게 의지함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해 나가려는 성질’을 가진 ‘자주적이며 사회적인 속성’이며, 자연과 세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사회적인 속성’라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동물과 달리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의 의식은 개인적, 개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집단적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사회적으로 형성, 변화되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인간)’은 사람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소수가 강압적인 기득권 권력으로부터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철학적 원리와 사회적 속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철학적 원리와 사회적 속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선언적이고 규정적이다. 논리적인 과정과 합리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사람, 인간, 인류에 대한 과거 학자들의 장구한 연구와 성과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도 부족하다. “자주성이 없는 사람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125쪽)과 같은 대목에서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느끼기도 어렵다.
그런 면에서 사람, 인간에 대한 철학적 논리적 탐구과정은 사회심리학자 김태형의 <싸우는 심리학>과 철학 교수 출신 이병창의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결론으로 내린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문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 2016년 8월 16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