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
장영철 / 사회평론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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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교수의 <법정증언>을 통해 알게 된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언론 인터뷰와 <법정증언>에서 인용된 문장은 "연변에서 온 동포 직업연수생들이 남한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멸시당했으면 집으로 돌아가며 '만약 전쟁이 다시 한 번 난다면 총을 들고 선참으로 한국에 와서 그놈들을 쏴 죽이겠다'는 악담을 퍼부었겠는가"였다. (기사 :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이재봉)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719&ref=twit)


 

이 책은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으로 가서 한국대 사관을 통해 망명한 저자가 귀순하기까지의 과정과 귀순후 서강대 학생으로 다시 시작했던 한국에서의 생활, 샐러리맨에서 평양냉면집을 계획하기까지 낯선 한국에서의 삶을 밝히고 있다.


 

저자 장영철은 1966년 황해남도 배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조선노동당 리당 비서였고, 인민학교 시절 아버지는 배천 자동차공업소 지배인이었다. 북한에서 일종의 중산층이자 주류에 속한 가정이었던 셈이다.

한국의 포항공대나 카이스트 정도로 보면 될 김책공업대학 지질학부를 다니다가 북한 당국의 지원으로 동독에 유학을 갔다. 북한 전역에서 20년 만에 파견되는 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미래 엘리트였던 셈이다.


 

장영철은 유학생활 초기부터 동독에서 문화적, 경제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말한다. 생맥주, 남녀교제, 애정표현, 영화, 수세식 화장실, 마트의 상품진열 등 북한에서 배우고 알던 상황과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나는 나이만 먹었지 그런 방면에서 아직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애정표현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지내는 내 청춘이 억울했다.”(51쪽)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상, 김일성 주석과 북한 체제에 대한 인식 등과 관련해서도 다른 국가의 유학생들과 충돌도 잦았다. “그의 날카로운 지적들은 그 후 나의 독일생활에서 비판적 시각을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느새 김일성 배지는 문제를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것은 결코 북한을 선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유가 없는 독재의 나라의 상징적 물건이 되었다.”(62쪽)


 

그렇게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 동독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장영철은 유학생활 3년이 지난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서독으로 도망갈 결심을 한다. 그는 도피자금 마련(2천 마르크)을 위해 유학생활 중 알게된 광산회사의 프로젝트 소프트웨어를 몰래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1989년 11월 베를린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한다. 그와 함께 넘어 온 사람이 바로 코미디언으로 알려진 전철우씨다.


 

아무튼 장영철은 1991년 서강대에 입학했지만 대학과 학생들 속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농남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북한과 많이 다른 문화와 언어에 익숙해지기도 어려웠다. ‘자유대한(?)’에서 데모하는 대학생들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히 ‘북한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그를 괴롭혔다. “언제나 따라다니는 ‘북한 사람’이라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나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이방인처럼 눈만 두리번거렸다.”(120쪽)

서강대 91학번이면 아직 노태우 정권 시절이다. 노태우 정권은 직선제라는 형식을 거쳤을 뿐, 전두환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이었고 박정희-전두환 체제에 편승하고 기생한 이들이 장악한 사회체제였다. 그리고 1992년에 당선된 김영삼 정권 역시 겉으로는 민간정부였지만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종필의 공화당이 합당한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이었다. 북한체제의 폐쇄성과 독재체제에서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장영철이 그런 한국 사회체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아니러니다. 물론 장영철도 한국의 체제가 자신이 염원했던 ‘자유대한’에 가깝지 않아 스스로 혼란스러웠음을 고백한다.


 

장영철이 대학을 졸업한 것은 1995년이다. 그 이후 그는 방송사 PD, 작가의 꿈을 깨고 포스코에 입사해 자재관리부에서 샐러리맨으로 살았다. 후배들은 그의 회사자랑 소리가 듣기 싫어 그를 만나기를 꺼려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 책이 출간되기 얼마 전 친구의 꼬임(?)에 빠져 남들이 부러워 하는 대기업 직장을 때려치웠다. 갑자기 방송인 전철우씨와 일산 자유로변에 평양식 냉면집을 차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서른 살 총각사장이 된다.

그가 이 책을 출간했을 때에는,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다른 샐러리맨들처럼 한 달에 몇 천만 원의 수익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꿈꾸고 있었다.


 

장영철이 이 책을 출간한 가장 큰 이유는 책의 제목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에 나타나 있다. 장영철이 책의 초반에 자신이 한국으로 탈출한 이유와 과정을 밝혔지만, 그가 책을 통해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이해’와 ‘민족동질성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제2부 ‘남한 사람이 북한을 이해 못하는 이유’와 제3부 ‘김책 공대 82학번, 서강대 91학번’에 걸쳐 장영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남한 대학생들은 북한 노래를 ‘촌스럽다’고 느끼고 평가한다. 북한 사람들은 술자리를 하다가  남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남한 노래가 꽤 알려져 있다.

“귀순 직접 동기 80%가 여성과 얽힌 문제 해결”이라는 <월간 중앙>의 제목. “티눈 만한 사실을 전체로 확대 해석하여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남의 삶을 마구 헤집어 놓는 회포성, 상업적 가치만 있다면 자기 아버지라도 팔아 넘길 듯한 그 살벌함, 그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보아 넘기에는 우리들이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158쪽)

코메디나 교양 프로에서 나오는 북한사람들의 의상과 언행으로 이미지화되는 ‘북한의 촌스러움’ “북한의 주민들은 한없이 바보로 만들고, 또 그들 위에서 군림하는 고위층들은 끝없이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한국의 매스컴이다.”(162쪽)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네 삶의 처지에 맞는 상황을 이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배고프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미국 식민지로 고통받고 남조선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는 당국의 선전을 곧잘 이해하지만, 남한 어린이들은 ‘배고프면 라면 먹지’라며 굶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167쪽)

“과거 귀순자들이 하던 역할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구태여 귀순자들을 등장시켜 북에 대한 남의 우월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미미한 가치는 남아 있다. 그러나 한둘이 와서는 더 이상 흥미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단위의 집단이 오거나 북의 고위층이라야 받아준다. 선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338쪽)


 

대체로 위와 같은 내용들이, 장영철이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을 이해하도록 설득하는 대목들이며, ‘민족동일성 회복’을 위한 그의 노력이다.

이 책의 가치는, 탈북자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폄하를 고발하는 것이다. 탈북 후 제대로된 교육과 일자리 기회를 준비하지 않은 채 정부와 탈북단체에서 탈북을 기획하고 부추기는 행태도 비판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를 읽은 독자들이 책을 통해 받을 느낌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부정적 혐오적 시각’과 ‘북한 인민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될 것이다. 장영철이 애초에 의도했던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이해’와 ‘민족동질성 회복’은 이 책을 통해서는 여의치 않다.

그는 책의 머리말부터 마지막 단락에 이르기까지 북한 체제와 지도부, 북한의 사회문화, 북한 인민들의 태도와 생활에 대해 부정적이고 동정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 가지 컴플렉스도 극복하지 못했다. 말로는 남한 언론과 사람들이 ‘북한의 촌스러움’과 ‘북한의 주민들은 한없이 바보로 만들고, 또 그들 위에서 군림하는 고위층들은 끝없이 영웅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면서도 초지일관 북한 인민들의 장점과 살아가는 동력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북한도 “사람이 사는 사회”이고, 남한과 비슷한 명절을 쇠고 비슷한 놀이와 문화를 갖고 있으며, 순박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산다는 점을 강조하지 못한다. 결국 장영철도 국내외에 존재하는 극우적이고 일방적 냉전적 사고방식인 ‘흡수통일’이라는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대북비방 전단 살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추구했던 2000년과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과 교류 시기에 장영철의 소감과 움직임이 궁금했지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다.)


 

적지 않은 국내외 학자들과 정치인들도 북한 체제와 지도력 성립의 역사, 냉전과 체제봉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했던 북한의 노력, 북한 지도부와 인민들의 관계, 북한 내 사상철학의 장점과 단점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 회복과 동북아 평화를 위한 대화를 통한 평화회복을 주장한다.

장영철이 아무리 북한체제를 버리고 남한으로 귀순한 처지라고 해도, 남북관계 회복과 민족동일성 회복을 위한 진심이 있었더라면 자신만은 북한사회와 인민들의 입장에서 변호하면서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부정적이고 폄하할 내용보다 자랑하고 긍정할 만한 내용을 담아야 했다.


 

물론 그의 곤혹스러운 입장도 이해한다. 장영철은 1989년 11월 귀순(?) 후, 서울에서 서강대학 91학번으로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1년 동안 국정원(안기부?)과 관련 기관에서 탈북에 대해 조사 받고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이후 지금까지 국정원과 공안기관의 감시와 보고 틀 속에서 생활해야 했을 것이다.

이 책 내용 중에서 탈북에 따른 공안기관의 수사와 교육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것도 밝히지 않는다.(그래서 이 책 내용도 미리 공안기관에게 검증받았을 것이라 감안해서 읽는다.)


 

한국살이 7년은 장영철에게 냉혹한 자본주의, 한국식 신자유주의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정부에서 제공한 정착금 1억원을 주식투자로 날리기도 했다.

“한국살이 7년 동안 느낀 것은 냉혹한 현실의 벽이었다. 이질적 문화의 벽, 학문의 벽, 언어의 벽, 인맥의 벽이 겹겹이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간신히 하나를 넘고 나니 또 다른 벽이 막아섰고 그 높이는 전의 것보다 곱으로 높았다.

이 땅에서 나의 삶을 돌이켜 보건대 ‘좋구나’ 또는 ‘자유스럽구나’를 느낀 것은 순간이요, 낮설음과 혼란 속에 헤메이며 좌절과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나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첩첩산중 넘어가야 할 길 또한 걸어온 것보다 더 멀 것이다.”(230쪽)


 

장영철은 탈북자 중에서 그나마 정부에서 가치를 인정한 축에 속하여 지원도 많이 받았고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년 동안 서서히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때 정부와 탈북자단체, 공안기관에 의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획 탈북’을 하게된 수천, 수만 명의 탈북자들 중 장영철 만큼의 지원도 못받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을 능력도 부족한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최근 대선 국면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기자회견한 탈북자들과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제3국으로 망명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탈북자들이, 2017년 탈북자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정치권에게, 권력에게, 공안기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장영철 관련 기사-


 

[이사람] 두고 온 고향에 ‘마음의 짐’ 갚고파 (2007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00601.html


 

<탈북자들 "봉사로 하나되고 싶습니다"> - 작성자 연합뉴스 (2013년)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SNS/r.aspx?c=AKR20131118071500065


[2017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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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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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 <대리사회>

김민섭 저, 2016. 11.. 255쪽, 와이즈베리


저자의 전작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고, 기업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대학의 노동력 착취 실태를 고발했다. 그 책을 출간하고서 홀연 대학을 떠난 저자는 대리운전 기사로 변신했다.

대학을 박차고 나와서야 그는 대학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학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괴물'이었고, 자신은 괴물 같은 대학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다.


저자는 대학원생, 박사과정, 시간강사였던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저자는 1년간 대리기사로서 일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거리에서 때로는 책상에서 기록해 <대리사회>라는 책을 냈다.


저자가 전하는 대리운전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대리운전에 필요 없는 모든 행위는 계약에 의해 또는 무의식적으로 금지된다. 내 차가 아니기에 의자의 기울기를 조절할 수도 없고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 수도 없었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건네기 전까지 먼저 말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손님이 던지는 말에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만 할 뿐이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게 되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사유의 통제다.

저자는 대리기사가 겪는 이런 주체성의 통제가 단지 대리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대리기사의 삶을 한국사회에 투영한다. 바로 이 사회가 거대한 대리사회라는 것이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의자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7쪽)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좌석에 앉아 도로를 질주하지만 이미 조수석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이 타자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들려주는 길 안내에 따라 운전한다.


‘대리운전’이라는 ‘주체성의 통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사회’를 사회 전분야로 확대적용하여 ‘대리사회’로 규정하는 저자의 논리에 일부 수긍한다. 그렇지만 수긍은 일부일 뿐이다.

‘주체성의 통제’나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사회’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만 개인을 대상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특성이고, 언론에 의해 이미지화된 ‘주어진 정당과 후보’에게만 투표하는 것으로 ‘정치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가로막는 자유민주주의체제(대의민주주의체제)의 특성이지 않을까 싶다. 권력과 자본이 ‘통제’와 ‘상품의 판매’를 위해 시민과 소비자를 획일화시키고 세뇌시키고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체제의 문제가 본질적이다.


필자는 오히려 대리운전이 음주문화와 연관된 특수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로 유지되는 전세계 국가 중에서 대리운전이 얼마나 보편적일지 모르겠지만(언론에 따르면 중국 정도가 대리운전 사업이 폭발적 성장세임), 음주문화가 한국과 비슷한 국가에서 시장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전망이나 자본주의 상품화의 특성상 ‘욕망의 대리경험’과 관련한 기술이나 산업이 성장할 수는 있겠지만, 저자가 의미하는 ‘대리사회’의 개념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학교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런 '을의 공간'에 순응하는 법을 체화했기에 우리는 남의 운전석에 앉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공간에서 다른 대리인간에 의해 밀려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타자의 존재, 즉 자기 욕망을 대리시켜온 대리사회의 괴물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 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 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써 내려가는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 가된다."(212쪽)


저자는 그때부터 '사유하는 주체'가 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 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252쪽)


‘사유하는 주체’, ‘거부할 수 있는 용기’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대리사회’라는 개념보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나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그림자 노동>, 그리고 <성장을 멈춰라>가 자본주의 체제나 근대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세계와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적합하다고 본다.


[2017년 4월 20일]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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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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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서평] 대학은 기업화된 ‘괴물’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저, 20153 10., 은행나무


2009년 현재 전국 405개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4년제 대학 157곳, 전문대학 129곳, 대학원대학 18곳 등 305곳에서 강의하고 있는 시간강사는 총 84,797명으로 조사됐다.(405개 전체로 환산하면 약 11만명) 이중 국·공립대가 14,290명, 사립대가 70,507명이다. 석사학위가 44,188명이고 박사학위 소지자는 30,966명이며, 그중 전업강사가 35,477명이라 한다. 하지만 전업강사 중 법정 수업시간 수인 주당 9시간 이상을 강의하는 실제 시간강사는 16,536명에 불과하다.([교수신문] 시간강사, 6시간 미만 강의가 50% 넘어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9012)


인용처인 [교수신문]에 따르면 전국 대학교수는 2013년 현재 73,400명이라 하니 한국의 대학은 교수보다 시간강사가 더 많은 셈이다. 교수보다 시간강사에게 지불하는 임금과 복지비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와 시간강사의 실제 수업시간 등 내용은 다르겠지만, 대학의 핵심 역할(서비스)가 강의이므로 강의에 대해 시간 당 책정하는 비용이 다르다.

즉 대학, 학교법인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학생들에게 그것도 매년 등록금을 올려받았지만, 대학운영비의 절감을 목적으로 교수의 정원을 늘리지 않고 시간강사만 땜빵시키면서 ‘학위 장사’를 한 것이다.


그렇게 대학으로부터 착취당한 시간강사, 그중에서 가장 처우가 열악한 지방대학교 시간강사가 직접 시간강사들의 애환을 이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적나라하게 공개했다.


필자는, 대학이 시간강사의 노동과 열정을 착취하여 시간강사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대학교육을 망가뜨리며 대학을 기업화시킨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이미 몇 년 전에 김동춘의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1999)>와 이정규의 <한국사회의 학력,학벌주의(2003)> 등 몇 개의 책을 통해 알았다. 하지만 시간강사들의 구체적인 삶과 애환을 느낄 수는 없었다.

드디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통해 뒤늦게 그들의 고통과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너무 늦게 책을 통해 체험한 ‘애환’은 막막하고 쓰릴 뿐이다. ‘지방시(지방대학교시간강사)’라는 단어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소설 쓰는 것을 좋아했고 지도교수가 말한 학문의 즐거움이 궁금해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는 “대학이란 지성진리학문의 총체라고 생각했고, 강의실과 연구실은 내게 가장 가치있는 공간이었다. 대학의 합리성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괴물로서 대학의 맨얼굴을 보게 된 계기는 “본업인 연구와 강의로는 도저히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연구를 한다는 것은 논문을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글을 어딘가에 투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학회 가입비와 연회비, 그리고 심사에 대해 고맙다는 의미의 심사비 등 도리어 20만원 가까이를 학회에 내야 해요. 최근에는 6-8학점을 강의했는데, 그러면 1년에 1000만원 내외를 버는 수준이에요. 그리고 건강보험 등 4대보험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 기쁜 일인데도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아들과 아내를 산후조리원에 두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문득 맥도날드 앞에 붙은 구인공고를 봤다. 새벽에 나가 몸을 써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한달에 60시간 이상 일하면 직장가입자로서 4대보험을 보장해준다는 말을 듣고, 덜 컥 일을 시작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최저시급 5580원은 생계에 쏠쏠한 도움이 됐고, 직장 가입자로 건강보험에 가입해 부모님까지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


“대학과 맥도날드를 비교해봤어요. 맥도날드는 신자유주의의 표상이지만, 그곳에는 일하는 사람을 위한 제도나 매뉴얼이 꼼꼼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합리성의 표상이라는 대학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시간강사부터 조교, 학부 아르바이트생까지 ‘학문의 길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가혹한 착취를 하고 있는 '괴물'로 서 대학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나 사회인'이 아닌,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됐죠.”


이렇듯 저자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동안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겪은 실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펼쳐내고 있다. 제도권의 삶이 비루하다고 불평하지도, “내가 이렇게 힘드니 좀 봐달라”고 징징대지도, “이러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저 한 청년이 이렇게 꿋꿋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고 보여줄 뿐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젊을 땐 좀 아파도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불평만 한다”는 식의 기성세대의 일갈에 대한 답으로서, 꿈을 가진 한 청년이 얼마나 ‘노오력’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꿈 때문에 현재를 얼마나 처절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는 이때에 제도권에서 살아가는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그래서 8090세대 청년들에 대한 세대성의 가슴 서늘한 기록이 된다. 그 세대들이 기성세대와 현 정치권, 기득권에 대해 불신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저자는 대학이라는, 제도권이라는 ‘괴물’(요즘 회자되는 ‘헬조선’의 대학)에서 혼자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꿈을 찾아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처럼 ‘괴물’에서 벗어나는 시간강사는 전체 11만 명 중 얼마나 될까. 저자 혼자서, 저자처럼 깨닫고 용기를 내어 벗어나는 강사들이 얼마나 될까. 즉 저자의 용기와 탈출은 개인적인 결단일 것이다.

저자와 조금 다른 이유로, 조금 다른 처지로 인해 아직도 대학이라는 ‘괴물’ ‘헬조선’에 갇힌 사람들은 못나서, ‘노오력’이 부족한 것일까. ‘글쓰기’가 전공이 아닌 강사들은 어떻게 ‘괴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필자는 저자가 비슷한 처지의 강사들과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 머리와 어깨를 맞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헬조선’에서는 ‘지방시’ 시간강사들이 혼자만의 노력과 용기로 탈출하여 안착할 만한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 진리, 학문’을 대학이 만들어내지 못할 때, 비슷한 처지의 강사들(노동자들)이 대학으로부터 착취당하는 대학 내 노동자, 학생, 교직원 그리고 해고위협에 시달리는 교수들과 어깨 걸고 나서지 않는 한, 정부나 정치권이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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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술래 - 과자장수가 골목에서 만난 바삭 와삭 와락 왈칵하는 이야기
박명균 지음 / 헤르츠나인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추천[서평]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 <나는 언제나 술래>

박명균 저, 2016. 05., 367쪽, 헤르츠나인


 

“우리는 그저 놀면 되는 나이였다. 놀아도 되는 나이였다. 이곳은 묘지 위에 세워진 우리의 새고향이었다. 맹이의 고향이었다.”

“이제 동생도 마흔이 넘었다. 그 일 뒤로도 난 내가 바쁘고, 어려워서 동생에게 해준 게 없다. 부모님께도 잘한 게 없다. 여동생에게 30년 전에 미안하다고 말한 게 전부다. 예쁘다고 아니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그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500권의 책을 읽었다. 노가다를 하면서 또 500권을 읽었ㄷ가.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1000권의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누가다 아저씨들은 모두 이 힘든 노동에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수시로 한계를 만난다. 마음이 막힐 때가 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운다. 마음이 포기하는 지점에서 담배를 문다. 이렇게 번 돈으로 집에 가서 싸운다. 이걸로 어떻게 애들 공부시키느냐고.”

“내가 괜찮아도 아무거나 할 수가 없다. 나 혼자면 괜찮았던 일이 누구 남편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아내를 통해서 사회적인 체면과 나를 다시 만난다. 나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야 되는데 지금까지 나는 뭘 한 걸까? 열심히 산다고 살았느데, 이게 뭘까? 왜 이렇게 꼼짝할 수가 없을까? 왜 이렇게 숨을 쉴 수가 없을까?”

“아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굶지는 않는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든 건, 날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너무 없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초라한 놈을 신랑이라고 격려하고 위해주는 사람에게 입 맞추고 따뜻하게 안아줄 자신이 없어진다. 그런 나를 다시금 위로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차마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이 사람한테, 나한테 이렇게까지 중요한 문제인지 몰랐다. 굳어 있던 입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한 사람이라도 내 속을 알아주면 된다. 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절대적인 무언가다.”

“밤에 일이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에서는 들어오라고 성화다. 이제 막 태어난 아들 보느라 아내가 힘들어서 일찍 들어오라는데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들어갈 수가 없다. 아들이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운이 좋아서 아들의 폭행사건을 무마되었다. 그날부터였다. 아들의 도끼눈이 풀린 것이. 그리고 받아들였다. 영어를, 수학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인생과 무엇보다 자신을 받아들였다. 괜찮은 애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한 문장, 한 문장… 자신이 직접 겪고 느끼고 아파던 삶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고등학생운동은 아주 짧게 반짝였고 금방 사라졌다.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뜨겁게 진행되었고, 90년대 중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91년 당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던진 6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고등학생운동 출신이고, 1명은 고등학생이었다.

또한 80년대 말 전교조 창립, 대규모 해직 과정에는 고등학생운동도 있었다. 학생들은 교육의 또 하나의 주체로 등장했고,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전교조에 대한 전면적 지지투쟁을 벌였으며, 그로 인해 구속과 퇴학처분을 겪기도했다. 고등학생운동은 학교안과 밖에서, 공개 단체에서 비공개 단체에서 매일매일 조직하고 투쟁했다.

당시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당시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특히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또는 못한 이들은?


 

당시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이 후배들과 학습용으로 많이 읽었던 책 중에 <친구야 세상이 희망차 보인다>(1990, 동녘), <불량제품이 부르는 희망노래>(1989, 동녘)가 있었다. 비민주적인 사회와 교육 현실을 담고 있는 책이다. 둘 다 <나는 언제나 술래>의 저자 박명균이 10대 였던 고등학교 시절 단독저자, 공동저자로 펴낸 책이다.

90년대 중후반 고등학생 운동의 쇠퇴와 함께 그의 조직도 해산했고, 그는 생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뜨거웠던 그 시절,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던 10대 박명균은 이제 50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쫓겨나고 내몰리는 ‘헬(hell) 조선’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사는 영세자영업자가 되었다. 말이 자영업자이지 앵벌이 노동자와 다름 아니다. 그전에 그는 주로 ‘노가다’를 뛰었다. 그가 겪은 지난 30년의 삶도 ‘헬 조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박명균이 27년 만에 <나는 언제나 술래>를 세상에 내놓았다. 컴맹이라는 그가 독수리타법으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출간했다. ‘글을 쓰지않고, 과자를 파는 자신이 서운했던’ 그가 다시 글을 쓰게 된 건 하명희 작가 덕분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는 하명희의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2014, 사회평론) 때문이라고한다.

이 소설은 당시 고등학생운동을 면밀히 묘사한 소설로 <22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 했다. 하명희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당시 해직되었던 전교조 선생님들도 복권이 되었는데, 그때 학교에서 쫓겨났던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왜 아무도 그들의 삶을 물어주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고 했다.


 

박명균은 사회의 밑바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중년의 사내가 눈물을 훔친다. 1톤 탑차 트럭 운전석에 앉은 그는 문방구, 슈퍼, 골목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곤 자꾸 울어 버린다. 하루 12시간 동안 30여개의 가게를 돌며과자를 팔아야 한다.

한 가게에서 물건을 내리고, 흥정을 하고, 상품을 진열하고, 수금을 하기까지 쓸 수 있는 시간은 7,8분이다. 빨리 다음 가게까지 운전해서 이동해야하는데, 그 짧은 순간 누군가의 ‘마음 지문’을 만나 버렸다.

그 느낌을 글로 옮기고 싶다. 초조한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아 몇 줄, 아니 몇 개의 단어라도 수첩에 옮겨 놓는다. 다시 트럭을움직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한다.


 

메모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트럭을 출발 시킨 날은 밤늦게 집에 돌아와 다시 수첩을 펼친다. 하지만 감정은 이미 날아가고 단어들만 헛헛하게 굴러다니는 걸 발견한다. 그런날은 그 단어들과 함께 잠자리에 눕는다.

점심은 늘 김밥 한 줄이니, 집에 돌아와 먹는 저녁은 늘 수북하다. 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피로와 식곤증이 범벅이 되어 밀려오고, 내일12시간 쉼 없이 일하려면 빨리 잠들어야 한다.

그런데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 날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단어들과 함께 눕는다. 그렇게 몸으로 써 내려간 63개의 이야기가 <나는 언제나 술래>에 담겨있다.


 

‘대기업에 잠식당하는 골목 상권’이라는 짧은 말에 다 담기지 못하는 구체적 울분과 땀내 가득한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더 이상 바닥으로 내려갈 곳 없는 이들이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 견디거나 견디지 못하는지, ‘그런 서로’를 어떻게 알아보고 침묵으로 위로 할 수 있는지 말해준다.

먹고 먹히는 현실에서 먹히는 쪽이 되지 않기 위해 ‘악마’가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 죽을 때 까지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운 자신을 고백한다. 상대적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삶에서 가난은 ‘손발이 묶인 나를 쥐새끼가 물어뜯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저자 박명균의 글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자주 울컥하게 만든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의 삶은 이론서적이나 소설처럼 마냥 아름답지만도 않고 긍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며, 선과 악이 감정과 이성이 희망과 좌절이 분노와 체념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술래>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고작 남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의 치열한 삶만큼 나의 삶이 치열하지 못할 뿐이라고 반성하게 된다.

이 책은 글쓰는 후배에게 선물받은 것이다.


 

“노가다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바닥을 밟고 있어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바닥에 뭐가 있든 우리는 그 바닥을 밟아야, 그 바닥을 밟고 걸어야 하루일당을 번다. 우리가 넘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124쪽)


 

“대한민국에서 노조 일을 하자면 매일 술을 먹어야 하고, 언제 해고될지 몰라서 마음이 조마조마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냥 공적인 업무를 보는 건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상식으로 안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돌봐야 하고, 내가 힘들더라도 내색하지 않으면서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을 다 안아주고 혼자 남아서 멍하게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나한테 웃으면서 투정부린 건데, 그런 친구에게 내 탓이 아니라고 발뺌을 해버렸다”(209쪽)


 

“사람은 얼마든지 사악해질 수 있다.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도 있다. 삶에 각인된 고통 속에서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 사람의 가슴에 강제로 자기 마음을 꺼내는 고통을 감수하는 시기가 있다. 아버지가 되면서, 자식이 커가면서 서서히 마음을 꺼낸다. 그게 사람으로 고통인 줄도 모르고 자식이 웃으면 웃게 되고, 자식이 울면 울게 되면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험한 일이라도 저 아이를 지켜줄 수 있다면 받아들이겠다고, 감수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한다.”(213쪽)


 

“부도라는 것이 현찰이 모자라서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 처음에 너무 가볍게 오기 때문에 손해로 막아내고, 두 번째는 빌리고, 세 번째는 회사를 걸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을 걸게 되기 때문에 중간에 물러나 지지 않는다. 살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덫에 걸린다. 무능해서, 무책임해서 처음부터 무너지면 되는데 10년 넘게 애쓰면서 살아온 사람에게 포기라는 건 어렵다. 가족을 위해 살았지만 그 가족이 자기를 떠나도록 못나게 구는 게 부도다.”(281쪽)


 

“장사꾼들이 그 (뭉칫)돈을 세어보고 또 세어보는 그 이유를 안다. 경제용어로는 손익분기점을 따진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살아도 되는지, 죽어야 하는지 세어보고 있는 거다.”(295쪽)


 

“욕하고 싶은 순간을 쓴다. 절대 욕은 하지 않는다. 욕을 참고 그 상황이 만들어진 사회적인 배경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사회가 때리는 대로 얻어맞는 사람의 상처를 쓴다. 욕을 하는 순간 글이 사라진다. 욕이 나오는 순간에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게 내 글의 목적이다.”(352쪽)


[2017년 3월 20일]

우습게 들리겠지만 누가다 아저씨들은 모두 이 힘든 노동에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수시로 한계를 만난다. 마음이 막힐 때가 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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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액션 - 영화로 보는 미국의 두 얼굴
최한욱 지음 / 615(육일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서평] 최한욱 저 <할리우드 액션>을 읽고 / 2013. 11., 200쪽, 615출판


여러 종류의 영화를 즐겨보는 내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어린 시절 유일하게 접한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년에 한두 번 학교 전학생이 동원되어 관람하던 반공영화를 제외하고는.

방 한쪽 구석에 TV가 자리잡은 초등학교 5학년 이후 주말 저녁시간은 ‘타잔’이나 ‘홀쭉이와 뚱뚱이’ 그리고 ‘주말의 영화’에 몰입하곤 하였다.


허리우드 영화 속 세상은 중소도시에 살면서 보고 겪는 일상과 TV 뉴스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가끔 소설책과 위인전도 읽었지만 책에서 경험하거나 상상해볼 수 없는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헐리우드 영화의 기본적인 패턴이 내 무의식과 '상식' 속에 자리잡았다. 미국은 위대하고 선량한 국가이며, 미국인들은 성실하고 정의롭다는 이미지, 아메리카 인디언은 잔인하고 무식하며 사기와 배신에 능하다는 이미지, 첨단기술과 상품은 무조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이미지 등을...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 시장의 80-90%를 점유하고 있으며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 연간 20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인다. 매년 수 십 억 명의 지구인들이 한 편 이상의 할리우드 영화를 소비하게 된다. 지구상에서 할리우드가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지역은 아마도 북한 정도일 것이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할리우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이념과 문화전파자로써 할리우드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이다. 종종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이 핵무기 이상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저자가 헐리우드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구촌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미국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동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고 동의한다.


물론, 모든 헐리우드 영화가 미국을 비호하고 미국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인 <라스트 모히컨>과 <매트릭스>, <혹성탈출> 같은 경우는 다르다.

<라스트 모히컨> 속에는 미국인들의 선조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한지 이야기해 준다. 반면에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물론 모든 인디언을 그렇게 설정하지는 않지만)은 선량하고 용감하고 지혜롭고 당당하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기본'이 허위와 허상으로 가득찬 역사이며 현실일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내가 영화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고,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는 훈련도 덜 되었기에 저자가 비교,분석해주는 헐리우드 영화는 나에게 또다른 깨달음과 생각을 안겨 준다.

<대부> 시리즈와 <갱스 오브 뉴욕>를 비교하면서 저자는 "미국인들은 왜 조폭영화를 사랑할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역사이며 자신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큰 폭력조직은 미국,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답한다.

저자가 "조직폭력은 미국인들의 삶"이라는 주장하는 이유는 실제 미국이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미국에서 발생한 범죄는 총 1,190만 건이고, 살인사건은 16,110건이었다. 미국이 폭력조직은 21,500개이며 조직원은 모두 104만 명에 달한다.


언젠가부터 TV와 극장가를 주름잡는 좀비영화를 '도살영화'라고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나 역시 아찔했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각도에서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대해 저자는 '미치광이 살인마'는 좀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잔혹행위는 모두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비영화에서 영화의 관객들은 살인과 학살의 쾌락(?)을 공유하면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제작된 시기(1968년)를 고려한다면 이 작품이 베트남전쟁의 은유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소개한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밀려드는 베트남 민중을 보며 미국인들이 '살아있는 시체', 즉 좀비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웜 바디스>를 분석하면서 좀비영화가 십대 취향의 로맨스영화와 좀비영화를 결합이지만, 혐오스러운 존재인 좀비를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좀비, 즉 유색인종과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저자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와 <링컨>, <더 레슬러>와 <부기 나이트>, <엘리시움>과 <식코>, <아르고>와 <계엄령>, <화씨 911>과 <세계무역센터>, <그린 존>과 <하트 로커>, <인디펜던스 데이>와 <디스트릭트 나인> 등을 비교한다.


헐리우드 영화, 즉 미국 문화와 한국의 관계는 다른 국가와는 크게 다르다. 1945년 9월 8일 인천으로 들어온 미군정은 일주일 뒤인 9월 15일 서울중앙방송국 등 남한의 10개 방송국을 모두 접수하여 미군정의 군정정책에 대한 홍보매체로 이용하였다. 이때부터 미군이 공급하는 뉴스와 헐리우드 영화가 한국에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TV와 영화관에서 여전하다. 미군정이 왜 방송국과 극장을 장악했는지, 신문과 라디오를 검열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다.

미군정의 방송과 영상매체 장악은 이승만 정권 이후 김대중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방식만 바뀌었을 뿐 영향력은 그대로다. 52년 동안 미국과 한국정부로 이어져온 방송과 영상매체의 편파적 운영은 아무런 반성도 평가도 없이 그대로 '미국이 천국인줄로만 아는' 재벌과 관료들, 역사의식 없는 사업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승계되었다.


그렇지만 저자가 헐리우드 영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헐리우드의 부정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이념과 가치, 정책을 세계로 전파하는 창의 역할을 하지만 역으로 우리는 그 창을 통해 미국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물론 할리우드의 창은 완전히 투명하지 않다. 그 창은 반투명 혹은 불투명한 유리로 가려져 있으며 외부로 수많은 커튼이 드리워져 내부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할리우드영화를 관찰하면 그 속에서 진짜 미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올바른 한미관계의 정립은 미국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미국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미국의 변화는 어쩌면 우리의 변화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 인상 깊은 문장 ]


"할리우드는 미국의 ‘문화통치’를 가장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비공식공무기구이다. 헐리우드는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보다 세련되고 유연한 방식으로 미국의 가치와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침투시킨다."


"우리는 할리우드의 영화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미국의 문화에 젖어들며 자연스럽게 미국식 사고와 생활방식을 받아드리게 된다. 또한 미국의 국가이념과 가치, 정책에 대해서도 학습하게 된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영향권에 있는 지구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에 동화되고 스스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혹자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헐리우드 영화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누구나 미국의 이념과 가치, 생활방식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미국 정부와 헐리우드의 밀월관계가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는 상항에서 헐리우드는 단지 오락을 제공할 뿐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우리를 헐리우드의 부정적인 영향에 무방비로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 2014년 11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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