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규율권력과 자발적 복종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미셀 푸코 저, 오생근 역, 2001. 11., 464쪽, 나남출판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23쪽)

<감시와 처벌>의 첫 문단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실재했던 유죄판결문 중 일부이다. 현대인으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다. 실재했던 판결문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다미엥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다.

한반도에서도 20세기 이전의 형벌방식은 비슷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시대 대역 죄인에 대한 능지처참형이 바로 그것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나 수많은 사화와 민란의 주인들이 받은 형벌을 그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능지처참형이 18세기 프랑스의 다미엥이 받은 거열형과 비슷했을까. 하지만 구체적이고도 악랄하게 형벌을 집행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유사하지만 프랑스 지배자들이 조선의 지배자들보다 더 참혹했던 것이다. 서구인들의 과거 신체형은 한국인(동양인)의 상상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푸코는 이를 ‘지극히 화려하고 호화스런 의식’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이런 처벌을 내렸을까. 지배체제에 그리고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누구도 왕권이라는 권력에 도전하면 그런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악한 신체형이 18세기 후반 이래 전반적으로는 감옥에 범죄인을 감금하여 교정하는 자유형으로 바뀌었다. 범죄를 저질러도 이제 더 이상 신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공간에 감금한 다음 규율을 통해 교육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 되었다.

(물론 이런 규정은 서구인들이 같은 서구인 범죄자들을 대하는 경우에 대한 것이다. 서구인들이 강제로 식민지로 삼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18세기 유럽의 잔인한 형벌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20세기 말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공공연하게 고문과 구타가 존재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탈북자에 대해서는 국정원의 고문과 악행이 여전하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것은 합리적 계산에 의거하여 효과적인 징벌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원칙이 있다. 이들 원칙 모두가 언뜻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다. 첫 번째 원칙인 '양의 최소화 원칙' 하나만 보자.

"범죄는 그것이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에, 그것보다 어느 정도 큰 형벌의 불이익을 결부시키게 되면 범죄는 저지르고 싶지 않은 행위가 될 것이다." (148쪽)

가혹한 형벌을 신체에 부과하지 않아도 범죄인이 형벌의 불이익을 생각하여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오히려 그 이상의 처벌을 하려다 보면 범죄인은 완전범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범인 잡기만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국 범죄인이 권력을 농락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원칙은 고도의 계산이 따른 것이다. 일종의 심리학이 동원된 것이다.

사람을 진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계량화를 통한 비용-효과분석을 형사정책에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 이성의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닌가. 이런 사고의 결과가 바로 신체형에서 감옥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형벌제도의 발달 때문에 권력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학문이 발달시켰다. ‘일망감시시설(팝옵티콘 panopticon)’, 즉 교도관 한명이 여러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은 관리의 효율성을 불러 일으켰다. 건축학, 광학은 이 시스템을 바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죄인의 죄를 측정하기 위한 심리학, 병리학의 발달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권력은 자신이 필요한 학문만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감옥의 탄생은 단순한 형벌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푸코는 이 변화가 18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율사회'의 건설이라는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감옥은 그 규율사회의 하나의 전형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주요한 사회기관 모두는 알게 모르게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을 적용하여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국가, 근대사회의 핵심은 바로 ‘복종하는 인간’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사람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 사회가 규격화한 사람만이 ‘쓸모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쓸모 없는 사람’, ‘이방인’, ‘사회부적응자’, ‘이탈자’, ‘범죄자’가 된다. 사회체제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키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가 설정한 정상의 기준에서 일탈한 광인이 되어 ‘사회의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인간들이여 사회의 규율에 따르라.” 이것이 푸코가 주장하는 근대사회의 핵심이다.

 

푸코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한 규율사회의 전형은 군인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 탄생한 상비군들은 과거와는 다른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이들의 신체는 길러졌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에서 ‘반항(저항)할 수 없는 인간’이 탄생하였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군인은 만들어지는 그 어떤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틀이 덜 잡힌 체격, 부적격한 신체를 필요한 기계로 만들면서 조금씩 자세를 교정시켜 나갔다. 계획에 의거한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에 두루 퍼져나가 각 부분을 마음대로 지배하여,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신체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구속은 습관이라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통하여 암암리에 그 작용을 계속하게 된다. 요컨대 '농민의 몸가짐을 추방해' 버리고, 대신에 '군인의 몸가짐'을 심어준 것이다." (204쪽)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을 푸코는 하나의 정치(기술)로 보았다. 이 정치(기술)은 단지 신체를 표적으로 강건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신체의 지배를 넘는 어떤 목적이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이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통제된다. 자기의 내적인 욕망에 의해 스스로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걸어 두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 기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원해서 말이다.

“끊임없는 판단과 검사를 통해 인간 행동의 객관화와 자료화가 달성되며 이것이 근대 인간과학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까지 푸코는 주장하면서 <감시와 처벌>을 마무리한다. "개인은 특별한 규율적 권력 기법이 생산한 실재"라는 것이다. 이 명제는 근 현대를 추동한 서양적 합리주의의 동역학에 대한 푸코적인 바깥으로부터의 사유가 도달한 한 극점으로서, 나중에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감시와 처벌>에서 제기하는 푸코적 권력론과 담론 이론의 통찰은, 권력과 지식은 서로 반대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근대 이후 권력과 지식이 서로 갈수록 정교하게 얽혀가게 된다는 것이다. 합리성을 주창한 계몽주의의 득세 이후, 보다 세련된 권력일수록 스스로 진리와 객관성을 자임하고 채택하는 형태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진리나 합리성의 이념 자체가 '일정한 권력효과를 동반하면서 사용되는 말의 흐름과 쓰임으로서의 담론'인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기독교적 문화나 가치관과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나 중동 이슬람세계를 정복할 때 처음에는 군사력 같은 물리력에 의존했다. 그러나 물리적 강압만에 의한 지배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 약소국의 시민들이 강국의 가치관과 문화를 부러워하고 자신의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할 때 강대국의 헤게모니가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강대국의 관점과 자신들의 시각을 약소국 주민들이 동일시할 때 강국의 지배는 거의 영속화된다. 결국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는, 부정적인 동양관과 긍정적인 서양관을 동양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수용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예컨대 '오리엔탈리즘'은 동양(Orient)에 대한 어떤 이미지나 관점을 총칭한 것으로서 대부분 부정적인 요소들, 즉 동양이 미신적이고 퇴영적이며 후진적이라는 등의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동양이 이런 방식으로 채색되면 서양의 이미지는 당연히 그 반대가 된다. 즉, 서양적인 것은 과학적이고 진보적이며 선진적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란 용어 자체가 서양 여러 나라들이 제국주의적 경략에 여념 없던 시절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강점기 그리고 미국제국주의의 미군정기와 한미동맹 체제는 ‘한국식 오리엔탈리즘’을 심어놓았다. 바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식민사관과 군사작전권의 영구적인 포기, 그리고 각종 보수적 집회와 종교행사에 도배되는 성조기를 통해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인들(특히 기득권층과 노인세대) 사이에 광범위하게 뿌리 깊게 새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 2017년 1월 1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 한국 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앤드루 새먼 지음, 이동훈 옮김 / 책미래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영국군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의 참상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Scorched Earth, Black Snow : 1950년 한국 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
 

제목의 ‘그을린 대지’는 북한 지역을 초토화한 유엔의 지침을, ‘검은 눈’은 네이팜탄 공격을 뜻한다.
 

영국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까지 불리며,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다. 그 영국의 군대는 머나먼 한반도에서도 싸운 적이 있었다. 그것도 우리 한민족의 비극인 한국 전쟁에서...

한국 전쟁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해였던 1950년. 영국군은 그 해에 낙동강과 인천, 사리원, 평양, 박천, 장진호, 흥남 등 모든 격전지에서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근 70년간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영국인 기자의 치열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빛을 드러냈다. 저자는 한국 전쟁을 '부당하게 잊혔던 전쟁'이라고 평가하며,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영국군과 호주군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고 극적으로 되살려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른 전쟁 중 가장 인명피해가 컸으며 가장 잔인했던 전쟁은 따로 있었다.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전쟁은 당시에도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오늘날의 영국인들도 그 전쟁을 거의 모르고 지낸다. 그 전쟁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이제까지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한국전쟁의 진실과 참상은 친일과 부정부패, 헌정유린 군사독재로 점철된 한국의 기존 군 관료와 정치인, 언론인과 학자들이(또한 그런 자들을 비호하고 육성한 미국 정부와 언론의) 제공한 '일방적인' 정보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정부나 영국인 역시 크게는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저자가 미국정부와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제한된 정보와 관계 그리고 영국인 특유의 편견 속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북의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인종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51년 임진강 전투를 다룬 <마지막 한 발>의 저자인 저자의 이번 신작은 한국전쟁 초기인 낙동강부터 참전했던 영국군 27여단과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41코만도 부대를 다루고 있다. 27여단은 원래 중국 본토의 공산화이후 홍콩 방어를 위해 배치되 있다가 한국으로 긴급 파견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가 병력 완편을 위하여 27여단에 배속된 것이다.

27여단 병사들은 한국 전쟁에서 그들의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그들이 본 다른 것들도 증언하고 있었다. 미군의 군수적인 풍요로움, 미 공군의 오폭, 사기와 훈련에서 준비가 안된 모습 뿐만 아니라 한국 전쟁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북한뿐만 아니라 미군, 남한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도 증언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영국군 1087명이 전사했다. 포클랜드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사자를 모두 합친 수(783명)보다도 더 많다. 책은 영국 제27여단과 41코만도 부대, 그리고 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의 참전기를 통해 전황이 가장 격렬했던 1950년 마지막 몇 개월의 최전선 상황을 보여준다.

영국 군인들은 불과 1주일 전에 출발 명령을 받았고, 무기나 보급품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참혹한 전쟁터에 떨어졌다. 이들은 부산 방어선에서의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중국의 충격적인 개입,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작전 등 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체험했다. 포로 학살, 마을 소각, 민간인 살해 등 60년이 흐른 지금에야 털어놓는 이야기들도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말하지 않는 진실, 즉 유엔군과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북한 민간인에 대한 수많은 폭격과 학살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영국은 한국이나 미국, 일본과 달리 북한에 대사관을 설치한 160개 나라 중 하나다. 따라서 이 책은 북한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면서 제대로된 정보가 없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의 한국전쟁 관련 기록이나 책, 즉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전쟁관련 정보와 많이 다를 수 있다.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저자 역시 ‘종북’이고 ‘빨갱이’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책 속에서 기록해 보이듯이 한국전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대립이 동서냉전으로 극한 대립을 펼치기 시작한 1950년대에 불행하게도 냉전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벌어진 내전은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제국주의 외세들의 협잡으로 일제에게 식민지 강점이 되었고, 그 외세들에 의해 분단이 되었던 한반도로서는 어찌보면 부득이한 일, 즉 필연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념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영국군인들이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들과 군산복합체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머나 먼 타향으로 전쟁에 동원된 구조적 뭌제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냉전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에서 벌인 영국군의 모습을 저술한 책이지만, 분단도 전쟁도 원하지 않았던 한민족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피눈물이 나는 전쟁’이다. 책의 제목처럼 유엔군과 미군은 ‘움직이는 흰색’이 보이기만 하면 한반도 어느 곳이든 네이팜탄을 퍼부어버렸다. 그 결과로 2천만 명의 한민족 중에서 3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영국군의 활약상 중심의 책의 내용 중에 한민족의 피눈물이 보였다. 한민족에게 더이상 분단이나 전쟁이 도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책은 증언하고 있다.


[ 2016년 12월 1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비명>

이덕일 , 2011. 11., 역사의아침


 책은 <사도세자의 고백>(이덕일 1999) 개정판이자 증보판이라   있다저자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 개정하면서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을 보충하고 내용을 더욱 보강하여 더욱 완성도 높여 내놓은 신작이다영조 38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조선 500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시 조명한다.

저자가 <사도세자의 고백> 증보 개정한 이유는 <사도세자의 고백> 서점가에 돌풍을 몰며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정병설이 인터넷 강의에서 <사도세자의 고백> 저자에 대해 비평 아닌 비난을퍼부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그는  13 동안 추가로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를반영했다.


영조 38(17625 21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가 죽었다이후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으며 누구도  사건에 대해 말할  없었다부왕 영조는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  결정적인 역할을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진실의 빈자리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 메웠다. <한중록>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라 했다세자의 부인이  피맺힌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달랐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한중록> 전하는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있는 기록들을 찾을  있다. 

이에 저자는 너무나 다른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자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전하는 다양한 사료를 취합하고 분석한다이를 통해 각각의 기록 행간에 담긴 사도세자의 본모습과  죽음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과정에서 세밀히 분석되는 삼종의 혈맥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영조의 탕평책과  한계  정조 대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 지형은 조선 역사의  부분을 이해할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혜경궁의 기록인까닭에 후세 사람들이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인지상정이다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있었으며 정신병은 자식들을 편애한 영조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더불어 남편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만들어낸 비극임을 강변한다. 

그러나 세자가 죽은 후에도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과 중부(仲父홍인한이 승승장구해 정승의 지위를 누린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혜경궁의 친정 풍산홍씨 가문은공교롭게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으로 몰려몰락했다이는 <한중록> ‘사도세자의 죽음 자유로울  없었던 사건 관련자의 기록이며또한 가해자의 기록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정신병시아버지 영조의 성격이상 등을 강조하면서 <한중록> 집필한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과 자신의 친정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 대해 무고함을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영조는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노론과 혜경궁은 정신병자라고 했으나, <영조실록> 기록된 온양 행차  사도세자의 모습은 달랐다마구간을 탈출한 군마가 농토를 상하게 하자   섬을 밭주인에게 주어 보상케 했고나이 많은 노인들을 불러위로연을 베풀었으며선비들을 불러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했다몸이 불편해 요양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강연은 멈추지 않았다또한 귀경길에는 농사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라고 하령했다아버지 영조 못지않은 애민(愛民) 세자였으며성군의 자질을 가진 작은 군주였다. 

온양 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세자가 ‘포악하다’ ‘정신병이 있다  노론이 조직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히는계기도 되었다하지만 역설적으로 온양 행차  보인 백성들의 찬사와 충청도 사대부와 부로들의 칭송은 노론과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더욱 경계하게만들었다.


영조 31(1755) 2 4,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붙었다소론 강경파인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모의를 꾸미며 붙인 벽서인데 나주 목사 이하징  서울과 지방의 소론 일부가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게다가  사건과 관련된 자들 중에는 과거노론이 주상인 경종의 살해를 모의한다는 고변으로 벌어진 임인옥사  당시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 역모의 수괴로 주장한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옳다고 이야기한 자도 있었다영조와 노론의 입장에서는 나주 벽서 사건은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민감한 사건이기도 했다결국노론은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고 영조는 이를 추인했다

하지만 세자의 생각은 아버지 영조와 달랐다경종 시절 노론의 세제 책봉과대리청정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 생각하던 그는 경종  연잉군이던 부왕을도운 소론 온건파마저 적당으로 모는 데에 반대했다또한 나주 벽서 사건 이후 벌어진 토역경과 사건에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한중록>에서조차 ‘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그는 분명 노론과 다른 정치관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이제 노론에게 세자는 자신들이 모셔야  다음주군이 아닌 분명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영조 38(1762) 5 13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휘령전에서 뒤주로 들어갔다.

14 동안이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대신들은 세자를 구원하기는커녕  반대 행위에 열중했다세자의 가족들  세자의 목숨을 구하고자 영조에게  인물은 세손뿐이었다세자가 뒤주에서 밤을 새운 첫날에 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홍봉한은 ‘세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대신들을 힐난하고세자가 뒤주에 갇힐  울부짖었다 이유로 한림 윤숙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다세자가 죽던  그는 한강에서 한가히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세자가 죽은  홍봉한은 “영빈께서 아뢴 것은 오직 전하를 위한 것으로서 성상께서 단행하신 것이고신이 성상의 뜻을받들어 행한 것이며그다음은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행한 것입니다라고 세자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이는 자신이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영조의 뜻을받들어 실행에 옮겼음을 의미한다그렇게 세자는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여드레 동안   모금 마시지 못한  신음하다가 영조 38 5 21이승을 하직했다.


250  역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과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라는 학문과 연구자그리고 ‘역사서라는 책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그리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수십수백 가지 다른 사실과 과정과 이유가 작용하여 발생하게 된다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어떤 입장에서어떤 관점에서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나 진실이 얼마든지 다를  있다는 것을 우리는수없이 목격했다.

<한중록>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고집불통 아버지인 영조와 정신병에 걸린 아들 사도세자의 대립구도로 바라보던 것이 지난 250  주류의 해석이라   있다마찬가지로 영조 치세 조선사회의 정치적 갈등구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고찰하는 것은 정치학적으로역사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여기에 당시 사회경제구조와 왕실 내부의 이해관계와 갈등그리고 노론-소론-남인  정파들의 세력타툼 구조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볼 수도있을 것이다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고 현세와 후세에게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게 된다.(저자가 ‘노론 300 독재라는 관점으로 인조반정 이후 현대까지 한반도를 고찰하는 것도 나름 합리적이고 일관된역사인식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하나의 관점하나의 해석하나의 이론만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은 도그마나 독재에 다름 아니다순수성과 단일성을 주창하는 대다수의 종교도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 2016 11 27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서평]  <가비오따쓰 GAVIOTAS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Alan H. Weisman, 1947 3 24~) 황대권  / 2008. 10., 364랜덤하우스


<가비오따스>  마디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이 일구어낸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 ‘자연과 함께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면 <가비오따스>는 ‘여럿이 함께 자연과 살아가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가비오따스' 콜럼비아 수도 보고타로부터 동쪽으로 자동차로 16시간 거리에 있는 사바나 대평원 지대(일명 야노쓰) 위치한 생태환경도시이다이곳은 나무 한그루 없는 콜롬비아 사막 불모의땅으로 알려져 있다가비오따쓰는 100년 넘게 콜럼비아를 온통 둘러싼 무장 폭력과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며 조금 비켜나 있다.

1970년대 초반파올로 루가리와 동료 1인은 '자연과 융화하며 자급자족의 공동체로서 척박한 열대지방의 특성을 살려 에너지를 거의 모든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 친환경적인 도시' 조성할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다. 루가리의 좌우명은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다”이라 한다. 2명으로 시작된 공동체는 2003년에 200명으로 늘어났다.


와이즈먼이 보여주는 가비오따쓰에는 빈부격차에 의한 계층도직업의 귀천도 없다모두들 맡은 일을 하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비오따쓰에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거나 나름대로 일거리를 만들어서 일했다도시에서 의사교수과학자였던 사람들도 있으며천민 취급을 받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던 거리의 아이들과이보 인디언들도 있었지만그들은 모두 같은 급료를 받았다임금은 높지 않았지만 숙소와 음식교육보건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쓰레기를치우는 사람도 최신 태양열 기구를 발명해낸 사람 못지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가비오따쓰는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있도록 지원하였다과학자와 기술자들은 태양열을 이용한 발명품들을 자체 개발해내고 기술을  3세계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결과그들은 적도의 미풍만으로도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풍차손가빌 하나의 힘으로도 작동시킬  있는 초효율 펌프태양열로 작동하는 정화 주전자프레온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태양열 냉장고태양열 주방자연의 바람을 이용해 열대의 뜨거운 기후에서도 쾌적함을 유지할  있게 설계된 병원 등을 발명해냈다. 

또한 그들은 공동체 회의를 통해 축구 대회음악회자연 실습 등을 꾸려가며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가비오따쓰는 주위를 둘러싼 혼탁한 세상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다. 


저자는 “가비오따쓰인들은 비싸고 한정적인 석유 대신 누구나 사용할  있고 무한한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고척박한 야노쓰에서도 가능한 수경재배법을 개발하고 채소를 키워 자급자족하고 있었으며학교와 병원을 세워 지역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와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었다그리고 마른 풀밖에 없었던 황량한 야노쓰에 소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4 헥타르의열대우림을 만들어냈다 열대우림은 가비오따쓰의 가장  성과다콜롬비아에서만 10 동안 60 헥타르의 숲이 사라졌다지구의 허파가 되는 열대우림의 소실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인류의  위협이다그들이 만들어낸 열대우림은 사라졌던 생태계를 불러들이고 적도의 열기를 막아주었다 모든 일들은 가비오따쓰인들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만들어간 인내와 노력투쟁의산물이었다가비오따쓰의 업적은 환경을 손상시킨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있음을 희망적으로 보여준다.”라며 인류의 미래라고 칭찬해 마지않는다.

루가리와 가비오따쓰 주민들의 노력과 열정은 오늘날 생태주의에 입각한 공동체 건설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 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비오따스’는 단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들의 꿈일 수도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온전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콜럼비아의 주요 사회체제에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비오따쓰는 어찌할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바로잡을  있는 능력이 인류에게 그것도 제3세계인들에게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와이즈먼이 생각하는 가비오따스의 미래는 불완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가비오따스의 탄생과 유지가 콜럼비아 상류계급인 파울로 루가리 등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과 가비오따스가 콜럼비아 주류 사회경제체제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루가리와 상류층 출신의 구성원들이 아니었으면 가비오따스가 생존하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비오따스는 필요한 기술과 자재, 인력과 상품시장을 루가리의 인맥, 그리고 유엔과 콜럼비아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가비오따스의 규모가 커질수록 의존도는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콜럼비아 및 남미, 그리고 전세계에 걸쳐 저소득층과 극빈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힘(또는 주요 모순)에서 개인이 아닌 일정 규모의 집단이 벗어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콜럼비아 사회 전체의 흐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힘을 쏟는 것이 지름길일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은 최근 콜럼비아 정부와 게릴라군 간의 평화협정이 말해주고 있다.


1970년대에 콜럼비아가 처한 현실이나 21세기에 콜럼비아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의 공통점 중의 한 가지는 콜럼비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콜럼비아에 내재하는 문제점, 즉 빈부격차와 양극화, 외세의 개입과 대외의존적 경제구조, 불안정한 정치사회, 공동체 붕괴 등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15세기 마제란으로 상징되는 유럽대륙의 아메리카 침략이며 그 이후 5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서구 국가와 자본의 아메리카 수탈과 개입이다.

콜럼비아는 스페인으로부터 오랫동안 식민지로 신음했으며, 장기간의 식민지 구조는 독립 후에도 콜럼비아의 정치사회 구조를 절름발이와 폭력으로 물들여 놓았다. 보수를 표방하는 세력과 자유를 표방하는 세력 간에 벌어진 수십 년간의 유혈대립, 그리고 민병대의 잔혹한 살상, 정부군과 게릴라군의 무장투쟁, 미국의 개입 등이 20세기 콜럼비아 사회를 규정했다.


다행하게도 21세기 들어 콜럼비아 정부와 게릴라군 간에 평화협정이 타결되었다. 이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에 쿠바 정부와 노르웨이 정부가 중재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로 미국이나 유엔, 유럽 주요국가 아닌 외국에 의해 콜럼비아와 남미에 평화의 희망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콜럼비아 사회가 미국의 집요한 개입을 극복하고 평화협정을 이행하고 사회경제 체제를 바꾸어 나가면 가이보따스에 콜럼비아 전체에게 끼친 영향보다 훨씬 광범위한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가비오따스의 의미나 가능성이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평화협정이 콜럼비아 사회 전체와 모든 국민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지는 못랄 것이며,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구체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의 적폐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화협정은 가비오따스의 유지와 확장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1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3921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2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7840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3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2523

콜롬비아의 50 내전이번에는 끝낼  있을까? 4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05534

'52 내전콜롬비아 평화협정 타결…"102 국민투표"(종합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6/08/25/0607000000AKR20160825036951087.HTML?input=www.twitter.com


<가비오따스>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50  44번째 책이다.


[2016 11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 박병엽 증언록 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서평현대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2010. 09., 395


 노동당 중앙위원까지 지낸 박병엽(1922~1998)씨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차례에 걸쳐 증언을 남겼다증언을 끌어내고 엮은 사람은 중앙일보 기자였던 유영구와 정창현이다.

그의 증언은 처음 중앙일보의 기획연재물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91.9~1992.12  115) 가장  비중으로 담겼다당시 그는 가명을 사용했다중앙일보의 연재는 1992년과 1993단행본으로 출간된  북한현대사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다박병엽 사후 그리고 단행본을 읽고 다른 북한 관련 자료와 정보를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역자는 기존단행본을 새롭게 출간하게  것이다.

<김일성과 박헌영그리고 여운형> 박병엽의  번째 증언록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번째 증언록이다.


박병엽 증언의 신뢰도와 가치에 대해서는 상당수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다도진순 교수는 "특히 서용규(박병엽의 가명) 증언은  범위가 매우 넓고논리적 기저가 일관되며 탁월한 구체성을갖추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면서 “이러한 폭넓은 증언과  료의 발굴을 기초로 「비록」이 엮어낸 내용은 1945-48 남북한 현대사특히 정치사 전반에 걸친 매우 포괄적인 것이다 중에서 특히주목해야할 부분은 북한 현대 정치사남북 정치지도자들 사이의 공식·비공식 회동을 포함한 남북관계사라고 생각한다 지적한  있다.(4)


박병엽이 증언한 북한 정권의 탄생과정은 기억으로서의 역사일뿐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역사라   있다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부터 외세에 의해 한민족이 갈라진  전개된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해방  5년간 대한 실체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한민족 5천년 역사와 더불어 수천~수만 년을 이어갈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기억 정보는 뇌에서 사라질  있으되 체험은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다 땅의 해방동이가 65세에 이른 지금, 80 노인들이어야 당시 15 전후였음을 감안하면 이제 '해방공간에 대한 기억이나 ‘체험' 남아 있는 세대를 찾기는 어렵다 점에서도 그의 증언은 귀하다."(9)

"해방 3년은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공간이었으니 만치  시기의 자료와 증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역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다증언은 자료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사서술의 수단이다미국·러시아 등지에서의 북한 현대사에 관한 문서공개 열풍이 사라진 지금추가적인 자료발굴이 여의치 않은 조건에서 이미 채록해놓은 증언이라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10)


박병엽의 증언을 통해 독자들은 북한 정권과 지도부의 권력 장악 과정과 현대사 속에서 이어진 북한 정권의 정책의 기초를 파악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민족 ‘통일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전쟁 이후에 남북 갈등 과정에서도 ‘민족 ‘통일 표면적으로든실질적으로든 북한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인 셈이다.(1990년대 중반 이후 ‘생존 추가되었고..) 

김일성 주석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주요 발언이나 정책이 어떤 이념적역사적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지   있게 된다김정은 체제가 수립된 이후 북한의 노동당이나언론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 자주 거론될 정도로 북한에서 ‘수령’ 김일성과 ‘지도자’ 김정일의 상징은 대단히 크다따라서 ‘유훈통치 강조하는 김정은 체제의 향후 대미대남통일정책을 예측하는  도움이  것이다. 

"한편  책이 역사의 기록이라는 과거의 측면 못지 않게 현재적 의미와 미래가치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정에 관한 해명은 이북 정권의 존재근거와 정당화특히 그들의 대남·통일정책의 이해와 직결된다정권 수립시의 정강에 조국통일의 목표가 설정된 이래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조국통일'  사상적 기초로서의 '민족대단결' 주장했으며 그의 유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조국통일과 민족대단결' 강조해왔다북측은 해방 3년의 기간에 통일정부의 수립과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으며 책에는  과정이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14) 


그런 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더불어남북간의 당국회담에 참석하는 정부당국자들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여러 분야의 민간교류 인사들그리고 시민·통일운동가들에게  책은 적지 않은 시사점과 지혜를  것이다. 

아울러 해방  70 년의 우리 역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는 독자들과 청년지식인들이라면  책에 눈여겨볼 대목과 습득할 지식이 많을 것이다그리고 한반도와 한국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고민하고 있는 기성세대전문가기업인 그리고 지성인에게는  책에 묘사된 해방공간 3년이 사유의 좋은 텍스트가될  있다역사에서의 반복과  차이를 반추연역해볼  있는 실마리가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1 ‘소련군의 진주 1945 8 조선의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군  군정 책임자들의 평양 도착과 소련군의 진주과정 그리고 소련군의 만행을 다루고 있다또한 38 이북의 정치권 동향과 조선 해방  항일빨치산파의 존재 그리고 항일빨치산과 갑산파의 관계에 대한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김일성은 주로 동남만 5 현에서 활동했고 최용건은 북만주김책은 주로 남만주에서 각각 활동했다 가운데 김일성부대가 가장 크고 다음으로 최용건부대그리고 북만주에 간지 얼마  되는 김책부대가 가장 소부대였다."(35)

"항일빨치산파 중에서도 유독 김일성그룹의 단결력이 다른 그룹에 비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김일성의 직계인 김일·최현·강건·안길·김광협 등은 주로 동만 5  출신들이다이들은 항일무장부대가 크든 작든 1930년대 초반부터 줄곧 뭉쳐서 활동했다그러다가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이들은 소대장·중대장 간부로 흩어져 활동하게 됐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령으로 들어가 재회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들은  자신을 지칭할  일심동체의 빨치산 출신임을 염두에 두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김일성 역시 ''라는 말을 절대로  밖에 내지 않고 언제나 '우리라고 말하곤 했다.그들 빨치산 가운데 항일투쟁 과정에서 배반한 사람은   사람 밖에 없었다고 자랑할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보였다이들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사상의지적 통일을 이뤄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이것이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통치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38)


2 ‘김일성의 부상 김일성의 입북 과정과 소련군정의 김일성 발탁의 배경그리고 소련군정의 김일성 지원과 10 14 김일성환영대회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은 이북지역에 들어와서도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김영환  몇몇 가명을 쓰고 다녔지  바로 "내가 바로 김일성이라고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만날 때만은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밝혔다그러다가 일반대중들 앞에서 김일성의 이름으로 공개된 것이 바로 '김일성환영대회였다."

"당시 언론들은 김일성환영대회에 40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보도했지만 다소 과장이 있었던 듯하고 입추의 여지없이 동원되었던 것은 사실이다지금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김일성경기장자리에 있던 공설운동장에서 환영 대회가 열렸다공정원들이나 보안대원들적위대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선전삐라도 대량 살포하였다조직적인 동원이 이뤄지기도하였다."(63)


3 ‘소련군정 하의 여러 정치세력들 해방 직후 소련파조만식과 소련군정조만식과 김일성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인적 구성과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현준혁 암살사건과 연안파의 입북,신의주 무장해제사건과 연안파와 신민당 창당그리고 무정의 등장과 몰락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무정이라는 인물의 약점은 성격이 급한데다가 고집이 세고 자유주의적 경향이 많아 다른 지도자들과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그는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포병사령관을 하고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지냈다고 해서 다소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군사능력을 과신해 상부의 조직적  령보다 자신의 판단  우위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 자주 비판받았다사람이  산만하고 조직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최창익이나 박일우 같은 사람들이 민족해방투쟁 시기에는 무정보다 하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은 정치위원이 됐지만 무정은 그렇질 못하였다무정의 정치적 식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117)

"무정이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은 6.25전쟁 시기였다개전 당시에 무정은 2군단장이었고 1군단장은 김웅이었다. 2군단 참모장은 항일빨 치산 출신인 김광협이었고 2군단 예하에 2사단,5사단, 7사단이 있었다. 2사단 단장은 중국인민해방군 출신 이종의, 5사단장은 항일빨치산 출신 오백룡, 7사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덕이었다. ... 2군단의 주역할은 이남 국방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한편 후방지원을 끊어버리는 것이 었다일종의 서울 포위 내지 압축작전을 쓰려했던 것이다서울로 직접 진입하는 부대의 도하작전과 계속적 진군을 보장하려는 것이 었다이것이이른바 개전  단계의 기본전략계획이었는데 무정의 2군단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의정부와 양평 방면에서 국방군의 저항이 심하여 계획대로 진군하지 못했고특히 경탱크부대가 역할을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이에 대하여 나중에 2사단과 5사단이 책임추궁을 당했는데 속도가 늦어진 것은 순전히 무정의 지휘 오류라는  드러났다."(118~119)


4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이북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조직화 과정과 지도부 선출 그리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립  운영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북부 5도당 책임자  열성자회의는 남과 북의  정파별 조선공산주의자들간에 의견 차이가 컸기 때문에 박병엽이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서 밝혔듯이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회담이 진행된  1945 1013 ~15 사이에 개최되었다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는 김용범이 선출되었다북조선분국 2 확대집행위원회는 1945 11 23~24 개최되었으며 인민적인 민주개혁혁명의 근거지론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과 일제잔재 청산민족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전민족의 단결이 결의되었다북조선분국 3 확대집행위원회는 1945 12 17~18 개최되었으며 북조선분국의 강화와조직체계 정비(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 간부대열의 정비종파주의 비판이 결의되었다. 

"18 오후 회의에서 김용범은 신상발언을 통해 자신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그동안 일을 해왔지만 능력도 모자라고 건강악화로 직무를 계속 수행하기 어려우니 사임하고 싶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그런 후에 김용범은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추대할 뜻을 밝혔고 아무도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가운데 박수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사실 회의 분위기로도 그렇고 김일성 계열의기세에 압도되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반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당시의 이북 사회의 분위기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흔하게 불렀고 “김일성 장군은 절세의 애국자만고의 빨치산민족의 영웅'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판이었다 내부를 보더 라도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창립의 실질적인 장본인인 데다가 북부 5도당 책임자  열성자회의와  예비회의에서 수십 차례 발언에 나섰고 당내 지도자들과 여러 면담을 가졌으며2 확대 집행위원회에서는 정치노선에 관하여 보고하는  실질적인 중앙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견이 있을  없었다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김용범은 새로 조직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을 맡게된다. 

조직문제를 마친 뒤에 일단 공식회의 일정은 끝났지만 2 확대집행위원회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당규약과 유사한 내용의 강습회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148~149)


5 ‘북조선로동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임시인민위회 설립과 인민위원회에 의해 실시된 토지개혁건국사상총동원운동보안간부훈련대대 설립에 대해 증언이 담겨 있다또한 1미소공동위원회와 북조선로동당 2차대회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북에서 1946 11 시점에 인민위원회선거라는 정치수순을 밟기 시작했는지를 들여다 필요가 있다  무렵에 선거가 실시됐는지·· 인민위원회 선거의 성격을어떻게  것인지 하는 것이다 선거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정권기관을 창출하기 위한 절차였다고   있는데 1946 11월에 가서야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이유가 있었다.

이북에서는 1946 3월부터 민주기지 노선에 따라 토지개혁노동법령중요산업 국유화남녀평등권법령 등의 제반 민주개혁 조치가 취해졌고 1946 말에 이르면  토대가 공고해졌다고  있다 정권을 창출해나가던 공산주의자들은 1946 말에 이르러 이북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와 봉건 잔재 일소 등의 과제에서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인민민주주의혁명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민주제도의 틀이 어느 정도 짜여졌다고  것이다이에 따라 초보적인 민주제도를 바탕으로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공고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민주제도를 법적제도적으로 공고히 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인민정권기관을 탄생시키는 일이었다합법적인 인민정권기관을 출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제도를  공고히 하지 않으면 여전히 취약한 이북의 사회체제가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민주개혁을 통해  나름의 인민민주주 의의 기초는 마련하였으나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면인민정권기관을 합법 적으로 출범시키지 않을  없었다는 것이다."(218)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과정은 이북의 헌법제정 준비와 1948 이남에서 이승만 등에 의해 단독정부 수립과 5.10 단독선거가 추진되자 이에 반대하여 진행된 남북연석회의와 2 정당단체지도자협의회의 전개과정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다또한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전개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와 지하선거와 8.25선거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준비와 진행과 공화국수립 이후 움직임이 소개 된다.

" 답신을 받은 북로당은 준비된 정치일정에 따라 김구김규식이 불참하 더라도 2 지도자협의회를 밀고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1948)6 29일부터 7 5일까지 일주일간 ·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기로 확정했던 것이다김구·김규식뿐 아니라 여운홍장건상  이남의 정당·단체 대표들의 회의 참가가 불가능해진 상황이어도 회의를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다만 성시백을 통해 북로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안우생박건웅권태양  김구·김규식의 일부 측근들은 2 지도자협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6 27일께 평양으로 올라왔다. 

평양에서 열린 2 지도자협의회에는 이북의 모든 정당·단체 대표자들은 물론 남북연석회의 뒤에 이북에 잔류한 이남의 정당·단체 대표자들그리고 비밀리에 38선을 넘은 일부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참가 정당·단체 수는 남북연석회의 때의 56개에 훨씬  미치는 40 미만이었다이북의 정당 3개와 사회단체 12개는 그대로였지만 이남의 정당·단체가 20 개로 줄어들었다."

"지도자협의회의 마지막 날인 7 5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선거의 절차 문제를 토의하고 합의서를 채택하였다.”(343)


[2016 11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