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 상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를 좋아하는가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다소 주춤하게 된다. 분명 관심있는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난 분명 단편으로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지만 그의 장편을 보면 적나라한 섹스 묘사에 결국 질리고 만다. 적당히만 했었어도 그를 완벽히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정말 오랫만에 그의 장편 소설을 완독했다. 완독을 해야한다면 <1Q84>여야한다. 오래 전, 세 권을 완비하고 2권 3분의 1까지 읽었던가 하곤 방치했다. 게다가 1권은 무려 두 번이나 읽었다. 다시 읽을 생각을 했다면 2권을 이어 읽으면 되는 것을 그래도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자 하곤 그렇게 되고만 것이다. 그리고는 '역시 하루키의 장편은 내겐 넘사벽이군.' 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완독하다니. 이유라면 글쎄, <1Q84>는 세권이고, 이건 두권이라는 정도? 아무래도 <1Q84> 보단 빨리 읽을 것 아닌가.


읽지 말까를 고민했던 때가 딱 한 번 있긴 했는데 그건 역시 섹스 묘사였다. <1Q84>을 읽다 포기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겨우 15살 밖에 안 된 다무라 카프카 군이 가출을 해서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또 누나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 물론 이들의 존재는 끝내 밝혀지지는 않지만 하루키의 이런 설정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비틀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때 나는 언젠가 읽은 그의 인터뷰 내용을 생각했다. 자신은 성에 대해 보수적이지만 소통의 기재로 다루길 좋아한다고 했다. 나름 인정은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너무 다루니 흥미롭지는 않다. 차라리 그 부분을 빼거나 줄이고 다른 의미있는 것으로 채우면 좋을 텐데 좀 질린다 싶다. 옆에 있으면 알려주고 싶다. "저기요, 그런 거 독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게다가 오해 받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별 볼 일 없는 작가가 빨리 주목 받고 싶어 발광하는 걸로. 하지만 매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대가에게 이런 지적질이 가당치 않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읽는 것을 포기할까 했을 때 잠시 숨고르기를 할 겸 읽기를 중단하고 (끝까지 읽기의 동력을 삼으려고) 저 유명한 파리 리뷰지와의 인터뷰 내용을 다시 읽었다. (<작가란 무엇인가> 1권에 실렸다) 마침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그는 이제까지 쓴 작품중에 가장 어려운 작품이라고 했다. 역시 작품을 보는 눈이 작가와 독자가 다르구나 싶다. 독자인 내가 볼 때 하루키는 다소 지루할 수는 있어도 어려운 작품은 없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약간의 초현실을 다루고 있는데 그래서 어렵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상당히 겸손한 작가다. 그의 글 쓰기 스타일과 코드를 안다면 어려운 건 없다.


그는 소설을 쓸 때 큰 틀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그때 그때 생각나고 내키는대로 쓴다고도 했다. 어찌보면 그건 재즈를 닮았다. 하지만 우린 그가 재즈 스타일로 글을 쓴다고 하지 않고, 그 자신 즉 '하루키 스타일'로 쓴다고 한다. 그렇게 그에게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때 국내외 적잖은 작가들이 그의 글 쓰기를 흉내 내기도 했고 지금도 있는 줄로 안다. 예전엔 누가 누구를 따라하면 독창적이지 못하고 하수로 보는 시각도 없지만, 지금은 글쎄 오리지널리티를 인정 받은 마당에 굳이 하루키 스타일이라고 헐뜯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건 솔직히 독자인 나도 따라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고,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지 않고 정말 그날 그날 마음내키는대로 글을 쓰고 싶다. 하다못해 하루키처럼 쓰겠다는 욕망도 내려놓고. 물론 그렇게 쓸 수 있는 게 하나가 있고, 우리는 이미 그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일기다.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사용하면서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일기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어느 정도 각을 잡고 써야한다. 게다가 누군가를 흉 보거나 헐뜯는 말도 할 수가 없다. 물론 딱히 누구라고 하지 않고 익명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일기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 어차피 나밖엔 볼 사람이 없으니까 맞춤법이 틀리거나 말거나, 누구를 흉보거나 좋아하거나 아무렇게나 써도 자유롭다. 그만큼 글 쓰기에서 중요한 건 자유함 아닐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1Q84>에서 편집자 덴고가 어떤 소녀의 원고를 보는데 난독증에라도 걸렸을까 문법은 엉망인데 그 속에 뭔가 있다고 하면서 버리질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하루키에 대해 글 참 쉽게 쓴다고 일갈할 수도 없다. 쉬운 게 사실은 더 어려운 법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도 쓰는데만도 6년인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그랬다지. 작가의 모든 작품의 초고는 다 걸레라고. 하루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도 만만하게 보고 따라하고 싶은 어느 글도 쉽게 써진 글을 없다는 얘기다. 솔직히 하루키의 문장은 깊이가 느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겉절이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던 건, 그는 자신이 읽은 책과 들어 온 음악만 가지고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다. 이 작품도 보라. 카프카는 물론이고, <겐지 모노가타리>도 나오고, <아라비안 나이트>나오고, 소세키도 나온다. 그뿐인가 <대공 트리오>도 나오고, 그의 독서팁도 슬쩍 흘리기도 한다. 이왕 <대공 트리오>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문학수 음악 전문 기자겸 평론가가 그런 말을 했다. 혹시 어떤 글에 음악으로 아는 척 하고 싶으면 절대로 흔히 알고 있는 작품을 가지고 쓰지 말라고. 그의 <1Q84>를 보라. 야나체크의 음악이 나온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야나체크가 누구지 하며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만일 거기에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의 <운명> 같은 걸 썼다고 하면 그건 정말 싸 보이는 거라고 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읽어 온 책이나 들어 온 음악은 그의 책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어 대담집이나 에세이 등으로 재생산 되고 있다. 그야말로 하루키 스타일을 넘어 월드,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자유롭게 쓴다는 점에서 빙산의 일각이란 법칙은 하루키에겐 예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즉 작가는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들과 생각들을 수면 아래로 숨기고 아주 조금만 보여준다고 해서 붙여진 법칙. 하지만 모르긴 해도 하루키는 그런 건 바보나 하는 일이라며 오히려 빙산의 일각조차도 다 보여주는 최초의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처럼 화수분같이 왕성하게 써 대는지도 모른다.


물론 작가가 다섯 발자국쯤 앞서가서 독자들에게 "따라 올 테면 따라 와 봐."하며 뭔가 독자의 사고를 고양시키는 작가도 좋지만, 이렇게 뭔가 만만한 게 느껴져서 독자도 따라해 보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면 그게 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예 글 잘 쓰는 작가가 있다면 독자는 그냥 우러러만 보면 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어떤 작가도 그의 처음은 독자였고, 글 쓰기를 가르치기 보다 독자로 하여금 글 쓰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게 더 우위고 상수다. 그래서 하루키는 제자를 두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진짜 하려고 하는 말은 따로 있다. 그건 '작가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다. 지금까지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일까. 난 거기에 의문을 재기한다. 어쩌면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작가가 죽었을 때나 가능하다. 작가가 죽어서도 그 작품이 회자되고, 독자가 기꺼이 읽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작가다. 그러나 작가는 살아 있을 때가 더 중요하다. 생각해 보라. 나는 하루키란 작가를 80년대 말, 90년 대 초에 듣기 시작했다. 그의 데뷔 년도가 1979년이니 우리나라에 알려지기는 내가 아는 것 보다 더 일찍일 수도 있겠다. 비슷한 무렵에 우리나라에 하루키 못지 않게 이름을 알린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작가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 기껏해야 20년? 그 기간 동안 뭐가 됐든 열심히 쓴다. 그렇게 문단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들은 지금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끔 떠올리면 뭐하고 사나 궁금해하다 만다. 그들은 어느 새 신진 작가들에게 문단계의 방석을 물려주고 어디가서 자신이 무슨 작품을 썼다며 추억팔이나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 늙기도 전에 이미 노쇄해져 버린 것이다.


하루키는 마라톤으로 단련되어서일까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 작가는 독자와 함께 나이들고 늙어갈 수 있어야 한다. 작가를 누가 기억해 주겠는가. 당대의 독자들이다. 그걸 작가들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의 자신 속에 안주해버리는 것 같다. 지금 작품을 쓰고 있지 않다면 그는 작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의 2, 30대 독자들이 앞으로 기억할 사람은 8, 90년대 작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의 작가들만 기억할 것이다. 그나마 그들도 언제부턴가 새로운 작품을 쓰지 않는다면 선배 작가처럼 될 것이고, 그 소수의 독자들만 멈쳐버린 시간까지만 기억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될 수는 있다. 그러나 증명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 존재감으로 증명되어져야 한다. 내가 당신들과 함께 있다고 독자들에게 잊을만하면 한번씩 새 작품을 투척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키에게 커다란 동굴같은 도서관도 지어주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게 만들지 않는가. 우리나라에 사람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과연 있던가. 김대중 도서관이 있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작가 이름을 딴 도서관이 있던가. 그러고 보니 이 책에 고무라 도서관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작품 년도가 2006년인데 그로부터 15년 뒤에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지어질 거라고 하루키는 예감했을까. 그에 비해 우린 뭔가? 원로중 최근까지 작품활동을 한 조정래나 황석영 작가를 위해 도서관을 짓는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타계한 작가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박물관이나 생가 보존 정도는 하는 것 같다만. 이건 또 작가만의 문제는 아닌듯 히다. 뭔가 국가적으로 예우할 것이 있으면 해야하는데 (늘 우리 소시민이 하는 소리를 되풀이 한다. 정치인들 서로 싸움박질만 할 줄 알지 그런 것도 신경없다고) 한숨만 나온다. 혹 그런 시도가 있다고 해도 사상 검증이 안 됐다고 퇴짜를 놨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과북이 갈렸다는 건 얼마나 많은 발전을 저해시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재밌지? 그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두꺼운 장편을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놓고 그는 이렇게 두서너 권씩이나 되는 장편을 잇달아 내놓기도 했다. 그나마 팔에 힘이 떨어졌는지 요즘엔 제법 얇은 책도 내더라. 아무튼 독자와 함께하는 작가가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를 완전히 좋아하진 않지만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데미안>은 몰라도 이 작품을 감히 청소년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차마 권하진 못할 것 같다. 읽을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은 20세기를 너머 21세기다. 그냥 15세 소년이 나오는 어른들을 위한 판다지 동화 같은 소설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난 그의 단편과 에세이는 좋아하는데 그것만이라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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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11-25 2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에 대한 stella.k님의 글 너무 공감됩니다.
저도 하루키를 좋아하기도 아니기도 해요. 얼마전에 읽은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에서 몸은 작가가 이름을 알리려면 끝까지 계속 써야한다라고 하더라고요. 스텔라님 말씀처럼 제가 젊었을 때 많이 읽었던 작품을 쓴 한국의 작가는 지금 작품을 거의 내지 않고 있어 안타까워요~~
하루키작가에게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히 있다는 점이 저는 좋아요^^
‘빙산의 일각의 법칙‘, 오늘 새롭게 알았어요~~

stella.K 2021-11-26 12:36   좋아요 2 | URL
자랑은 아닙니다만, 제가 책 리뷰를 가장 많이한 작가가 하루키더라구요. 이달의 당선작으로 적립금을 가장 많이 받았고. 정말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왤케 많이 썼나 싶어요. 나중에 책 한 권 낼까봐요.😄

미미 2021-11-25 22: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겉절이ㅋㅋㅋㅋ👍1Q84 재밌게 읽었는데 늘 그렇듯 다 지워져서 스텔라님이 언급해주신 내용 기억하나도 안납니다ㅋ😳 게다가 야한 장면?!!
여성 캐릭터 혼자 살면서 아주 멋졌던 것만 기억나요~^^♡
그리고 저도 생가 홍보보단 작가도서관이 더 늘어났음 좋겠어요.

stella.K 2021-11-26 12:44   좋아요 1 | URL
생각해 보니 그렇겠더라구요. 동네 이름 딴 도서관은 있어도 작가 이름 내세운 도서관하나없으니 도서관 애용자들 아쉬울 것 같아요. 겉절이 괜찮았나요? 그거 말고 더 괜찮은 단어가 없더라구요. 겉절이 김치 맛있잖아요. 아마 하루키도 맛 보면 좋아할걸요?🤣

새파랑 2021-11-25 2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 단편도 좋은데 장편을 더 좋아해요.ㅋ 해변의 카프카는 특히 더 좋다는 ^^ 그래도 다른 책에 비해 해변의 카프카는 나름 요즘(?) 음악이랑 책이 언급되어서 더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글을 보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그리고 청소년 권장도서는 절대 아닌것 같아요 😅

stella.K 2021-11-26 13:46   좋아요 2 | URL
아, 그러시구나. 해변의 카프카가 사실은 음악겸 그림이더라구요. 근데 하루키가 음악 인용하기 좋아한다고 유튭에서 그 음악 찾아보고 그러면 어떡하죠?🤣

기억의집 2021-11-26 01: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 너무 잘 쓰셨어요. 저는 하루키 좋아하고 섹스 묘사에 그렇게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딱히 그게 걸림돌인 적은 없었어요. 젊었을 때 글은 관망적이고 초월적인 작가의 세계관, 환상과 잘 어울렸던 것 같고 나이가 들면서 묵직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미야베 미유키 혹은 많은 일본 작가들의 글을 초기부터 현재 출간된 것까지 많이 읽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좋은 작품은 하루키였어요. 이건 저만의 감상평이라… 아마 하루키는 더 이상 글을 쓰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야기는 잘 만들어내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음악이든 글에 대한 것이든 자기만의 세계관이 확실한 작가임에는 분명해요. 맞아요. 야나체크 다 검색했을 걸요~

stella.K 2021-11-26 18:54   좋아요 2 | URL
알라딘엔 독서의 숨은 고수들이 많이 계시죠. 전 그중 한분이 기억니이라고 생각해요. 거봐요.미미 여사를 비롯해 일본 작가들 잘도 꿰고 계시잖아요. 하루키에 대해서도 저보다 잘 알고 계시고. 나중에 일본문학 리뷰집 한번 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 그책 꼭 살꼬예요.😉

희선 2021-11-26 0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소설을 써야 소설가다 말하기도 했어요 소설가가 되는 사람은 많아도 언제나 소설가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도 하더군요 한국도 그렇게 다르지 않겠습니다 지금 소설 쓰는 사람을 알고 읽기도 하지 예전 건 잘 찾아보지 않기도 하네요 고전은 보는 사람 있군요


희선

stella.K 2021-11-26 13:41   좋아요 3 | URL
하루키도 그런 말을 했군요. 역시 하루키...! 작가는 썼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1-11-27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가 섹스 장면을 많이 쓰는 작가라는 건 예전에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라는 장편을 읽고서 알았어요. 의외였죠.누구에게 그 책을 선물하기가 곤란할 정도였어요. 전 이런 해석을 하게 되어요. 현실 속에서 섹스 하는 관계가 많은데 그걸 작가가 제외시키고 쓰면 안 되니까. 철저히 현실 반영을 해야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말이에요. 또 하나는 자기의 보수적 성향을 그런 걸 씀으로써 상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고요. 둘 다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stella.K 2021-11-28 17:1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언니 말씀대로라면 하루키는 후자쪽이 아닐까 싶기도해요.🤔

고양이라디오 2021-12-06 12:50   좋아요 0 | URL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맞을 꺼예요. 하루키 인터뷰에서 하루키가 섹스를 소설에 쓰는 것은 현실반영이라고 말했었어요. 현실 속에서 섹스를 하는데 소설 속에서 굳이 숨길 필요가 있느냐?

니르바나 2021-11-28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을 한권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읽어볼까 생각해서 몇권 주문해서 제 책장에 서 있긴하죠.
그러나 하루키 현상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선인세를 지급하고
하루키 소설을 계약하는 것을 보고
뭐 그렇게 까지 읽을 만한가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한국 여성 소설가의 소설도 좋아하는데
한국 작가 중에 공지영 소설도 한권도 안 읽었습니다.
백만부 팔리는 작가들은 영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루키의 수필은 몇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가볍게 읽은 책이지만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는게 하루키 수필이 준 인상입니다.
저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이 마음에 듭니다.

추신)
스텔라님 리뷰을 보니 갑자기 하루키가 땡기네요.ㅎㅎ


stella.K 2021-11-29 06:28   좋아요 1 | URL
ㅎㅎ 공지영은 한 권 읽었는데 저도 별로여서 그후 안 읽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작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궁합. 제가 볼 때 니르바나님은 하루키완 맞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오에를 오래 전에 읽으려다 좌절했는데 저도 니르바나님께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1-12-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녕하세요ㅎ

전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하루키예요ㅎ 당연히? 섹스묘사에 대해 반감도 없고요.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인터뷰에서 하루키씨가 현실에서 섹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소설 속에서도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거 같아요.

stella.K 2021-12-06 18:01   좋아요 0 | URL
엇, 그랬나요? 성적으론 보수적이고 그냥 소통의 하나 뭐 그 정도로 얘기하던데. ㅋ 전 하루키가 삶은 보수적이잖아요. 단순하고 특별한 스캔들도 없고. 그래서 싫진 않더라구요. 사생활도 복잡하면 당연 거들떠도 않봤겠죠?ㅋㅋ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이종화 지음 / 홍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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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란 책이 있다. 기독교인으로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인하된 가격으로 팔고 있다.) 마음 같아선 한 권 장만하고 싶은데 700쪽이 넘는 분량을 읽어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 망설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 신부로 무려 1700년대에 중국 선교를 파송받고 웬만한 중국 고전을 독파하며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아갔다. 그것을 책으로 쓴 것이다. 심지어 저자인 프레마르 신부는 공자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예견했었다고 한다. 


문득 오래전 교회 청년부를 다니고 있을 때 성경공부 리더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진짜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동양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서양에 영향을 주었고 동양철학과는 배치된다는 것이 보통의 인식인데 왜 그런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 보다 훨씬 깊고 우위에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세월이 한참 흐르긴 했지만 아마도 이 책이 그 리더의 말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이 프레마르 신부가 자꾸 생각이 났다. 연구하느라 얼마나 고독했을까. 얼마나 지난했을까. 


신부의 중국식 이름은 마약슬이다. 그는 30년 중국 사역 동안 경전과 고전, 주석서들과 중국 고대 역사서를 백여 차례나 읽고 또 읽으면서 기독교의 본원적 흔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구절을 수집하였다. 신부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없을까 생각하던 중 마침 그 책의 역자가 소설을 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일단 소설을 사서 읽었다.


제목 <물이 바다 덮음같이>는 '물이 받아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란 성경 이사야 11장 9절의 말씀에서 따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좀 놀라운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 이종화는 전문 소설가가 아니다. 대학 때 불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는 경제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귀국 후 대학에 국제통상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수년 전(이 책이 나온 건 2016년이다) 유교 경전을 읽다가 그 내용이 성경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 오강남 교수의 <장자> 조금씩 읽고 있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딱히 하나님이 거론되지 않을 뿐이지 대입하면 성경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튼 저자는 그 후 혹시 고대 중국과 유대인들과의 교류가 있었는지 자료를 찾다가 프레마르 신부를 알게 되었고 <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를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번역까지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프레마르 신부가 1725년 라틴어로 완성한 것을 그로부터 약 150년 후인 1878년 두 명의 프랑스 신부가 불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가 프레마르 신부의 책을 출판하기 전 일종의 예고편 같은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은 역사 추리다. 조선시대 경종 1년을 배경으로 신부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습득하기 위해서 북경 천주당을 왕성히 드나들던 때를 상정한다. 만약 신부의 그 책이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 전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하며 썼다고 하는데 내용이 흥미롭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이해하려면 <서경>이나 <역경>을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선 프레마르 신부의 책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한다. 버겁다. <사서삼경>도 제대로 읽지 못한 내가 서경이나 역경을 읽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용에도 보면 마약슬 신부가 자신을 만나러 온 조선 사신에게 중국의 상형문자와 기독교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 수도 없고 그저 이런 게 있었구나 나의 무지함을 또 한 번 일깨우는 정도 밖엔 되지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전문 소설가도 아니면서 다양하고도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역사 소설에 고어나 사어들을 살짝살짝 써 주면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다. 하지만 요즘엔 아무리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해도 현대적 감각을 내세워 익히 아는 단어만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보거나 잊힌 단어가 심심찮게 많이 발견했다. 이를테면 구실아치, 서쾌, 액흔, 치의, 맨드리, 곰비임비, 구메구메, 번주그레, 실천스럽게, 지망지망히 나부댔다, 바르집기, 생게망게 하다, 옹긋쫑긋 등. 운종가란 단어를 들어 보긴 했지만 이 책에서 그 뜻을 알았다. 사람이 구름 엉기듯 모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뿐인가, 성경을 알려면 나라나 사람 이름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한자어로 옮겨 놓은 것도 이색적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를 희백래로, 이스라엘은 이색렬국, 앗시라아는 아서리아, 메시아는 미새아, 모세는 마서다. 중국 사람들은 코카콜라도 가구가락으로 고쳐 부른다던데 과연 대단한 중국이다 싶기도 하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를 선교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음은 유럽에 전파되었다. 몇 세기가 흐른 후 복음이 아시아에 전파된다면 그건 중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그 길이 막혔다. 선교사들은 일본도 겨냥했지만 그 역시 전제군주주의와 제국주의에 막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복음 전파에 성공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모르긴 해도 이 책도 그 맥락에서 쓰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작품을 폄하할 생각은 없는데 일종의 신앙적 애국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그 보단 프레마르 신부는 중국 고전을 연구하는 동안 중국 복음 전파의 당위성을 확신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프레마르 신부의 일생이나 그가 추구하는 바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일종의 전기적 기법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비전문 작가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저자는 우치무라 간조의 신실함,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 니체가 도달한 지성 최고의 경지, 카잔차키스가 갈망한 영혼의 자유를 사랑하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소설에 표현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웬만한 소설가 못지않은 노력과 지성을 겸비했다. 하지만 읽을 책을 항상 많이 쌓아놔서일까 아니면 게을러서일까 아쉽게도 이 소설을 읽었다고 <중국 고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를 읽어 볼 마음이 당장 생기지는 않는다. 예전엔 동양 철학이 고리타분하고 어려워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씩 관심이 가고 있다. 또 그러다 보면 신부의 책도 읽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에겐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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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5-26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 성경이 중국에서
건너온 지라, 중국 말들이 여적 사용되
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굽이니 약대니...

어려서 성경 읽을 때는 당최 무슨 말인
지 너무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stella.K 2021-05-27 19:22   좋아요 1 | URL
ㅎㅎ 원래 경전은 다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매냐님 성경 읽은지 한참 오래되셨나 봅니다.ㅋ
지금은 한글로 많이 순화되었구요, 버전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소설처럼 풀어 쓴 것도 있구요.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보시죠.^^

scott 2021-05-26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케이님 아니시면 이런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뻔 ,,,

stella.K 2021-05-27 19:30   좋아요 1 | URL
그렇다고 읽으실 것도 아니믄서...ㅋㅋ
어제 <칠극>이란 책을 발견했는데 그책 역시
중국에서 선교한 판토하 신부가 써서
18세기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정민 교수가 번역했다는데
마약슬 신부의 저 책과 일맥 상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이러고 징징거리고 있다 어느 날 확 질러버릴지도 몰라요.ㅠ
 
이토록 고고한 연예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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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토록 고고한 연애'인 줄 알았다. 그런데 '... 고고한 연예'다.
연예하면 요즘 연예인들의 예능 프로에서의 활약상이나 아니면 그들의 험담을 연상시키지 않나. 그런데 연예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대중 앞에서 음악, 무용, 만담, 마술, 쇼 따위를 공연함. 또는 그런 재주.'라고 나와있다. 그런 연예가 조선 시대에도 있어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조선 시대 광대들의 삶을 이름이다.


이 책은 마치 저자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외전 같기도 하고 연작 같기도 도하다.  <서러워라,......>에서는 모독과 김만중과 그의 유명한 작품 <구운몽>와 <사씨남정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림자로만 나오고 전작이 모독과 김만중의 서사라면 이 작품은 모독과 달문의 서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서러워라...>를 통해 소설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면, 이 작품은 소설 쓰기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캐릭터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다뤘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작가는 두 소설을 통해 소설 쓰기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달문이다. 그는 처음 연암 박지원의 소설에 나온다. 18세기 광대였고 그 모습이 괴이하여 우는 아이 눈물을 뚝 그치게 만드는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즉 울음을 안 그치면 달문이 와서 잡아가라고 할 거라고 겁을 주면 뚝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대마다 그런 인물이 하나씩은 전해 내려오는가 보다. 나 어렸을 땐 그 대상이 망태 할아버지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김탁환 작가는 바로 이 달문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작가는 오히려 달문의 외모에 대한 괴이함 보다는 그의 인물됨에 초점을 맞춘다. 생김에 대한 묘사를 보면 얼핏 조커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의 인물됨을 보면 한마디로 대인배를 넘어 금상이 가질 법한 자질을 가졌다. 그런데 그가 광대이기 전에 거지라는 것이다. 거지라면 뼛속까지 거지일 텐데 과연 이런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가능할까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그렇게 말하면 듣는 거지 기분 나쁘다고 할지 모르겠다. 우리 거지들 중엔 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금수저라고 그 인간성까지 금수저란 법 없지 않은가. 내내 읽으면서 달문의 그런 사고방식과 인간됨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없고 인간 된 도리에 대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고 고민이 없다.  


그는 거지지만 산대놀이의 리더이기도 하다. 산대놀이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가면극이다. 이것을 언제 누구에게서 배웠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사람이 자기 밥그릇은 타고난다지 않는가. 어쨌든 그런 재주가 있으니 잘 갈고닦아서 거지 팔자를 면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것을 불가피할 때나 사용할 뿐 광대 보다 거지이기를 더 좋아한다. 이쯤 되면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다른 거지들은 달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그 정도라면 저 노트르담의 꼽추인 콰지모도나 희랍인이라던 조르바를 넘어 조선 시대 예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독이 누군가의 모함에 빠져있을 때 달문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뛰어든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금상을 만나는 자리다. 


그뿐인가, 달문이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라.) 그렇게 기괴한 모습을 하고 워낙에 거지로 산지라 몸에 밴 거지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데도 그를 아는 기생들은 하나 같이 그를 연모한다. 이쯤 되면 작가가 구라를 쳐도 너무 친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역시 인간의 뇌는 팩트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작가가 그렇게 묘사를 하니까 긴 기민가 하면서도 믿게 되는 것이다. 안 믿으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소설 아닌가. 문제는 소설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믿을만한가 하는 것이다. 즉 소설의 관건은 얼마나 독자를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느냐인 것이다. 잘 속이고, 깊이 속이고, 많이 속이면 속일수록 독자는 기꺼이 그것에 환호한다. 대신 어설프게 속이면 화를 내고 분노한다. 


캐릭터는 일상에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어딘가 있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가 캐릭터가 된다. 독자는 바로 인물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타나는 인물에  빠져드는 것이다. 달문과 모독의 관계도 보라. 달문과 모독이 내내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 하지만 그 과정이 모독이 꼭 무슨 일이 생기면 달문이 나타나 문제 해결을 해 주고 떠난다. 또 그러기를 세 번쯤 반복하는 것 같다. 그건 이야기의 법칙 중 하나다. 그것 이상을 넘어가면 떠날 거란 달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가끔 작가들 중에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 논 등장인물들이 살아서 자기네들끼리 말을 하고 무엇인가를 하는데 그럼 난 그것을 받아 적을 뿐이라고. 그게 실제로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려면 캐릭터를 깊이 파야한다. 작가 스스로가 인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코 독자를 매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릭터에 대해선 빙산의 일각의 법칙을 말하기도 한다. 즉 말 그대로 우리가 작품에서 보는 인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수면 밑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달문이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6백 페이지를 별 무리 없이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달문에 대해 여러모로 연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달문을 위한, 달문에 의한, 달문의 소설 즉 인물 중심의 소설이다. 뭐 인물 중심의 소설이든 아니든 캐릭터는 너무나 중요하다. 사실 매설가인 모독이 처음부터 달문이 하도 특이한 인물이라 소설로 쓰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를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봉착하고 또한 쥐 영감과 그의 아들의 응원으로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모독이 초기엔 별 볼 일없는 작가 지망생에서 확실한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난 이 부분에서 왠지 김탁환 작가의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지금까지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모르긴 해도 누군가의 성원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역사 소설의 묘미는 당시 사회 문화상을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책방은 오늘 날로 치면 서점에 해당하겠지만 출판 인쇄가 발달하기 전이었으니 판매 보단 대여의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소설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거기에 쥐 영감이 있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쥐 영감의 임무는 아무 소설이나 가게에 내놓을 수 없고 읽힐만한 소설을 가려내는 소위 감별사의 역할이었다. 얼핏 오늘 날로 치면 평론가일까 했는데 그 보단 기획이나 편집, 마케팅 등의 일을 하는 인물은 아닐까 한다. 그런 일은 오늘날엔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비해 달문이 했다던 산대놀이나 운심의 칼춤에 관한 묘사는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여 그 점은 좀 아쉽다.


하지만 '고고한 연예'는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당대의 연예인들 즉 기생을 포함한 광대들을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친다. 그들은 자신의 웃음을 팔았지 자존심을 판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삶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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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이리뷰도 읽었고 댓글도 달았는데 오늘 와서 보니 내댓글 사라져버린 ㅜ.ㅜ
역시 북플에서 뭔가 쓰면 날아가버리나봐요.

스텔라 케이이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추카~

stella.K 2021-01-09 21:06   좋아요 0 | URL
엇, 정말요?
지금이라도 무플을 방지해 주시니 감읍할따름입니다.ㅠ

저도 스콧님의 이달의 2 관왕을 감축드립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소설 조선왕조실록 1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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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바람이 무섭다고, 이제야 김탁환에 빠져 지내는 요즘이다. 오래전 <노서아 가비>를 읽을 때만 해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책이란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나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지금도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드는지 역사 소설이 가끔 당기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은 내가 관심 있어하는 글 쓰기 그것도 소설에 관한 성찰과 물음을 하고 있다.    


글 쓰기에 관한 책이야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종목이긴 하지만 주로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 또는 전기류로 많이 나오지 소설로 나오기는 드문 것 같다. 김탁환 작가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소설이란 장르에 그것을 담아냈다. 그것도 서포 김만중의 작품을 모티브로 했다. 조선 시대 고문학이 그의 전공이고 보면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역사 소설가들에 대해 조금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김탁환 작가도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평가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라기 보단 스토리텔러라는 약간의 비아냥. 


물론 순수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장르로 보자면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요즘 순수 문학이 그렇게 환영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자세는 문학을 너무 작게 보는 시도는 아닐까 싶다. 역사 자체가 스토리텔링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한 것이 역사 소설이다. 하지만 이만큼 잘 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눈에 보이는 듯하고, 손에 잡히는 듯하다. 왜 독자들이 김탁환, 김탁환 하는지 알 것 같다. 좋은 작가는 독자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고맙지 않은가. 김탁환 같은 역사 소설가 (그는 현대물도 쓰지만)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 그것은 또 '제탁 월드'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서포 김만중의 <사 씨 남정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서포 김만중과 희빈 장 씨와 작중화자라 할 수 있는 모독에 관한 이야기다. 짐작하겠지만 모독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작품을 위해 가공한 인물이고 그것은 김탁환 작가의 페르소나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꼭 같지는 않아도 그와 비슷한 이름이 그 시대에 흔히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시절 양반들이나 성에 이름을 붙였지 보통의 사람은 예명인지 별명인지 본명 인지도 모를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모독도 그리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모독의 직업은 매설가. 조선시대엔 소설가를 그렇게 불렀나 보다. 물론 이 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매설가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싶어 진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그 시대 의원이나 예인들처럼 중인 이상의 신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담가, 이야기꾼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직업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매설가가 되는 것도 역시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 팔도의 있는 책, 없는 책을 다 주워 읽는 것도 모자라 대국의 책까지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오늘날 남의 나라 소설을 읽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만 당시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대에 매설가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매설가가 아니면 양반이고 평민이고 어디서 이야기를 접하겠는가. 그 시대 작가와 독자들은 아직 문명의 이기를 경험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렇다면 문명의 이기 앞에 소설가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라디오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소설가들은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을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라디오에서 성우를 내세워 이야기를 들려주니 비로소 이야기가 재밌다는 걸 알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극장이 생기면서 소설가들은 그때야 불안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활동사진이란 것이 큰 스크린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데 자기네들도 빨려 들어가겠는데 영화를 보지 무슨 소설을 읽겠냐며 이제 소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라디오 쟁이들도 마찬가지다. 극장이 생겼는데 무슨  라디오 극장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게다가 TV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것의 등장 때문에 라디오는 물론 극장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아 졌다. 이쯤 되면 소설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그 모든 것들은 약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 SNS와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시대 매설가들의 인기와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했을지도 모른다. 가히 제왕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오늘날 '제탁 월드'처럼 누구누구의 월드는 이미 그 시대에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재미만 보장이 된다면 세책방에 내놓으면 되는 일이다. 서로 간에 질투와 경쟁은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처럼 문명의 이기 때문에 약화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오늘날 문학판의 복잡한 카르텔의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글 쓰는 게 권력이 되고 누군가의 비호를 받아야 한다니. 상업주의를 견제하고 문학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독자를 즐겁게 해 줄 의무가 있고 그런 점에서 소설가를 포함한 모든 스토리텔러들이야 말로 가장 대중적이야 하고 상업적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역설을 주장하고 싶어 진다.


물론 현대의 모든 작가들이 카르텔에 편승하지는 않는다. 어떤 작가는 누가 무슨 상을 받고 누구에게로부터 사사를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하이틴 로맨스 같은 B급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또한 그런 책을 내주는 출판사와 서점이 있고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 그게 꼭 의미 없는 독서라고 어떻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중 당대엔 B급으로 취급받던 책도 있다. 이 B급이라는 것도 요즘에나 정의 내린 거지 당대엔 굳이 그런 구분이 필요 없지 않았을까.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가 가장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B급이라고 말하는 마이너 한 형태가 그 시대엔 가장 보편적 형태는 아니었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또 그런 점에서 지금의 서점은 아직 공평한 것 같기도 한다. 매대의 구조를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서점은 돈 되고 고급 취향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온갖 잡다한 책들을 다 구비해 놓고 있지 않은가.      


김탁환 작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서포 김만중을 통해 답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매설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서포 김만중도 소설을 썼지만 그를 두고는 매설가라기 보단 문필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대사헌까지 지냈던 것을 보면 학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가 문필가로서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모독과의 대비를 보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매설가는 그냥 이야기를 팔아먹고사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매설은 양반도 쓸 수 있는 거지만 그런 문필가를 통해 그 격을 한층 높이지 않았을까.


서포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는 희빈 장 씨를 겨냥해서 쓴 작품이다. 임금의 성은으로 희빈이 된 것도 부족해 황후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던가. 그것이 얼마나 인륜을 거스르는 파렴치한 짓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썼다. 물론 오늘날 장희빈에 대해선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이 유교 사회이고 보면 지식인이었던 김만중이 그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정이란 곳은 온갖 거짓과 술수가 난무한 곳이고 보면 일일이 상대하여 싸우는 건 피곤하지만 이걸 소설로 쓴다면 글감은 넘쳐났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김만중이 누군가를 겨냥한 소설을 써도 되는지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글을 써도 쓸 것이 많을 텐데 굳이 그런 글을 쓰는 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그 책은 오늘 날로 말하면 불온서적으로 읽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 참극을 면치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책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분서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과연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지식인의 양심 때문었을 것이다. 또 매설만큼 사람과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본노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고,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분노 거기엔 반드시 분노를 유발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인물과 상황이 있고 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싸우는 건 작가의 일이 아니다. 작가는 오직 글로만 싸울 수 있다. 그러므로 글은 그들의 무기다. 그건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글을 쓰므로 독자도 행복하고 작가도 행복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세상은 고대로부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두 세계의 작가는 있을 수 있지만 김탁환 작가는 이것을 굳이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작가의 딜레마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고발하고 훈계 아닌 훈계해야 하는 존재.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전지적 시점을 견제해야 하는 작가의 맹점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보통의 매설가 모독은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죄하고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독이 맞다. 솔직히 왜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모독일까 조금은 불편했다. 작가 후기를 읽으니 김탁환 작가는 자신을 지독한 자기 모독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모독이란 이름을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고. 무엇이 그토록 스스로를 모독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존감을 가져라. 자기를 사랑하라. 이기적이 되라고 부추기는 시대가 아닌가. 하긴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 너무 괴로워 앓아누울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 <목격자>에서 침몰하는 조운선에 죽어가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의 한자 이름인 '제탁'을 끼워 넣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책에서도 보라. 모독의 정인이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속이고 이용하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무라기보단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려 하지 않던가. 이 또한 어쩌면 자기를 모독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삼 소설가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모독해야 쓸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니 부쩍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읽고 싶어 졌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감히 읽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국어 강의를 들어도 언급된 책을 읽을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김탁환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나라 고전에 대해 읽어 볼 생각이라도 해 보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읽을 그의 책이 몇 권은 더 남아 있다는 게 나로 하여금 뭔가의 기대와 행복감을 갖게 만든다. 내친김에 우리 고전도 관심을 갖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그가 참고한 자료 목록이 나오는데 과연 그는 자료 벌레고 아무나 역사 소설 쓰는 게 아니구나 싶다.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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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한글로 쓰여진 문학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스토리 구성 재미가 뛰어난 고전이죠.
stella k님 페이퍼를 읽으니 다시 읽고 싶어졌네요.

김탁환은 리심, 노서아 가비 정도만 읽어봤는데,,,,
이렇게 한국적인 소재 한국 전통문학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써내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 할것 같아요.
옆나라 일본은 헤이케, 겐지 이야기, 괴담류 모노가타리 형식에 일본 전통 고전을 현대 작가들이 끊임없이 활용하고 이어가고 있는데 ,,,

stella.K 2020-11-28 16:13   좋아요 0 | URL
스콧님은 어떤 면에선 성향이 약간 비슷한 것 같네요.
하루키도 그렇고, 저도 노서아 가비 별로라서
리심도 있었는데 안 읽었어요. 마침 전 신경숙판으로
읽었던지라 김탁환까지 읽는 게 별로 안 땡기더라구요.
이 책이나 방각본 살인사건인가 백탑파 시리즈 1권부터 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백탑파에 이덕무나 박지원 같은
조선의 걸출한 문인들이 나오잖아요.
그냥 무협 소설류 같아서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근데 스콧님은 도대체 안 읽은 책이 뭔가요?
여긴 독서 고수들이 많은데 스콧님도 예외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0-11-29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선 맘에 드는 작가가 생긴 거 축하드려요. 유익하고 기쁜 일이죠.
옛날엔 화가도 얕보고 환쟁이, 라고 했잖아요. 지금의 예술가 위치와 많이 달랐죠.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글을 써야 독자들이 쉽게 역사에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누군가는 칼럼도 얕보더라고요. 소설 밑이라는 거죠. 게다가 문학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회해서 상황으로 보여 주는 소설이 있는 반면 메시지를 바로 직선으로 날리는 칼럼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짧은 글로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도 필요하거든요. 매번 메시지를 소설을 다 읽어야만 알 수 있다면 피로하죠. 신문에 칼럼이 많은 이유죠.

평론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게 안 되니깐 평론가가 된 거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맞는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평론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평론을 쓰는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댓글이 길어졌어요. 이만 스톱...ㅋ

stella.K 2020-11-29 18:46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우린 좀 글을 포괄적으로 넓게 볼 필요가 있는데
너무 시야가 닫혀 있어요. 이건 좋고 저건 별로다란 인식이
필요없는 것 같은데. 옛날이나 어떨지 몰라도 요즘 칼럼 우습게 보면
안 되는데 말이어요.

평론가에 대해선 그런 말이 있긴하죠.
조선 시대 땐 세책방마다 평론가에 해당하는
쥐영감이 있었나 봐요. 뭐 평론가라기 보다
이 책을 팔아도 될지 안 될지 감별사 노릇을 했나 봅니다.
재밌죠?^^

레삭매냐 2020-12-02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적해 주신 대로 순수문학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본질은 매설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탁환 작가는 오래 전 책 읽기 시작하던
시절에 자주 만났더랬는데...
<노서아 가비>를 마지막으로 끊었나
봅니다.

stella.K 2020-12-02 19:29   좋아요 1 | URL
그래도 주요 작품들은 다 읽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됐죠.
전 솔직히 어느 작가가 막 좋다가도 어느 순간
권태로워질까 봐 그게 좀 불안하더군요.
전 김훈 작가가 여전히 좋긴한데 어느 순간 잘 안 읽게되더군요.
싫어서라기 보단 여지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야 좋아하는 게 오래도록 유지될 것 같다는 변명 아닌 변명 같은 변명을...
김탁환은 워낙에 써 놓은 책이 많아서 오래 좋아할 것 같습니다.ㅋㅋ
 
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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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이란 책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과 이것은 내용도 결도 다르다. 더구나 뒤에 '삼대'가 붙었다. 그러니 또 염상섭의 소설이 생각났다. 어쨌든 철도원과 삼대라는 조합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책 표지도 마음에 든다. 무슨 책인가 했더니 전에 모 인터넷 서점의 무가지 잡지에 '마터 2-10'이란 작가의 소설 연재를 단행본으로 내면서 제목이 그렇게 바뀐 것이다. 어떻게 해서 처음에 그런 제목을 정하고 그것이 뜻하는 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터 2-10'라니 무슨 SF물 같기도 하고 영 낯설었다. 역시 책은 제목이 반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무려 30년 동안 묵히고 어르고 달래서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생각한 게 1989년 방북을 했을 때였다고 하는데 물론 30년 동안 이 작품만 붙들었다는 얘기는 아닐 테다. 작가는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만큼이나 왕성한 글을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쓴 작품만 해도 결코 만만치 않고 짬짬이(?)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편집도 했다. 언제 그 많은 작업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중에 이 작품도 썼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 문학작품을 보면서 일제 시대 노동사를 다룬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작품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꽤 오랫동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해 왔다. 지금도 여전하고. 그러니 노동사 자체를 다루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녹여낸 작품은 더더욱 기대할 수가 없다. 모르지. 북한 문학엔 우리 남한보다 많이 있을지. 솔직히 우리나라 근대 문학이라는 것도 한정적이란 느낌이 들긴 하다. 근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든, 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는 요즘 작가든지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 작가의 이 작품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 흔치 않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최근에 읽었던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도 포함)와도 맥락을 같이해 뭐 이런 우연이 있나 반갑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를 들여다보면 어느 지점에서든 만날만한 인물들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작가 특유의 작품을 엮는 재주는 거의 신기에 가까워서 읽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진다. 누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 싶다. 한동안 역사 드라마가 붐이었는데 요즘엔 좀 뜸한 편이라 좀 아쉽다.


특히 이 작품은 현대와 근대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첫 장면부터 나오는 노동자의 크레인 고공 농성을 사실적으로 그려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난 몇 년 전 뉴스나 신문에서 고공 농성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이 허공에 매달려서 뭘 하는가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내가 우리나라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구나 뜨끔했다. 


노동 문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난 8월 14일은 우리나라 택배 역사 28년 만에 처음으로 택배 없는 날이었다고 한다. 난 아직도 그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당연히 택배 기사들도 남들 쉴 때 쉬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공휴일에 택배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28년 역사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어서 그런 특별한 날을 지정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기본적인 게 어떤 사람에 이처럼 특별해야 하는 것일까. 마침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날 하루를 쉰 택배 노동자들은 그만큼 밀린 일을 그다음 주에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하루 쉴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고 한다. 그건 내가 고공 농성 때 농성자는 크레인에 매달려 뭘 하고 지내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말 우리나라 노동 문제는 양파 같아서 까도 까도 새롭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빨갱이란 이름 아래 노동자의 문제를 얼마나 많이 숨겨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386 세대 언저리쯤 노동 문학이 나왔던 것을 감안해 얼핏 그 무렵부터를 생각하면 큰일 난다.


이런 작품은 황석영 같은 걸출한 작가가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황석영 작가에게 매료당하지 못했다. 본문만 600쪽이다. 유장한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권할만하다. 독서는 내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분량만 읽는 것이 아니라 가끔 미친 척하고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에 도전해 봐야 는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난 이 책을 훗날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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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1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석영작가와는 딱히 안맞더라구요. 기념비적인 객지같은 작품도 있지만 문학사적 역사적 의의로 읽었지 작품이 확 좋다는 아니었던것 같아요. 그래서ㅜ이 책도 고민좀 하다가 살짝 빼놓았는데 읽지는 않을것같아요

stella.K 2020-08-20 16:0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네요.
저도 전에 한 3권쯤 읽었는데 딱히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그림은 그려지는데 문체의 맛은 별로 없는. 그냥 스토리텔링이나
서사에 강한 그런 작가라고 봐야할 것 같아요.
주로 남성 작가들이 이렇지 않나요? 김탁환도 그렇고.
저도 사실은 안 읽을까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관심이 있어
읽었는데 과유불급이더군요.ㅋㅋ

카알벨루치 2020-08-2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의 문체도 좀 끌리는데... 600쪽이라 큰 일 하셨습니다 ^^

stella.K 2020-08-21 15:18   좋아요 1 | URL
ㅎㅎ 역시 황석영 작가는 여자 보단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은가 봅니다.
끌리면 읽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