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지난 여름 문학 잡지 <악스트> 창간호에서 였다. 단편이 실렸길래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랄만큼 글을 잘 썼다. 주인공이 택시를 잡아 타는 것에서 시작해서 운전 기사와 나눈 이야기가 전분데, 그 이야기속에 한 남자의 인생이 담겨 있고 결말은 당연 주인공이 목적지에서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리면 끝이다. 그걸 읽으면서 어쩌면 이리도 문장이 지적이고 오돌오돌한지 마치 고기의 오돌뼈를 씹는 맛이라고나 할까? 김경욱이 이런 작가였어? 진작 알아주지 못한 게 미안할 정도다.
가끔 이렇게 괜찮은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마침 난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는 거리에 작가의 책을 두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몇년 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그해 생일을 핑계 삼아 선물로 받은 것인데 민망스럽게도 바로 읽지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이제야 읽은 책이다(나는 책을 선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ㅠㅠ).
이 책 띠지엔 "소설적 재능이 만개한 폭죽다발!"이라고 써 있다. 뭐 책을 팔려면 무슨 말인들 못 쓰겠냐만 그 말이 꼭 틀린 말은 이닌 성 싶었다. 마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보면 하늘에서 팝콘 눈꽃이 내리는 장면이 있는데 왠지 그 장면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작가 이 책이 첫 소설집이 아니다. 이미 2009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지금까지 국내 유수의 문학상은 거의 다 석권하다시피 했다. 등단 나이도 빨라 약관 22세에 등단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결코 젊다고 할 수 없지만 또한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전업작가인가 본데, 그만한 실력과 학벌이라면 다른 좋은 직업을 가져도 될 텐데 그는 소설에 순정을 바쳤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책을 사 볼 사람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지 않은가? 정말 예전엔 입이 가볍고, 철 없어서 요즘 작가들 어쩌고 하며 성토했지 그것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싶기도 하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한국 문단계의 자성의 소리가 높은데 결국 문단을 바꿀 사람들도 그들 아니겠는가?
수록작은 총 8편. 물론 모두가 다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중 한 두 작품은 뭔가의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특히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는 아내가 대리모인 것에 대해 뭔가 할 얘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이렇다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끝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통해 실제로 작가가 어떤 책을 읽었을까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한다하는 작가들 또는 명사들 심지어 일반인들까지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책을 경쟁적으로 내고 있는데, 독자에게 그렇게 책을 직접 들이대기 보다 표제작처럼 그런 스토리 방식을 통해 작가 자신의 독서 이력을 슬쩍 끄집어 내는 방식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표제작 <위험한 독서>는 주인공이 독서치료사다. 내담자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가 각주를 달기도 했는데 이 작품을 위해 언급한 책만해도 거의 10권은 되어보임직 하다. 주인공은 내담자를 치료하는데 필요한 목록이기도 하지만 분명 작가는 그 모든 책을 섭렵하고 그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불친절하게도 언급한 인용구에 대해 책 이름만 나와 있을 뿐 몇 페이지 어디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접 찾아 보라고 한다. 약을 올리겠다는 건가?
누가 무슨 책을 읽었을까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거의 관음증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책 목록중 나도 읽은 책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없으면 괜히 민망해 하기도 하고 설혹 있다고 해도 두 권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쉬워 하면서도 두 권쯤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 같은 걸 교차시키겠지. 모르긴 해도 작가는 독자의 이런 반응을 계산에 넣고 이 작품을 쓰고 각주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아님 말고). 그렇다고 작가가 독자들에게 어떤 자각 내지는 반성을 이끌어 내려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작가도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지 왜 읽지 않냐고 따져 물을 권리는 없다. 그거야 독자가 책을 읽지 않은 것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거지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혼내킬 일은 아니니까. 어쨌든 이 단서(각주에 언급된 책 목록)를 통해 작가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추적이 가능해졌으니 오히려 약간의 스릴 같은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천년 여왕'은 또 어떠한가? 얼핏 이 작품은 남자들이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는 현모양처의 전형과 사는 것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하는 것도 같다. 물론 우연히는 아니겠지만 생각 보다 쉽게 작가된 남자가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럴 경우 배우자의 동의와 지원을 받지 않으면 그건 거의 불가능 하다. 다행히도 아내는 별 거부감 없이 남자가 전업작가가 되는 것을 동의했고, 남자는 성공하는 작가가 되기 위한 행동 지침도 수립했다. 아내는 연상이기도 하지만 지적이고 똑똑해서 남자의 작업에 적지않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내의 도움과 조언이 자신이 바라는 도를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위축감까지 느끼게 된다. 자신이 미처 알지도 못하고 번역조차 확인 불가능한 책의 제목을 들이대며 이미 세상에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다른 책을 써 보라는 조언을 받기가 일쑤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문득 작가 김경욱이 주인공을 통해 언급한 책 예를 들면, 훌리오 루이스 곤잘레스란 작가의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란 책이 실제로 있는지 궁금해 졌다. 작가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낮설지도 않다. 곤잘레스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분명 남미 어디쯤 되는 사람인 것도 같다. 또한 '산티아고'가 들어 간 책이 몇 권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제목은 십중팔구는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가 실제로 있는 책을 얘기하고 있는지 없는 것 가지고 구라를 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검색해 본 결과는 어땠냐고? 미안하지만 나도 안 가르쳐 준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 보라.
그러니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작가가 독자를 쥐락펴락 하는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작가는 '위험한 독서'에서 제발 독자들은 작가가 취급하는 작품마다 작가의 경험과 삶이 녹아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천년 여왕'에서도 다시 한 번 다른 식으로 못 박기도 한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쓰는 것마다 어떤 나라 어느 작가가 이 비슷한 글을 썼다는 아내의 말에 매번 좌절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경험을 쓸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아내는 해 아래 새 것이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을 판 다음에는 무엇을 팔 것인가. 작가에게 자신의 삶은 씨암탉이다. 배고프다고 씨암탉을 잡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89p)하며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건 그냥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쓴 말이거나 그러기를 바라서 쓴 말은 아닐까? 어차피 소설은 허구가 아니던가? 허구 속에서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소설이란 100%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100% 진실만을 쓸 수도 없다. 물론 경험이 아니면 글을 쓰지 않는다는 에니 아르노란 작가도 있지만 자전 소설을 쓴 경험이 없는 작가가 과연 있을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그게 과연 작가일까? 자신의 경험을 펼쳐 보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수록작 <황홀한 사춘기>는 뭔가 작가의 경험이 녹아져 있는 작품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작가라면 누구든 자신의 사춘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런데 난 저 <천년 여왕>을 읽으면서 과연 세상에 어떤 작가가 나와 비슷한 책을 썼다고 해서 과연 엎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게 언젠가 표절 시비에 휘말릴까 봐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마추어 작가일수록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의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나만이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과연 있을까?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걸 알게된다면 창작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는 것이거나, 누군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이야기를 그 작가가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과 비슷하다고 해서 소설을 못 낼 것까지야 있겠냐는 것이다. 나중에 혹시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고 해도 자신이 표절 안한 것이 확실하다면 낼 수도 있는 것 아닐까?(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읽은 안정효 작가의 '허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소설이 생각이 난다. 그 작품은 결국 창작이란 재각색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묻는 작품이 아니던가?)
표절 의혹 받을까봐 쓸 수 없고, 씨암탉이라 쓸 수 없다면 작가는 과연 어떤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작가가 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없다면 어떻게 작가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건 책이란 무엇이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아무리 좋은 작가라고 해도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는 책을 쓰는 작가는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저자의 말을 생각해 보자. 그는 <위험한 독서>에서, 책의 의미는 작가의 창조적 재능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책에는 독자가 메워야 할 수 많은 빈칸이 존재한다고. 독자가 그것을 채우기 전에는 모든 책이 본질적으로 미완성 원고에 불과하다(32~33p)고 했다.
이렇다면 <천년 여왕>에서 주인공이 왜 자신의 작품을 엎어야 했는지 그의 고민의 실체가 좀 더 명확해 보인다. 오늘도 작가지망생을 포함한 작가들은 늘 이것 때문에 스탠드 불빛 아래서 글을 쓰고 고민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쓰는 책이 독자에 의해 미완성 원고라도 될수 있을지 아니면 무관심속에 잊혀지는 책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독자를 고민하는 작가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경욱 작가는 '위험한 독서'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