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천연색 거룡, 우주유형, 무인도의 쓰나미 참으로 다양한 소재가 꿈에 등장해왔지만, 오늘 새벽처럼 국회의사당 수백 명 관중, 정치를 업삼는 숱한 이들과 최고군통수권자까지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꿈에 사회풍자극 공연의 하이라이트로써 관중의 퍼포먼스와 반어적 가사를 총지휘하는 연출가가 (부끄럽지만) 나였다. [부동산 약탈국가]를 읽다 잠들었기 때문인데, 꿈으로 리뷰를 쓴 셈인가? 

 


한 두 시간 차 바퀴를 굴리면 '초저출산, 인구위기'의 대한민국이라는 뉴스제목이 폐부로 느껴지는 지방 풍경에 닿을 수 있음(+ '머리 식힐 수 있어' 좋아라 하는 나의 이중성)이 내심 불편했다. [부동산 약탈국가]를 읽으니, 그 불편감이 더 커진다. 저자 강준만 교수는 전북대학교 교수이며 전북에 거주한다. 그는 1966년 전라북도의 인구가 252만 명이었다지만, 현재 180만 명대로 "졸아들었고 지금도 계속 졸아들고 있는 중이다 (226쪽)."이라고 지방의 소멸과 황폐화를 탄식했다. '줄다'나 '감소하다'라는 단어로는 지방공동화를 실감하기 어렵기에 "졸다"라는 말을 쓴다고도 했다. 









평소 강준만 교수가 어떻게 그리 방대한 자료를 축적하고 빨리 쓰고, 많은 책을 펴내는지 궁금하였는데 [부동산 약탈 국가]에서는 유독 신문기사나 인터뷰 인용이 많다. 통계자료도 주관 뚜렷한 학자의 꿰뚫는 시선으로 꿰어야 보배라고, 강준만 교수가 추리고 엮어낸 자료들이 굉장히 흥미롭다. 부분들을 아래에 인용한다. 


"2017년 9월 한국을 다녀간 IMF총재 크리스틴 리카르드는 세계 꼴지 수준인 한국의 출산율에 대해 '집단적 자살 사회 collective suicide society'라는 표현을 썼지만, 모두가 다 자살의 길로 치닫는 건 아니었다. 한국인은 바야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이어, '유전결혼, 무전비혼'의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161)"

☞ 강준만 교수는 2016년 '경기도 인구 정책 심포지엄'에서 공개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 및 논문과 신문 기사를 근거로 '유전결혼, 무전비혼'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 "우편번호 정체성 (61)"에 관한여: "


● "우리 집이 무너지게 생겼다고 경축하는 요지경 세상(67)": 아파트가 안전진단을 '불합격,' 즉 통과하지 못했음을 아파트 단지 주민이 축하하는 것. "나는 현대에 살고, 너는 삼성에 살아라(92)": 대우건설의 푸르지오와 비슷한 '푸르지요,' 삼성물산의 래미안을 흉내낸 '라미안' 등이 등장한 것이다 아파트 입주민들 사이에선 "아파트 이름 바꿔 떼돈 벌어보자"는 운동이 맹렬이 전개되었다 (93)" 


● "(아파트는) '살 집 house for living'이 아니라 '팔 집 house for sale'인 것이다. 아파트의 긴 수명은 상품 회전을 빨리 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아파트 평균 수명은 영국 140년, 미국 103년인데 우리는 고작 22. 6년이다 (121)." 


● '다주택 매각 서약서' 와 매각 현황 공개가 이뤄졌는가? 이뤄졌다면 그 결과는? 부동산 3법 입법 통과 찬성자와 혜택을 톡톡하게 본 의원들의 재산증식 현황은? "지방 엘리트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파견된 총독(229)"이라는 모욕적 호명이 모욕이 아니던가? 지방 국회의원 보유 아파트 강남 편중 통계는?


● "역대 수도권 정권들은 수도권 비대화를 저지르면서 늘 '민생'을 내세우는 '토건 사기극'을 펼쳐왔다. 그 사기극의 공식은 3단계로 이뤄져 있다. 첫째, 가장 중요한 교육 정책과 일자리 정책을 비롯한 주요 정책들을 통해 서울로 인구가 몰리게 한다. 둘째, 서울 인구 집중으로 인한 주거 문제 해결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서울 주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 셋째, 신도시 건설이 불러온 교통난 해결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수도권 교통 시설에 국부를 탕진한다...우리는 이제 수도권 정당들이 이 나라의 미래를 망치는 걸 인내할 수 없어 '더불어지방당'을 창당하고자 한다. '지방'은 상징일 뿐 우리는 지방의 이익을 표방하지 않는다...우리는 서울-지방의 문제는 계급 문제임을 알리는 동시에 '진보'를 참칭하는 기존 가짜 진보 세력의 민낯을 폭로하고 진보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면서 진정한 국익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214)"




참고로 이 책은 2020년 8월 출간되었다. 2021년 1월, 상황은 더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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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04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준만 교수는 천재인가, 한때 생각했었죠. 어찌나 책을 빨리 써 내는지 말이죠. 1년에 몇 권을 낸 적도 있을 겁니다.
사람의 능력 차이가 크다는 걸 실감해요. 그의 저작 중엔 제가 좋아하는 책이 몇 권 있어요. 글쓰기 책을 낸 적도 있고
인간 심리를 다룬 여러 법칙을 쓴 책도 있어요. 아마도 늘 타이핑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능력자죠. ㅋ

2021-01-06 0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공유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저자 서종석은 [어업의 품격]을 펴내며, 청소년,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들이 많이 읽기를 기대했다. 저자 역시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학부모이자, 부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무엇보다 북 토크에서 실제 만난 서종석 교수는 수산물을 좋아하기에, 수산자원이 고갈되면 슬플 거라고 이야기했다. 


[어업의 품격] 을 몹시 기대하며 읽었다. 먹거리나 환경에 관한 책은 널렸지만, 실제 현장 전문가가 전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귀하기 때문에 더욱더. 서종석 교수 역시 MSC(해양관리협회) 한국 대표이자 국제표준분야에서 10년 이상 전문가로 활동해왔기에 그만이 전할 수 있는 내용을 [어업의 품격]에 많이 담아냈다. 


저자 소개의 책날개에서도 '공유의 비극'을 키워드 중 하나 삼은 만큼, 나 역시 [어업의 품격]을 읽고 '공유의 비극' 관련 챕터를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리하려 한다. 


● 저자가 인용한 여러 공공재 게임 실험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예외는 있지만) 게임을 반복할수록 기부금은 낮아지고 무임승차가 많아졌던 것이다. 단, 팃포탯(Tit for Tat, 눈에는 눈)과 평판 시스템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참여도와 기부율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엘리나 오스트럼 © Holger Motzkau 2010, Wikipedia/Wikimedia Commons (cc-by-sa-3.0) 


● 자원이 부족하고, 배신자들이 들끓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유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정치경제학자 엘리나 오스트럼Elinor ostrom은 공유의 비극 해결 방안을 제시해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탔다 한다. 제시한 극복 사례는 에게해 터키 어업 실례지만, 이 시스템을 어업 외 다른 분야에 적용한 사례를 추후 더 찾아보면 유용할 것 같아 부족하나마 정리해본다. 


 터키 알라니아에서도 1970년대엔 어업 분쟁, 어부들간 갈등이 심각했고 수산자원은 고갈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결방안으로서 도입한 "조업구역 배정시스템"은 십여 년 시행착오를 거쳐 안착했다. 서종석 교수가 요약한 시스템 운영법은 


1. 매년 조업하는 모든 어부 명단 작성. 

2. 어부들이 선호하는 조업 구역 목록 작성. 

3. 조업 구역 로테이션, 공평하게 모든 어부에게 배정.

4. 매년 조업 구역과 배정순서 재배치. 


이에 더해 자발적 감시와 모니터링(배신자(freerider는 늘 있으므로), 갈등 조율 과정을 거쳐 지속가능한 이익을 얻는다. 주목할 점은 이 시스템이 정부가 제시한 것이 아니라, 알라니아 어부들이 자발적으로 구축한 공동체 관리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Fishermen in Alanya proud to be a part of Nobel prize."라는 기사 제목도 등장하나 보다. 


● 오스트럼이 뽑은 성공적 공유자원 사례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공유자원을 정의하고, 누가 이를 사용할지 확정하고 권리를 부여한다. 

2. 효율적 규칙과 시스템을 구축한다. 

3. 구성원이 참여한다. 

4. 모니터링한다. 

5. 점증적으로 제재한다

6. 갈등 조정의 장을 마련하고 조정한다.

7. 자치권을 보장한다. 

8. 적정 규모를 유지한다.


● MSC어업표준의 원칙

1. 어장은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자원량을 유지한다.

2. 어업은 환경 파괴를 최소화한다.

3.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토대로 지속가능한 어업이 효과적으로 관리된다. 



터키 알라냐, Pixabay/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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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의 품격 - 건강한 해양생태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서종석 지음 / 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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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리 까다. 야부리를 까다."

난, 찰진 생활어를 몰라서인지 그런 말, 처음 들어봤다. 그것도 자그마치 Yale대학교 박사이자 귀공자풍 엄친아 이미지의 젊은 교수에게서. 반전 충격이었기에, 강력하게 뇌리에 박혀 잊히지도 않는다. "노가리 까다. 야부리 까다."


[어업의 품격]을 읽는데, "노가리 까다"가 등장했다. 1970년대 한국 정부가 [수산자원 보호령]까지 풀자 어린 명태(노가리)까지 싹쓸이하자 노가리가 심심풀이가 되니 "노가리 깐다"라는 표현이 나왔다고 한다(오호! 그랬군! '야부리'는 여전히 미지어이지만, '노가리'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저자 서종석 교수(부경대)는 충격 요법으로 [어업의 품격]을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물고기들을 나열한다. 그렇게 흔해 빠졌던 '노가리,' '명태'가 적어도 2008년부터 정부 공식 통계상 "0"라 한다. 쥐포는 어떠한가? 쥐치잡이 트롤어선들이 바닥을 싹 쓸어 고갈 시킨 이후, 쥐치는 자취를 감췄다. 양식장에서 사료, 영양제, 항생제 먹여 키우는 귀한 생선이 되었다. "설마" 사라진다고? 바다가 이렇게 넓은데? 해양수산 분야 국제비영리기구 MSC 한국대표이자 이 분야 전문가인 서종덕 교수는 단언한다. "설마"가 아니다. 실제로 그 많던 어류가 사라져간다고. "금"갈치, "금"징어, "금"조기. 더 이상, "국민" 생선이 아니다. 한국 상황만이 아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국민 생선이었던 대구 역시, 남획으로 완전히 고갈되어 어장 폐쇄 상황까지 갔다. 


물론, "품격 있는 어업"을 이야기하려면 이제는 비싸고 귀해진 어류를 나열하는 외에 더 중요한 지점을 짚어야 한다. 사실, [어업의 품격]에서는 다 짚어준다. 현 해양생태계의 위기상황을 보여주고 진단하고, "지속가능한 어업"을 위해 어떤 실천과 국제적 공조가 따라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읽고 나면,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the Commons'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 알면서, 왜 어민들이 이토록 거칠게 바다를 쓸어가는지 짐작된다. 어업 분쟁의 원인과 현황, 혼획 및 남획의 폐해, 기후변화가 해양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MSC를 위시해 지속가능한 어업과 해양 관리를 위한 노력까지 [어업의 품격]에서 배워갈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특히 소비자로서 우리 대다수)를 움직이는 것은 해양생태계나 수산 자원에 대한 통계수치보다도 갈치, 오징어, 명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인식하는 데서 시작하는 듯하다. 이점은 저자도 분명히 지적한다. "소비자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좋아하는 수산물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인식만 해도 시장은 변화하게 된다....소비자들이 에코라벨이 표시된 수산물을 선택하면 자연스럽게 지속가능한 어업이 유지될 수 있다...소비자가 지속가능한 수산물을 인식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어업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178쪽)." 



이 라벨이다. MSC. https://www.msc.org/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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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0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첼 카슨이 관심 가질만한 주제가 있는 책이군요. ^^

2021-01-02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1-02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바트로스 인간이 버린 해양 쓰레기들이 고스란히 몸속안에 ㅜ.ㅜ

얄라알라 2021-01-02 22:10   좋아요 0 | URL
어미새가 먹이라고 새끼에게 주는 모습이.....인간도 마찬가지겠죠. 자식에게 좋겠다고 주지만, 실은 오염물을 주기도 할 것 같아요^^:;;;;;;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 화상경험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송효정 외 지음 / 온다프레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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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도 다중이용시설이지만, 여태 도서관發 코로나 감염 뉴스는 들어보지 못한 듯 하다. 도서관에서는 대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책 순환하기 전에 소독을 하는 사서분들의 노고 덕분이겠지. 오늘도 도서관. "새로 들어온 책"들이 한 줄 조르르 꽂혀 있는데,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우선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에도 "교만" "속단." 부제는 놓치고 '자기 긍정하라는 자기계발서인가?'할 뻔 했다. 부제가 "화상경험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구술집이다. 한림화상재단이 5명의 작가들에게 의뢰(? 제안?)하여, 일곱 분의 화상경험자들을 인터뷰했다. 


낮은 목소리, 낮은 자세. 


구술을 채록하는 작가분들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될까 경험을 나누는 분들도 낮고 투명하다. 일인칭의 이야기지만 일곱 편의 인터뷰가 모이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료복지 시스템이 가동되어야 유익할지 '화상경험자'를 보는 사회의 시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등 사회고발 르포가 된다. 






"어떤 사람은 참 무심하게 이런 말을 툭 던져요. '야, TV 보니까 발로도 밥 잘 먹더라.' 내가 태어날 때부터 팔이 없었다면 발로 할 수도 있겠죠...전 세계에서 자기 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얼마 없어요. 근데 말을 그렇게 ..."


"힘들어서 어떡하느냐 하는데 그 말이 전혀 공감이 안 됐어요. '그저 지나치듯 하는 말이구나. 차라리 말을 말지.' 그런 생각도 들죠. 그랬기에 더더욱 멘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얘기해주는 거랑은 다르겠죠. 사람들이 습관처럼,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의무감으로 "힘들었지?"라고 말해주는 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어요."


"어찌 보면 '네가 나만큼 다쳤어야 할지'라든지 심지어는 '너도 나만큼 다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잖아요. 참..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진짜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더라고요...(중략)...그 때부터는 그 사람 상처의 경중을 떠나, '나만큼 아프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제가 만나러 간 사람들이 오히려 내 멘토가 되는 거예요. 내가 위로하러 갔는데, 나를 위로해주더라고요."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이 강조하는 "곁의 곁"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곁의 곁. 아플수록, 절망적일수록 곁의 곁의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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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12-31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사랑인 올 한 해 많이 많이 감사했습니다 ^^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

얄라알라 2021-01-01 23:35   좋아요 0 | URL
초딩님, 제 서재까지 와주셔서 새해 인사 남겨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2021년, 외부의 변화 흐름이 어떠할지라도 책을 읽고 나누며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는 한 해 되시기를.(코로나 이야기였네요. 아무래도 2021년도 비슷하겠지요? 그래도, 함께 삶과 책 이야기를 나눌 분들이 여기 서재에 계시니 으쌰!)

2021-01-01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 - 헝거포드 대학살에서 다이애나 비 사망사건과 9.11까지,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가 말하는 삶과 죽음
리처드 셰퍼드 지음, 한진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29, 30, 31일. 단식 3일차. 

물 단식에서 슬그머니 쥬스 단식으로 바꾸었으니 엄밀한 의미로는 '음식을 끊지' 않았다. 사과당근 쥬스에 이어 독특한 색상의 액체도 마셨는데, 톳과 다시마 추출액에 시금치가 더해졌으니, 성분표를 보고 짐작했던 맛보다 더 다시마스럽다. 출시 전에 테스팅을 숱하게 거쳤을 텐데, 소수의 마니아를 겨냥했을까? 나는 그 소수가 분명 아니다.  


   

29, 30, 31일. 


의외로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위장이 얌전하다. 작년 생일 무렵 3일 단식은 심심해져서 그만두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음식에 대한 욕구도 별로 없다. 심심함은 조바심의 다른 표출이었을텐데, 2020년 코로나 집콕 책수련을 통해서 차분해졌는가? 더 깊은 포기 상태로 내려가 초연해진 걸까? 2020년 내내 집 밖으로 책과 물건들을 몰아내며 딱 필요한 것들만 남겼듯, 음식과도 그런 관계를 맺고 싶었다. 거기서 출발했지만, 막상 대면해보니 더 복잡한 마음이다. 



 

도움 받을까 싶어, [음식을 끊다. 단식, 자신을 찾는 여행]을 읽었다. 단식 중에는 산책 이상의 격한 움직임이 좋지 않다는 저자 스티븐 헤로드 뷰너의 충고를 착실히 받아들여 아예 산책조차 안 했다. 책만 종일 읽었다. 늦은 오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인데, 예상 밖의 내용이라서 오래 기억할 듯 하다. 미드 Criminal Minds, CSI, 한니발 시리즈까지 샅샅이 훑고 국내외 법의학자들의 저서를 꽤나 탐독해왔기에 읽기 전부터 책 내용을 짐작했다. 35년도 넘는 경력의 전문가가 쓴 책을 두고 감히 "짐작"했으니,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총 34장 구성의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는 좀 묘하게 시작된다. 경비행기 운전 취미가 있는 저자가 하늘을 날다가 비현실적 지각을 하는 장면으로. 9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13살 때 법의학자 되기로 결심한 계기, 결혼 생활, 아버지로서의 노력과 아내와의 갈등, 커리어 상의 위기 등등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가 마치 고백체 일기처럼 배치되다가 마지막 장에 와서야 그런 배치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Dr. 리처드 셰퍼드는 글을 쓰면서 치유하는 중이었다. 30년 동안 2만 3천여 구의 시신을 마주하면서 PTSD를 겪게 된 것이다. 프로페서널한 엄밀함으로 공정하게 검시를 하면서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적 정서적 파동이 그의 내면을 집어삼켰던 지라, 1장을 위험한 비행 경험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Dr. 리처드 셰퍼드 (홈 페이지: https://drrichardshepherd.com/portfolio/books ) 는 여러 면에서 Criminal Minds의 애런 하치를 떠올리게 한다. 표정 없고, 거의 화내는 일 없이 감정적으로 요동하지 않으나 내면은 따스하고 고독한....영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이지만, 안주하지 않고 사회를 위해 자신의 (법의학) 전문성을 어떻게 활용할지 어떤 제도가 필요할지를 고민한다. PTSD로 어쩌면 진작에 무너졌을 그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바로 그 소신이다.  법의학자로서 세상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 육아서에 간혹 "감정의 쓰레받이, 쓰레기통"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분이 대신 받아낸 고통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닥터 셰퍼드의 표현을 그대로 빌어와 본다. 


"  어느 뜨거운 여름날 아침 나는 토막 나서 썩어가는 시신들의 영상에 쫓기고 있었다. 창자가 있었다. 스펀지 같은 간도 있었다. 뛰지 않는 심장도 있었다. 결혼반지가 끼워진 손도 있었다. 나는 그 반지를 빼야 했다...(중략)....독자들은 이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진단을 내렸으리라. 나만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증상은 내가 부검한 2만 3천 구의 시신 중 어느 특정 시신에 의해 발병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시신에 의해 발병한 것도 아니다. 내가 개입했던 특정 재난에 의해 발병한 것도 아니고 그 모든 재난에 의해 벌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한 비인간성을 다른 구성원들(법원, 가족, 일반 대중, 사회) 대신 처음으로 목격한 평생의 경험에 의해 발병한 것이다

  이 진단을 받고 나는 2016년 여름 동안 휴직을 했다. 

  두 가지 치료법은 상담과 약물치료였다. 

  그리고 이 책을 쓰는 것. (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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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0-12-3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부터 읽고 싶게 만드네요. ^^ 북사랑님 2020 남은 시간 잘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여기서 또 만나요~~~^^

scott 2020-12-3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사랑님 이추위에 단식을 4일 넘기면 ,,,,,안되는데

2020-12-31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1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