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화제(?), 여기저기서 뜨겁게 추천하는 책을 인류학자가 썼다기에 반가웠습니다. "암 선고 받고 삶을 통찰," "유명인 *** 추천" 등의 홍보문구를 보았지만, 정작 [인생의 의미] 저자를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 책을 실물로 만나 책 날개를 열자마자, '아....!' 낮은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 분이셨구나!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2019, 2020년쯤 [과열 overheating]을 반복해 읽으며 대규모 인터네셔널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사회인류학자,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 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건강한 중년으로 보였던 그가 202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뜨셨다니, 갑자기 마음이 휑해집니다.

[과열 overheating]에서 성장과 효율을 추구하는 지구촌의 흐름을 제어장치 없는 거대트럭에 비유하며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명과 암을 논의했던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은 양적, 질적 연구 양자를 탁월하게 수행하는 사회인류학자였습니다. 빈틈 없이 냉철한 프로페셔널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2025년 읽은 [인생의 의미]를 통해 엿본 이 분의 세계는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자연친화적이고 느림의 미학'을 아는 노르웨이 사람 특유의 여유, 프로그레시브 록을 비롯 음악과 반려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 평생 인간을 연구해온 분답게 동서고금의 인생철학을 꿰뚫은 혜안으로 가득했습니다.
2025년 5월 5일, 원래 하려던 일을 미뤘을 정도로 [인생의 의미]를 읽는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이분은 2022년, 즉 60세에 이렇게 깊이 있는 에세이로 세상에 큰 울림을 주셨습니다. 학자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자기성찰에 충실하고 겸손하면 이런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과연, 60즈음에 이렇게 지혜로 충만한 이야깃거리를 갖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인생의 의미]를 읽으며 중요하게 생각한 점을 몇 가지 압축해 봅니다.
독특한 글쓰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은 욕심이 생겼는데요. 비슷한 글을 흉내내보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인생의 의미]도, 큰 틀에서 예시가 되어줍니다. 저자가 아버지이자,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웨이 사람, 자전거, 산책, 음악, 애호가이자 인류학자로서의 삶을 평생 공부하며 경험한 세계와 엮어서 펴낸 글입니다.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혜도, 지식도 이 한 권에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균형적 시각
인류학자로서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은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많은 장소를 다녀봤고 다양한 경험을 해왔습니다. 책을 통해 '인공위성적 조망'이 가능한 그의 균형 잡힌 시야가 드러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서, 그의 해석에 신뢰가 갑니다. 예를 들어 그는 '가난의 낭만화,' '결핍의 낭만화' '동물과보호' 를 경계하면서도 이 화두에 관한 뚜렷한 소신도 드러냅니다.
동물이 일반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과도하게 관심을 받는 것도 문제가 있다. 돌고래같이 몸집이 작은 고래목 동물이나 범고래가 숨구멍이 얼어서 문제가 될 때면 전 세계 미디어가 북극의 드라마에 집중되기 동물환경운동가들은 정부나 불특정한 다수에게 도움을 달라고 목청을 높인다. 지중해에서 난민 수십 명이 익사해도 짧은 뉴스로 보도되는 게 전부인 사실과 비교하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50)
그 시인에게 물리적 바다는 중요치 않았다. 그것은 은유의 원천이자 상상의 도화선이다. 그는 수평선 너머 존재하는 욕망과 결핍, 갈망을 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가 결핍을 서정적으로 찬양했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물질적 결핍 속에서 살고 있다. (95-96)
물론 가난을 낭만화하거나 청바지와 아이폰 소비를 꾸짖을 생각은 전혀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원주민을 자기 경멸의 인질로 삼으려는 시도도 탐탁지 않다. (112)
광폭, 심연의 사유
내게 치졸한 편견이 있다. 사회적으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소위 성공한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은 그 편견을 깨뜨려주었다. 물론, 그가 췌장암 진단을 받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2년이라는 느린 시간을 보낸 것이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지만....
[인생의 의미]는 비단 노르웨이 국민뿐 아니라 그 어떤 문화적 배경과 국적을 지닌 독자가 읽어도 매 페이지 멈춰 서서 문장을 곱씹어야 할 만큼 지혜가 가득한 책이다.
핵심 메시지
두세 번 다시 읽고 난 후 조심스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인생의 의미]를 한 번 읽은 독자로서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다. 저자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은 1) 그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과 사는 세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2) 위기나 결핍을 어두움이 아니라 저항과 변화의 기폭제로 본다. 3) 겸손한 인격자이다. 이 책에서 내가 유난히 좋아한 문장을 따로 옮겨본다.
부유한 사람들은 큰 위기가 있어야만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 나는 나만의 아늑한 작은 어항에서 헤엄치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심각한 암 진단을 받았다. 암은 나를 2년 넘게 죽음의 대기실에 내던졌다...나는 (저승을 일곱 바퀴 돌아 흐르는) 스틱스 강의 진흙투성이 기슭에서 오래 머무르며 뭔가를 배웠다. (109)
광채가 나는 사람은 내면과 외면이 서로 잘 통하고 숨기는 것이 없는 특징을 갖는다. (265)
작은 세상은 큰 세상을 투영하고 큰 세상에 말을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공동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이 일부인 더 큰 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자신의 작은 정원만 가꾸며 사는 사람들 말이다.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