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귀한 손님이 짧게 깜짝 방문한 듯 반갑고도 서운합니다.
작년 가을부터 내내 책 한 권에 매달리느라, 풍경의 변화에도 시큰둥한 채 등살만 두툼하게 키우는 실내 생활을 했거든요. 집 밖으로 나와보니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다 못해 벌써 졌네요. 목련 꽃잎도 떨어져 있고요. 일단 나무 본체에서 멀어지면 갈색인지 고동색인지 참 못나게도 망가지는 꽃잎을 보는데 어린 시절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어요. 목련 꽃잎은 어린 시절 소꿉놀이에 등장하는 스페셜 재료였죠. 한 철 잠시 자연이 선물로 주는 별미용 재료. 하지만 그렇게나 탐스러웠던 흰 눈송이가 소꿉놀이 돌판 도마에만 누으면 갈색 못난이로 변해버려서 속상했었어요.
요즘 꼬마들은 꽃잎 소꿉놀이가 뭔지 알까요? 갑자기 그런 물음표가 떠올라 멜랑콜릭해지려는 차에 산책로에서 반가운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나는야 도시의 고고학자. 남겨진 물질을 보고 그것을 만졌던 사람들과 활동을 상상해봅니다. 산책로 부근 돌 위에 얌전히 놓인 풀잎들. 귀여운 꼬마(들)이 여기서 소꿉놀이를 했구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존재들에게 애정을 느꼈습니다.
계속 걷습니다. 인간의 만족을 높이기 위해 직선화 공사를 해버린 하천을 따라 걷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봄이면 여기로 새들이 날아들고 오리(?)도 살고, 생명의 흐름이 가득했죠. 인간들 눈 즐거우라고 아주 빡세게, 깔끔하게 일자 직선형으로 밀어버린 이 하천에는 더 이상 늘씬한 하얀 새로 다리 짧은 오리 친구들이 오지 않습니다.
혼자 속으로 욕합니다. '봤니. 이 어리석은 정책집행자들아! 너희들이 한 짓이야! 버드나무까지 싹 다 밀어버리더니 이제 이 하천이 어떻게 되었는지 봐봐? 새소리며 생명의 소리가 사라졌어! 모르겠나'
제가 별거에 다 흥분하고 오지랖 떨고 있네요. 하지만 버려지고 소홀히 여겨지는 것에 측은지심, 내가 곧 그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삭막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