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11장 "자기 수양"은, 일본 종교에 이해가 깊은 독자가 더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다.
공역자 김윤식, 오인석 교수는 "self-discipline"을 본문에서 "자기 수양"으로 옮겼다. 2021년의 독자에게는 "자기규율"이 더 친숙한 번역어일 텐데, 내용상 '수양'이 적합해 보인다.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한 문화의 '자기 훈련' 방식은 "외부자(=다른 나라에서 온 관찰자(243)"에게 유별나게 보이기 쉽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에게 일본인의 수양 방식은 속된 말로 '사서 고생, 생고생, 헛짓거리'로 보이기 쉽다. 엄동설한 해 뜨기 전, 폭포 냉수를 뒤집어쓰다니! 또한 "죽은 셈 치고"나 "산송장"이라는 관용어는 미국에서는 부정적 뉘앙스를 전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죽은 셈 치고, 해본다!" 이런 식의 표현은 "달인"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 보이는 "일체의 자기감시, 공포심이나 경계를 버린(266)" 긍정 상태를 의미한다.
Utagawa Kuniyoshi,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좀 더 비교해보자.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인에게 "자기 훈련"은 사회화를 위한 욕망의 억압과정이자 "자기 희생"과 동의어로 쓰인다 지적한다. 흥미로운 예시인데,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음식을 먹고, 제시간에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식 규율 말이다. 따라서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에서 어른 지위로 넘어가는 표지는 금기 음식(junk food 등) 억제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자기 훈련이 희생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국 "뿌린 만큼 거둬갈" 투자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나중에 변제받는 투자," "일종의 민간 계약"에 비유했다. 미국인에게는 "희생"이 일본인에게는 "상호 교환"이다. 받은 이가 같아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나는 투자했기에 같은 선에서 얻어갈 권리가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11장은 일본의 종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자기훈련 방식이 대개 인도의 요가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명상, 자기최면, 트랜스 상태 경험 등 신비주의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미각, 촉각, 시각, 후각, 청각 외 제 6관이 열린다고 한다. 이로써, '부끄러움(하지)'라는 자기감시에서 벗어나 무가(無我)의 경지에 도달한다. observing self, interfering self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즉 '내가 지금 이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식 자체에서 벗어나는 숙달의 경지를 말한다. 책 제목, [국화와 칼]에 비유하자면 수양한 사람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249)" 행위를 통해 결국 자신을 예리한 칼로 만드는 것이다.
왜 아들러 심리학에 일본인들이 열광할까? 궁금했는데, [국화와 칼] 11장을 읽으며 조금 답을 알 것 같다. 보는 나 observing self, 방해하는 나interfering self, 수치심(하지), 외부의 시선(상호의무의 강제력, 체면 등)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이런 심적 상태, 인생에 대한 가정이 어린시절의 훈육을 통해 어떻게 길러지는지는 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에서 이어진다.